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 되기 > 설교자료실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설교자료실 >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설교자료실

선한 사마리아인 되기

본문

선한 사마리아인 되기 <눅 10: 25-37>


The Way of Discipleship(IV)―Becoming a Good Samaritan



플로리다의 한 신문이 최근에 일어난 웃지 못할 이야기를 보도하고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자기 집 안뜰(patio)에 세워둔 오토바이를 타려다가 기어를 잘못 밟아서 자기 집의 식당에 처박게 되었습니다. 바닥에 누워 피를 흘리는 남편을 발견한 아내는 급히 구급차를 불러서 병원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병원에서 상처부위를 치료하는 동안 부인은 다시 집에 돌아와 집안으로 들어온 오토바이를 원래 있었던 곳으로 옮기고 바닥에 가득 고여 있는 오토바이 기름, 즉 개솔린을 휴지로 깨끗이 닦았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생각도 없이 기름이 묻은 휴지를 화장실 변기통 안에 집어넣었습니다. 집안 청소를 마친 부인은 병원에서 간단한 수술을 받은 자기 남편을 집에 다시 데려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남편은 오토바이 때문에 산산이 부서진 부엌문과 파손된 오토바이를 바라볼 때 기분이 몹시 상했습니다. 그래서 울적한 기분을 달래려 화장실에 들어가서 담배를 피우게 되었습니다. 담배를 다 피운 뒤 남은 꽁초를 이 남자는 변기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곳에는 자기 부인이 오토바이 기름 닦은 휴지가 들어 있어서 갑자기 불이 났습니다. 아닌 밤에 홍두깨 격으로 엉덩이 밑에 불길이 솟아 이 남자는 바지를 다 태우고 엉덩이에 큰 화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기겁을 한 아내가 다시 구급차를 불렀는데 공교롭게도 그 구급차의 직원들은 처음에 자기 남편을 병원에 후송해주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남편을 들것에 싣고 가던 구급차 직원 한 사람이 부인에게 어떻게 자기 남편이 엉덩이에 화상을 입게 되었는가를 물어서 자초지종을 알게 되자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심하게 웃다 보니까 이 구급차 직원이 잡고 있던 들것을 놓쳐버려서 이 남자는 땅바닥에 떨어져 이번에는 팔목을 다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설상가상, 혹은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표현이 이 남자를 두고 생겨난 말 같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강도 만난 나그네처럼, 그리고 플로리다 신문에 난 이 남자처럼 갑자기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에게 어떤 사람은 큰 도움을 주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우리의 아픔을 외면하고 아무 도움도 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좋은 제자가 된다는 것은 상처 입은 우리의 이웃을 사랑으로 돌보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하여 도대체 우리의 이웃이 누구이며 선한 이웃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를 일러주십니다.


어떤 나그네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여행을 하다가 강도를 만나서 입은 옷을 다 빼앗기고 심하게 얻어맞아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까지는 약 20마일 정도거리의 가파른 내리막길로 곳곳에 널려있는 바윗돌 때문에 강도들이 쉽게 몸을 숨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강도 만나 만신창이가 된 나그네 곁을 세 사람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먼저 한 제사장, 지금으로 말하면 종교지도자 혹은 성직자가 그냥 못본채하고 지나갔습니다. 둘째로, 레위인, 즉 성전에 있는 예물들을 관리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주관하던 사람도 이 나그네를 피하여 그냥 지났다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번에는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이 강도 만난 나그네를 못본채 지나갔다는 것과 같습니다. 세 번째로 사마리아인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나그네를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 응급처치를 해주었을 뿐 아니라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에 데리고 가서 여관 주인에게 계속해서 이 사람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면서 두 데나리온의 돈까지 주었다고 했습니다. 두 데나리온은 한 사람이 한 달 동안 여관에서 숙식을 함께 할 수 있는 분량의 돈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두 데나리온의 돈을 준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치료비가 더 들면 자기가 다시 돌아와 나머지 액수까지 다 갚겠다고 한 것으로 보아 주막 주인에게 백지수표를 건네 준 것처럼 호의를 베풀어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율법사는 물론이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에서는 종교적으로 가장 의롭고 거룩한 사람들로 여겨졌던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착한 이웃으로 표현되지 않고 천대받고 멸시받던 사마리아인이 주인공으로 부각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주전 722년경에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패망 당한 뒤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주해 들어온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정통 유대주의자들은 유대민족의 순수성과 유대교의 정통성을 사마리아인들이 훼손시켰다는 사실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을 몹시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주전 109년경에 요한 히르카누스(John Hyrcanus)라는 유대왕이 그리심산에 있던 사마리아인들의 성전을 파괴한 다음부터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이 깊은 증오감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 곳곳에 보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길거리에 만나서 인사도 하지 않고 아예 서로 상종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닌 사마리아인을 선한 이웃으로 부각시켰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첫째로,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한 율법사와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대화에서 나온 것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율법사는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 혹은 성경을 열심히 기록하고 연구하던 서기관을 말합니다. 이 사람은 적어도 율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많이 알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알고 있던 율법 지식을 자랑하기 위하여 자기가 어떻게 해야지만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의 숨겨진 의도를 아시고 율법사의 지식을 마음껏 자랑할 수 있도록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26절)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신명기 6: 5에 있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과 레위기 19: 18의 말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이 율법사는 구약에 나와있는 613가지 율법 조항의 진수가 바로 이 두 계명에 집약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있게 대답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의 대답이 옳다고 인정하시고 이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더욱더 자기 자신의 율법 지식을 자랑하기 위하여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29절)하고 예수님께 또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이 율법사는 "내가 어떻게 선한 이웃으로 살아갈까?" 하는 실천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누가 내 이웃인가?" 하는 지식의 문제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뒤 다시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절)고 물으셨습니다. 이번에도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 즉 사마리아인"(37절)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옳게 대답했습니다. 적어도 율법적인 지식에 관해서는, 그리고 누가 내 이웃인지에 대해서는 율법사나 예수님과의 사이에는 아무런 의견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한 가지가 차이가 있다면 율법사는 구약 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바 영생을 얻기 위한 지식과 세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상처 입은 나그네의 진정한 이웃인가에 대해서는 바로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선한 이웃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은 우리가 아무리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도대체 누가 진정한 이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흔히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강도 만난 나그네를 그냥 스쳐 지나갔던 것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죽은 시체를 만져서 안된다는 율법 때문에, 즉 종교적인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자기가 알고 있던 율법 지식과 종교적 책임 때문에 거의 죽게된 사람을 만져서도 안되고 돌보아서도 안된다고 생각하며 그냥 지나갔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질문을 던졌던 율법사와도 관계됩니다. 바로 율법적인 족쇄에 매달려 선을 분명히 실천해야 할 자리를 피하는 율법사 자신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위선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마리아인은 역사적으로나 민족적인 감정으로 볼 때 도저히 강도 만난 나그네를 도와줄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실천했던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으로 보건대 사마리아인은 수중에 돈도 있었고 나귀와 같은 짐승도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강도 만난 나그네를 돕다가는 자칫 잘못하면 자기 자신도 강도를 만날 위험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런 모든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 깊은 곳에 강도 만난 나그네를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 조건 없이 자비를 베풀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의 선행은 선과 자비를 실천하는 일에는 어떤 장벽도――예컨대 종교적, 인종적, 민족적, 계층적 장벽을――모두 뛰어 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불교 신자인데다가 과거에 우리 민족을 괴롭혔던 어떤 일본 사람이 똑같은 일을 당했다면 비록 우리가 기독교인이고 한국인이라고 할지라도 아무 조건 없이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과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세 사람의 주인공 중에 누구에 속합니까? 제사장입니까? 레위인입니까? 아니면 사마리아인입니까? 교회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연극을 할 때면 많은 사람들이 제사장이나 레위인 역보다는 사마리아인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만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조건 없이 도와주는 사마리아인의 모습에 매력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선한 사마리아인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고 강도 만난 나그네가 우리의 진정한 모습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기 보다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는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마리아인은 우리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예수님은 아무 조건 없이 자비와 사랑과 긍휼로 상처 입은 우리를 돌보아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상처 입은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상처 부위를 싸매 주시고 치료하시고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셔서 오늘도 상처 입은 우리를 도와주실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당신과 똑같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도록 초청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아무리 고상해도 그것을 시간과 물질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해서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기 전까지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이제 다음과 같은 예화를 여러분에게 들려드림으로서 저의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두 사람의 수도사가 살을 찢는 듯한 추위 속에서 수도원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다리를 건널 때 다리 밑 협곡에서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멈추어서 그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해가 지기 전에 수도원에 도착해야지만 얼어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자 주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수도사는 갈 길이 멀지만 다리 밑 계곡에 빠진 사람을 살려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그를 건져내어 그를 부축하고 천천히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수도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해가 지기 전에 수도원에 도착 해야지만 얼어죽지 않는다는 생각 하나만 한 채 계속해서 빠른 걸음으로 자기 길을 걸어갔습니다. 드디어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자 날씨는 살을 에듯이 더욱더 추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첫 번째 수도사가 목적지인 수도원 근처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웬 장애물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자기를 넘어지게 한 장애물을 만져 보니까 놀랍게도 그것은 해지기 전에 부지런히 수도원에 도착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자기 형제 수도사의 시체였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목숨만 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다리 밑에 떨어진 불쌍한 사람의 아픔은 외면한 채 수도원으로 돌아오다가 얼어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도와준 수도사는 날씨가 추워져도 옆에 부축하고 있는 사람의 체온이 따뜻하게 전해져와 결국은 혹한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기 생명을 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태 16: 25)는 예수님의 말씀이 실제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좋은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만 있고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주님의 온전한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황 요한 바오로 II세가 자주 인용했다는 조지스 버나노스(Georges Bernanos)의 다음과 같은 말을 귀한 교훈으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숫자의 교회 개혁자들이 아니라 더 많은 성자(聖者)들이다." (What the church needs is not more reformers, but more saints.) 아멘.
김흥규목사


고객센터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기독정보넷공식트위터 Copyright © cjob.co.kr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