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맛없게 식사하는 사람들
본문
출12;8
사람들은 맛을 찾아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기도 합니다. 산속이고 바닷가이든지 맛있는 집은 손님들이 바글바글합니다.
그러나 일부러 맛없게 식사하여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매일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주식은 빵입니다. 그런데 맛없는 빵 무교병을 그것도 설탕이나 꿀을 발라 먹는 것이 아니라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그러나 일부러 맛없게 쓰게 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음식의 궁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음식과 그 음식을 같이 먹으면 써너지 효과가 있어서 더욱 좋습니다. 예를 들면 돼지 고기를 먹을 때에는 새우젓과 같이 먹는 것이 좋습니다.
닭고기를 먹을 때에는 대추와 함께 먹으면 훨씬 영양가가 좋습니다. 삼계탕속에 들어 있는 대추를 먹는 것이 좋으냐 안 먹는 것이 좋으냐를 물은 사람이 있습니다.
<대추는 닭속에 있는 안 좋은 요소를 흡수하라고 넣은 것이기에 같이 끓인 대추는 안 먹는 것이 좋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대추를 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추는 삼계탕에 들어가는 인삼과 마늘의 강한 기운을 완충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나쁜 요소를 빨아내는 것은 아니기에 먹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음식에는 철학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추석에는 송편을 먹습니다. 설에는 떡국을 먹습니다. 노총각이나 노처녀에게 <국수 언제 먹어?>라고 물으면 결혼 언제 할 것이냐는 이야기입니다. 미국은 추수감사절이면 터키를 먹습니다.
이스라엘은 설이면 꿀과 생선 머리를 먹습니다. 그리고 서로 서로 <싸나 토바>라고 축복합니다. <꿀같은 한 해가 되기를...>이라는 축복입니다.
유월절이면 무교병을 쓴 나물과 함께 먹습니다.
이같이 같이 먹으면 좋은 음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교병은 쓴 나물과 함께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의미는 무엇일가요? 일부러 맛없게 음식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맛없는 음식입니다. 세 가지 면에서 맛없는 음식입니다.
(1) 무교병은 밀가루만입니다. 효소가 없습니다. 맛이 없습니다.
(2) 쓴 나물을 같이 먹어야 합니다. 씁니다.
(3) 일주일 7일을 계속 먹어야 합니다. 나는 유월절에 이스라엘에 들어간 것이 세 번이었습니다. 세 번을 모두 무교병과 쓴 나물만 먹었습니다. 한 끼 먹기도 힘든 음식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무교병만 먹고 쓴 나물을 같이 먹어야 합니다. 일부러 음식을 맛없게 먹는 기간입니다.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출12;8)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도 유월절을 지키면서 무교병을 먹습니다. 그런데 무교병을 먹을 때에는 반드시 쓴 나물과 함께 먹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쓴 나물은 어떤 것입니까? 먹어서 쓴 나물은 어떤 것이든지 상관없습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쓴 상치나 씀바귀 또는 고들빼기라는 채소가 좋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통 파슬레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될 수 있는 대로 쓴 것일수록 좋습니다.
무교병은 쓴 나물과 함께 먹으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가요?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전5;7-8)
믿음의 사람들은 무교병입니다. 누룩없는 떡입니다. 누룩은 악의 상징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닦았기에 누룩없는 무교병이 된 것입니다.따라서 예수 안 믿는 이들은 아직 누룩을 닦지 못 한 누룩있는 떡 즉 유교병입니다.
우리 무교병은 늘 쓴 나물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무교병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쓴 나물을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쓴 나물을 먹으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1. 일부러 쓴 말도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교병된 성도는 쓴 말을 먹을 줄 알아야 합니다. 살아가다 보면 좋지 않은 소리를 들을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참고 그런 말도 먹으라는 말입니다. 무교병된 우리는 쓴 나물과 섞어 먹어야 합니다.
다윗 왕과 헤롯 왕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헤롯은 자기 동생을 죽이고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지적하였습니다. 마땅히 책망받아야 마땅하였습니다. 그런데 헤롯왕은 세례요한의 목을 잘랐습니다. 쓴 말을 먹지 못 하고 뱉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부하 장군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와서 지적하였습니다. 다윗왕 선지자의 쓴 말을 잘 받아 드렸습니다. 침상이 눈물에 젖도록 울며 회개하였습니다.
다윗왕은 쓴 말을 잘 받아 먹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역사상 가장 큰 왕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다윗 왕이 쓴 말을 잘 먹는 대표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4편에서 말했습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 지어다>(시4;4)
이 말을 다윗이 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떨며 범죄하지 말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가요? 떨며라는 말은 <라가즈>로 되어 있는 데 <분노하며>라는 의미입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에 죄짓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이 때에는 누워서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 지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기드론 시내를 넘어 압살롬의 공격을 피하여 도망하면서 지은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이런 싯귀절이 나오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시므이가 따라오면서 다윗왕을 향하여 저주하였습니다.
<피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삼하16;7-8)
이 말을 들은 아비새 장군이 왕에게 물었습니다.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정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이 때 다윗왕은 화가 치밀때 범죄치 않았습니다.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 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내 몸에서 난 내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날 그 저주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16;10-12)
그런데 그 다음이 더 은혜롭습니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니까 시므이도 그만 둔 것이 아닙니다. 시므이는 <산비탈을 따라 가면서 저주하고 저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더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 다윗의 자세를 보십시다.
<왕과 그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곤비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삼하16;14)
시므이가 그렇게 화가 머리끝까지 나게 할 때 누워서 쉬면서 다윗은 이 말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 지어다>(4)
다윗에게는 이렇게 하는 것이 화를 푸는 가장 좋은 비결이었습니다.
화날 때 범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알렉산더 왕은 술에 만취된 후 억제할 수 없는 홧김에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에게 창을 던져서 죽였습니다. 화날 때 참지 못 하는 것은 죄입니다.
화가 날 때에는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며 잠잠하면 하나님께서 다 해결시켜 주심을 다윗은 누누히 경험하였습니다.
나중에 다윗은 압살롬으로부터 승리하고 시므이로부터 승리하였습니다.
쓴 말을 먹을 줄 알았던 다윗은 승리하였습니다. 마지막 웃음이 참 웃음입니다. 끝에 가서 이기는 것이 정말 승리한 것입니다. 무교병인 성도는 좀 괴로운 말을 들어도 씹어 먹을 줄 알아야 합니다.
2. 일부러 쓴 결단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이기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안 되는 것은 조금도 양보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내게 손해가 나면 한 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습니다. 각박한 세상입니다. 이런 생존경쟁속에서도 양보할 줄 알고 손해볼 줄 알면서도 그런 방향으로 결단할 수 있다는 것은 무교병된 성도들의 특징입니다. 그 극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이 땅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구름타고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4-8)
예수님의 승천을 보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500명이었습니다. 그러나 380명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120명은 쓴 결단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도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성령받을 때까지 기도하기로 하였습니다. 10일동안 기도만 하였습니다. 드디어 모두 성령을 충만하게 받고 불붙는 사명자들이 되었습니다.
쓴 결단을 한 이들이 무엇인가 큰 일을 이루어냈습니다.
내가 번역한 미드라쉬 이야기 하나를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70명의 장로들을 임명하라고 하셨습니다. 60명을 임명하라고 하면 간단하였습니다. 12지파에서 5명씩 임명하면 60명이 됩니다. 72명을 임명하러고 하면 핮 지파에서 6명씩 임명하면 공평하였습니다. 그러나 70명을 임명하여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한 지파에서 공평하게 6명씩을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보니 모두 72명이었습니다.두 명을 빼야 하는 데 어떻게 뺄 지 모세는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제비뽑기를 생각하였습니다. 제비를 모두 72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70장에는 <장로>라고 쓰고 나머지 두 장은 백지로 두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한 장씩 뽑아 두 명을 장로의 반열에서 빼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72명을 모아 놓고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우리 민족의 장로들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72명이라 두 명이 빠져야 합니다. 이 제비에 백지가 두 장 있습니다. 백지 제비를 뽑은 이는 장로의 반열에서 빠져야 합니다.>
모세가 이렇게 말할 때 두 명이 모세앞으로 나왔습니다. 엘닷(Eldad)과 메닷(Maidaa)라는 이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둘은 장로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제비를 뽑을 자격조차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70명을 모두 장로로 임명하시면 편하실 것입니다.>
모세는 베비뽑을 필요가 없이 마음이 편하여졌습니다. 모세는 장로들을 임명하고 백성들 앞에 세웠습니다.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예언자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모세만큼 위대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모세는 위대한 등불이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등불이 더 생긴다고 할 지라도 모세의 등불을 약화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장로들이 임명되는 순간에 엘닷과 메닷에게는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강력한 예언의 영이 두 사람에게 임하였습니다.
<모세는 죽게 될 것이고 그 뒤를 이어서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될 것이다.>
이런 예언의 음성을 들은 두 명은 곧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게르손이 성막으로 달려갔습니다. 모세가 일하고 있었습니다. 게르손은 모세에게 말했습니다.
<엘닷과 메닷이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성막으로 오지도 않았는 데 하나님이 예언의 영을 주셨습니다.>
여호수아도 이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모세님! 그들을 감옥에 넣습니다. 그들의 말은 거짓 예언입니다. 마귀가 준 예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조용히 여호수아에게 말했습니다.
<내게 죽을 것이라고 예언하였기 때문에 속상해 하지 말아라. 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예언의 영을 준 것을 믿는다. 나없이 너희들은 이스라엘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인격입니까?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70장로들은 장로가 된 그 날 하루만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예언의 영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엘닷과 메닷은 죽기까지 예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실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고하고 백성의 장로 칠십 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그 녹명된 자 중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에 머물고 회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신이 임하였으므로 진에서 예언한지라.
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엘닷과 메닷이 진 중에서 예언하더이다 하매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가로되 내 주 모세여 금하소서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11;24-29)
남을 높이고 양보할 줄 알았던 멜닷과 엘닷은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일생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낮고자 하는 자는 높아 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무교병된 성도는 쓴 결단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극치를 이루었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여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그 무교병의 극치입니다.
우리는 일부러 쓴 결단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교병은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 합니다. 무교병인 우리는 일부러 쓴 나물을 맛없게 먹을 줄 알아야 합니다.
지난 번 뉴욕 집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스텐튼 아일렌드 교회입니다. 김 정식 목사님이 목회하고 계신 계십니다. 그는 아스토리아 교회를 10년 섬기던 평신도였습니다. 그는 10년을 한결이 한 일이 있습니다. 주일 낮 예배를 마치고 다른 이들은 골프장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아니면 밀렸던 자기 일을 합니다. 그러나 김 정식 목사님은 혼자 교회에 남아 교회 청소를 다 하고 집으로 돌아 갔습니다.
김 성남 목사님이 그 성실에 감탄이 되어 그를 신학교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목사를 만들었습니다. 김 정식 목사는 지금 그 때문에 목사가 되어 목회를 잘 하고 있었습니다. 쓴 일을 하기로 결단할 줄 아는 이가 바로 무교병입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지금 인질로 잡혀 있는 이들은 이중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탈레반들의 위협의 공포입니다. 또 하나는 국내에서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공격입니다. 매일 수 천명이 비난의 글을 인터넷에 올리고 있습니다.
<가자 말라는 데 왜 가서 우리를 괴롭히느냐?>
<돈으로 타협하고 가족이 돈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정말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전하러 간 것입니다. 지난 주 예배드리는 시간에 정확하게 11시 50분 그러니까 5만 교회 예배가 끝날 즈음에 벼락이 14000번 쳤습니다. 5명이 죽었습니다.
틀림없이 예수 안 믿는 이들입니다. 산위에서 그랬습니다. 예수 믿는 이들이 산위에 그 시간에 있을 리가 없습니다.
예배 성공이 인생의 성공입니다. 무교병은 쓴 나물과 함게 먹어야 합니다.
3. 일부러 쓴 사람과도 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습니다. 그러나 무교병인 성도들은 누구나 다 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원수도 사랑할 수 있어야 무교병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유교병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무교병입니다.
싫어하지만 극단적으로 그를 사랑하였던 극치의 사람이 있습니다. 스데반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싫은 사람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겨운 사람을 위하여서도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일부러 맛없게 음식을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처음에 성막을 만들었을 때였습니다. 모 신문사 가자가 나를 사설에서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강 문호 목사는 대답하라. 왜 기독교 시대에 유대교를 말하느냐? 왜 예수 피 시대에 짐승피를, 복음시대에 율법을, 교회 시대에 성전을 강의하려느냐? 왜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고 있느냐?>
두 세 번 저를 신랄하게 공격하였습니다. 나는 그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성막이 복음의 뿌리임을, 교회의 기초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는 나의 팬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자양동으로 이사왔을 때 제일 먼저 찾아 온 기자가 그 분입니다.
무교병은 쓴 사람과도 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게에서 제일 많이 보는 잡지는 <Times>지입니다. 저는 정기독자입니다. 타임지를 창간한 이는 루스 목사 아들 헨리 루스입니다. 루스 목사님은 평생동안 선교사로 활동하였습니다. 아들 헨리는 아버지와 연락이 없었습니다. 가정에 관심도 없었습니다. 미운 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을 나간지 10년만에 아버지에게 이런 편지가 왔습니다.
<아버지! 잡지를 만들고 싶으니 아버지가 구할 수 있는 만큼 돈 좀 구해 보내 주세요.>
한심하였습니다. 밉기 짝이 없었습니다. 싫었습니다. 그러나 구할 수 있는 만큼 구한 돈이 600불 그러니까 60만원 정도였습니다. 보내 주었습니다. 이 돈으로 창간한 잡지가 타임지입니다. 독자가 1000만명 가량 됩니다. 매월 100억 이상의 흑자를 내는 잡지가 되었습니다. 그 후 헨리는 라이프(Life)지, 포춘지(Fortune)를 창간하여 잡지의 왕이 되었습니다.
<미워도 다시 한번.>
우리는 사람의 쓴 나묻도 먹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일부러 쓴 사람과도 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남편을 처음 교회에 데리고 간 날 목사님의 설교가 <원수도 사랑하라>였습니다. 돌아 와서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오늘 목사님 설교는 감명깊었어요.>
<무슨 말씀에요?>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요.> <그래서요?>
<나 원수를 다시 사랑하기로 하였어요?>
<당신 원수가 누구요?>
<술>
이런 것은 원수가 아닙니다.
싫은 사람과도 교제할 수 있어야 쓴 나물을 먹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무교병입니다. 무교병은 쓴나물과 같이 먹어야 합니다. 일부러 맛없게 음식을 먹으라고 하나님은 명하고 계십니다.
1. 일부러 쓴 말을 먹을 줄 알아야 합니다.
2. 일부러 쓴 결단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3. 일부러 쓴 사람과도 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장 깨끗한 무교병은 예수님이십니다. 흠이 한 점도 없으신 분이십니다.가장 쓴 말을 가장 많이 삼키신 이도 예수님이십니다. 가장 쓴 결단을 하시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머리 둘 곳이 없도록 고통을 당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수많은 반대자들과 교제하시면서 그들은 구원하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직전까지 그렇게 하셨습니다.
두 강도가 처음에는 모두 예수님을 비방하였습니다(마 27;44) 그러나 예수님은 참으시고 받아 드리셨습니다. 드디어 한 강도가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고 죽었습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오직 영혼구원을 위하여 쓴 나물을 다 드셨던 주님이 우리의 신앙 모델입니다.
강문호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