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밭의 동역자
본문
고린도전서 3장 1~9절
석기현 목사
우리나라 군대의 특별한 생리 중에 하나로서, ‘직속 상관이 무섭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군대라는 것은 명령과 복종 관계가 철칙으로 지켜져야 제대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자기 직속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부터 철저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처럼 직속 상관과 직속 부하들끼리만 너무 잘 통해서, 군 최고 통수권자의 권위까지 무시하거나 거역할 때 일어나게 됩니다. 쿠데타라는 것이 항상 그래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기의 직속 부하들이 군부 고위층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면 마치 자기가 그들을 제일 잘 이해해 주는 좋은 상관인 채 하면서 평소에 비위를 맞추어 줍니다. 그렇게 해서 그런 부하들을 국가의 충복이 아니라 자기 개인의 사병으로 만들어 갑니다. 그러면 그런 부하들은 그 직속 상관이 명령만 내리면 참모총장이든지 대통령이든지 가리지 않고 문을 박차고 들어가서 총구를 겨누게 되고, 그 상관은 나라를 통째로 삼킨 후 직속 부하들과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물론 군에서 고참과 졸병이, 장교와 하사관이 서로 존중하고 아끼면서 상하관계를 긴밀하게 가지는 것은 지극히 옳은 일이요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제일 높은 사람은 따돌려 놓고 그 밑에서 저희들끼리만 서로 좋아하고 친하게 지내게 되면, 군대란 것은 국익을 해치는 정도가 아니라 나라의 존속마저 위태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바로 ‘하나님의 밭’으로 본문에서 비유되고 있는 교회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밭주인 되신 하나님은 완전히 저 뒤로 제쳐 놓고, 그 밑에서 목사와 교인들이 저희들끼리만 서로 짝짜꿍을 맞추면서 교회 생활을 하는 경우입니다. 물론 그런 밭이 농사가 잘 될 리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교회를 그런 부실한 밭, 그처럼 저희들끼리 해먹는 밭이 되지 않고, 정말 하나님의 구령 사업이 제대로 일구어지고 열매가 자라는 기름진 밭이 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고려신학교 주일을 맞이하여, 이 하나님의 밭을 경작하며 추수하고 있는 주의 사자들과 선지 생도들을 어떻게 바로 모셔야 할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교인들은 목회자를 결코 주인처럼 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밭을 맡아서 경작하고 있는 주의 사자로 모실 줄 알아야 합니다
. 본문 고린도전서 3장 1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신령한 자’란 앞서 2장에서 보았던 대로 ‘성령 충만한 자’ 즉 그래서 신앙생활이 완전 성숙을 향해서 계속 잘 자라나고 있는 신자를 뜻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그런 ‘신령한 자’들로 대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육신에 속한 자’, 즉 교회 출석은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세속적 판단과 습관을 좇아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는 그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여전히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린 아이’란 이어서 바울이 설명하듯이 ‘젖’ 즉 구원의 기본적인 진리만을 받아먹어야 하는 단계입니다. 누구나 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이 ‘어린 아이’의 단계를 반드시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성장 발육이 멈추어져 버린다면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랬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설립하고 이제 이 고린도전서를 쓸 때까지는 벌써 5년 정도의 세월이 경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그들은 여전히 ‘밥’을 ‘감당치 못할’, 즉 더 높고 깊은 단계의 신앙 교육을 받을 수도 줄 수도 없는 갓난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라고 장탄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상 교회 안에는 정말 그런 교인이 있습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그런 아이, 젖을 빨고 몇 년이 지나도록 몸무게도 지능도 조금도 안 자라는 그런 아이는 없겠지만, 신앙 세계에서는 정말 그런 이상한 어린 아이가 있습니다. 그래도 몇 년을, 몇 십 년을 교회 생활하고 말씀을 배우면서 살았으면, 어느 정도는 좀 자란 것이 표가 나야 할 터인데, 정말 이상하게도 발육 속도가 완전 ‘제로’인 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예배에 참석하고 기본적인 신앙 생활하는 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생 받았다면 분명히 나타나야 할 성장의 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정말 알 수 없는 교인이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있어서 그런 현상이 생긴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사도들 때문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잘못해서 그랬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그 훌륭한 사도들을 잘못 대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본문에 ‘사람을 따라 행함’이라 함은, ‘세상 사람들 하는 식대로 행동함’이란 뜻입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도 마치 바깥 사회에서 하던 버릇 그대로 ‘시기와 분쟁’을 일삼았습니다. 어린애들이 툭하면 쉽게 서로 틀어지고 싸우듯이 교회 안에서도 패를 나누고 편당을 지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그처럼 갈라질 때 내세운 슬로건들이 ‘나는 바울에게라’, ‘나는 아볼로에게라’, 혹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나오듯이 ‘나는 베드로에게라’라는 것들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일년 반 동안 머물면서 전도하여 세운 교회였고, 나중에 아볼로 역시 거기서 일정 기간 동안 머물면서 사역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특정 목회자에 대한 편애심이 극단적으로 자랐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인으로서의 자신의 바탕을 말할 때, ‘나는 바울 사도가 가르치는 대로만 사는 사람이다’라든지 ‘나는 아볼로 선생을 흠모하고 존경하는 신자다’라는 말을 가지고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다’라는 신앙 고백을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그 특정 목회자가 그들 자신의 신앙생활의 출발점이요 또한 그 신앙생활을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힘의 출처나 되는 것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들의 신앙생활이란 것은 그들이 편애하던, 그리고 소위 존경한다고 말하던 한 개인 목회자라는 테두리에서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던, 정말 ‘우물 안의 개구리’ 식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도나 교사 한 사람을 두고 좋아서 못살겠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마치 자기의 진실한 신앙 고백인 것처럼 떠벌리던 그들이었던지라, 사도 바울은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라고, ‘너희들은 내 눈에는 마치 아직까지 완전히 육에 속한 사람처럼 보인다.’라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단 종교일수록 사람이 좀 거룩하게 산다는 것을 지극히 높이고 과찬하기 마련입니다. 중이 뭔가를 좀 깨달았다고 점잖게 폼을 잡으면 그것을 두고 ‘도사’니 ‘달인’이니 하고 높이면서, 그 도통한 것 곁에서 좀 얻어먹겠다고 몰려 듭니다. 무슨 수녀가 평생 남 도우는 일만 하고 살았다 하면 그런 사람을 ‘성녀’니 하고 추앙하는 그 자체가 마치 무슨 종교 행위가 되는 것인 양 여기는 것입니다. 중이나 수녀를 보면 거룩하고 존경스럽게 받들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고서는 그보다 훨씬 더 감탄할 줄 모르는 것은 정말이지 이상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 아닙니까? 참된 신앙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것이 어떤 한 개인의 생활을 보면서 ‘사람이 저만큼 착하게 살 수 있구나!’하고 감탄하는 데에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은 완전하게 선하신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스스로 인의 장벽을 치는 일일 뿐입니다. ‘저 사람은 나 같은 범인으로서는 도무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거룩하게 살고 있구나!’하고 찬사를 던지게 되면, 그 순간 그 개인의 신앙이란 것은 바로 거기에서 끝나고 말게 됩니다. 그런 말 자체가 이미 자기가 직접 하나님과 교제하는 신앙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또한 그런 찬탄이야말로 마땅히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감사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직속 상관만 하늘처럼 모실 줄 알고 그 위에 있는 최고 사령관을 모르는 병사는 반드시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인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그 옷자락에 손을 대려고 나아가는 길에서 자기 목사를 그 사이의 벽으로 만들어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즉 자신의 신앙생활이 어떤 특정 목회자를 존경하고 받드는 선에서 정지되지 않도록 극히 조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그런 인의 장벽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악한 농부 같은 목사도 이 지상교회에 있지만, 교인 쪽에서 스스로 목사를 그런 인의 장벽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인이 목사를 존경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 없는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그것보다는 훨씬 더 강력하고 진실해야 마땅합니다. 목사의 설교에 은혜가 있으면, 그런 말씀을 그의 입에 주신, 스스로 ‘그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더욱 감사해야 합니다. 목사의 인격이나 삶이 존경스러우면, 꼭 같은 죄인을 그렇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에 모든 영광을 다 돌리면서 자신도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 닮아가는 성화 생활에 더욱 매진해야 할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사자들을 이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령 사업의 밭을 위하여 쓰고 계시는 신령한 농부들로 바로 모실 줄 알아야 합니다. 이 교회라는 밭에서 자신의 신앙생활이 잘 자라날 수 있도록, 밭의 농부인 목회자들의 충성스러운 사역을 통하여, 오직 밭의 최고 주인이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모시고 섬길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목회자들은 사람의 인기를 구하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인정받는 하나님 밭의 일군이 되어야 됩니다.
고린도전서 3장 5절 이하 8절에 기록하기를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아볼로나 바울 같은 자들이 결코 어떤 신앙의 바탕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찬탄이나 영광 돌릴 대상도 될 수 없는 존재라면, 과연 이들은 ‘무엇’이었습니까?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저희는… 사역자들이니라’고 정의했습니다. 여기 ‘사역자’라고 번역된 말은 사실은 그냥 ‘종’ 혹은 ‘일군’이란 뜻입니다. 원래는 주인의 식사 테이블 옆에서 시중들던 ‘웨이터’를 가리키던 말이었습니다. 교인들이 자기를 사도라고 받들어 주고 일부 지나친 사람들은 그처럼 자칭 ‘바울파’라고 극성을 부리기까지 했지만, 바울 자신은 자기를 가리켜 그저 ‘종 이상 아무 것도 아니라(no more than servants)’고 했던 것입니다. 단지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 바로 자기라는 존재의 정의요 기능이요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 종으로서의 하는 사역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었습니까? 그것은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믿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바울을 위시한 모든 사도들과 교사들과 전도자들의 사역의 본질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너무나도 중요한 자각입니다. 주의 종들의 사역이란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착한 생활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무슨 사회 정의를 구현하도록 리드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온 소아시아와 그리스를 돌아다니면서 무슨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운영하면서 선행을 쌓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 동포들을 로마 정부의 압제 하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무슨 정치 활동을 한 적은 결코 없었던 것입니다.
소위 기독교 사회 운동을 한다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와 눌린 자들을 위하여 복음 전하러 왔다.’라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인용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말씀에서 ‘가난한 자와 눌린 자’만 강조하고, 바로 그 다음의 말씀 ‘복음 전도’는 다른 말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가난한 자와 약한 자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전해 주신 복음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부자 되게’, 약한 자를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주는’ 것이 예수님의 복음은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만드는’ 본래의 사명 대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물질적, 사회적, 정치적 불만을 예수 이름 가지고 해소해 주는 것을 두고 목사의 사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는 인기 좋고 인정받는 목회가 될지 몰라도 하나님의 인정은 결코 받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인이 명령한대로 밭에 씨 뿌리지 않고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종자를 제멋대로 뿌리는 악한 농부와 꼭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하여 복음을 ‘심는’ 사역에 주력했습니다. 즉 전도 사역을 말합니다. 자신은 그저 씨를 뿌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볼로가 했던 사역 ‘물을 주는’ 것이란 양육 사역을 뜻합니다. 아볼로는 원래 ‘학식이 많고 성경에 능통한’ 교사였기 때문에, 일단 믿게 된 성도들을 가르치고 자라나게 하는 사역에 남다른 은사를 받았던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이처럼 ‘심고 물을 주는’ 과정은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만 다하면 자기 할 일은 끝난 것이었습니다. 그 씨가 제대로 자라나 안 자라나 하는 것은, 자기네들의 힘이 전혀 미칠 수 없는 영역이었습니다. 그 대신 ‘자라나게 하셨나니’라는 말은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한 개인의 신앙 성장 과정은 과거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온통 하나님께서 홀로 주장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구원이 시작되고 성립되게 되는 전 과정은 개인 노력도 아니요 목회자의 능력 때문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 100퍼센트 달려 있을 뿐인 것입니다.
이어서 사도 바울은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직무는 조금 달라도 똑 같은 하나의 목적만을 공유하고 있는 한 팀’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해서 주시는 대로 받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종은 하는 일도 그저 주인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듯이, 그 상도 그저 주인이 주시는 대로 받을 뿐인 존재일 뿐입니다. ‘동역자’란 같은 일,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주인 밑에 쓰이는 꼭 같은 일군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일군 중에는 아무도 수퍼 스타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하는 것을 두고 마치 교인들로부터 인기를 얻거나 칭찬을 받는 수퍼 스타가 되고자 하는 길을 가는 것처럼 여기는 목사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목사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만드는’ 사역을 제쳐 놓고 여러 가지 변칙만을 구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많은 지상교회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는 밭이 되지 못하고, 그 밑에 있는 청지기, 즉 ‘집 관리를 맡은 집사’가 제멋대로 자기 사욕을 채우는 강도의 굴혈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 맡은 집안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본래의 책임은 다하지 않고, 청지기가 마치 제집인양 제멋대로 친구를 부르고 파티를 열고 저희들끼리 함께 흥청망청 마셔대는 꼴을 연출하고들 있는 것입니다. 자기 부하들로 하여금 최고 통수권자의 명령에 따르도록 훈련시키는 대신, 자기만 좋아하도록 만드는 목사, 그런 얄팍한 인기나 끌어 모아서 자기 생계나 유지하려는 목사들이 이처럼 교회를 시장판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도의 신앙이 자라나는 ‘하나님의 밭’이 되기 위해서는, 목사들이 어찌하든지 사람의 인기를 모으려 하지 말고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사명에 충실하여 하나님께 인정받는 종이 되어야만 합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여러분의 기분을 맞추어 주고 여러분의 심기를 편하게 해 주려 하는 대신에, 어찌하든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님 더 잘 믿고 잘 섬기도록 오히려 다그치고 훈계하는 주의 사자들을 정말 ‘배나 존경할 자’로 모실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 마지막 고린도전서 3장 9절 말씀에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 원문에 보면 ‘하나님의’라는 말이 각 구절에서 세 번 다 제일 앞에 나옵니다. 굳이 직역하자면 ‘하나님의, 우리는, 동역자들이요, 하나님의 밭, 하나님의 집이니라, 너희는’이라는 순서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라는 말을 엄청나게 강조하고 있는 문장인 것입니다. 교회는 오로지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 밭에서 경작되어지는 과정, 각 교인의 신앙 성장의 전 과정이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서만 진행되어지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 본래 주인이 오직 하나님이시요 따라서 그 집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대소사의 일들 역시 오직 그 주인의 뜻대로 내리시는 명령을 따라 이루어져야 마땅한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밭이, 목사가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만 하는 사역자가 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씨를 뿌리고 제집인양 멋대로 써먹고 노는 곳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런 하나님의 집에서,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지 못하고 평생 주일마다 그저 목사 얼굴만 보고 돌아가는 미숙아 신자로 끝나서는 정말 아니 됩니다. 하지만 최고 통수권자를 제쳐 놓고 직속 상관과 직속 부하들끼리만 해 먹는 교회는 바로 그런 경작 안 되는 밭, 난장판 집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인들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가르치지 않고 그저 자기만 존경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서 무슨 사회 운동에나 써 먹는 목사들, 그저 자기의 육신적 불만이나 잘 이해해 주는 목사를 하늘처럼 받들고 사신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은 모르는 교인들이 바로 그처럼 교회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한 교회 안에서 교인과 목사가 친해져야 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지만, 적어도 그것이 교회 생활의 최고 정점은 결코 아닙니다. 목사가 교인을 지극히 아끼고 교인이 목사를 지극히 존경하게 되는 것이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최고의 사랑 관계는 결코 아닌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는 목사와 교인들이 있다면, 이미 그 교회는 명백히 하나님 앞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있는 교회입니다. 목사는 교회를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대로만 경작해야 합니다. 교인은 목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접목되어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의 재료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의 가르침과 모범을 통하여 어찌하든지 본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직접 도달하는 교인, 자기 팬(fan)을 키우지 않고 어찌하든지 예수 그리스도 믿는 신자를 만들고 키우는 목사 - 실로 완벽한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이처럼 개인의 신앙이 자라는 ‘하나님의 밭’, 함께 그리스도의 지체로 성장하는 ‘하나님의 집’을 이 교회를 통하여 일구고 세우시는 가운데, 우리 고려신학교를 통하여 바로 이와 같은 주의 사자들이 배출되고 주의 교회들이 확장되기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동역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