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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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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다니엘 5장 1~31절
석기현 목사

옛날에는 몸무게가 적게 나가는 것을 흠으로 여기고 걱정했지만, 요즘은 다들 자기 체중을 줄여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자기 몸무게에 신경을 쓰고 그것을 달아 보면서 자기 건강을 체크하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보다 우리 각자를 훨씬 엄밀하게 달아보고 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매사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무게와 높이를 재어 보시고 그 상태가 얼마나 양호한 지 혹은 불량한 지를 정확하게 판별하고 계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재어 보시는 것은 육신의 키나 몸무게가 아니라 그 사람의 영적 건강 상태와 그 인생의 질을 당신의 잣대와 저울추로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은, 바로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 벨사살을 재어 보시고 달아 보시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본문 다니엘 5장 25절부터 28절에서, 하나님의 손가락이 바벨론 왕궁의 분벽에 친히 쓰셨던 저 유명한 글자를 두고 다니엘이 해석하기를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 되었다 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은, 간단히 말해서 ‘세어 보고 세어 보고 달아 본 후에 나누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벨사살 왕이 그 하나님의 계량에서 수준 미달 되었을 때 그의 인생도 바로 거기서 끝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의 인생 무게가 그처럼 하나님 앞에서 형편없이 가볍게 재어졌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그는 세 가지 중요한 것들을 가볍게 여기다가 바로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가볍게 달리게 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인생을 지극히 가볍게 여기시고 짧게 끝내어 버리시는지를 함께 상고함으로써,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 오늘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당신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자를 하나님께서도 하찮은 사람으로 달아 놓고 계십니다.

본문 다니엘 5장 1절부터 4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벨사살 왕이 그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그 일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 / 벨사살이 술을 마실 때에 명하여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이는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더라 /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취하여 온 금 기명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마시고 / 무리가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타나는 벨사살 왕은 성경 외의 바벨론 역사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 왕의 실존에 대하여 의심을 가졌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발굴된 비문에 의하여 이 벨사살이란 인물이 바벨론 제국의 마지막 왕 나보니더스의 아들로서, 그 당시 일종의 섭정처럼 아버지를 대신하여 국정을 맡아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역사 기록에 따르면, 고레스의 부하 즉 다리오의 연합군이 바벨론 성을 기습해 들어갔을 때 바벨론인들은 술에 흥청망청 취해 있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바로 본문의 기록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즉 벨사살은 적군이 코앞에 있는 상황에서 이런 큰 술잔치를 열었던 셈이 됩니다. 어쩌면 적군을 얕본 방심이었다고도 할 수 있고, 어쩌면 이미 자포자기하고 마지막 술판을 크게 벌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벨사살은 그 잔치에서 술이 거나하게 오르자 엉뚱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 부친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온 금, 은 기명을 가져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여기 ‘부친’이라고 번역된 말은 느부갓네살이 벨사살의 직계 아버지란 뜻이 아니라 ‘조상’이라는 뜻에서 쓰인 말입니다.
하여튼 벨사살은 다른 좋은 술잔들이 많이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 왔던 금 은 기명을 그 술잔치에 가져오도록 명하고, 바로 그것들을 잔으로 삼아 또 술을 마시기 시작했었습니다. 원래 어떤 성스러운 목적에 쓰이던 기명을 그처럼 난잡한 술자리에 사용하는 것은 당시의 그냥 미신적인 사고방식을 따른다 해도 금기로 여겨지던 행위였습니다. 벨사살이 술 취한 와중에 자기의 주흥을 더 돋우기 위하여 생각해 내었다는 것이 곧 그처럼 하나님의 성전의 기명을 더럽히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그 기명들만 더럽힌 것이 아니라, 바로 예루살렘 성전 자체를 모독하고 그 성전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얕보는 행위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그 잔치 자리에서 그 성전 기명으로 술을 한 순배 돌린 사람들이 다 그들의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우상신들을 위하여 특별히 건배했다는 사실을 보아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벨사살은 평소에도 예루살렘 성전 따위를 안중에 두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는 자기 인생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했다는 것까지도 성전을 모독하는 범죄가 되었으며, 그런 벨사살의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가볍게 달아 놓고 계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몇 달 전에 이 나라의 공영방송국은 “선교 120주년, 한국교회는 위기인가?”라는 제목의 특집을 방송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성장제일주의로 치달으면서 위기로 가고 있다, 한국교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지 못하고 있다는 등,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으로 채워진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교회에 따라서 문제나 부조리도 있겠지만, 그냥 전체적으로만 볼 때 우리나라의 교회가 국가와 사회에 실제적으로 무슨 해독을 끼쳤습니까? 교회 때문에 이 사회의 도덕이 더 악화되었고 교회 때문에 이 나라가 더 못 살게 되었습니까?
그리고 교회 자체 안에 있는 문제에 대한 비판은 그래도 교회를 알고 교회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기독교 언론에서 다루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국민들에게서 시청료를 받아 운영되고 있는 공영방송국이 이 국가와 사회의 진짜 위기, 현 정부의 실정으로 인하여 초래되고 있는 경제적 위기와 사상적 위기에 대하여는 한 마디 비판도 언급도 할 줄 모르면서, 왜 교회 자체 내에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관심도 많고 할 말도 많은 것입니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대한민국은 바로 교회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받게 된 나라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나라를 지탱하고 있는 진짜 힘과 이 민족을 사랑하고 있는 진짜 애국애족심은 새벽마다 눈물의 기도로 제단을 쌓고 있는 이 조국의 교회들이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를 가볍게 여기고 업신여기는 자, 그런 귀중한 하나님의 교회를 우습게 여기고 조롱거리로 삼는 자 -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자들을 조금도 쓸모없는, 지극히 하찮은 인생으로 달고 계시는 줄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당신의 선지자를 낮추어보는 자를 하나님께서도 작은 인물로 재어 놓고 계십니다.

본문 다니엘 5장 5절로 12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그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 / 왕이 크게 소리하여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를 불러오게 하고 바벨론 박사들에게 일러 가로되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옷을 입히고 금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셋째 치리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 때에 왕의 박사가 다 들어왔으나 능히 그 글자를 읽지 못하며 그 해석을 왕께 알게 하지 못하는지라 / 그러므로 벨사살 왕이 크게 번민하여 그 낯빛이 변하였고 귀인들도 다 놀라니라 / 태후가 왕과 그 귀인들의 말로 인하여 잔치하는 궁에 들어왔더니 이에 말하여 가로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왕의 생각을 번민케 말며 낯빛을 변할 것이 아니니이다 /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곧 왕의 부친 때에 있던 자로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어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라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세워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의 어른을 삼으셨으니 / 왕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이 다니엘의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이 있어 능히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파할 수 있었음이라 이제 다니엘을 부르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그 해석을 알려드리리이다」라고 했습니다. 한창 술자리의 흥이 오르고 있던 판에 그야말로 찬물을 끼얹는 듯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잔치하던 자리의 한 벽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자를 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기 「분벽」이라 함은 ‘석회로 바른 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씨를 쓴 벽의 바로 맞은편에 「왕궁 촛대」가 최상의 조명을 하고 있었던 까닭에 그 장면과 그 글씨는 누구라도 분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기괴한 장면에 완전히 질려버린 벨사살 왕은 그야말로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당장 나라의 모든 용하고 똑똑하다는 술객과 점장이와 박사들을 다 불러 모아 그 글을 해석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 내건 상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 글자를 해독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때 그런 소식을 듣고 ‘태후’가 그 자리에 찾아왔습니다. 그 태후의 소개하는 말 중에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세워 박수와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장이의 어른을 삼으셨」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즉 벨사살 왕의 조부 혹은 증조부 뻘 되는 느부갓네살 왕은 이미 다니엘의 총명과 지혜를 겪어 보고서 그를 국정 고문의 좌장으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이미 느부갓네살 때로부터 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였으니, 이때쯤 다니엘은 꽤 나이 많은 노인이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선왕 주변의 브레인들 중에서도 우두머리였던 다니엘이, 벨사살 왕이 제일 처음에 박수와 술객들을 부를 때에는 그들 틈에 끼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벨사살은 그동안 다니엘을 무시하고 홀대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초창기 적부터 하나님의 지혜로 그의 조상 통치자들을 가르치고 조언해 왔던 다니엘을 이 벨사살은 지극히 낮게 평가하고 있었든지 아니면 아예 무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그 자신이 망하게 될 것을 예언하는 이 마지막 메시지를 받게 될 때에 와서야 다니엘을 불렀던 것이고, 두말할 필요 없이 그때는 이미 늦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낮게, 작게 여겨지기 십상입니다. 특히 위정자들이나 부자들로부터는 더욱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평가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켜 ‘소자’라고, ‘사람들로부터 지극히 작게 여김 받게 될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푸대접 받는 전도자들이야말로 사람의 영혼을 살릴 수 있는 복음을 소유하고 전하는 자들입니다. 걸핏하면 이 사회가 매도하고 있는 목사들이야말로 역사를 바로 판단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하나님의 지혜로 바른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진짜 최고의 브레인인 줄을 깨달아야 합니다.
불신자들이야 모르니까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손 치더라도, 교인들이 자기 교회의 교역자들을 그렇게 대한다는 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자기 구역의 담당 전도사님이 전화하는 것을 반가워하기는커녕 귀찮아하거나, 교구 담당 목사님의 심방을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꺼려하는 교인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작게 여기고 낮은 사람으로 재는 사람은, 바로 그 당신의 종들을 파송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지극히 작은 인물로 평가받게 되는 것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당신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는 자를 하나님께는 함량미달 인생으로 끝나게 만드십니다.

본문 다니엘 5장 18절로부터 24절에 기록하기를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나이다 /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 도리어 스스로 높여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고 그 전 기명을 왕의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노구를 이끌고 나와 그 벨사살 왕 앞에 서게 된 다니엘은 그 얼마나 강렬하고도 따끔한 멧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까? “왕은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스스로 높여 하늘의 주재를 거역했습니다.”라고, 그야말로 추상같이 정곡을 찌르고 있는 것입니다. 벨사살 왕이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자기의 조부 느부갓네살 왕에게 일어났던 일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역시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다가 7년 간 짐승처럼 살게 되었던 일이 바로 4장에 기록되어 있고 물론 벨사살 왕이 이것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하나님의 명백한 경고의 계시를 완전히 무시했던 것입니다. 무시할 정도가 아니라 그는 한술 더 떠서 느부갓네살조차 하지 않았던 일, 성소의 기명을 더럽히는 일까지 저질렀던 것입니다. 아니 그 기명으로 술을 마시면서 그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정면으로 모독하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벨사살이 이처럼 자기 「호흡을 주장하시고」 자신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을 감히 대적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을 때, 그는 이미 끝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는 그것을 배운 세대로 하여금 같은 잘못을 범치 않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훈과 경고를 무시하는 개인과 민족이라면 그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너무나도 뻔한 일입니다. 우리나라는 일제시대에 저질렀던 신사참배라는 그 명백한 중죄를 회개하지 않았던 결과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징계를 받게 되었는지를 뼈저리게 맛보았습니다. 적어도 깨어있는 참된 교회와 신자라면, 불신사회가 퍼붓는 불신앙적인 비판에는 조금도 개의치 아니하는 대신에 이처럼 조국의 과거 역사를 통하여 생생하게 선포된 하나님의 경고를 정말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백한 경고를 끝까지 무시하는 인생은 오직 ‘쪼개어질’ 일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역대하 25장 16절에 보면, 「선지자가 오히려 말할 때에 왕이 이르되 우리가 너로 왕의 모사를 삼았느냐 그치라 어찌하여 맞으려 하느냐 선지자가 그치며 가로되 왕이 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이 왕을 멸하시기로 결정하신 줄 아노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유다의 왕 아마사가 하나님의 경고를 끝까지 듣지 아니하기로 결심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시려는 작정 역시 동시에 ‘결정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제사를 통하여 이미 구원의 복음을 만민에게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고 심판의 경고까지 명백히 선포해 주셨습니다. 끝까지 ‘스스로를 높이고 하늘의 주권자를 거역하면서’ 이 경고를 듣지 않는 사람은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이미 끝난 ‘우바르신 인생’이라고 역사의 벽보에 선명하게 기록해 놓으신 것입니다.
앞서 간 역사의 교훈,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생자의 십자가를 통하여 선포된 이 마지막 심판에 관한 경고를 얕보는 자는, 자기 원수들에게 짓밟히고 쪼개지고 멸망당할 한 날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조국이 ‘나누어지는’ 징벌을 또다시 받지 아니하도록,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히 버림당하는 자리에 완전히 빠지지 아니하도록, 앞서간 역사와 기록된 말씀의 경고를 늘 깊이 새기고 기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계량이 끝난 후 그 결과는 바로 즉시 벨사살에게 닥쳐왔습니다. 30절과 31절 말씀에 「그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라고 했습니다. ‘메네, 데겔, 우바르신’ - 그처럼 위대한 제국의 권력자였지만 하나님께서 ‘세어’ 보시고 ‘달아’ 보신 후에 함량 미달이 되니까, 바로 「그날 밤에」 그 육신과 그 나라가 다 ‘쪼개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벨사살 왕이 하나님의 전을 가볍게 달고, 하나님을 선지자를 작게 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얕보며 살고 있는 동안, 사실은 하나님 편에서 그를 달아 보고 재어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교회를, 그의 사자들을, 예언된 경고를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교회를 내 인생을 즐기는 한 보조수단 쯤으로 여기고, 목사님들을 제멋대로 불렀다가 쫓아내었다가 할 수 있는 심부름꾼 정도로 여기고, 마지막 날의 심판을 경고하고 있는 이 성경 말씀을 “뭐 진짜로 그런 일이 벌어질라고”라고 우습게 여기는 동안, 그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세어지고 달려지고 끝장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달아보는 저울과 재어보는 잣대 위에 나타나는 눈금은 사실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느 정도로 평가해 주고 있을까?’ - 여기에 신경을 쓰고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교인을 판단하실 때, 그 교인의 담임목사가 그 교인을 얼마나 중하게 달고 있는지를 참고로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목사를 판단하실 때, 교인이 그 목사를 어떻게 재고 판단하고 있는지를 물어 보셔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결코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 각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날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 정확하고도 엄밀하신 하나님의 눈에 자신의 생활과 심령이 어떻게 재어지며 얼마나 무게가 나가는지 이것을 늘 의식하고 조심해서 살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눈앞에도 분명하게 보여 주시는 이 글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을 읽고 해석하며 깨닫는 가운데, 진정 자신을 날마다 하나님의 저울에 겸손하게 달아보고 무게가 나가도록 애쓰고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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