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과 해석이 중요합니다/창45:1~8/2007년 8월 12일 주일설교 > 설교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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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과 해석이 중요합니다/창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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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과 해석이 중요합니다. 창세기45:1~8 2007년 8월 12일 장안중앙교회 주일 낮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 2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설교: 영동 고속도로 강릉을 가다가 새말을 지나 좀 더 가면 오른쪽에 민족사관 고등학교라는 간판이 있습니다. 이 학교는 과거 파스퇴르 우유 회사를 만들었던 최명재 이사장이 사재를 더 털어 세운 학교입니다. 이 학교는 민족주체성 교육과 영재 교육을 목표로 세운 고등학교입니다. 최 이사장은 역사를 민족사관으로 보는 민족주체성 교육이 필요하다고 보고 영재교육을 통해 각계각층의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그 학교를 세웠다고 합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데는 사관(史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관을 갖느냐에 따라 역사가 달라지고 해석이 달라집니다. 제 나이 또래 또는 저보다 연배 되신 분들, 초등 중등 학교교육을 받은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조선 역사를 공부하면서 당파 싸움을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습니까? 노론 소론, 북인 남인 하면서 조선역사가 당파싸움 일색으로 사람들 이름 외우느라 얼마나 고생들을 했습니까? 그런 교육은 식민시관의 결과였습니다. 일제가 우리 민족사를 해석하면서 처음부터 끝가지 이렇게 정쟁싸움하다 망한 나라로 인식하게 하기 위해 그런 역사관을 주입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그것인 진짜 조선역사의 전부인 줄 알고 그러니 조선이 일제에 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인식하게 되었고 결국 우리나라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식민사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역사를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해석은 다른 것입니다. 같은 사건인데 그 사건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냐에 따라 그 해석을 달리할 수 있고 그 해석이 올바르면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사건에 대한 시각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 해석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 애굽에 끌려 왔습니다. 그 요셉은 애굽의 임금 바로왕의 경호 대장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자그마치 10년이 넘도록 갖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집에 총무가 되어 있다가 어느 날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거기서도 적어도 2년 이상 무진 고생을 하며 죄수생활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애굽의 왕이 꿈을 꾸었는데 그 해석을 요셉이 하게 되고 그 결과 하루아침에 요셉은 대 애굽 제국의 총리로 세워집니다. 그러고 나서 7년 풍년과 흉년 2년, 약 9년쯤 되었을 때 형들이 애굽 땅에 양식을 사러 왔습니다. 노예와 죄수로 13년, 총리로 9년, 약 22년의 긴 세월동안 그는 힘들고 어려웠던 고난을 잘 견디어 냈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오랜 세월을 성실하고 인내심 있게 살아왔을까요? 인간의 혈기로나 감정으로 사건을 바라보고 해석했다면 요셉은 형들을 만나자 마자 곧바로 복수를 했어야 합니다. 아니 총리가 되자마자 가나안땅을 찾아가 형들을 잡아 복수를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고나서 9년 동안 참고 기다렸습니다. 왜요? 그에게는 지나온 과거에 대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시각이 있었고 그에 따른 믿음의 해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지나온 과거에 대한 시각과 해석이 다르면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족이나 장애로 무척 힘들게 살아왔던 과거를 가진 사람도 그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면 해석이 달라집니다.
어느 믿음 좋은 성도 가정에 뇌성마비 장애 아동이 태어났습니다. 서울에 일류대를 졸업하고 남부럽지 않게 행복한 믿음의 가정을 꾸려 왔는데 그 가정에 첫 아들이 장애 아동이었습니다. 그 일로 가족 식구들이 충격을 받고 부인은 교회도 출석하지 않게 되고 부부 사이는 심각한 갈등과 아픔이 생겼고 그 아이를 치료하느라 재산도 다 날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이 그 가정을 심방하여 위로를 베풀고 권면을 했습니다. 그때 그 부인이 목사님께 울면서 물었습니다. “왜 내 아이가 장애 아동이어야 합니까?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요?” 그때 목사님이 그에게 답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아이를 세상 어느 가정에 맡길까 찾으시다가 그래도 믿음이 좋은 집사님 집에 맡기면 잘 길을 것 같아 맡기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로 양육하시고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했답니다. 그때 그 부인 집사님이 엉엉 울면서 시각이 바뀌었습니다. 이제까지 자기나 자기 남편이 무슨 죄가 있어 그랬는가 하며 죄책감속에 괴로웠는데 이제 시각이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맡기셨다. 그래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양육하자” 하고 삶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같은 일, 같은 사건을 가지고 시각과 해석이 어떠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어떤 시각과 해석을 해야 할까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리 성도에게는 만사를 믿음의 시각과 믿음의 해석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을 영적 시각과 영적 해석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습니다.
영적 시각과 영적 해석을 가지려면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요? 1.성경 중심의 시각과 해석이 필요합니다. 요셉은 13년의 고난과 역경 끝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런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무엇으로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어릴 적 하나님이 그에게 주셨던 꿈을 통한 계시 덕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언약이었습니다. 한번은 꿈을 꾸었는데 밭에서 형들과 함께 곡식을 묶는데 형들의 곡식 단이 요셉의 곡식 단을 둘러서서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꿈을 이야기 했다가 형들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또 다시 꿈을 꾸었습니다. 해와 달과 열한별이 요셉을 향해 절을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을 부친에게 고했더니 호되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리고는 지나쳤으나 요셉은 그 꿈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분명한 하나님의 언약이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온갖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참고 인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런 고난이 나를 연단하고 성장시켜 언젠가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 질것이다.” 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내려온 언약, 그 약속을 철저히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을 믿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경의 약속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 질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 약속이 내 삶속에서 그대로 성취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성경을 날마다 묵상하고 성경에서 하나님이 내게 약속하시는 언약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장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묵상하고 성경적 관점에서 내 문제를 바라보고 해석하면 하나님은 놀라운 복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2.내 중심이 아닌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을 바라볼 때 나중심의 시각으로 나중심의 해석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12명이 가나안땅을 정탐하고 돌아왔을 때 왜 10명과 2명의 보고가 정반대로 다른 의견을 내어 놓았을까요? 이유는 가나안 땅을 보는 시각의 차이입니다. 10명은 이스라엘 백성의 시각에서 가나안땅을 보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예측하고 가나안땅 정복에 대해 부정적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2명,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보는 시각이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고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허락해 주셨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히 이길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시각이 다르면 삶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번 아프간 인질사태도 세상 사람들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가를 보세요. 그리고 어떤 시각으로 해석을 합니까? 개인의 이익과 불이익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불신자들이 보는 시각과 우리가 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아니 달라야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그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이 보시는 시각으로 문제를 보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루시고 자하는 그 뜻을 올바로 해석하길 원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인줄 알지 못하면 우리의 시각과 해석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 개인의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형들이 자기를 노예로 팔고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13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고 억울한 누명으로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원한으로 품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있는 것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을 보세요. 5절을 다 같이 봅시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당신들이 나를 팔았다고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하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만사를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사관입니다. “역사의 주장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내 생명과 내 인생을 주관하신다.” 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요셉에게 있었기에 그토록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과거를 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힘들고 억을 했던 과거가 있습니까? 도저히 용서 못할 과거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중심으로 그 사건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은 그리하셨을까? 왜 하나님은 나를 그렇게 힘들게 놔두셨을까?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 시각으로 그 사건을 해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용서할 수 있고 그러면 내가 자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소아마비 장애를 가졌습니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첫돌 되던 달, 걸음마를 할 무렵에 소아마비를 앓았습니다. 그 일로 저는 어린 시절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아픔도 많았고 힘든 일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과거를 돌아봅니다. 왜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두셨을까요? 하나님 입장으로 생각을 해보면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예수 믿게 하는 도구가 되게 하셨고 그 일로 나를 오늘의 나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말씀드렸던 체력장 시험 사건도 나를 지방대학으로 내려 보내 거기서 예수를 영접하게 하신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연처럼 보인 사건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신 일들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경에도 그런 사건들이 매우 많이 있습니다. 롯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와 베들레험에 머물게 됩니다. 거기서 시어미를 봉양하느라 보리이삭을 줍다가 보아스를 만납니다. 그 사건이 인연이 되어 그들이 결혼을 하게 되고 그 둘 사이 후손으로 다윗이 탄생한 사건을 어지 우연이라 할 것입니까? 세밀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된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성도는 매사를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아야 하고 그 사건을 해석해야 합니다.    3.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사역에 저와 여러분을 참여 시켰고 그 일을 우리는 지금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 우리가 믿음생활을 잘 해야 할 이유는 우리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는 그 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셨고 그 교회 안에 저와 여러분을 세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영혼구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일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자기를 애굽에 보내신 이유를 알았습니다. 7절~8절을 보세요.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이 고백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1)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을 구하시려고 요셉을 애굽에 먼저 보낸 것이고 2)그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고 요셉에게 그 나라를 다스릴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여기 요셉은 마치 예수님과 같습니다.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할일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그러기에 요셉의 말처럼 요셉이 애굽에 오게 된 것은 형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이용하여 그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이 시기 질투해서 못 박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 하옵소서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도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를 하나님 나라와 구원 역사로 보면 은혜가 됨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번 아프간의 성도 억류 사건도 그냥 이루어진 사건은 아닙니다. 이 사건도 하나님 나라와 구원역사에 아주 중요한 사건이고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엄청난 일을 이룰 것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성도가 이런 영적 시각과 해석을 가지면 어떤 결과가 찾아올까요? 1. 우리가 겪는 고난의 이유를 알게 됩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 닥칠지라도 그 고난의 이유를 알게 되고 거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됩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보디발 장군의 부인이 그를 유혹했으나 그는 청결한 믿음으로 그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그런데 대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행입니다. 미치고 환장할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감옥에서 여러 정치인들을 만납니다. 비리 정치인의 결말이 어찌되는지 나라는 어떻게 다스리는지, 사람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다 배우게 됩니다. 결국 그곳은 감옥이었으나 요셉에게는 정치를 가르쳐 준 학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있어서 만난 사람이 연결되어 왕과 연결 되었고 어느 날 하루아침에 애굽의 총리가 되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고난당할 당시에는 이유를 모릅니다. 고난 당시에는 그 사건이 해석이 안 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면 하나님이 그 이유를 알게 해주십니다. 그러기에 성경적 시각과 해석이 중요한 것입니다.     2.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성경적 시각과 해석을 가지면 결국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알게 되기에 어느 누구도 용서하고 사랑으로 끌어않을 수 있게 됩니다. 요셉에게 형들은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고 그 사간을 해석하는 관점이 다르니 다 용서를 합니다.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임을 알게 되니 다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사건을 상상해 봅니다. 요셉이 국무총리 되었을 때 취임식을 했을 것입니다. 그때 만조백관들이 다 모였을 것입니다. 그때 보디발 장군도 머리를 숙였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 그 부인이 나왔는지 모르지만 그가 나왔다면 얼굴이 어떤 모습일까요? 아마 새파랗게 질려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보디발 부인은 아마 나는 죽었구나!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요셉이 그 보디발 집에 한번쯤은 행차를 했을 것입니다. 그때 그 얼굴을 상상해 보세요. 그러나 아마도 요셉은 한번 윙크 하고 웃고 지났을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3. 하나님이 쓰시는 일군이 됩니다. 성경적 시각을 갖고 성경적 해석을 하게 되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사람이 됩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어찌 그냥 두시겠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셨을 때 사람들은 그를 누구라 했습니까? 요한복음7:42를 보세요.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하며 기적을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합니다. 그들의 시각 관점은 육신의 시각입니다. 그들의 해석도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은 그를 다른 시각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66절에 보면 제자 중 많은 수가 물러갑니다. 아예 떠나 버려 다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요한복음 6:67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그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성도 여러분! 왜 베드로가 수제자인줄 압니까? 질문에 항상 먼저 대답하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항상 먼저 나섭니다.
68절 그의 위대한 고백을 보세요.  68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 로 가오리이까? 69절/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올바로 바라본 시각,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바라보고 그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고 따르니 주님은 그들을 사도로 세우고 위대한 일꾼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건은 매일 매일 일어납니다. 그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그 사건을 해석하는 우리의 견해가 문제입니다. 육신의 시각 육신의 해석이 아닌 성경적 시각과 성경적 해석이 이루어지면 여러분의 삶은 복되고 놀랍게 들어 쓰임 받는 삶이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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