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의 미련한 것
본문
고린도전서 1장 18~25절
석기현 목사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맥아더 장군이 저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맥아더 장군이 참모회의를 모아 놓고 그 작전을 건의하자, 그 자리의 모든 참모들이 하나같이 펄쩍 뛰며 반대를 했습니다. 그처럼 간만의 차가 심하고 갯펄이 넓은 해안으로 대규모의 상륙 작전을 펼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공통적인 반대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맥아더는 말하기를 “귀관들은 모두가 다 세계 최고 수준의 참모들이다. 그런 귀관들이 이 작전을 도무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면, 적군들은 더더욱 설마 이런 곳으로 우리가 상륙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작전은 반드시 성공한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절대다수의 상식을 깨뜨리는 한 사람의 천재적인 착상이 그 작전을 큰 성공으로 이끌고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가 땅끝까지 전파되어 가는 이 복음 전선에 있어서 바로 그처럼 비범한 신적 지혜를 발휘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상식을 깨뜨릴 뿐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사람의 총명까지 철두철미하게 압도하는 최고의 작전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부터 21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그 작전이란 바로 ‘십자가의 도’를 가지고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복음을 전함으로써 기독교를 땅끝까지 확장시킨다는 것은, 세상의 ‘선비’나 ‘변사’들이 보기에는 정말 ‘미련한’, 도무지 통할 것 같지 않은 무리한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의 작전은 사도 바울 시대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혼을 사단에게서 구출하여 구원받게 만드는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절묘한 구령 작전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은 우리 기독교 복음 전도자들은 과연 어떻게 이 작전을 수행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까?
1. 전도자는 전도 대상자들이 기독교를 통하여 오직 인간적 욕구 충족만을 기대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 전파에 온 생애를 바친 사도 바울은 그가 전도할 때마다 절실히 체험한 한 가지 공통적인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바울 자신으로부터 복음 아닌 다른 것을 받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라고 기록된 말씀이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킵니다.
여기 ‘구하다’라는 말과 ‘찾다’라는 말은 같은 뜻입니다. 즉 유대인이고 헬라인이고 간에 이들이 바울을 통하여 받고자 하는 바는 따로 있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표적’ 보여 주기만을 원했습니다. 그들은 믿기에 앞서 뭔가를 ‘눈으로 보아야’ 했습니다. 뭔가 그들을 감탄시킬만한 이적, 혹은 자기네들에게 당장 실제적 유익을 주는 권능 즉 신유 따위의 기적을 행사해 줄 것을 바울에게 요구했습니다. 전도자에게 무슨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유대인의 버릇은 이미 예수님께서도 자주 경험하셨던 일이었습니다. 사복음서 여러 곳에, 유대인들이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여 주기를 예수님께 요구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헬라인들은 어떤 ‘지혜’로운 것을 바울에게서 원했습니다. 이들은 믿기에 앞서 뭔가를 ‘머리 속으로 생각해’ 보아야만 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도가 어떤 합리적인 사상이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들이 자랑으로 삼고 있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들과 비교해 볼만한, 혹은 그것들을 능가할만한 새로운 논리적 지식을 바울을 통해서 듣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이 아덴(아테네)에 전도하러 갔을 때 이런 일을 경험했음이 사도행전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모든 아덴 사람들은, 일은 노예가 하고 있으니까, 날이면 날마다 아레오바고라는 집회 장소에 모여서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 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았다」(행 17:2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오직 세상 지혜일 뿐이었습니다. 단지 복음만을 전하기 위하여 그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하던 사도 바울에게서, 이처럼 사람들은 전혀 다른 것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유대인들대로, 헬라인은 헬라인들대로 그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바울이 주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기독 전도자들이 만나게 되는 전도 대상들은 이처럼 복음 아닌 다른 것, 전혀 엉뚱한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자들인 것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갖가지 필요나 욕구를 목사나 교회가 충족시켜 줄 수 있으면 신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으면 무조건 불치의 병이 나아야 하고, 벼락부자가 되어야 하며, 세상 만사가 다 자기 뜻대로 되어 나가야 마땅하다고 기대하면서 나아옵니다. 이들은 목사가 자기의 영적 문제뿐 아니라 온갖 자질구레한 육신적 문제들까지 해결해 줄 수 있는 팔방미인 같은 사람이 되어 주기를 원하면서 교회에 출석합니다. 교회는 종교적 집단이면서 동시에 정치, 경제, 사회적 제 문제들에 관여하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세상 학문에 약간 닦인 지식인들은 그들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상반되는 요소들을 성경 속에서 발견할 때마다, 기독교의 교리를 소위 합리적인 사고 방식에 맞도록 뜯어 고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기독신자들 앞에 있는 전도의 대상은 이처럼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참 전도하기 쉽겠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 오직 자기네들의 욕구와 지식을 만족시켜 주기만을 원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전도해야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2. 전도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선포하는 이 한 가지 전도 방법만을 고수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기독교를 향하여 요구하는 바가 그러하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전도해야 합니까? 온갖 현실적 필요, 지적 충족만을 원하는 그들에게 과연 복음 전도자는 무엇을 주어야 합니까? 그 대답은 단 하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3절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이 무엇을 구하든지 찾든지 간에 전혀 개의치 않고, 마땅히 선포되어야만 할 전도의 주제, 복음의 핵심을 결코 바꾸지 않았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누가 무엇을 바라든지 간에 그의 전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헬라어 원어 성경에는 22절과 23절 사이에 ‘그러나’에 해당되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우리 한글 개역 성경에는 이 단어를 직접 옮겨 놓고 있지는 않지만 그대신 22절의 마지막 동사의 어미를 ‘찾으나’라고 번역함으로써 ‘그러나’라는 말의 뜻을 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즉 ‘유대인과 헬라인은 이러저러한 것들을 원하는 줄은 알지만, 우리는 그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한다’라는 뜻입니다. 또 이 귀절의 ‘우리’라는 인칭대명사는 소위 강조 용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헬라어에서 쓰이는 특별한 문장 구조인데 우리나라말로 굳이 직역하자면 ‘우리’라는 단어가 두번 반복되어져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장을 ‘우리,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라고 하면 자연스러운 번역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뉘앙스를 정확하게 우리 말로 옮기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상의 두 단어를 통하여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너무나 뚜렷합니다. 새로 번역된 성경에 보면 그와 같은 바울의 강조점을 반영하기 위해서, 23절의 마지막 동사 ‘전하다’라는 말을 ‘전할 따름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도할 따름이지 다른 것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라는 의미를 잘 전달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무엇을 찾든지 무엇을 요구하든지 간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하겠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우직한, 그러나 너무나도 멋진 고집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그런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란 것이 세상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나아가서 그들의 비위에 거슬리며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구세주라는 존재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은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거리끼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하로부터 그들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줄 수 있는 능력 있는 군주로서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했었다는 요한복음 6장 15절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도 기대했던 예수님께서 오히려 로마 군병의 손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그들의 태산 같던 기대는 깨어졌습니다. 승리하는 군주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하던 유대인들의 눈에는,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고통당하는, 낮아지신 종으로서의 메시아란 도무지 공감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아니 오히려 반감만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는, 즉 ‘거치는 반석’과도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한편 이방인 즉 헬라인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란 바보 같은 소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이 야만인 취급하던 유대인 중의 한 사람, 그것도 그들이 인간 취급도 하지 않던 노예나 흉악범을 처형할 때 쓰던 십자가에 달려 죽은 한 죄수에게서, 그들이 자랑하던 고고한 학문에 비길만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는 상상도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는 말은 그들의 합리적 사고 방식으로 따져 볼 때 백번 어처구니 없는 미련한 소리일 뿐이었습니다. 아까 언급했던 사도행전 17장을 계속 보면, 바울이 아덴 사람에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증거하자마자 그들은 바울을 ‘기롱했다’고 32절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그가 전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단지 세상 사람들이 받을 준비가 안된 정도가 아니라, 훨씬 거센 거부 반응을 유발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사람들이 원하지도 않고 오히려 세찬 반발과 조롱을 던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주제는 전혀 변함이 없었습니다. 단 한 가지 복음, 외곬으로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전도자는 바로 이처럼 세상 사람들이야 무슨 기대나 요구를 가지고 나아오든지 간에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고집불통이 되어야 합니다. 제나름대로 요구 사항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재미가 없고 딱딱해 보이고 혹은 ‘케케묵은 옛날의 어리석은 이야기’라는 조소를 받더라도,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내 죄와 당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라는 이 한 가지 복음만을 전해야 합니다. ‘내 죄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나는 지금까지 예수 안 믿고도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살아 왔다.’라고 마음에 반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도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런 구시대의 신화 같은 복음은 오늘날 과학문명 시대에는 보다 이치에 맞는 새로운 신학으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소위 지혜롭다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조소를 던진다 할지라도, 우리는 끝까지 꼿꼿하게 그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도해야할 따름입니다.
3. 전도자는, 택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어 있다는 확신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그처럼 무리해 보이는 전도가 과연 어떤 결과를 낳게 되겠습니까? 그 결과는 정말 놀랍고도 은혜로운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증거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22절과 23절을 통하여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주제를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변형시키거나 양보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음을 보았습니다. 그저 우직하고 무식해 보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을 고집스럽게 전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곧 그 복음을 들은 자들 중에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그 미련해 보이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신기한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헬라인들이 원하는 바들을 전혀 묵살하면서 오히려 그들이 거리껴 하고 조소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했는데도, 정말 듣는 자의 요구와 전하는 자의 복음은 극도로 상반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보아도 전도의 효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 즉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이미 구원하시기로 작정하고 택하신 자들의 심령에는 그 복음이 파고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 딱딱해 보이는, 그 재미없어 보이는, 그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그 무식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그리스도 십자가’가 적어도 택자에게는 가장 ‘기쁜 소식’으로 받아 들여진다는 사실은 실로 오묘하고도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일단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은혜를 체험하게 된 자들은, 이전에 잘못 구하고 있던 것들까지 이제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벽하게 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처음에 표적만을 구하던 유대인들이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자, 그들은 바로 그 그리스도의 생애가 ‘하나님의 능력’ 그 자체, 아니 최고의 기적적인 사건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혜만을 찾던 헬라인들 역시 그들이 갈구하던 세상 철학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완전한 지혜의 근본을 바로 예수님의 말씀에서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만일 그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나 색깔을 사람들의 요구에 맞게 바꾸었더라면 결코 그런 멋진 결과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전하는 대신, 가는 곳마다 그저 병이나 고쳐 주고 혹은 자기의 학문을 총동원하여 재미있는 수사만을 구사했더라면, 그의 전도는 택자의 영혼 구원에는 아무런 열매를 거두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런 타협을 거부하고 전혀 고집스럽게 바보처럼 그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선포하자, 도무지 복음을 받을 것처럼 보이지 않던 자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선택함을 이미 입고 있던 자들이 그 복음에 전적으로 감동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예수 믿기 전에 가지고 있던 개인적 육신적 소원들까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벽하게 충족되었다는 사실은, 실로 너무나도 멋진 전도의 완벽한 결과가 아니었겠습니까?
세상적 관점에서 볼 때에는 도무지 복음을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 중에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택자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전도자의 희망입니다. 복음 외에 다른 것을 기대하던 사람들도 일단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그외의 모든 부수적인 필요나 욕구는 예수님 안에서 틀림없이 해결된다는 것이야말로 전도자의 확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비위에 맞도록 우리의 전하는 복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대로, 그저 꾸준히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하면, 전혀 인간이 기대하지 못했던 놀라운 결과를 하나님께서 내려 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22절부터 24절까지 나타나는 이 모든 과정을 온통 계획하고 주장하고 계시는, 그야말로 한 손에 꽉 잡고 계시는 분이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25절 말씀에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재차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딴에는 머리를 짜내고 안간힘을 쓰면서 온갖 변칙적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보았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 역사를 위하여 당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세워 놓으신 그 오묘한 작전에는 도무지 비교의 대상조차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저 저 높으신, 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기쁘시게 정해 놓으신 방법을 따라 그 분이 시키시는대로 복음을 전파하기만 하면, 그 마지막 열매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다 맺혀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님 여러분,
왜 오늘날 일부 목사들은 스스로 팔방미인이 되려 합니까? 왜 오늘날의 일부 교회들은 세상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들에 비위를 맞추어 주기에 급급합니까? 사람들이 음악회장에 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수준 높은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감상하기 위함입니다. 클래식 음악에 전혀 문외한인 사람이 어쩌다 초대권 하나 얻어 들어와 앉아 있다 하더라도, 연주자들은 그 사람 하나야 알아 듣든지 말든지 전혀 개의치 않고 원래 정해진 프로그램대로 클래식 음악만을 연주합니다. 사람들이 왜 야구장에 갑니까? 프로 선수들의 박진감 넘치는 야구를 구경하기 위해서입니다. 어쩌다 야구보다는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친구따라 와서 지루하게 앉아 있다 하더라도 야구 선수들이 그 사람 기분 맞추어 준다고 야구공으로 축구를 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의 집단들과 전문인들도 각각 분명한 그 주된 기능과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몸되신 이 교회이겠습니까? 하물며 그 교회의 지체된 우리 전도자들이겠습니까? 교회의 기능은 사회가 무엇을 요구해 오던지 간에 상관치 않고 오직 복음만을 선포할 뿐인 것이며, 기독신자의 사명 역시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든지 간에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만을 전도할 따름인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과 함께, 노아의 생애를 기억해 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잘 살아가고 있을 때 혼자 미친 사람처럼 산꼭대기로 배를 지으러 올라가던 노아를 그려 보았습니다. 그 평온한 시대에, 문명은 발달하고 사람들은 시집가고 장가가서 건강한 장부들을 낳으며 번영을 누리던 그 태평성세에, 장차 다가올 하나님의 물심판을 외치면서 배를 짓는다고, 그것도 바다도 아닌 산꼭대기로, 매일 같이 올라가던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한번 상상해 보았습니다. 누가 보아도 정말 어리석은, 실로 미련한 행위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정말 옛날 영화 제목에 나왔던대로 ‘바보들의 행진’입니다. 정말 틀림없는 바보들이지요. 매일같이 산꼭대기로 배를 지으러 올라가는 사람들, 그것도 얼마 안 있으면 온 세상이 홍수로 다 잠길 것이라는 이상한 소리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정말 더 이상 어떻게 바보가 되겠습니까? 하지만 저와 여러분 역시 이 시대로부터 조롱받는 오늘의 노아입니다. 노아와 꼭같은 바보들인 것입니다. 아니 그런 바보들이라고 자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 이천 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 위해 대신 죽으셨던 그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 노아 때에는 물심판이 있었지만 이번에 재림하시면 영원히 꺼지지 아니하는 불심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 십자가 공로를 믿기만 하면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다.’라는 이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이런 비합리적인, 이런 미련한, 이런 정신나간 소리를, 찬란한 과학 문명과 지성을 자랑하는 이 현대 사회를 향하여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오늘도 산꼭대기에 교회라는 구원의 방주를 짓고 있는 바보들이라고 자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멸망받을 자’에게만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지, ‘구원을 얻을’ 택자에게는 하나님의 최고 지혜요 최고 능력이며 반드시 성공하게 되어 있는 명작전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바로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스스로 간직하고, 오직 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하나님의 택자를 불러 모으는 진정 지혜로운 전도자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