한 어린 아이의 태도 경쟁력
본문
마가복음6:30-44
하버드 대학의 로버트 로젠탈 박사는 학생들과 쥐를 대상으로 한가지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학생들과 쥐를 세 그룹으로 나누었답니다. 첫번째 그룹의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자네들은 행운아들이다. 자네들은 천재적인 쥐를 다루게 되었다. 이 쥐들은 지적으로 키워졌으며 지극히 총명하다. 평탄치 않은 곳에서도 수숫대를 찾아낼 것이며 치즈도 많이 먹을 것이다.'
두 번째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보통 쥐라고 소개했답니다. 능력과 지각이 평범한 보통 쥐를 다루니까 크게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세 번째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멍텅구리 쥐라고 소개했답니다. 아주 지능이 낮아 수숫대를 찾아도 그것은 우연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그렇게 지시하고 훈련을 시켰답니다. 똑같은 조건에서 6주 동안 훈련을 시켰는데 천재 쥐들은 단시간 내에 수숫대를 찾아내었고, 평범한 쥐들은 수숫대를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 바보쥐들은 수숫대를 찾는데 너무 어려워했다고 합니다. 사실은 천재 쥐도 바보 쥐도 보통 쥐도 없이 다 똑같은 쥐였지만 이런 판이한 결과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실험에 참가한 학생들의 태도에 있었다고 합니다. 먼저 학생들이 천재쥐, 보통쥐, 바보쥐라는 전제를 가지고 쥐를 대할 때 그런 태도로 대했기 때문에 결과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는데 어떤 태도로 접근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일이지만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태도는 마치 계산을 하는데 필요한 전제와 같습니다. 1+1=2라는 전제로 덧셈을 하면 제대로 된 답이 나오지만 1+1=11이라는 전제로 덧셈을 하면 모든 답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 기본 전제가 잘못되었다면 그 뒤에 따르는 모든 결론 또한 잘못되듯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태도도 이와 유사합니다. 똑같은 사건이지만 어떤 태도를 접근하느냐에 따라 감정과 말, 행동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질병에 걸렸는데 죽을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죽을 이유를 수없이 찾습니다. 그러나 살 수 있다고 접근하는 사람들은 살 수 밖에 없는 수없는 이유를 찾을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건축하려고 하는데 부정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안될 이유만 수없이 찾을 것입니다. 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될 수 있는 이유를 수업이 찾을 것입니다. 되어진 일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태도에 따라 결과는 판이하게 차이가 납니다.
심리학자 페팅게일은 유방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병에 대한 태도와 사망률을 분석했보았다고 합니다. 환자들 중 암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환자와 그렇지 않은 환자들의 수술 후 사망률을 비교한 결과 자신이 병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환자의 71%가 생존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절망감에 빠져 포기했던 환자는 19%만이 살아남았답니다. 똑같은 상황이지만 실제적으로 태도가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키스 해럴이라는 사람이 “태도의 경쟁력”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주장합니다.“태도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바탕이자 도구로, 운명을 통제하고 직장생활이나 개인생활을 최고로 만들기 위한 핵심 요소”라면서 “‘능력’은 바꿀 순 없지만 ‘태도’는 바꿀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태도를 조금만 바꾸어도 생각은 놀랄 만큼 달라지며, 생각이 달라지면 믿음이 바뀌게 되고, 믿음이 달라지면 행동이, 더 나아가 인생이 바뀌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장합니다.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좋은 태도를 선택하고 '나쁜대도'를 '좋은태도'로 전환하라고 말합니다. 커밍워크는 성공의 4요소를 머리, 지식, 기술, 태도라고 말하고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태도라고 했습니다. 펜실베이니아대학 심리학과 마틴 셀리그만 교수는 긍정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 즉 낙관론자들이 비슷한 능력의 비관론자에 비해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낙관론자들은 비관론적 태도를 가진 자들보다 보험 판매 실적도 평균 37% 정도 높을 뿐더러 보험 설계사 일도 더 오래 계속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태도는 마음의 렌즈와 같습니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우리가 보는 것은 달라집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의사와 면담했습니다. 만지는 곳마다 통증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릎을 누르면 무릎이 아프고 배를 누르면 배가 아프다고 호소합니다. 의사는 이 말을 듣고 전신 엑스레이를 찍었습니다. 잠시 후 결과를 검토한 의사가 가슴을 졸이는 환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손가락이 부러졌군요.”손가락이 부러졌다고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러진 손가락으로는 전신을 만지면 만지는 곳마다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태도의 중요성이 바로 이것입니다. 태도가 비뚤어져 있으면 모든 사물이 비뚤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태도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바탕이자 도구로, 운명을 통제하고 개인생활이나 가정과 사회생활을 최고로 만들기 위한 핵심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이들을 교육 시킬 때도 태도 교육을 중요시 여깁니다. 아이들을 교육할 때 ① 지식을 전달 교육(지식교육)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1/6에 해당합니다. ② 기능을 습득시키는 교육 (기능교육), ③ 태도를 익히는 교육 (태도교육) ④ 문제 해결을 능숙하게 행하는 지혜 교육,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인격 교육, 삶의 궁극적 의미를 탐구하는 종교교육 등을 시킵니다. 그런데 성과를 이루는데 무엇이 근본적으로 작용하겠습니까? 데이비스(K. Davis)는 이렇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성과 × 물질의 성과 = 경영의 성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성과란 능력 × 동기유발의 결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능력 (ability)이란 지식 × 기능을 곱한 것이고 동기유발 (motivation)은 상황 × 태도에 의해 나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경영 성과의 가장 밑바닥에는 태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의학자 칼 메닝거는 '태도(Attitude)는 사실(Fact)보다 중요하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앤서니 드멜로는 '태도 하나를 바꾸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만큼 태도는 중요합니다. 태도는 일과 인간 관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태도는 전염되고 태도에 따라 미래는 달라집니다. 회사에서 사람을 뽑을 때도 가장 많이 보는 것이 태도라고 합니다. 노동부와 중앙고용정보원이 기업체 인사 담당자 1,526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면접 때 가장 중점적으로 평가하는 항목으로 절반 이상(56.0%)이 '성실한 태도'를 꼽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업무에 관한 지식'(18.3%), '자신감 있는 모습'(17.3%)이 뒤를 이었습니다.
사람들은 30세가 넘으면 사람의 성격은 바뀌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태도 역시 바꾸어지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바꾸지 못할 성격도 태도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을 시켰습니다.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태도를 가지게 만들기 위해 그 많은 시간 동안 훈련시켰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태도를 갖게 만들기 위해 25년이 소요되었으며 다윗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태도를 갖게 하기 위해 17년의 세월을 훈련시켰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러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갖가지 기적을 보여 주었습니다. 폭풍을 잔잔케 했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고쳐 주었습니다. 중풍병자를 낫게 하고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정도 되었으면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달라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직접 경험하면 태도가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의 남편이 암으로 투병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제가 방문할 때 처음에는 거부적이었습니다. 의사는 몇 개월 못사신다고 했습니다. 수술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용기를 주고 기도해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면 넉넉히 살 수 있다고 믿음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조금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기도를 하면 크게 아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의사가 수술을 할 수 있다고 하여 수술을 하였습니다. 계속적으로 가족도 기도하고 본인도 기도하였습니다. 이번 대심방을 가니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의사가 직장에 나가도 된다는 말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참 약합니다. 그렇게 많은 기적을 직접 목격했는데도 문제가 다가 오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의 태도는 주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벳새다 광야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치료 받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게네사렛 호수 동쪽 해안 지대일 것입니다. 남자만 5천명이니까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하면 약 2만 명 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저녁 시간이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점심 식사도 하지 못한 사람도 많은데 저녁 먹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과거 어려움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받은 경험도 있는데 막상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돈이 없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가려고 하는데 배가 없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려고 하는데 대포가 없는 것입니다. 마라에 왔는데 원하는 단물은 없고 쓴물만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다가 오면 사람들은 대부분은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됩니까?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80%는 부정적인 말과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애굽에서 10가지의 기적을 체험했고 홍해를 가르는 것을 경험했고, 쓴물이 단물이 되는 것을 경험했고, 만나와 메추라기, 불기둥과 구름 기둥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가데스바냐에 와서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그들은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12명의 정탐꾼을 보내었는데 10명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적들을 과대하게 봅니다. 자신들은 메뚜기라고 생각합니다. 상대는 과대평가하고 자신은 과소평가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두려워 합니다. 결국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 때 여호수아와 갈렙 믿음의 태도를 취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 14:9)”라고 외칩니다.
오늘 성경 보니까 2만의 군중 앞에 먹을 것이 없을 때 제자들은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에 대한 태도에 대하여 시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예수님의 의도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요 6:6)” 예수님은 문제를 당했을 때 예수님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가지는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한 시대를 변화시켜야 할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테스트에 합격했습니까? 태도 경쟁력에 있어서 한 어린 아이보다 못했습니다.
1. 태도 경쟁력에서 합격 점수에 들지 못한 그들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1) 상식화 된 합리적인 태도(36)입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군중을 해산 시켜 각각 가까운 촌이나 마을에 가서 음식을 사 먹도록 하자고 예수님께 제안했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이고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 상식적 수준, 합리적 수준으로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이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이성을 선물로 주었기 때문에 그 선물을 가지고 문제해결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함정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합리적 상식적 수준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사먹을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온 사람들입니다. 설령 돈이 있다고 해도 2만 명이 어디에서 무엇을 사먹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과 같은 현대 사회에도 2만이 한꺼번에 즉석에서 식사를 해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합리적 생각 같지만 결국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들의 부담을 회피하기 위한 불신앙적 방법을 제안한 것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우리 예수님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백성을 위한 명분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을 자신들의 부담을 회피하기 위하여 합리와 상식이라는 미명으로 그런 제안을 한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37절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합니다. 너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의 부담을 회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대안이 되라는 것입니다. 너희도 얼마든지 그 난제를 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전에 얼마든지 보았지 않습니까? 친구들의 믿음의 태도를 통해 중풍병자가 고침받는 것을 보았지 않습니까? 야이로의 믿음을 통해 죽은 딸이 살아난 것을 보았지 않습니까? 그들이 믿음을 가진다면 2만 명인들 못먹이겠습니까? 문제는 먹을 것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믿음 없는 태도였습니다. 그들이 대안이 될 만큼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2) 현실만 보는 부정적인 태도(37)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요6:6에 의하면 믿음을 테스트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믿음있는 태도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 때 계산이 밝은 빌립이 무엇이라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요한 복음에 의하면 “각 사람이 조금씩 받게 하여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우리게에 해결하라고 하는데 우리가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숫자에 밝은 빌립이 미래를 계산합니다. 그리고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남자 하루 품삯이니까 200일의 품삯의 떡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루 품삯 5만원 잡으면 1,000만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작은 양을 먹여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얼머나 부정적인 태도입니까? 200데나리온이면 넉넉합니다가 아닙니다.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다릅니다. 계산은 빠른데 안되는 것만 보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안계신 것만 찾으면 무수히 않계신 증거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찾으면 무수히 계신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똑 같은 사건이라도 부정적으로 접근하느냐 긍정적으로 접급하느냐에 따라 생각과 말과 행동은 전혀 달라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의 계산 속에는 전능하신 예수님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경험한 예수님이 빠진 것입니다. 바다를 잔잔케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을 경험했는데도 여전히 실제적인 일이 다가오면 인간적 계산을 하고 부정적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입니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하여 계산해 보고 두려워하며 부정적인 태도를 취합니까? 자기 홀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하나님이 인도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쓰실 때 늘 미래에 대한 믿음의 태도를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가나안 땅을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합니다.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신 31:8)” 모세를 뒤이어 민족을 이끌어야 할 여호수아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수 1:9)” 현실 인식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빌립은 현실과 실증을 참 중요시 여겼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요14:6절에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때 빌립이 말합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요 14:8)”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요 14:9-11)”
오늘날도 빌립처럼 아주 실용적이며 실증적인 원리에 입각하여 예수님은 따르지만 늘 부정적인 태도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 비평해 봅니다. 유추해서 따져 봅니다. 원인과 결과의 원리에 따라 판단해 봅니다.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외시키면 안됩니다. 어짜피 세상일은 나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스룹바벨 성전을 짓다 중단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 4:6)” 큰 산도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시작한 일을 꼭 마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멸시해도 작은 일로 시작했지만 결국 완공하여 사람들이 기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계가 다가오면 미래 보고 불안해 하지 말고 과거의 증거를 보고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사건을 주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태도가 바뀝니다. 주님 안에서 예가 됩니다. 주님 안에서 긍정적인 태도, 적극적인 태도, 낙관적인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공동체에게 전염이 됩니다. 우리를 회의하게 하는 것은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부정적인 태도로 접근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민수기 14장에 나오는 백성들을 보십시오. 들어갈 수 없다고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자들을 그들의 말대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들어갔습니다.
3) 내게 있는 것보고 갖는 회의론적 태도(38, 요6:8-9)입니다.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그들에게 믿음의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제자들입니다. 이 말을 듣고 제자들은 알아봅니다. 무엇이 있는가 찾아 봅니다. 그리고 보고 합니다. 38절을 읽어 보십시오. 요한 복음에 보면 안드레가 한 아이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요 6:9)”라고 말씀합니다. 아주 회의론적 태도입니다. 가져 오라고 해서 가져 오기는 했지만 이것으로 무엇을 하겠냐는 것입니다. 참여하라고 해서 체면상 참여하기는 하지만 무엇이 이루어지겠냐는 것입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힘이 없습니다.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안주하게 됩니다.
2. 태도 경쟁력에서 합격 점수를 맞은 어린 아이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38, 요6:9).
제자들은 이렇게 합리적인 태도(36), 부정적인 태도(37), 회의론적 태도(38, 요6:8-9)로 문제 앞에서 무기력할 때 한 어린 아이가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태도로 접근합니다. 제자들에 비하면 미미한 아이입니다.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아이입니다. 아마 부모님과 함께 무엇인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아이일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한 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이 먹고자 하는 도시락을 내 놓았습니다. 자신 혼자 먹으면 끝나는 도시락입니다. 자신도 배가 고팠을 것입니다. 그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도시락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그 아이만 그것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어린 아이의 순순한 믿음입니다. 자신의 관점에서 상황을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계신 예수께로 시선을 돌리는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자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뢰하는 것입니다. 비록 하찮은 존재이나 예수의 도구로 사용 되기만 하면 위대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롬 4:17) 예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고전 1:27).
경쟁력있는 아이의 믿음 태도입니다. 합리적 태도로 접근할 때 비합리적인 태도입니다. 회의론적 태도로 접근할 때 어리석은 만용에 불과한 태도입니다. 부정적인 태도로 접근할 때 말도 않되는 현실을 모르는 비이성적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의 도시락이 굶주림의 문제를 푸는 대안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대안적 태도입니다. 내가 대안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연약하고 부족하고 가진 것이 없지만 우리 하나님이 쓰시면 모세의 마른 막대기를 통해서도 홍해를 가르듯 우리의 난제를 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물맷돌 아무런 힘이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 쓰이면 골리앗을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이 어린 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41)
1)미래를 희망적으로 보고 준비하게 합니다.(긍정적, 적극적, 낙관적 태도로 변화)
제자들에게 푸른 잔디 위에 떼를 지어 앉게 합니다. 50명씩 100명씩 앉게 합니다. 회의를 품고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제자들을 분명 식사를 주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들의 태도가 바뀐 사람도 있겠지만 여전히 합리주의적 태도, 부정적인 태도, 회의론적 태도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참여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이 작은 것으로 저렇게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을까 회의를 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경험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멘 앞 자리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 보았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무엇을 합니까?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합니다.
2)오히려 이런 난관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회의론적 태도의 극복)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감사한 사건이 다섯 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다 모든 것이 잘 될 때가 아닙니다. 최악의 순간, 절망적인 순간, 뜻대로 되지 않은 순간입니다. 첫째는 회개치 않은 마을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을 보면서 감사로 해석했고(마 11:25) 두 번째는 죽은 나사가 죽었을 때(요 11:41) 세 번째는 죽음을 앞두고 최후의 만찬 때 감사로 해석했습니다(눅 24:30). 네번째는 굶주린 백성 오천명이나 되는대 먹은 것은 아이 도시락 한 개 있을 때 감사로 해석했고(마 14:19) 다섯번째는 사천명을 먹여야 하는데 물고기 7마리와 보리 떡 두 개 밖에 없을 때 감사로 해석했습니다.(마 15:36)
뜻대로 되지 않은 순간입니다. 굶주림으로 아우성 치는 순간입니다. 이미 사람인 죽어 있는 절망적인 순간입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감사로 해석했습니다.
3)기도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합리적 태도의 한계 극복)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불평의 입술을 열기 전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내 것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예수님의 한 아이의 5병 2어를 들고 기도했습니다. 회의론적 태도가 똬리를 틀지 못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태도가 내 인생을 구렁텅이로 끌고 가지 못하도록 기도합니다. 합리적인 태도가 하나님의 능력을 소외시키지 못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것,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 하나님의 갖가지 은사와 달란트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사용해 주시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4)순종을 통해 기적을 체험시켰습니다.(믿음에 대한 경쟁력있는 태도 실증)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줍니다. 그 현장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의 합리적 태도와 회의론적 태도, 부정적인 태도를 잠재우는 기적적인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이 문제는 해결되었습니까?
42절 43절을 읽어 보십시오.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한 아이의 경쟁력이 있는 태도를 통해 믿음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는 역사가 일어 난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했는데 그 역사가 현장에서 읽어난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1)”라고 했는데 믿음의 증거라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열두 바구니를 남겨 거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풍요로움으로 채워 주시는 생명의 떡이십니다. 사람을 죽이는 헤롯의 잔치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잔치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영적으로 구원시켜 주실 뿐 아니라 육적으로 굶주인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질병에서 치유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영적인 문제가 있습니까? 경제적 궁핍함의 문제가 있습니까? 질병으로 고통 가운데 있습니까? 큰 문제 앞에 있습니까? 이럴 때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제자들의 태도입니까? 어린 아이의 태도입니까? 우리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 1-2년에 한 차례씩 건강진단을 받습니다. 태도에 대한 진단을 하고 있습니까? 하루에 1%씩만 바꾸어도 1년이며 300% 이상 바꿀 수 있습니다. 안전하게 운행하려면 자동차 정비를 해야 인생의 행복을 위해서는 태도 정비를 해야 합니다. 영적 정글세계에서 승리하려면 끊임없이 나의 태도를 교정해야 합니다. “태도를 바꾸면 성공이 보인다” 웨인 코데이로 목사님은 예수님은 우리의 태도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가장 유명한 설교라 할 수 있는 산상수훈 역시 "너희의 태도 (attitude)가 너희가 무엇이 될지(be)를 결정할 것이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태도를 약간의 조정만 하면 인생은 그들 앞에 힘차고 분명하게 다가올 것이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조그만 태도의 차이가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태도를 테스트 받는 기간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에 대한 태도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 5병 2어를 들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이 축사하시고 풍성하게 우리에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
2007.5.6/열린교회/김필곤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