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본문
본문 : 시편 23편 마경훈 목사
본문 : 시편 23편(개역개정)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설교영상보기] [설교 동영상을 보시기 원하시면 [설교영상보기]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본 시에서 두 가지 고백을 합니다. 첫째는 자신은 양처럼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는 확신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받은 사람은 겸손한 것 같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기에 겸손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합니다. 그 말은 자신은 하나님의 양이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 다윗은 풍성한 경제력과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런 부강한 나라의 왕이 자신을 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양은 보잘 것 없는 약한 존재입니다. 양은 대단한 근시입니다. 멀리를 내다보지 못합니다. 단지 눈앞의 것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시냇물을 찾는다든지, 길을 잃었을 때 우리를 찾아 올 수가 없습니다. 양은 철저한 무방비 상태의 동물입니다. 동물들은 저마다 적들로부터 자기를 방어할 수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컹크는 방귀로 자신을 보호합니다. 사슴은 도망을 잘 칩니다. 카멜레온은 보호색이 있어 자신을 잘 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은 그렇지 않습니다. 방어무기가 없습니다. 전혀 무방비 상태의 존재가 양입니다. 양은 방향감각도 없습니다. 미국에서 어떤 사람이 고양이를 자루에 넣어서 삼십 리 밖에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주인보다도 먼저 집에 와 있었다고 합니다. 고양이나 개는 예민한 방향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에게는 그러한 감각이 없습니다. 양은 왔던 길도 못 찾는 우매한 동물입니다. 양은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힘이 없으면 지혜라도 있거나 머리라도 좋아야 살아남을 텐데 양은 다른 동물들과 비교해도 IQ가 낮은 동물입니다. 거기다가 양은 겁이 많은 동물입니다. 사소한 소리에도 놀라서 도망을 칩니다. 양 한 마리가 뛰게 되면 다른 양들은 영문도 모르고 따라서 뜁니다. 얼마나 바보 같은지, 양들이 자나가는 길에 막대기로 낮은 장애물을 만들어놓으면 막대기를 뛰어넘습니다. 뒤에 따라오던 양이 앞에 가는 양을 보고 그대로 따라서 펄쩍 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막대장애물을 치워도 그 따라오는 양들이 영문도 모르고 펄쩍 펄쩍 뛴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1절 말씀으로 풀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1절에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고백합니다.
1. 여호와가 목자가 되시면 내게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가 목자가 되시면 어떤 면어서 부족함이 없습니까?
1) 환경적인 면에서 부족함이 없다.
2절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말합니다. 양에게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는 최상의 환경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후에 에덴이라는 아름답고 풍요한 땅 부족함이 없는 땅을 주셨습니다. 역사의 종말이 오게 되면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거기는 아픔도 슬픔도 눈물도 고통도 괴로움도 없는 완벽한 환경입니다. 역사를 에덴에서 시작하게 하셨고 역사의 종말에 새에덴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사람을 환경적인 면에서도 부족함이 없이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목자로 삼은 사람은 환경적인 회복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참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15살에 기름부음을 받고 약 15년의 고난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을 점점 강성하게 하시면서 그의 모든 환경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환경도 회복시켜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4절의 고백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일이 있어도 환경에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잠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이끌고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을 찾아 일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양떼를 험한 골짜기로 인도해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목자는 언제나 양떼를 안전하게 이끌기를 원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험한 골짜기를 피하려고 애를 쓰지만, 그곳을 통과하지 않으면 푸른 초장에 도달할 수 없을 경우 위험을 무릅쓰고 라도 통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틴의 목자들은 대체로 네 가지를 몸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우선 동물 가죽으로 만든 염낭입니다. 여기에는 자기가 먹을 음식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투석기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다윗이 물맷돌을 던진 바로 그 물 맷돌 투석기입니다. 그리고 막대기와 지팡이입니다.
4절에 보면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한다’고 했습니다. ‘안위한다’는 말은 ‘안심시키다’, ‘위로하다’라는 뜻입니다.
목자가 가지고 있는 긴 지팡이는 길고 끝부분이 구부러져 있어서 양이 골짜기를 지나다가 빠지면 그 지팡이를 양의 목에 걸어서 건져내 줍니다.
목자는 자기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양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피리를 불기도 하고 노래를 하기도 하고 가끔씩 가지고 있는 막대기로 바위를 두들기기도 합니다. 그 목자의 막대기 소리는 양들에게 안도감을 주고 다른 짐승들에게는 위협을 주는 소리가 됩니다. 목자의 막대기 소리가 들리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라도 양은 안 심하고 누울 수 있었습니다. 장소가 좋아서 눕는 것이 아니라 거기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입니다. 시골 할아버지 집은 화장실이 마당 가장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다가 화장실에 가려면 무서웠기 때문에 주무시는 할아버지를 깨웠습니다. 할아버지는 손자가 화장실을 다녀올 동안 당신 방문을 열어두십니다. 문제는 할아버지가 일어나셨고 문까지 열어놓으셨지만 화장실이 십 여 미터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여간 무섭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어린이들은 화장실에는 달걀귀신(?)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약간은 두려운 마음으로 화장실로 향할 때와 화장실에 있는 동안에 할아버지는 '헒'하시면서 헛기침을 해주셨습니다. 그 할아버지의 헛기침 소리를 들으면 무섭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손주가 성공적으로 일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몇 번이고 헛기침을 해주셨습니다.
다윗은 할아버지의 헛기침소리와 같은 막대기 소리를 듣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부족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2) 원수를 만나도 부족함이 없다.
양들은 자신을 보호하거나 적을 공격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목자가 있기에 이리나 늑대가 나타나도 걱정 없습니다. 어떤 적이 나타나도 목자가 지켜주기에 원수를 만나도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목자는 투석기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다윗이 물맷돌을 던져서 골리앗을 쓰러뜨렸던 바로 그 물맷돌 투석기입니다. 양을 헤치려는 원수가 나타나면 목자는 물맷돌을 던져서 적을 물리치고 양을 보호합니다.
목자가 가지고 다니는 막대기는 나무로 만든 곤봉에 철을 입힌 것입니다. 이것은 들짐승이나 도적들과 싸울 때 사용했습니다. 목자가 양을 보호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다윗을 보호하시기에 다윗에게는 어떤 원수가 있어도 부족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5절을 보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리시고 기름을 머리에 발라주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상'은 침상과 밥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상을 베푼다는 것은 잔치를 베풀어준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원수의 눈앞에서도 잔칫상을 받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복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원수의 앞에서도 음식을 먹고 잠을 잘 수 있다면 얼마나 안전합니까? 거기다가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신다고 했는데 이 말은 원수 앞에서 높여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근동 지방에서 손님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일은 그 손님을 귀한 손님으로 영접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원수 앞에서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시니 하나님이 나를 높이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원수 앞에서도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3) 앞으로도 계속해서 부족함이 없다.
다윗은 이 시를 지을 때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평생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자신을 따를 것이고 또 영원토록 하나님의 집에 살게 될 것을 선포합니다.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목자로 삼은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기대감으로 미래를 맞이합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목자로 삼은 사람들은 행복한 것입니다.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연합군은 집 없는 아이들을 모아 커다란 캠프 안에서 함께 살도록 했습니다. 거기서 아이들은 배불리 먹었고 안전하게 보살핌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이들은 밤이면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어느 심리학자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습니다. 아이들이 침대 속에 들어간 후에 각자가 손에 쥐수 있는 있을 빵을 한 조각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것은 먹으라고 준 것이 아니라 그냥 손에 들고 있도록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그마한 빵 한 조각이 놀라운 효과를 가져 왔습니다. 아이들은 내일 먹을 것이 있다는 안도감에서 평안히 잠들었던 것입니다. 내일 먹을 것을 염려해야만 했던 이 아이들이 내일 염려를 해결 받았을 때 비로소 평안히 잠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전쟁고아들만의 심리 상태이겠습니까? 이것이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한 아들이 노모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중얼중얼 합니다. “우리 집은 망했어요. 이제 모두 굶어 죽을 것 같아요.” 밤에도 자지 않고 걱정만 했습니다. 이제 곧 망한다는 생각에 식사도 거부하고 방에 불도 켜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실 이 할머니는 재산도 많고 자녀들도 다 훌륭하게 양육시켰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이상한 증세를 보이자, 그 아들은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곳간에 쌀을 많이 쌓아놓고, 드실 것도 풍족하게 갖다 놓았습니다. “어머니, 이 광에 쌀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것 다 먹으면 어떻게 하지? 이제 우리는 곧 굶어죽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정신과 병원에서 진찰을 받게 했더니 노인성 우울증 환자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현재의 목자만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여러분의 평생에 아니 영원토록 목자이십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삼아서 영원토록 부족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2. 여호와를 목자로 따르는 양의 생활은 어떠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다윗의 목자이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사 40: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고 말씀합니다. 이 선한 목자의 이미지는 신약에서 예수님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양인 우리들이 목자의 인도함을 잘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가야 합니다.
전남 순천에 참 존경받는 목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이 여순 반란 사건 때 순천에 있다가는 잡혀 죽을 수밖에 없어서 순천에서 조금 떨어진 별량이라고 하는 곳에 가서 숨어 지내다가 그 동네 공산당원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순천 사람인지라 순천으로 보내졌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데 불안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니 독 안에 든 쥐 꼴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반란군 장교 하나가 들어오더니 여기 예수 믿는 놈 있으면 나오라고 소리칩니다. 처음엔 아무도 손을 못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가만히 보았더니 자기 교인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치미를 떼고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신앙 양심의 가책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데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다고 하면 당장에 죽을 형편이었기에 꾹 참고 있었습니다. 장교가 나가더니 한참 있다가 다시 들어 왔습니다. “여기 목사 놈 있으면 나와” 라고 거듭 소리칩니다. 그 당시 순천에는 목사님은 그 목사님 한분 밖에는 없었습니다. 분명히 자기를 두고 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렇지만 손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마음속으로 “이놈아, 너 목사가 아니냐. 바로 너를 부르는 소리 아니냐. 왜 그렇게 목사가 아니라고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느냐. 손들어”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 목사님은 견디다 못해 “내가 목사요” 하고 손을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장교가 목사님의 목덜미를 잡고는 “이 반동은 괴수니까 내가 직접 처리할테니 너희들은 가라”며 다른 사람들을 못 다라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을 산기슭으로 끌고간 장교는 공포탄만 쏘고는 목사님에게 “목사님! 빨리 도망가십시오. 내가 어떻게 하다가 지금은 이렇게 됐는데 사실은 내 아버지, 어머니도 다 예수 믿습니다. 나도 주일학교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듣자하니 순천 지방에서 유명한 목사님이 잡혀 왔다고 하길래 살려 주려고 ‘믿는 사람 나와라’ 해도 안 나오고 ‘목사 나와라’ 해도 안 나오니 참 답답했습니다. 마지막에라도 손을 들어줘서 감사합니다. 내가 내 손에 권세가 있을 때 돕는 길은 이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빨리 도망가십시오.” 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살아났습니다. 그 목사님이 바로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까지 지내신 나덕환 목사님이십니다.
만약 나덕환 목사님이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불순종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목사님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양은 목자의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가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만약에 양이 목자의 음성을 불순종하고 다른 길로 가면 어떻게 될까요? 들짐승들의 밥이 되든지 아니면 목자에게 혼이 날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스위스를 여행하다가 양무리가 있는 한 목장에 들르게 되었다. 목장안을 거닐다가 그 부인은 목자가 양무리에 둘러싸여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목자 옆의 건초더미 위에는 병이 난 듯한 양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궁금하게 여긴 부인이 가까이 가서보니 양은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부인은 그 양이 매우 불쌍하게 생각되어서 어떻게 하다가 양의 다리가 부러졌는지 목자에게 물어보았다. “제가 부러뜨렸습니다.”라고 목자는 슬픈 표정으로 말하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제 소유의 양떼 중에, 이놈이 가장 속을 썩이는 양이었지요. 이 녀석은 제 말에 순종하지도 않았고 양떼를 이끌고 갈 때에도 따라 오지를 않았어요. 몇 번인가 위험한 벼랑 끝까지 가서 헤매고 있길래 구해온 적도 있습니다. 게다가 이 녀석은 자기만 불순종할 뿐 아니라 다른 양들까지도 길을 잃게 만들지 뭡니까? 저는 이런 양을 많이 겪어봐서 압니다만, 다른 대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놈의 다리를 부러뜨렸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먹이를 주려고 하니까 이놈이 날 물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한 2,3일 혼자 누워 있게 내버려 두었다가 찾아가 보니 녀석의 태도가 아주 달라져 있었어요. 이 녀석은 열심히 먹이를 먹을 뿐 아니라 내 손을 핥으면서 복종하고 사랑한다는 표시를 했답니다. 제가 장담하건대, 이제 이 양이 건강해지면 모든 양떼 중에서 최고로 모범적인 양이 될 것입니다. 전에는 다른 양들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주었지만, 이제는 헌신과 순종의 모범이 될 것입니다. 이 망나니 양의 삶이 완전히 변화된 것이라고나 할까요? 이 양은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게 된 겁니다.”라고 하더랍니다.
2) 목자의 우리에 거해야 한다.
6절에서 다윗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살리로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는 직역하면 ‘돌아가리로다’라는 말입니다.
목자는 날이 어두워지면 양떼가 들짐승들의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 집어넣습니다. 목자는 양의 문에 지팡이를 가로질러 놓습니다. 그러면 양들이 그 밑으로 한 마리씩 지나갑니다. 그 때 목자는 양의 숫자를 헤아리고 또 하루 동안 다친 데는 없는지 무슨 문제는 없는지 살펴봅니다.
양은 저녁이 되면 목자의 우리에 거해야 합니다. 만약 목자의 우리에 들지 못한 양은 들짐승의 밥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는 찾도록 찾아다닙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은 이 땅에 목자의 양 우리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영원한 세계에서 목자의 양 우리는 천국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는 교회에 거해야 하고 죽어서는 천국에 거해야 합니다.
양은 언제나 목자 앞에서 삽니다. 이것이 양이 사는 방법입니다. 사자나 늑대는 짐승을 잡아먹고 살고, 소나 나귀는 일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양은 목자를 보고 삽니다. 양이 사는 방법은 목자밖에 없습니다. 목자이신 주만 바라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