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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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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변화 <막 10: 46-52>


The Way of Discipleship (I)―The Change of the Blind Beggar Bartimaeus



옛날 옛적에 코끼리 한 마리와 생쥐 한 마리가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었습니다. 어느 곳을 가든지 이 코끼리와 생쥐는 나란히 함께 다녔는데 하루는 길고 좁다란 다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다리 밑으로 깊은 강물이 흐르고 있어서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고 무시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코끼리와 생쥐는 나란히 함께 서서 조심조심 다리를 넘어서 무사히 건너편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이 때 엄지 손가락만한 생쥐가 하는 말이 "아유, 우리가 저 낡아빠진 다리를 건널 때 몸무게 때문에 흔들려서 애먹었네!"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분수를 바로 알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오늘 이 땅위에 수많은 신자들, 혹은 종교인들은 있지만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드뭅니다. 또한 교회 안에 사람들은 많지만 좋은 일꾼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참된 그리스도인들, 좋은 일꾼들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훈련으로 만들어집니다. 끝없는 결단과 훈련을 통하여 한 사람의 믿음직스러운 '제자'로 양육되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취지에서 저는 앞으로 몇 주 동안 그리스도의 제자되는 길에 대하여 설교하고자 합니다.


어떤 십대 소녀가 차를 몰고 나갔다가 엄청난 눈보라를 만나서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이 소녀는 자기 아버지가 주었던 충고가 생각났습니다. "만일 네가 큰 눈보라를 만나서 길에 묶이게 되면 조금도 당황해서는 안된단다. 차를 길옆에다가 끌어 놓고 제설차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서있거라. 그리고 제설차가 도착하면 곧바로 그 뒤를 따라가도록 하면 된단다." 그래서 이 소녀는 제설차가 올 때까지 길옆에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서 있다가 마침내 제설차가 오자 그 뒤를 따라 가기 시작했습니다. 한 45분 정도 제설차를 뒤따라 운전을 하다가 앞에 있는 제설차의 운전사가 갑자기 차에서 내려 이 소녀가 왜 자기 뒤를 따라오는 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녀는 자기 아버지가 주었던 교훈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제설차의 운전사는 "그렇니? 나는 지금 방금 Wall-Mart 구역에 있는 눈을 다 치우고 다음에는 K-Mart 지역까지 청소하려고 하는데 아마 너는 거기까지 따라 올 것 같아 차에서 내렸단다." 이 소녀는 눈보라를 피하는 방법은 알았지만 도대체 누구의 뒤를 어디까지 따라가야 할지는 몰랐던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뒤따르고 있는 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목사를 따르거나 어떤 평신도 지도자를 따르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속해주시고 우리 각자가 받은 은사대로 특별한 사명을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불교에서 흔히 말하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때 달을 쳐다보아야지 손가락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의 궁극적 대상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쳐다보고 그 분의 뒤를 따라야지 어떤 지엽적인 것에 몰두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12: 2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Arkansas Littlerock에서 목회하는 제 친구, 이광훈 목사님이 우리 교회 뉴스레터에 기고하는 글에서 바디매오에 대한 좋은 에쎄이를 써주신 적이 있는데, 소경거지 바디매오의 기적 이야기에는 어떻게 예수님의 참제자가 될 수 있는가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8―10장은 '제자도'(discipleship)라는 주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 장에서 예수님은 한 사람의 선생으로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 장에서 예수님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모두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참제자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특히 마가복음 저자가 바디매오 이야기를 맨 나중에 배치한 것은 바디매오야말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가장 확실하게 잘 알았으며 올바르게 뒤따랐던 참제자인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마가복음 8장―9장의 이야기가 모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고난을 받기 바로 직전에 일어난 사건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장차 직면하게 될 운명은 영광이 아니라 수치와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마가 복음 10: 17―22에 나오는 '부자청년의 이야기'와 10: 35―45의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영광받기를 구한 이야기'는 바로 뒤에 나오는 '거지소경 바디매오가 눈뜬 이야기'와 아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부자 청년과 소경거지는 경제적인 신분에서 정반대였습니다. 한 사람은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었지만 바로 그 물질에 대한 미련 때문에 예수님을 뒤따르는 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물질적인 미련이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참제자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했던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제자는 예수님과 3년 동안이나 동고동락했지만 주님이 어떤 분인지 주님이 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야만 하는지를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제자의 길이 고난의 길이 아니라 영광의 길인 줄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당연히 주님께 무엇을 얻을 것이 있기나 한 것처럼 그것을 내 놓으라고 주님께 요구를 합니다.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마가 10: 35). ("Teacher," they said, "we want you to do for us whatever we ask.")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36절)고 물으셨습니다. 이들은 "주의 영광중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37절)하고 세상적인 특권과 명예를 요구했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참제자가 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 재물에 대한 욕심이었다면 야고보와 요한은 외적으로는 버젓이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명예욕 때문에 내적으로 진정한 제자의 길을 걸을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육신적으로 버젓이 두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육안으로 보면서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하실 분이지를 바로 알지 못했던 영적으로 '눈뜬 소경'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의 자세와 바디매오를 대조시켜 보면 참제자의 길이 보다 분명하게 보이게 됩니다.


첫째로, 바디매오는 시종일관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주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마가 복음서에 나타난 다른 기적 설화들과 달리 바디매오의 이야기는 바디매오(Barti―maeus, 'Son of Timaeus')라고 하는 사람 개인에 대하여 집중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는가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그의 신체적 상태, 그의 믿음, 주변 사람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도움을 끝까지 구하는 집요함, 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 이것은 마가 복음 저자가 바디매오가 비록 육신은 눈멀었지만 영적으로 밝은 눈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부자 청년이나 야고보와 요한과 달리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따랐던 참제자였음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길거리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은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47절) 하면서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입닥쳐!"라고 제재를 가하면 가할수록 바디매오는 더욱 간절하고 크게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비록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육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다윗의 혈통을 가진 메시아, 즉 구세주이시며 자기의 병을 고쳐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내적 확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불타는 믿음을 세상 사람들의 간섭이 결코 가로막지 못했습니다. H. L. Mencken이라는 사람은 "참종교란 99%의 신뢰와 1%의 지식"(True religion is 99% trust and 1% knowing.)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하여 주님에 대한 지식보다도 주님의 메시아되심, 참 나의 구주가 되심을 신뢰하는 믿음이 더욱 절대적입니다.


둘째로, 바디매오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좋은 제자가 되기 위하여 순종하는 생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당신의 뒤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 슬픈 기색을 띠며 주님 곁은 떠났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르신다는 소식을 듣고 '겉옷'(cloak)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갔다고 했습니다(50절). 거지에게 겉옷은 가난한 어부들의 고기잡는 배와 마찬가지로 소중한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만난 기쁨이 너무 크기에 가장 귀한 재산을 포기하고 주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또한 겉옷을 벗어 던졌다는 것은 예수님께 신속하게 나아가야 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바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디매오의 겉옷처럼 때로 세상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요긴하고 필요한 것이 주님의 뒤를 따르는데 장애물로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좋은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적으로 귀하고 요긴하지만 신앙생활에 장애가 되는 겉옷을 과감히 벗어 던질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Philadelphia Inquirer라고 하는 신문에 실린 웃지 못할 이야기는 참된 순종이란 어느 한 쪽에 순종하면 다른 한쪽에 불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느 날 Michigan의 Grosse Pointe Park라는 곳에 있는 레코드 가게에 두 사람의 강도가 침범했습니다. 한 사람의 강도가 "Nobody move!" "아무도 움직이지마!"하고 고함을 쳤습니다. 이 때 옆에 있던 강도가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소리를 지른 강도는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해서 바스락거린 자기의 동업자의 머리에 총을 쏘아서 죽게 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주님의 일과 세상의 일에 동시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주님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참된 제자는 예수님께서 던지시는 질문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What do you want me to do for you?)에 바르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본문 10: 36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했을 때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던 것처럼, 51절에 바디매오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러나 양쪽의 대답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이 권세를 잡게될 때 한 자리 차지하게 해달라는 청탁성의, 보장된 지위와 영광이었지만 바디매오는 단지 보게 해달라고 주님의 자비를 구했습니다. 거짓된 제자는 주님의 뒤를 따름으로서 어떤 세상적인 영예와 보상을 구하지만 참된 제자는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의 자비를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이미 바디매오 마음 깊은 곳에서 샘물처럼 솟구치는 믿음과 소망을 보셨기 때문에 안수하시거나 큰 소리로 기도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면서 믿음의 결과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음을 확인해주셨습니다. 육신의 눈을 뜬 바디매오는 영적인 눈마저 뜰 수 있었기 때문에 눈을 뜨자마자 길에서 곧바로 예수님의 뒤를 따를 수 있었습니다.


California의 Van Ness Community Church의 Sam Williams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문제를 풀어 주신다."(God doesn't solve problems for us. God solves problems with us.)고 말했습니다. 참된 기적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시는 어떤 초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염원이 있을 때 이미 우리 내부에서 일어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애끓는 소원과 믿음이 있었기에 바디매오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주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는 참제자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제자의 길이 영광이나 특권의 길이 아니라 주님이 걸으시는 길이 때로 가시밭길인 것을 알고서도 그 길을 믿음과 순종으로 기뻐하며 걸을 수 있는 제자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그런 제자가 되어 보지 않겠습니까?

김흥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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