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정복하기
본문
마가복음5:35-43
부활절이면 계란을 선물합니다. 어제 우리 교회에서도 권사님들이 오셔서 계란을 삶으셨습니다. 삶은 계란을 저에게 가져오셔서 두 개를 먹었더니 어제 저녁 계획에 없는 금식을 하였습니다. 왜 우리가 부활절에 계란을 선물합니까? 부활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정복한 것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절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오늘 돌아가셔도 영원한 천국에서 눈을 뜰 믿음이 있습니까? 오늘 날도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믿음으로 우리는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막연히 믿습니까? 억지로 믿는 채 하는 것입니까? 실재로 믿습니까?
현대인들은 기적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성의 범주에서 이해되는 것만을 인정합니다. 과학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것만 믿겠다는 것입니다. 과학에는 법칙이 있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 부력의 법칙, 물량불변의 법칙, 죽음의 법칙과 같은 법칙이 있습니다. 이 법칙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기적이나 예수님의 부활이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제자들의 신앙 고백적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경에 일어난 일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지금도 사람이 부활하여 살아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지 않으니 성경에 기록된 부활 기사는 제자들에 의하여 신화적으로 꾸며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합리주의자들은 그리스도는 부활한 것이 아니라 일시 기절했을 뿐이며 장사를 한 후 정신이 되돌아와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기절설). 마리아가 어두운 새벽길에 잘 못 찾아서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이 부활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빈무덤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옮겨 놓고는 부활했다고 거짓을 퍼트렸다는 것입니다(도난설).
부활이 없었는데 돌아가신 후 죄송한 뉘우침에 부활을 말하신 것을 굳게 믿고 심히 피곤하여 머리 속에 그리다가 마침내 환상을 보고서 이것을 실제인양 퍼트렸다는 것입니다(환상설). 바벨론 신화, 동방신화에 나오는 부활설을 예수님께 적용했다는 것입니다(신화설). 그러나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했다는 것이 사기이고 환상이고 꾸며낸 이야기이고 신화일까요? 기절하였다가 다시 일어났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성경의 진리이면서 역사적 사실입니다. 역사 속에 일어난 단회적 사건은 과학으로 입증되는 분야가 아닙니다. 믿음의 분야입니다. 이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어떻게 최초에 생겼는지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습니까? 부활은 논리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합리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개미들이 먹이를 나르고 있는데 인간이 한 마리를 집어가버렸습니다. 개미들에게는 그것은 휴거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초월하지 못하고 3차원의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에 과거를 갈 수 없습니다. 만약 인간이 과거를 갈 수 있다면 분명하게 과학적으로도 입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단회적 사건으로 일어나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지금 공룡이 살고 있지 않다고 공룡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역사 속에 존재했다가 사라진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습니다.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도 역시 역사 속에 일어난 단회적 사건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기록을 진실로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수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빌라도도 빌라도 보고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기절한 것이 아닙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잘 못 찾아가서 빈무덤을 보고 착각했겠습니까? 예수님의 묘지는 공동묘지가 아니라 개인 묘지이기에 찾기에 쉬웠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의 위치를 미리 확인하여 두었습니다.(눅23:55). 해 돋을 때에 무덤으로 다시 베드로가 갔습니다(막16:2). 제자들이 시체들 도둑질하여 옮겨놓고 거짓으로 부활했다는 소문을 퍼뜨렸겠습니까? 그럴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잡히시던 현장에서 도망하고 주님을 부인하던 제자들입니다. 또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 부활을 전했을 때, 믿지 않으려고 확인까지 하려던 제자들입니다. 제자들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하였는데 한결 같이 거짓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부활 사건 이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을 믿고 증거하다가 화형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리고 짐승에게 찢겨 죽었습니다. 거짓을 위해 그렇게 죽었겠습니까?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갔던 베드로가 거짓을 위해 순교를 당했겠습니까? 예수님을 너무 그리다가 그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고 헛소리 한 것입니까? 여러 사람이 일시에 환상을 보고 실제적 사건으로 오인했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후, 40일간 무려 11번 나타나셨고 갈릴리 지정된 산 위에서는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셨습니다. 확실한 증거는 부활을 목격한 예수님의 가족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가족과 친척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요7:5) 미쳤다고 했습니다.(막3:21) 그러나 그들은 부활을 목격하고 그들의 삶은 변하였습니다(행1:14)
옥스포드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토마스 애놀드는 말하기를 "나는 여러 해 동안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사실을 조사하고, 이에 대하여 기록한 문헌과 유물을 고증하여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오는 중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표징, 곧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을 인류사에서 나는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살지 못하였고,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 믿음도 헛것, 금생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고전15:16-19)"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인류 그 누구도 정복하지 못하는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셨습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오늘은 죽음을 정복한 바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정복하였기 때문에 우리도 죽음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 사실을 믿습니까?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죽음을 정복할 수 있겠습니까? 과학주의 신봉자들은 과학이 영생을 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영생(永生)하는 새로운 인간 즉 늙지도 죽지도 않으며,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 넘는 인간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포스트휴먼(posthuman) 시대라고 말합니다. 정신을 컴퓨터에서 공급받는 포스트 에고, 몸을 생체 공장에서 재생받는 포스트 바디, 생명공학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는 포스트 데스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미래학자 호세 코르데이로(Cordeiro) 박사는 “인간의 영생은 불가능한 게 아니다. 과학기술의 성과를 감안하면 시간 문제일 뿐이다." 라고 말합니다. 포스트 휴먼 시대에는 어떤 장기(臟器)도 복제를 통해 대체 가능해 질 뿐 아니라 뇌세포의 뉴런(신경세포)까지 교체할 수 있게 되며, 불로장생(不老長生)이 과학적으로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생명공학․정보기술․나노기술 등이 인간에게 영생을 준다는 것입니다. 과연 과학이 이렇게 인간에게 영생을 줄 수 있을까요? 어제 신문을 보지 않았습니까?
30년 뒷면 지구 생물종 20~30% 멸종될 위기가 온다는 것이 아닙니까? 신학자들이 모여 만든 것이 아닙니다. 6년간 세계 130개국의 과학자 2500여명이 참여해 작성한 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IPCC)에서 최종안으로 확정해 발표한 것입니다. 영생이 아니라 2020년 17억명 물부족 사태를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계시록과 같은 미래모습이 나타나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기온은 이번 세기 말까지 지난 세기 말 30년 평균 온도에 비해 4도가 상승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태백․소백산맥 산지를 제외한 서해안․동해안 중부까지 아열대 기후구가 북상하고, 집중호우와 극한 고온 현상의 빈도가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과학에 의해 영생을 얻게 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딸의 죽음 앞에 서있는 회당장 야이로에게 예수님 말씀합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님께서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영생을 얻는 방법은 오직 믿음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이 죽음을 정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청교도 신학자 Thomas Watson이 말하듯이, "이성이 걸어갈 수 없는 곳에서도 믿음은 헤엄쳐갈 수 있습니다."
믿음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가게 만듭니다. 어떤 믿음이 죽음을 정복하게 합니까?
1. 예수님께서 나의 한계를 채워주신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22).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음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가지는데는 넘어가야 할 산이 있었습니다.
(1) 합리주의의 산입니다.
예수님께 나오는 자들이 아무나 나옵니까? 아닙니다. 대부분 어떤 문제로 나오게 됩니다. 인생의 공허나, 질병, 가난, 삶의 고뇌 갖가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기 힘든 문제를 풀기 위해 예수님께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나오기까지는 합리주의 산을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가버나움의 한 회당장입니다. “집회의 우두머리”입니다. 건물을 관리하며, 예배 순서의 작성 및 질서 유지, 심지어 재판과 같은 사무 등을 관할하던 장로 출신의 지도자였습니다(눅 4:13 ; 8:41 ; 행 18:8,17). 당시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이었을 것입니다. 합리적인 사람입니다. 병원을 찾아다니고 갖가지 방법으로 딸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을 것입니다. 비합리가 아닙니다. 초합리입니다. 죽음 앞에 서있는 딸의 절박한 모습 앞에 합리적 틀에 갇혀 있을 수없습니다. 물 속에 빠져 죽어 가고 있는 숙녀가 있는데 예의와 체면과 합리를 생각하며 건지지 않고 조용히 나오라고 소근거릴 수 있겠습니까? 머리채라도 잡고 나와야 합니다. 그러니 자신의 딸의 문제를 가지고 젊은 예수님께 나아가 발아래 엎드리는 것입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행동입니다. 당시 관습과 합리를 초월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회당장이라는 사회적 신분을 가졌지만 예수님께 복종하겠다는 최대의 존경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를 최고의 지위로 높이는 절대 겸손의 모습입니다. 그 당시 예수는 일반적으로 한 새로운 랍비 정도에 불과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던 터였기 때문에 유대의 종교를 대표할 만한 종교 지도층 인사가 그 앞에 무릎 꿇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2) 경험주의의 산입니다.
이제까지의 경험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비경험이 아닙니다. 경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초경험입니다. 이제까지는 사람들을 통해 살리려 했지만 한번도 경험하지 못하신 예수님께 문제를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만나면 자신의 딸을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간 것입니다. 아직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지만 소문을 듣고 믿고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회당장이 직접 바닷가에 많은 무리가 모인 곳으로 예수를 찾아갔습니다. 이제까지 자신의 경험을 초월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이런 행동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발 앞에 엎드려 무엇을 합니까? 많이 간구하였습니다(23). 마치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한 자처럼 필사적으로 거듭 반복해서 예수께 간절히 매어 달렸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경험을 무시하는 비경험이 아닙니다. 경험을 초월하는 초경험입니다.
(3)과학주의의 산입니다.
과학은 인간에게 많은 편리를 제공했습니다.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과학주의는 과학을 신앙으로 삼게 만들어 버립니다. 증명되는 것만 믿겠다는 과학신앙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믿음은 비과학이 아니라 과학을 초월하는 초과학입니다.
무엇을 그렇게 요구하였습니까?(23) 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학적으로 맞는 것입니까?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께서 그 손을 딸의 몸위에 얹으면 곧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수만 하면 죽지 않고 살아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과학을 뛰어넘는 믿음입니다.
2. 회의를 딛고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회당장의 말을 듣고 예수님이 그와 같이 갔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쌌습니다.(24) 그리고 12년 혈루증 앓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 치료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해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고쳐 주시느냐고 지체를 하였습니다. 그 때 회당장 집에서 사람들이 왔습니다. 무엇이라고 말합니까?(35) 그렇게 예수님께 요청하는 순간 죽지 않고 살아났다는 것입니까? 그저 요구하는 순간 죽지 않고 살아났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35절을 읽어보십시오. 당신의 딸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혈루증에서 치료받은 여인과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입니다. 질병에서 치료받은 현장에 찬물을 끼얻는 소식이었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렸습니다. 질병을 치료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질병이 더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사업을 일으켜 달라고 기도했는데 더욱 사업은 망해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되기를 위해 기도했는데 교회는 점점 더 기울어져가는 것입니다. 이러면 어떻게 합니까? 거부당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나왔는데 결국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부당하면 세가지 반응로 나타납니다.
(1)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와서 무릎 꿇고 빌었는데 어떻게 내 딸이 이렇게 죽습니까하며 원망하는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늘 사용하던 방법입니다. 모세를 원망하고 죽이려고까지 하는 것입니다. 어디나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38절을 보십시오. 훤화하며 심히 통곡하였다고 했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그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니까 비웃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회당장이 예수님께 딸을 살려달라고 간 사실을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뭐냐는 것입니다. 헛소리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처리해 버립니다.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고 교회를 떠나버리고, 주님을 멀리해 버리는 것입니다.
(2)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지체한 동안 딸은 죽었고 회당장 집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이 사람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났으니 예수님을 더 이상 귀찮게 하거나 마음에 부담을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메너를 갖추고 합리적 판단에 따라 대처합니다.
(3) 신앙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죽음 앞에 모든 것이 끝났을 때 회당장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36절 한 번 큰 소리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전한 말을 아예 무시하셨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 앞에서는 절망적 소식이 아무런 가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적 사고는 아무런 근거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회의와 절망에 사로잡힌 야이로에게 희망을 선포합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 말라”, “믿기만 하라” 이는 곧 죽음의 소식에 마음 흔들리지 말고 지금껏 나를 향해 지니고 있었던 그 믿음, 그것을 계속하여 지니라는 말씀입니다(롬 4:20, 21).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죽음과 삶을 주관하시는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을 정복하는 믿음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우리가 기도한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접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결과가 나타나도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나의 신념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나는 못해도 우리 주님은 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믿는 것입니다. 내 앞길이 어떻게 전개된다고 해도 우리 주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우리 주님의 사람으로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극한 상황이 주어진다 해도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대리고 회당장 집에 들어갔습니다. 이미 끝이 나버렸습니다. 사람들은 훤화하며 울며 통곡합니다. 심히 통곡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41절을 보십시오.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하십니다.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생명의 주인의 권위를 가지시고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소녀는 일어나 걸었습니다. 치유의 결과는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즉시 일어났습니다. 다 끝나 버린 것같은 상황에서 역전이 일어났습니다. 12살 소녀의 동작은 가볍고 발랄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광을 보고 “크게 놀라”습니다.
3. 죽음을 정복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죽음을 정복한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제 죽음을 정복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1)자신에 대하여 죽음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소녀가 죽은 것을 보고 죽음이 끝이다고 절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말합니까? 39절 보십시오. 잔다는 것입니다. 지금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아침이 되면 눈을 떠고 일어나는 잠과 같다는 말입니다. 죽음이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입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있습니다. 영원한 천국이 있습니다. 그 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2)죽었다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어야 합니다.
죽음이 끝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합니까?
38절을 보십시오. 울며 통곡하며 훤화합니다. 절망적입니다. 훤화하는 것은 심하게 떠들며 부르짖는 다는 말입니다. 사실 슬퍼서 우는 것도 아닙니다. 돈받고 우는 것입니다. 그저 우는 체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그것으로 끝납니까? 비웃습니다. 마른 고목 나무에 어떻게 꽃이 피겠냐는 것입니다. 파지 않은 우물에서 어떻게 물이 나오겠냐는 것입니다. 마른 하늘에 어떻게 비가 오겠냐는 것입니다. 끝이 난 집안인데 어떻게 회복되겠냐는 것입니다.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질병에 걸렸는데 어떻게 다시 살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기업인데 어떻게 기업이 다시 돌아가겠냐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교회인데 어떻게 그 교회가 부흥하겠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웃는 자들을 어떻게 합니까?(40) 내어보내 버립니다. 강제로 추방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소녀를 살렸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어떻게 변하였습니까? 42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놀라고 놀랐습니다. 크게 놀라고 놀랐습니다. 놀란 정도가 아닙니다. 황홀경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놀랐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정복하는 우리의 믿음을 통해 이런 역사가 일어나야 하겠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조롱받는 삶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따라가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죽는 문화를 닮아가서는 안됩니다. 부활을 선포하는 인생이 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그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야 그렇게 힘없던 아이가 그렇게 사회적으로 출세하다니? 초등학교 시절 꼴치만 하더니 야 그애가 어떻게 박사학위를 받았어? 야 그 집안 꼴이 아니더니 어떻게 그렇게 잘되었지? 야 그 공장 망한 줄 알았든데 어떻게 그렇게 잘되었지? 야 그아이 시집도 못가고 장가도 못갈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런 좋은 가정 이루었지? 야 그 교회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런 교회 이루었지?”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3)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죽음의 자리에서 일으키는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믿음을 통하여 소녀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지금 그 소녀는 죽을 사람이 아닙니다. 80대 노인이 아닙니다. 한참 자라야 할 아이이고 이 세상에 할 일이 많은 젊은이입니다. 12살 소녀와 죽음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죽음을 이기고 일어서야 합니다. 병을 이기고 일어 서야합니다. 한계상황을 극복하고 일어서야 합니다. 어떤 고난이 온다고 할지라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될 인생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기를 예수님은 원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가정도 일어서고 교회도 일어서고, 직장도 일어서고 기업도 일어 서고 사업터도 일어서고, 자녀도 일어서고, 나라도 일어서야 합니다. 지금 잠잘 때가 아닙니다. 관속에 누워 있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일어서야 합니다. 오늘 우리 예수님께서 죽음을 정복한 날을 기념하는 부활절입니다.
① 로뎀나무 아래 지쳐서 쓰러져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시켜서 떡과 물을 주시며 "일어나 먹으라" 고 하셨습니다.(왕상19:5절) 주님의 일을 하다가 영적 기갈과 곤비함으로 힘을 잃은 사람들이 생수의 떡을 먹고 일어서야 합니다.
② 세상을 향하여 말씀을 전하다 지쳐 있는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일어나 빛을 발하라" 고 말씀하십니다.(이사야 60:1절) 절망하지 말고 가정에 빛을 발하게 하십시오. 일어나 세상에 빛을 발하게 하십시오. 세상을 보며 절망하지 말고 빛을 주십시오
③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고 하였습니다.(요한복음 5:8) 해도 해도 안된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일어 나야 합니다. 때가 되면 이룹니다.
④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기도하러 가다가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고 하였습니다.(사도행전 3:6절)
예수를 10년 20년 믿었어도, 교회를 수십년 다녔어도 잡아 끌어야 끌려오고 업어다 놔야 하는 앉은뱅이와 같은 신앙에서 일어나십시오. 구걸하는 신앙에서 주는 신앙으로 일어 서십시오.
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같이 기도하려고 했으나 제자들은 모두 잠이 들고 홀로 피와 같은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시고 마지막 군병들이 잡으려고 올 때 제자들을 깨우시며 "일어나라 함께 가자" 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26:46절) 잠자는 신앙에서 일어나십시오
에베소 5:14절에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자 가운데서 일어나라" 고 하셨습니다.
사망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나태와 게으름의 병에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 우리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해도 믿음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앉은뱅이와 같은 신앙, 중풍병자와도 같은 신앙, 소경과도 같은 신앙에서 일어나십시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0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