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그릇 속에 있는 보배
본문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요 부활의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육체의 약하고 추한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실제적으로 경험을 통하여 증거 하였습니다. 바울은 약하고 또 추한 육체적 조건을
인하여 언제든지 이르는 곳곳마다 모든 일을 환난과 곤고를 당하고 또 박해를 당하였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즉 이 사방이란 말은 모든 일에 관한 말입니다.
즉 그는 모든 일에 이처럼 박해를 당하되 그 박해에 굴하지 아니한 것은 질그릇과 같은 자기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절망하지 아니합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後孫)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民族)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으로 인함이라(롬 4:18)고 성경은 말씀하였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약하고 또 추해서,
또 실망하기 쉬운 것이로되 그리스도의 능력이 가하여 갈 때에 힘을 얻고 또 강하게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성도의 모습입니다.
1.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합니다. 바울은 복음(福音)을 증거(證據) 할 때에 모든 면에서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 마음에 사형(死刑)선고(宣告)를 받은 줄 알았다"고 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싸이지 아니하고 실망하지 아니했다고 하였습니다. 사방으로 길이 막혀도 나갈 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전투 중에 적군에게 포위당하는 일처럼 두려운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십중팔구 몰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다는 일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옛날 도단 성에 있던 선지자 엘리사와 그 종 게하시는 아람 군인들에 의해 밤새에 완전 포위되어 위기일발(危機一髮)에 놓였던 일이 있었으나 엘리사의 능력의 기도로써 아람 군인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사마리아로 끌고 간 일이 있었습니다. 이는 전쟁을 하지 않고 후퇴시킨 역사적 사실입니다.(왕하 6:14-19절).바울이 전도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일이 여러 차례 있었는데 그 중에서 두 가지 사건만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루스드라에서의 경우입니다.(행14:19-22) 바울의 제 1차 전도여행 중에서 된 일들이 많은데 특히 이고니온에서 전도하여 허다한 무리가 믿으니(행 14:1)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바울과 바나바)를 능욕하여 돌로 치려고 하여 피신하였던 것입니다.
연이어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키는 놀라운 표적(標的)이 나타났고 이로 인하여 반대자들의 큰 박해를 만나 돌에 맞아 성밖으로 끌려 내침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죽지 않고 회생(回生)하여,
"너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도리어 교우들을 격려하고 그 곳으로 떠났던 것입니다. 2)데살로니가에서의 경우입니다.(행17:1-9절) 데살로니가는 헬라의 북방 마게도니야 지방의 수도였고,
옛날 알렉산더 대왕 통치 시에는 크게 번창(繁昌)했던 곳인데 이곳 전도도 크게 성공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聖經)을 가지고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거(證據)하였습니다.
그 결과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게 되니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저자(시장)의 괴악한 사람들(불량자 깡패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며 야손의 집으로,
달려 들어가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다행히 바울은 사전에 이를 피하여 무사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해도 싸이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지금가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환난과,
괴로움 때문에 사면을 온통 둘러싸인 채 몸부림쳤습니까? 어떤 사람은 슬픔에 싸이기도 합니다. 낭패와 실망이 사방으로 우겨 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어떤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갈 길이 있습니다.
고전10: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않으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케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2.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답답한 일이란 미혹된 상태 어리둥절한 입장 혼란한 모습을 말합니다. 역경이 오면 사람은 당황하게 되고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을 당해도 믿음이 있으면 낙심치 않습니다.
일이 진전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이렇게도 못하고, 저렇게도 못하게 되는 경우라든가 아무리 생각해도 시원한 해답이 없이 진퇴유곡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속수무책(束手無策)이요 수수방관(袖手傍觀)만 할 경우에는 속이 답답해 옵니다.
그러나 아무런 대책(對策)도 세우지 못하는 경우(境遇)라도 낙심(落心)하지 않고 굳세게 서는 것이 신자(信者)다운 일입니다. 전도자(前導者)는 전투(戰鬪)하는 군인(軍人)의 책임과 같이 결단코 낙심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1)빌립보 성에서의 경우입니다.(행16:22-34) 제 2차 전도여행을 떠난 바울이 소아시아 북방 비두니아로 가려고 하였으나 예수의 영(靈0이 허락지 아니하여 무시아에서 기도하는 중에 마게도냐 사람의 간청하는 환상을 보고
찾아간 곳이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인 빌립보인데 여기서도 전도에 성공하였습니다. 즉 자주 장사하는 "루디아"와 그 가족들이 믿게 되었고 점(占)치는 귀신들린 여자를 고치어 믿게 되었는데 그 주인의 고발로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옥중에서 기도하고 찬미할 때에 옥터가 흔들리고 쇠사슬이 풀리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이에 놀란 간수는 직책에 따른 자책을 느끼어 자결(自決)하려고 하다가 바울이 탈옥하지
않은 일에 또다시 놀라고 감동 받아 믿게 되었고 그들이 빌립보 교회의 초석이 창설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2)고린도 전도시의 경우입니다.(행18: 5-7)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에도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거 하였습니다.
그 결과 회당 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예수를 믿고 수다한 고린도 인들도 믿게 되자 많은 박해가 있었는데 그때 주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심히 답답한 중에 주님의 격려를 받은 바울은 시원함을 얻어 더욱 더 자신 있게 전도에 전력하였던 것입니다.
3.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게 될 때에 때로는 핍박을 당하는 일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따르면 회롱, 채찍질, 결박, 옥에 갇힘, 돌로 치는 것, 톱으로 켜는 것,
칼에 죽는 것, 궁핍, 환난, 학대 등의 핍박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버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버리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간증하기를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곧 고난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하였습니다.(롬8:31-39). 그는 허다한 박해를 받아도(고후 11:23-27) 버린바 되지 않았습니다. 4.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초대(初代)교회(敎會)의 주의 종들은 이러한 핍박에 때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어 순교를 당한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같이 하시기 때문에 망하지 아니합니다.
도리어 영광이 세계가 앞에 있는 것입니다. 시37:24절에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고 하였습니다. 또 잠24:16절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고 했습니다.
9절에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거꾸러뜨림이란 바로 죽음의 지경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죽지 아니했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경험을 이미 많이 하였습니다.
그는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거꾸러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끌어 내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으켜 세워 성에 들어갔다가 데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종교개혁 당시에 기독교인들을 로마 천주교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악형을 수없이 받았습니다. 심지어 “루터”와 “부셔”는 술에 취하여 죽었다고 하는 악한 선전까지 당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적 신앙으로 되돌아가고자,
일어난 중세기의 개혁자들은 거꾸러뜨림을 당하여 망하지 아니하고 역사의 한가운데를 움직인 불사조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특징 중에 하나는 넘어지지 아니함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매를 맞지 아니함이 아니라 매를 맞아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부분적인 전투에서는 지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전반적 전쟁에서는 결코 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5.버린바 되거나 망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이유로 혹독한 핍박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성도는 아주 버림받거나 망하지 않는 특권을 갖게 됩니다.
이 세상(世上)에서 하나님의 의를 들어내고 살아야 하는 성도(聖徒)들은 항상 세상과 싸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당연히 세상은 성도들을 방해하고 더 나아가서는 해치며 목숨가지 위협(威脅)하는 핍박을 가합니다.
사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핍박을 대가로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는 시대 어느 역사에서도 교회가 핍박받지 않았던 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가 존재하는 곳에서 언제든지 복음의 진리를 통하여 사람들을
깨우치고 변혁시키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지속적으로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항상 세상을 두렵게 하고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마치 혜롯이 직언(直言)하는 세례 요한을 옥(獄)에 가두고 나중에는 죽이기까지,
한 것처럼 세상도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인 성도들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의 절대적이 주권 아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힘을 다하는 성도들은 죽음에 이르는 핍박이 닥쳐오더라도 견디고 능히 승리합니다. 이렇게 복음의 능력을 신뢰하는 믿음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교회는 아마도 다른 어떤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어지럽고 위태로운 현대를 살아가면서 환난을 당할 때 어떤 자세로 극복해 나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당하는 환난이 우리를 더 강건한 믿음의 사람으로 장성하게 합니까? 아니면 그 당하는 환난으로 인해 남아 있던 믿음조차도 잃어가고 있습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에게는 갑자기 원수(怨讐)의 습격(襲擊)을 받아 일시적으로 거꾸러뜨림을 당할 수는 있으나 성도는 결코 영원히 망하지 않는 존재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聖徒)가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담고 있는 한 비록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에 불과(不過)할지라도 우리 성도(聖徒)들은 결코 영원(永遠)히 버린바 되거나 멸망(滅亡)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6.모든 환난을 이기는 힘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이 세상에 거하는 핍박을 직접적으로는 세상이 주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핍박조차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핍박을 시험으로 사용하셔서
성도를 단련시키시지 결코 성도들을 넘어뜨리려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주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사람이 감당치 못할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고전 10:13).
하나님께서는 자기(自己)의 사랑하는 자녀(子女)들이 시험(試驗)(연단)을 통하여 강건(强健)하여지기를 원하시며 또 그 자녀들에게 그 시험(試驗)을 이길 수 있는 능력(能力)을 허락(許諾)하십니다.
7.고난(苦難) 속에서 주님의 고난을 알게 됩니다. 성도(聖徒)들이 주님께서 당한 고난을 당하여 고난에 동참하면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생명(生命)의 영광도 함께 받게 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와의 일치의 생애가 있습니다.
고후4:16-18절에서 사도 바울은 낙심치 않는 원인을 말했습니다. 1)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육체가 세상에 시달려 약해지면 질수록 반비례하여 영적인 면은 점점 강해지고 해로운
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9-10)라고 했습니다. 2)환난은 주의 영광을 이루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주를 위하여 환난과 역경을 받는 자는 후에 영광도 함께 받습니다. 딤후2:11-12절에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永遠)함이라는 말씀에 의지해서 보이지 아니하는 곳에 애착을 두었기 때문에 실망(失望)하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하였습니다.
8.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질그릇과 같이 연약(軟弱)하며 무가치(無價値)한 존재(存在)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주신 능력(能力) 있는 구원의 복음 즉 보배를 소유했기에 더 이상 나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사단의 시험에 직면하나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있는 보배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권세 자 사단을 이미 이기신 분으로 결코 지체인 우리 성도들을 패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보배를 소유한 성도는 우겨 쌈을 당하지도 않고 낙심할 것 없이 승리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50: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때 세상 사람들처럼 낙담하는 것이 아니라 감격과 감사로 화답하며,
감사(感謝) 기도(祈禱)를 드리므로 응답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환난만 바라보지 말고 환난 건너편 소망의 문을 바라볼 수 있는 영 안의 눈이 열려서 주님의 이름으로 나의 죄를 이기고 이 세상을 넉넉히 이기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榮華)롭게 하는 성도(聖徒)의 복(福)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祝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