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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사고를 변화시키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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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사고를 변화시키는 믿음
마가복음2:1-12

몇 년 전 한 여 집사님에게서 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습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갑자기 쓰러졌다는 것입니다. 빨리 가까이에 있는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하고 급하게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도착하니 응급실에 누워 있었습니다. 의식은 있었는데 팔과 다리가 마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건강했던 50대인데 뇌졸중 중풍으로 쓰러진 것입니다. 흡연자,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경쟁심-야망 큰 사람에게 잘 나타나는 뇌졸중은 암, 심장질환과 함께 우리나라 사람들의 3대 주요 사망원인 중 하나입니다. 뇌혈관이 막히거나(뇌경색), 그 반대로 뇌혈관이 터져 뇌손상을 일으켜 위험한 고비를 넘겨도 반신 마비나 언어 장애 등의 후유증을 오래도록 갔게 됩니다. 국내 사망원인으로 암 다음으로 2위를 차지하고 있고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발병률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중풍에 걸린 분이 나옵니다. 아마 죽지 못하여 사는 삶일 것입니다. 당시에는 의학이 그렇게 발달되지 못했고 중풍은 주로 40-60대에 발병하기 때문에 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경제적인 고통도 심각했을 것입니다. 단란했던 그 여집사님 가정이 그 후 완전히 바뀌어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가족 모두가 병시중에 초점을 맞추어 삽니다. 보통 정성이 아니고는 모시기 심든 질병입니다. 매년 효자효부 대상을 받는 분들을 보면 중풍으로 쓰러진 시어머니 혹은 시아버지 대소변 받아내며 10년 20년 정성껏 모신 분들이 받는 것을 봅니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을 감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병에 걸리면 환자는 물론 가족들이 온통 중풍에만 관심이 집중되게 되고 그 질병으로 환자와 가족의 중심 사고는 부정적이고 우울해 지며 비관적이게 됩니다. 어떤 특별한 경험으로 생각의 색깔이 고정되어 버립니다. 기쁜 일도 기쁜 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좋은 일도 좋은 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 중심 사고는 마치 색안경을 쓴 것과 같은 사고의 구조를 가지게 되어 버립니다. 눈길에 교통사고는 당한 사람은 오늘같이 눈이 오면 교회도 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한 목회자를 통해 마음이 다친 사람들 중에는 목회자는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늘 부동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예배시간에 헌신 예배를 드리며 사회를 시키면 "우리 모두 찬송가 109동을 부르겠습니다."라고 무의식중에 나온 것처럼 그 질병에 대한 생각이 삶을 지배해 버립니다. 그것은 숲의 나무처럼 마음 깊은 곳에 쌓여 있다가 불씨만 붙으면 금방 타오릅니다.
15개나 학위를 가지고 있는 세계적인 미래학자 존 나이스비트는 이러한 사고를 마인드 세트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천편일률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이나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걷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니까 이 사람은 숙명적으로 자신의 삶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믿지 않는 사람들 식으로 이야기하면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일을 당했는가?" "이것이 내 운명이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 끝이다. 이제 나을 수 없다. 이렇게 살다가 가족들에게 피해만 주다 죽는 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숙명적 중심 사고, 이런 운명적 중심사고를 그를 지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 죽었으면 좋겠다. 나는 일어 날 수 없다. 나는 저주받은 인생이다. 세상은 우울하다.” 등 아주 부정적이고 우울하고 비관적인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중심 사고가 그와 그 가족을 지배하는 한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일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기분도 변하는데 생각 자체가 늘 우울하니까 결국 인생도 우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과거를 이상화하고, 현재를 불평하며, 미래를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상황이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 내 중심 사고가 나를 만드는 것입니다. 내 중심 사고를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 인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1. 그릇된 중심 사고, 절망적 생각의 한계를 변화시키는 믿음-“내 병은 못 고친다.”
신비하게도 사람의 중심 사고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색안경과 같아 한 번 틀을 가지게 되면 그 틀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풍병자의 생각이 어느 날 변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베드로 장모가 열병으로 나았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1장 29절) 각색 병든 자가 났고 정신병자가 났고(1장 34절) 문둥병자도(40절)도 치료받았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각종 병이 낳을 수 있다는 희망의 소문을 들은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중심 사고가 바뀐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만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막연하지만 희망이 냉긴 것입니다. 모든 변화는 생각의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변화는 대부분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는가'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미 문제는 발생했습니다. 생각에 따라 그 문제는 풀 수도 있고 못풀 수도 있습니다. 생각이 변화되어야 표정이 변하고 감정이 변하고 행동이 변하고 인생이 변화됩니다. 절망적인 중심 사고가 희망적으로 변화되면 인생은 희망적이게 됩니다. 비관적인 중심 사고가 낙관적으로 변화되면 낙관적인 인생이 펼쳐집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무엇을 보았는지 보십시오. "예수님이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5)"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생각을 보신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읽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여기 저희는 단순히 친구 네 명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 네 명 뿐 아니라 중풍병자의 믿음까지 포함된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죄사함은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병고침 받는 일, 귀신에게 놓임 받는 일, 죽음에서 살아나는 일도 가능합니다. 아버지의 믿음을 통하여 아들의 병이 치유될 수 있습니다. 목사의 믿음을 통하여 교인들이 기적을 체험받을 수 있습니다. 본인의 믿음이 없이도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고침받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위 사람의 믿음과 예수님의 절대적 권위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그러나 죄사함 받는 일은 당사자의 믿음과 회개가 반드시 요청됩니다(막16:16 눅7:50 롬4:5) 예수님께서는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막 16:16)”라고 말씀했습니다. 죄사함받는 것은 구원얻는 것은 자신의 믿음 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 7:5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에서는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나오는 저희의 믿음은 중풍병자를 포함한다고 밖에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숙명적이고 절망적인 그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만 나아가면 예수님께서 내 질병을 고쳐 줄 수 있고 내 인생을 고쳐 줄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이제까지 가지고있던 중심 사고를 완전히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중풍병자와 같이 절망적인 경제 상황입니까? 중풍병자와 같이 아무런 희망도 없이 비관적으로 살아야 할 가정 환경입니까? 내 성격으로 인하여, 나의 고치지 못한 습관으로 인하여, 나의 영적 상태가 조금도 진보하지 못하고 중풍병자와 같이 앉은뱅이 신앙으로 있습니까? 중심 사고를 바꾸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 관심을 돌려보시기 바랍니다. 과감하게 주님의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내 경험이 나를 통제하지 못하도록 주님께 마음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한계란 오직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할 뿐이지 그 마음을 주님이 지배하면 얼마든지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기분을 바꾸기 위해 대가를 지불합니다. 생각을 바꾸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교육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 나오는 것은 돈받는 것 아닙니다. 주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기분도 바꾸어지고 생각도 바꾸어지고 인생도 바꾸어 집니다.
이제까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하며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다 틀릴 수도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스트레스와 흡연 그리고 알코올이 궤양을 유발한다는 주장은 가장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의학 이론이었습니다. 위궤양은 스트레스로 인해서 신체가 위산을 과다 분비하면서 위벽을 헐게 하는 것으로, 최선의 치료법은 제산제를 먹고 심하면 수술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외과의사인 로빈 워렌 박사와 배리 마셜 박사가 위궤양의 원인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박테리아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정신 나간 얘기라고 생각했습니다.
1983년 마셜 박사는 항생제를 이용해 위궤양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해 말 벨기에에서 열린 질병학회에서 마셜 박사는 박테리아가 적어도 일부 위궤양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모든' 위궤양의 원인이 박테리아라고 생각한다고 답변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그 자리에 참석한 전 세계의 위궤양 전문가들이 모두 틀렸다고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연단에서 야유를 받으며 쫓겨났고 다른 의학 모임에도 참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005년 10월 워렌 박사와 마셜 박사는 '위궤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 의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기성 의학계가 제산제를 포기하고 마침내 항생제를 사용하는 데 10년 이상의 세월이 더 걸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 주님께 나가면 영원한 천국에 갈 수 있고 나의 인생 문제가 해결되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면 어떤 죄를 지었다해도 용서받을 수 있다. 주님 앞에 나아가면 무슨 문제라도 해결 받을 수 있다." "주님 만나면 행복해 질 수 있다. 주님 만나면 고칠 수 있다. 주님 만나면 기쁨을 얻을 수 있다. 주님 만나면 평안을 얻을 수 있다. 주님께 나아가면 내 성격 고칠 수 있다. 주님께 나아가면 우리 가정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주님 믿으면 이 땅에서 질병으로 고생하지만 영원한 천국에서 갈 수 있다. 주님 만나면 나의 고질적인 나쁜 습관 고칠 수 있다. 주님께서 나에게 손을 내미시면 내 인생 활짝 열린 수 있다." 라고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일이 이루어지고 현대 과학과 현대 의학으로 어떻게 가능하며 이런 식으로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중심사고를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단순하게 생각할 때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단순할 때 주님 만날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따질 것 없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씀을 들으면 ‘그래 그 말이 맞아 예수님께 나아가면 그런 일이 일어 날 수 있어’ 이렇게 중심사고를 바꾸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예수님 만나면 해결된다”는 중심사고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운명, 숙명의 노예가 된 중심 사고에서 우리를 해방되게 합니다. 자기 중심의 인생 경영이 아닙니다. 예수님 중심의 인생 경영입니다. ccc 대표였던 김준곤 목사님의 둘째 사위 컴패숀 대표인 서정인 목사님이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잔뜩 긴장하고 김목사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 때 김준곤 목사님은 사위 후보에게 딱 한 가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나?" 그 때 서 목사님이 "죽도록 사랑합니다."고 대답하자 김 목사님은 눈물을 글썽이며 "됐네"라고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해답은 예수님께 있는 줄 믿습니다.
"예수앞에 나오면 모든 죄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구원 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205장 1절)"

2. 그릇된 중심 사고, 능력의 한계를 뛰어 넘는 믿음-“나를 도와 줄 사람 없다.”
이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중심 사고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만 나아가면 예수님만 만나면 나는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 중풍병자가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가고자 할지라도 혼자서는 도저히 갈 수가 없는 능력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홀로 걸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건강을 위해 담배끊고 술먹는 것 끊으려고 하는데 도저히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작심 삼일입니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의 벽에 부디 치게 됩니다. 누구에게 도와달라고 말할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의 중심사고는 자신의 능력을 비관하면 "나는 할 수 없는 존재다. 나는 무능한 존재야" "나는 어쩔 수 없어"라고 다시 비관적인 과거의 잘못된 중심사고로 돌아가 버립니다.
능력의 한계에 부디 칠 때 이 때 어떻게 접근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하지 못한다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내가 주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나를 도와 일할 사람을 하나님은 준비시켜 놓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그를 들어 예수님께 운반할 수 있는 네 명의 믿음의 사람을 붙여 주었습니다. 5절에 보니 이들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저 친구가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고침을 받겠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보고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신의 약점을 가지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약점을 보완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위로해 주고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5절에 보십시오. 같은 비전 같은 꿈 같은 미션을 가진 사람을 붙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믿음 뿐 아니라 그들의 믿음도 보신 것입니다. 모두 다 그를 짐으로 생각하고 모두 다 그를 불쌍하다고 말만하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구경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어떻게든 도우려는 믿음의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어떤 희생을 감당하든지 그를 도와 그의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실 예수님을 만나게 할 친구들은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대학 강단에 선 방글라데시의 젊은 교수 유누스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고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길바닥에선 사람들이 굶어죽는데, 도대체 경제학 이론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작은 동네 '조브라'에 들어가 주머닛돈 27달러를 대출해주는 것을 시작으로 그라민은행을 설립했습니다. 작은 시작입니다. 그런데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라민 은행은 현재 방글라데시 전역에 1,175개의 지점을 두고 240만 명에게 1,600억 타카(3조 3,600억 원)를 융자해주고 있으며, 직원 수만 1만 2,000여 명에 이르는 대형 은행이 되었습니다. 재정구조도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안정적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요나단이 있었습니다. 최고의 권력자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데 그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있었습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생명을 구원할 요나단을 하나님께서는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을 때 바울에게는 자신을 진정 이해해 주는 바나바같은 사람이 있었고 자신들의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만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 홀로 외로이 신앙 생활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자 칠 천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시킬 자로 세웠을 때 다섯 번이나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론을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내가 못해도 하나님이 일하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못해도 하나님은 내 문제를 해결해줄 하나님의 사람을 곳곳에 준비시켜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어 내 문제를 풀어 주십니다.
인생은 부족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해서 망하는 것 아닙니다. 성격이 잘 못되었다고 망하는 것 아닙니다. 공부를 좀 못하고, 신체적 결함이 있다고 망하는 것 아닙니다. 주변에 누가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실력만 있으면 좋은 직장을 얻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문 직업알선업체를 찾거나, 취직 시험을 통해 취업할 확률은 20퍼센트 정도이고 평소에 알고 지내는 사람에게 소개받아서 취업할 확률은 55퍼센트나 된다고 합니다. 개인적인 연고를 통해 취업할 확률이 3배 이상 높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친구처럼 자주 만나는 사람을 통하여 17퍼센트 성공할 수 있고, 어쩌다 드물게 만나는 사람을 통하여 28퍼센트 성공할 수 있으며, 간혹 만나는 사람을 통하면 55퍼센트 성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사회과학자들은 '약한 연결의 강한 힘'이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를 도와 능력을 한계를 뛰어 넘게 하는 분은 꼭 잘 아는 사람만 아닙니다. 하나님이 붙여 주시는 것입니다. 헬렌켈러가 뜻하지 않게 좋은 선생님 만나니까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해해 주고, 용서해주고, 끝까지 참아 주고 기도해주고 인도해주고 품어주는 사람을 만나면 망하지 않습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 아론과 바나바, 요나단 같은 사람, 숨겨놓은 7천명의 동역자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내 능력 없다고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 홀로라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망할 힘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같이 일할 사람 보내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3. 그릇된 중심 사고, 방법의 한계를 극복하는 믿음-“내 병은 고칠 방법이 없다.”
마음도 바뀌었고 함께 일할 믿음의 동지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장벽은 있었습니다. 1)사람의 장애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막상 가보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어 예수님께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질병을 앓고 있는 자들이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계신 집은 문 앞에도 용신 할 수 없었습니다. 통행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모인 것입니다. 눅5:17에는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 지역 사람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구경하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2)시의성의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환자를 치료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병원 의사가 진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때였습니다. 이 때가 맞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도저히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부정적인 중심사고로 다시 돌아가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즈음 사람들 말로 하면 " 이 친구 예수님 만날 팔자가 아닌가 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귀찮은데 잘되었다. 그만 가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교회까지 와서 망신 주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장애물은 핑계거리를 찾는 요인이 됩니다. 길이 막힐 때 방법이 없을 때 핑계거리를 찾으면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끝없는 핑계거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사람들 때문에, 목사님 때문에, 교회 때문에, 자식 때문에, 환경 때문에, 돈 때문에, 회사 일 때문에, 사업 때문에, 누구 때문에, 구실과 핑계는 얼마든지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핑계가 많으면 은혜 받기가 어렵고, 신앙이 자라지 않고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믿음은 장애물을 극복하면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장애물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 필요한 것이고 은혜가 크게 느껴지면 질수록 간증 거리는 더욱 많아지는 것입니다.
3)모험적 믿음으로 장애물을 극복합니다.
자기가 가진 최고의 강점으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차별화하는 것입니다. 사무라이와 싸운다고 반드시 칼싸움을 하란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룰 수 있는 것을 선택하고 그것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중풍병자와 이들을 보십시오.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포기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려면 적어도 2,000시간은 한 분야에 투자해야 한다고 합니다. 국보급 소나무는 하루아침에 자란 것이 아닙니다.
4절을 보십시오.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얼마나 거추장스럽겠습니까? 계단을 오르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리고 지붕을 뜯어 침상을 내릴 만나 구멍을 내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다. 그 친구를 고쳐야겠다는 집념입니다. 어떻게든 예수님께만 가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중풍 병자를 불쌍히 여기는 사랑 때문입니다. 당시 팔레스틴 가옥은 지금처럼 아파트가 아닙니다. 지붕은 덤불이나 갈대에 진흙을 이겨서 평평하게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쉽게 뜯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남의 집입니다. 밑에는 예수님과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설교하는 시간입니다. 상식에도 맞지 않고 예의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평상시가 아닙니다. 평상시에는 상식이나 예의가 통하지만 목숨이 걸린 전시입니다. 위기상황입니다. 열차에 휘말려 가는 숙녀가 있다면 손이 아니라 머리라도 잡아 끄집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열차에 빨려 들어가는 숙녀를 보며 숙녀의 손의 예의 상 어떻게 잡느냐고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긴급성의 문제입니다. 우선 순위의 문제입니다. 중요성의 문제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죽어 가는 데 예의만 찾고 상식만 찾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우선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상식이 거슬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앞에 서는 것입니다.
장애물이 다가오면 방법의 한계성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꼭 골리앗을 이기는 데 칼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홍해를 건너는데 꼭 배가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데 꼭 성을 부술 대포가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38년 베데스다 연못에 있는 환자가 꼭 그 연못에 들어가야만 낫는 것이 아닙니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신의 방법에 노예가 되어 그것으로 안된다고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성실성입니다. 끈기입니다. 끈기보다 성실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해주실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예수님을 만나면 된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포도주를 꼭 포도로만 만들지 않았습니다. 물로도 만들었습니다. 믿음은 내 방법을 고집하는 사고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중심 사고의 변화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막 2:11)" 오늘 이 말씀이 저와 우리 성도님의 심령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이 되길 바랍니다.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막 2:11)" 모든 무거운 짐들로부터 일어나길 바랍니다. 그릇된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안된다. 못한다. 죽겠다. 힘들다. 외롭다. 고통스럽다. 불안하다. 끝났다. 어림없다. 짜증난다." 등의 그릇된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조지아 주립대학의 데이비드 슈워츠 교수는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를 말하면서 "성공하는 사람은 키나 체중, 학력이나 집안 배경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크기에 따라 평가된다."고 말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나는 안되어도 우리 하나님을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는데 어떻게 밥이 입으로 들어가겠습니가? 예수님 만나면 나는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면 내 인생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 우리 가정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심을 통해 원하셨던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육신의 질병 뿐 아니라 영적인 질병 죄사함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알게 하시길 원하였습니다. 네 명의 친구가 그 중풍 병자를 지붕에서 내렸을 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죄 용서의 선포를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타락과 방탕을 즐기며 나쁜 죄악에 빠져 있다가 중풍병에 걸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든 이 사람은 죄가 병의 원인이 되었습니다(요5:14). 이 사람에게는 육신의 질병보다 더 심각한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만 할 죄 용서를 받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죄 용서를 선포하는 예수님을 보며 신성모독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데 어떻게 인간이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그들의 마음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죄사함을 선포하는 것도 병을 고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죄를 용서함으로 영혼의 질병을 치유시킬 수도 있으시고 육신의 질병도 치유시킬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죄사함의 권세가 있는 것을 보여 주길 원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질병,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을 통해 우리 예수님은 우리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인 것을 알게 하기를 원합니다.
이 중풍병 환자는 그 질병에서 고침받으니까 어떤 결과가 벌어졌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그를 보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 인생도 이런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006.12.25/열린교회/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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