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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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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마가복음 5:35-43
우리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공포의 대상은 바로 죽음입니다.
따라서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자는 어느 누구도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구원자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말로 죽음의 공포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영생의 소망을 안겨주신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를 믿으면 영원한 죽음에서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12살 먹은 야이로 회당장의 딸이 죽다고 했고, 예수님께서는 죽은 그 소녀의 곁에 오셔서 “달리다굼” 이 한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 “달리다굼”라는 말은 “작은아이야 일어나라”는 뜻인데, 예수님의 이 말씀과 함께 죽었던 이 어린 소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서 다시 일어설 기력없이 주저앉아 절망하고 좌절하는 하는 인생을 얼마든지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사회적 갱신이 아니라, 생명의 기적이 일어나는 예수의 음성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작은아이야 일어나라”는 예수님의 이 음성을 듣는 자마다 누구든지 절망의 자리에서, 좌절의 자리에서, 실패의 자리에서, 근심걱정의 자리에서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적이 나의 삶 속에서도 일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1.문제를 가지고 예수 앞에 나올 줄 알아야 합니다.
22-23절을 읽겠습니다.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우리는 이스라엘의 회당이 단순한 종교적 기능만을 가진 곳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회당은 그들의 삶의 중심에 있었던 기관으로서, 종교적 기능도 수행되었지만 학교역할도 했고 심지어 재판소 역할도 했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판결을 내리는 재판관과 비슷한 역할까지 회당장은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당장에게는 사회적 명예가 있었고, 사회적 존경이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정도의 신분을 가진 사람이 예수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예수는 아직 사회적으로 공인되지 못한 젊은 예언자로서, 어떤 이단의 교주처럼 취급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2절을 보면, 이 회당장이 그냥 예수를 만났다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라고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를 찾아와 그 발아래 엎드렸을까요?
아마 그는 사랑하는 어린 딸을 살리기 위해 자기의 경제력, 혹은 지위를 가지고 별별 노력을 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릴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죽어가는 어린 딸을 살리기 위해 예수를 찾아와 그 발아래 엎드렸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보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질병의 고통이나 실패나 걱정근심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회당장이 어린딸로 인한 고통이 없었다면 예수 앞에 나왔겠습니까?
아마 우리 가운데도 질병이나 경제적인 고통이 없었다든지, 인생의 역경이 없었더라면 예수 앞에 나올 수 없었던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을 건설한 청교도들은 고통이나 역경을 가리켜서 “변장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고통이, 이 역경이 이 회당장을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사회적 신분과,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겸허하게 나사렛 예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에수의 발아래 엎드려서 어떻게 했습니까?
23절을 읽겠습니다.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여러분, 다급하게 소리치고 부르짖는 이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저는 우리 한국인들이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앞에 나오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 하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체면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정말 체면에 민감합니다.
그래서 예수믿고 싶어도, 은혜받고 싶어도, 깊이 하나님의 은혜속에 들어가고 싶어도, 자기 얼굴을 의식하여, 체면때문에 믿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 언어를 살펴보면, 유달리 발달된 언어 가운데 하나가 이 얼굴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예를 들면 “뵐 낯이 없습니다. 면목이 서지 않습니다.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 얼굴 한번 넓다. 그 사람 얼굴이면 통하지 않는 데가 없다. 내 얼굴에 먹칠을 하지 말아라. 제 얼굴을 봐서 한번만 부탁한다” 등등, 이 얼굴에 대한 단어들이 얼마나 발달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체면 때문에 오늘도 인생의 절박한 문제를 안고 있어도 주님 앞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절망이나, 갈등이나, 고통이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 문제를 가지고 나사렛 예수앞에 내 인생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여기 회당장처럼 엎드려 간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여러분에게도 반드시 부활의 기적은 시작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2.회당장이 예수 앞에 엎드려 간구한 후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24절을 보면 읽겠습니다.
“이에 그가 함께 가실 새 큰 무리가 따라 가며 에워싸 밀더라”
회당장은 예수를 만나서 그와 함께 자기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는 “예수께서 우리 집에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내 딸은 살아날 것”라는 문제해결의 희망을 안고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과 함께 걷고 있었던 그 도상에서 사건이 발생했습니까?
25절을 읽겠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그렇습니다.
이 사건이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을 예수께서 치료하는 사건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좋은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회당장 야이로의 편에서 보면 이것은 정말 안타까운 사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일분일초가 급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으로 인하여 시간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던 이 사건은, 회당장의 편에서 보면 이것은 그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드는 방해거리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사건을 하필이면 이때 주님이 허용하셨을 것이라고 여러분은 느끼십니까?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을 강화시켜주시려는 의도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이런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내 문제해결이 다급해서 열심히 기도했지만 아직 응답이나 문제해결을 받지 못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기도하자마자 응답을 받고, 문제해결을 경험하고 기뻐하고 감격해합니다.
이때 그 사건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이런 때에 우리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다가 인생을 포기해 버린, 이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 사람을 치료하시는 주님은 나에게도 그리고 내 집에서도 반드시 동일한 역사를 행하실 줄을 전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을 시험하는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야이로 회당장은 지금 갈 길이 바쁩니다.
그러나 주님은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치료하기 위해 지체하고 있습니다.
아마 성질급한 사람은 이때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회당장에게 “네가 정말 나를 믿고 기다릴 수가 있느냐? 포기하지 않고 기다릴 수가 있느냐?”는 이런 시험이 또한 이 사건속에 게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눅18장을 보시면, 억울한 일을 경험한 과부 한사람이 재판관에게 와서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달라고 호소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을 보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가라사대...”라고 예수께서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단 한번의 기도로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문제의 해결보다도 더 중요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주님과의 신뢰관계가 생기도록, 문제해결을 지연하시면서 우리에게 기다리게 하시고 기도를 시키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더 엎드려 기도해야 하고, 더 기다리며, 낙망치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한번만 구하라는 말도 아니고, 한번만 찾으라는 말도 아니고, 한번만 문을 두드리라는 말도 아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계속해서 구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인생을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은 사람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더 두드리십시오. 아직 포기할 때가 아닙니다.
더 두드리시길 바랍니다. 마침내 열릴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교훈합니다.
아직 당신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어도 계속 간구해야 하고,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어도 주님곁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내 인생속에서 주님의 위대한 능력을 맛보기를 원한다면, 최악의 절망속에서도 예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5절을 읽겠습니다.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다시 말해서 상황은 끝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희망은 사라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절망의 상황 한복판 속에서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36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따라서 합시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말씀은 현재 명령형으로서 “너는 두려워 말고 계속해서 믿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상황은 끝이요, 절망이지만 주님은 회당장에게 “너는 계속해서 믿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회당장에게 이 절망의 상황속에서도 네가 계속해서 나를 믿기만 하면, 너에게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한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8-39절을 읽겠습니다.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여기 “훤화”라는 말은 “시끄럽고 복잡하게 소란을 일으키며 통곡소리가 혼란스럽게 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죽은 소녀에게 다가가서 “달리다 굼” 즉 “어린 소녀야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즉시 죽었던 소녀가 살아나는 그 기적은 마침내 일어났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는 마지막 절망은 죽음입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을 삼킵니다.
어린이도 삼키고 젊은이도 삼키고 노인도 삼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죽음의 확률은 100%입니다.
따라서 아무도 죽지 않을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최악의 절망 속에서도 주님은 우리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은 회당장에게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죽었던 이 소녀도 다시 살아났습니다.
부활의 위대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이 소녀를 죽음에서 살리신 목적이 무엇이리고 느끼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들의 죽음 건너편에 부활의 소망을 약속해 주시고, 또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도상에서 무력함에 시달리고, 좌절하고, 앞이 캄캄할 때, 우리 곁에 어김없이 다가오셔서 “달리다 굼” 즉 “일어나라”라고 선포하시는 부활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믿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의 구원자로서 절대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야말로 죽음의 공포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영생의 소망을 안겨주신 유일하신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우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면 저와 여러분은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 그리고 모든 걱정근심으로부터 진정한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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