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 설교자료실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설교자료실 >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본문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막2:13-17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행복론"에서 사람이 기본적으로 네 가지를 가져야만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명랑한 정서입니다. 두 번째는 건강한 몸입니다. 셋째는 정서적 평온입니다. 넷째는 약간의 외부 자산입니다. 그는 자산에 대하여 세 가지를 말합니다. "당연히 필요한 재산, 여유 있는 재산. 불필요한 재산"입니다. 이 재산 중에 불필요한 재산에 대한 욕심 때문에 사람들은 근심이 많고, 건강과 가정을 잃어버리는 불행을 겪는다고 말합니다. 불필요한 것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명랑한 정서를 잃어버리게 하고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평온을 상실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행복을 방해하는 불필요한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들이 있습니다. 그것만 포기해 버리면 행복할 텐데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옛날 아랍에 한 왕국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나라의 왕자가 귀한 항아리에 들어 있는 사탕을 꺼내려고 항아리에 손을 넣었다가 그만 항아리 주둥이에 손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항아리를 깨서 왕자를 구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이웃 나라 왕에게서 받은 귀중한 항아리를 깰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왕자를 구한 것은 지나가던 한 현자였습니다. 현자는 왕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손에 쥐고 있는 사탕을 놓으세요." 그러나 왕자는 "싫어, 싫어! 사탕 먹고 싶단 말이야!"라고 울어대기만 했습니다. "사탕은 제가 꼭 꺼내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현자의 그 말을 믿고 왕자가 손에서 사탕을 놓으니 손이 쏙 빠졌습니다. 왕자의 손이 빠지자 현자는 항아리를 거꾸로 들어 사탕을 꺼내 왕자에게 주었습니다.
혹 왕자처럼 사탕을 놓지 못하여 항아리 주둥이에 갇혀 있는 성도님 계시지 않습니까? 그것만 놓아 버리면 가정이 행복해지고 그것만 놓아 버리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것만 놓아 버리면 참 자유를 누리고 그것만 근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데 여전히 주먹으로 움켜 쥐고 놓지 못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놓는 순간까지는 참 자유와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레위라는 사람이 손에 움켜쥔 것을 놓지 못해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1. 불행한 레위
레위라는 말은 ‘친한 자’라는 뜻입니다. 레위하면 떠오르는 것이 구약의 레위지파입니다. 레위지파는 제사장 가문입니다. 아버지가 그 이름을 지어줄 때는 앞으로 제사장이 되어 로마의 압제하에 살고 있는 나라에서 레위 지파의 영광을 회복해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레위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는 가버나움에서 살았습니다. 갈릴리 북서쪽 호수와 접해 있는 인구 1천 5백 명에서 2천 명 정도가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조그마한 도시입니다. 국경 지역이었으므로 세관이 있었고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지방의 중심지였으나 가버나움은 당시 유대 내륙 지방 사람들에게 업신당하고 소외되었던 곳입니다.(마4:15) 어느 나라나 국경 지대 근처의 변방 지역 사람들은 내륙 지방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합니다. 잦은 외세의 침략과 교류로 인해 그들의 피와 정서는 내륙지방인들처럼 순수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이런 곳에 자라면 가장 인생의 중요한 가치가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정해지기가 쉽습니다. 농촌같으면 돈없이도 10리를 걸어갈 수 있지만 도시는 문 앞에만 나가도 돈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느끼게 됩니다. 이런 곳에 자라면서 그는 출세하는 것이 인생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상업이 발달된 도시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돈에 눈을 떴을 것입니다. 돈있는 사람이 최고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릴 때 마음 속으로 무시받지 않고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하든 돈을 벌어야 하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바램인 제사장이 되는 것보다 세속적인 지위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남보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방법은 출세하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했을 것입니다. 그가 마태복음을 기록한 것을 보면 적어도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돈을 가장 잘 벌 수 있는 직업인 세관이 되었습니다. 그의 소원대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돈만 많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출세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을까? 경제학에서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라는 가설은 연역적으로 볼 때 당연한 결론입니다. 소득이 높을수록 소비 가능 영역이 넓어지므로 소비자는 더 높은 만족을 주는 소비 선택을 할 수 있어 암묵적으로 더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추론입니다. 그러나 실증적으로는 돈으로 행복을 사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부자가 되면 어느 정도 행복감을 누리지만 이 행복도는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돈이 많아지면 소득을 처분하여 만족을 얻는 방법을 강구하는데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며 이 비용이 너무 크게 발생하는 경우 오히려 불행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사람은 소득의 절대적 수준보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 의한 상대적 수준에서 만족함을 얻기 때문에 소득이 많아지면 더 많은 소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아 상대적으로 행복도는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행복계량학파는 돈과 행복이 꼭 비례하진 않는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연구했습니다. 선도자 격인 에드 디너 교수는 2004년 포브스가 뽑은 미국 400대 부호와 인터뷰를 했답니다. 응답을 7점 만점으로 계량화한 결과, 부호들의 행복지수는 5.8로 얼어붙은 땅 그린란드의 이누이트 족이나 케냐 사막의 유목 민족 마사이 족과 같은 수준이었답니다. 타임스지의 연구 결과도 비슷했습니다. 행복을 주는 요인 중 돈은 14위. 애정. 자유. 유머 등보다 훨씬 순위가 처졌습니다. 워싱턴 포스트가 내 놓은 답도 "대체로 그렇지 않다"입니다. 개인의 연간 소득이 1만 2천 달러를 넘어서면 그 이상의 돈은 삶의 만족을 증가시키지 않는다는 수십년 간의 데이터를 제시했습니다.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실린 연구논문은 "높은 소득이 좋은 기분을 들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넓게 퍼져 있으나 이는 착각일 뿐"이라면서 "평균 이상의 소득을 가진 사람들은 더 긴장돼 있고 특별히 즐길 만한 행동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 일상사에서 일반인들보다 더 행복하지 않다"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행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6가지 요소를 보면 "정신건강, 만족과 안정감을 주는 일, 안정적이고 애정이 넘치는 사생활, 안전한 공동체, 자유 그리고 도덕적 가치"로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돈은 없습니다. 행복은 마음의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심리학자 리처드 스티븐스는 행복의 세 가지 요소를 "좋은 느낌과 긍정적인 마음, 활기 넘치는 생활, 인생에서 가치 있는 선택"을 하는 의미부여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이 바뀌어야 행복합니다.
후지이 가오루가 지은 「엔딩, 나의 인생에 후회가 있다」라는 책은 자만심, 방탕한 사생활, 너무 일찍 이룬 성공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몰락해간 사람들 26명의 스타와 위인들의 이야기가 수록이 되어 있습니다.
불안과 고독 속에 쓸쓸히 홀로 죽어간 마릴린 먼로가 결코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답니다. 독재자 스탈린 중국의 여걸 강청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스탈린은 고문과 암살 등으로 공포의 정치를 감행해 개인숭배의 탑을 쌓아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했지만 그에게는 따뜻하게 차 마실 상대 하나 없었고 가족의 사랑도 없었답니다. 그의 두 번째 부인은 남편의 잔악한 숙청에 충격을 받고 오래 전에 자살했고 장남은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사망했으며 차남은 알콜 중독자로 방탕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가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는 측근조차도 방치한 상태에서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무명의 여배우에서 최고 권력자가 된 모택동의 부인 강청 역시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서조차 외면 받으며 자살로 인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20세기 대문호 어네스트 헤밍웨이, 사치와 방탕한 사생활로 무너진 집념의 여배우 사라 번하트, 여자의 일생을 지은 플레이보이 모파상, 성공한 탐험가에서 미움받는 천덕꾸러기가 된 콜럼버스 등 인기와 권력 명예, 탐욕, 쾌락의 노예가 되어 불행한 앤딩을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출세하고 돈을 잘 벌 수 있는 세리였는데 왜 불행하였겠습니까?
백성들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앞잡이 매국노 취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서북편에 위치한 도시로서 다메섹, 두로, 예루살렘, 애굽등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였스며 상업이 발달한 지역입니다. 따라서 그곳에는 국립 세관이 있었으며 어업세, 통관세, 통행세를 징수하였습니다. 토지세 인두세 같은 정기적인 세금은 로마 관리들이 직접 징수하였지만 어업세 통관세 통행세는 세금 청부업자들에게 맡겨졌습니다. 이들은 로마 관리에게 선금 계약금을 주고 세금을 받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세금을 받아 챙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로부터 천대와 멸시,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유대인 자치 조직의 직무를 맡지 못하도록 하고 법정에 증언으로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죄인들과 창기들이방인처럼 취급하였습니다.(마21:31,마18:17)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있고 돈이 있어도 이렇게 취급받는 자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권력이 있고 돈이 있다할지라도 불안과 고독, 아픔과 소외 속에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불행한 인생입니다.

2.부름받은 세리 마태
이 불행한 인생에게 어느날 예수님이 찾아가셨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따뜻한 말로 접근하지 않는데 예수님만은 그에게 따뜻한 말로 접근하였습니다. 그의 고독한 마음을 어루만겨 주었습니다. 그의 불안한 마음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에게 친절한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날도 갈릴리 바다가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세관을 지나갔습니다. 그 때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사람은 몰라도 예수님은 레위의 사정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소외되고 어려울 때 우리의 사정 아무도 모른 것 같지만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사정 알고 계십니다. 나의 외로움, 나의 고독, 나의 아픔, 나의 부족함을 다 알고 계십니다. 알고만 계신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의 습관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음을 아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나쁜 습관을 고치려고 얼마나 노력합니까?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머릿속에 새로운 습관의 경로를 만드는 데는 총 21일이 걸리며, 배운 것을 머릿속에 단단히 박아 습관적인 활동이 되게 하려면 다시 63일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 쉽지 않습니다. 늘 실패하고 패배감에 고통을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바로 성탄절은 우리를 연약한 죄인들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아시고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권위 있는 사람이 우리의 이름만 불러 주어도 얼마나 좋습니까? 유명한 사람이 우리를 불러 준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당시 많은 사람들이 따르시는 분이었습니다. 질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가지고 그분이 자신을 알아주고 불러 주니 얼마나 감격적이었겠습니까?
얼은 마음이 녹아졌을 것입니다. 불안한 마음에 평화가 찾아 왔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나를 좇으라.” 단순한 한 마디를 합니다. 어떤 약속도 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나를 좇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이제까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말입니다. 누구도 자신을 상종하려고 하지 않는데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누리며 존경을 받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좇으라고 하니 감개 무량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는데 만약 자신이 예수님을 좇으면 예수님도 자신과 똑같은 사람으로 취급을 받을 터인데 “좇으라”고 하니 얼마나 감격적인 초청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가 죄와 모순 갈등 가운데 번민할 때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유익한 사람만 부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짐을 지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건강을 상실하고 죽음의 고통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잡으려고 갈 때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그를 불렀습니다.
모세가 애굽인 죽이고 살인자가 되어 멀리 도망가 목동 생활할 때 그를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이 우상 장사 아버지의 아버지 밑에서 희망없이 살아갈 때 그를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단순했습니다. “나를 좇으라” 사울을 부르실 때도 단순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모세를 부를 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야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 신을 벗으라” 아브라함을 부를 때도 단순합니다. “갈대아 우르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레위는 예수님의 부름에 어떻게 응답하였습니까? 단순한 부름에 단순하게 응답하였습니다. 즉각적으로 응답하였습니다. 일어나 좇아갔습니다. 누가는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눅 5:28)”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돈많이 버는 자리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책이지만 백성들에게 비난 받고 예수님을 따르기에 거추장 스럽고 예수님께 욕을 돌릴 수 있는 세리의 자리를 다 포기해 버렸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을 진정 따뜻하게 맞이해 주고 인간답게 만들어 주시는 그 분 앞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되면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대상을 발견한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따르면 됩니다. 이것이 주님을 좇는 길인가? 아닌가? 단순한 원리에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단순성을 잃었습니다.
가바타 요시유키가 쓴 “단순하게 생각하라”는 책이 있습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잔뜩 쌓여 있을 때, 인생에서 무엇이 진실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깊은 침체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그리고 목표를 상실하게 되었을 때 단순하게 생각하라” 말합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해답이 보인다. 내 위치를 알면 문제도 해결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토마스 아켐퍼스는 “세상사에서 떠나 높이 날아오르는 데에는 두 개의 날개가 있다. 이른바 단순성과 순결성이라는 날개이다.”라고 말합니다. 진정 강해지기 위해서는 단순해야 합니다. 진정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단순해져야 합니다.

베르너 티키 퀴스텐마허는 그의 책 “단순하게 살아라”에서 돈과 시간, 육체적인 병 혹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자신의 내면 문제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단순하게 살아라고 말합니다. 그는 7가지를 단순화시키라고 합니다. “물건들을 단순화시켜라. 재정 상태를 단순화시켜라. 시간을 단순화시켜라. 건강을 단순화시키라. 관계를 단순화시켜라. 배우자와의 관계를 단순화시켜라. 자신을 단순화시켜라”라고 말합니다.
기업도 성공하려면 단순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니 최대의 강점, 단순함과 새로운 발상이라고 합니다.
빌젠슨은 더 많고, 더 좋고, 더 빠른 세상에서의 새로운 경쟁력 최고의 경쟁력은 단순함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는 단순함이 필요합니다. 복잡하게 제고 또 제고 이렇게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내 인생 다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미래는 주님의 손에 있다고 믿고 따를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단순하게 따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사랑의 으뜸가는 사랑, 최고의 사랑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다. 가장 큰 으뜸의 믿음은 묻지 않고 따르는 것이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잠 16:3)”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시 37:5-6)”

3. 새 삶을 살아가는 마태
레위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자신이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만을 따를 것은 그의 동료 세리들에게 확실히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는 무감동, 무목적, 무의미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잔치하는 삶으로 전환되었습니다. C.S. 루이스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잔치로 시작된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의 죄인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면 하늘 나라에서 잔치 벌어집니다. 가나 혼인 잔치, 최후 만찬, 오순절 성령 강림, 어린양 혼인잔치 모두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잔치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잔치입니다.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잔치입니다. 그날은 뒤늦은 마태의 크리스마스였습니다. 레위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인 마태로 변하는 날이었습니다. 생애 최대의 날, 자기 중심 경영에서 하나님 중심 경영으로 인생이 바꾸어지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잔치에 찬물을 끼얻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파 출신의 서기관들입니다. 당시 신앙이 아주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리를 죄인 취급하며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정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식탁 정결법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안식일 법 못지않게 중요한 법입니다. 그들의 율법전통 가운데, 무려 67%의 내용이 식탁교제에 관한 법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을 수 없는 음식을 엄격하게 구분했습니다. 그들은 우유와 송아지 고기를 함께 먹지 않습니다. 음식을 담는 그릇도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음식과 그릇만 구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식탁에 함께 앉아서 밥 먹는 사람도 정결해야 합니다. 그들은 식탁의 정결을 위하여 세리들, 죄인들, 문둥병자들과 저주 받은 각종 병자들, 신체가 온전치 못한 사람들, 창기들과는 함께 식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 부정탄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모든 유대인의 정결법을 깨뜨려 버리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사람을 차별하고 소외하는 그릇된 법을 예수님은 깨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좇는 마태를 정결한 사람으로 대접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병든 사람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바리새인 출신 서기관들이 그들이 목숨과도 바꿀수 없다고 신봉하는 식탁정결법을 어기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왜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느냐?”고 시비를 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학으로 병자들, 죄인들, 세리들, 창기들을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부정과 정결함이라는 기준으로 그들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병자들과 죄인들 세리와 창기들에게도 문이 활짝 열려있습니다. 우리는 다 매일 매일 죄를 짓는 죄인들입니다.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늘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루이스 팔라우는 교회는 거름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모여 있으면 냄새가 나지만 세상으로 나아갈 때 퇴비가 되어 열매가 있습니다.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우리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있는 자와 비천한 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죄인들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앞에 나아가면 모두가 죄인입니다. 용서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 앞에서는 다 죄인입니다.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사람이 있을 뿐이다. 죄인이란 이름의 죄인과,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다."
레위는 이제 변화되어 예수님의 제자 마태가 되었습니다. 그는 마태 복음을 기록합니다.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구약의 예언된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전합니다. 나중에 에디오피아서 전도하다가 창에 찔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부르심이요(요 5:24), 절망에서 소망에로의 부르심이며, 죄인에서 의인에로의 부르심입니다(사 1:18). 우리는 다 치료 받아야만할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인됨을 진솔히 고백하는 자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임에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십니다.

2006.12.24/열린교회/김필곤 목사



고객센터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기독정보넷공식트위터 Copyright © cjob.co.kr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