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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 서게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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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에 서게 될 때
설 교 : 조 용 기 목사
말 씀 : 히 10:37~39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서론]
저는 여러분과 더불어 ‘벼랑 끝에 서게 될 때’라는 제목으로 은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삶의 벼랑 끝에 서는 우리가 여러 가지 마음에 시련과 고통을 많이 당합니다. 사람들은 삶의 벼랑 끝에 서는 체험을 여러 가지 말로써 표현지요. 진퇴유곡이란 말이 있습니다. 즉 전진도 후퇴도 할 수 없는 곤궁한 처지에 놓임을 말합니다. 또 배수의 진을 친다는 말도 있습니다. 뒤로 물러가면 바다나 강에 빠져 죽는데 앞에는 강력한 적의 공격을 받을 때 쓰는 말입니다. 그 어느 것이나 쉬운 것이 없습니다. 모두 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사생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살 수 있는 길은 믿음의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옛 말에 백척간두에 진일보란 말이 있습니다. 높디높은 벼랑에 섰을 때 뒤로 물러갈 길도 없고 앞으로 한발자국 발을 내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발을 내딛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어떠한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가지고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오직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고 천길만길 벼랑에서 한걸음 내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천길만길 벼랑 끝에서 눈 딱 감고 벼랑으로 한 발자국 내미는 용기는 믿음 이외에는 절대로 찾을 수 없습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두려움에는 무려 75가지의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에딘버러 대학의 심리학자 칼스테오는 인간의 올바른 마음을 빼앗고 정신건강에 해를 끼치는 가장 큰 원인이 바로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대설교자 헨리 비쳐(Henry Beecher)는 “우리는 날마다 두 개의 손잡이를 잡고 하루를 살게 된다. 하나는 두려움의 손잡이요 다른 하나는 믿음의 손잡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두려움을 따라 뒤로 물러갈 것이냐 믿음을 가지고 백척간두에서 한발자국 내딛을 것이냐 이러한 결단을 우리가 늘 내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퇴유곡의 상황에서 믿음과 두려움 중에 어떤 손잡이를 잡을 것인가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본론]
1. 홍해 가에 온 이스라엘 백성
홍해 가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 왔는데 뒤에는 바로 왕이 애굽 군대를 거느리고 포위 공격해 오지요. 앞에는 창렬한 홍해바다입니다. 정말 진퇴유곡입니다. 뒤로도 물러갈 수 없고 앞으로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벼랑 끝에 섰습니다. 어찌할 도리가 없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다 통곡하고 탄식하고 모세를 원망하고 차라리 “애굽에 있었던 게 좋았다.” 바로 왕에게 두 손 들고 항복할 태세였습니다. 좌절과 절망에 처했습니다.
성경은 출14: 9에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백척간두에서 진일보냐 인생포기냐의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곤궁한 처지에서 원망과 탄식과 절망을 가지고 인생을 포기할 지경에 놓였습니다.
출14:10~12에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원망이 하늘에 치솟았습니다. 그들은 바로 왕에게 두 손 들고 항복할 그러한 태세였습니다. 모세를 원망하여 말하기를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이스라엘 백성이 진퇴유곡에 처했을 때 백척간두의 낭간에 섰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난간에서 그냥 뒤로 물러서기를 원했습니다.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앞길이 칠흑같이 어두운 난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 탄식하고 뒤로 물러설 때 유일하게 이 난간에서 믿음으로 한발자국에 내딛는 분이 있었으니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뒤로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으로 생각할 때는 절대절망에서 벼랑 끝에서 믿음으로 한발자국 내딛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출14:13~14에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이것이 모세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는 것처럼 믿고 참고 담대한 믿음의 선언을 하고 백척간두에서 한발자국 믿음으로 내딛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떨어져서 죽을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이 덥썩 받아 주셨으니 그것이 하나님이 바로 모세의 기도를 통하여 홍해를 갈라놓은 것입니다. 홍해의 창렬한 바다가 갈라진 것입니다.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갈라진 바다 사이로 마른땅처럼 지나갔고 그 뒤를 따라오는 애굽 군대는 물이 도로 흐르매 다 물에 빠져 멸살하고 만 것입니다.

2.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믿음
성경에 보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똑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두라 평지에서 금신 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자기가 다스리는 중동의 모든 나라 문무백관들을 다 불러 모아서 이 금신 상을 제막하는 날에 그 앞에 경배하게 만든 것입니다. 어느 명령이라고 안 오겠습니까? 온 느브갓네살이 다스리는 바벨론왕국의 두라 평지로 천하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 왔습니다. 그래서 그 제막식 날 음악을 연주할 때 모두다 금신 상에 절하라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단 3: 6~ 7에 보면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라 하였더라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언어를 말하는 자들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자 곧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엎드려 절하니라”
어느 명령이라고 거역하겠습니까? 금신 상에 절하지 아니하면 불 풀무 불에 던져서 태워 죽이겠다고 하니까 모두다 엉덩이를 들고서 엎드려서 절을 했습니다. 한 사람도 절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유대인 세 사람만 절하지 않고 우뚝 섰습니다. 그들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서 백척간두에서 믿음의 진일보를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말씀에 너희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 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비록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왔지만 그들이 금신 상에 절하면 그들의 양심을 팔아먹고 신앙을 팔아먹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정말 진퇴유곡에 빠졌습니다. 벼랑 끝에 섰습니다. 이제 절하지 아니하면 벼랑에 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택했겠습니까? 그들은 죽으면 죽으리다.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 엎드려서 엉덩이를 곧추 들고 절할 때 그들은 뻣뻣하게 서있었습니다. 용감하고 담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우리 한국에 장로와 집사들이나 평신도들이 북한에 가서 김일성 동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서 그들이 말하기를 속으로는 “주여!” 하고 절했으니 괜찮다고 그렇게 말을 하는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그 이론대로 말한다면 금신 상에 하나님하고 절을 했더라면 괜찮을 뻔 했지 않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왜 하나님이 한국 교회에 오늘날 진노하시고 복을 주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많은 한국교회 목사나 장로나 성도들이 타협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 절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것을 타협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북한에 내 동포, 내 민족이라고 하더라도 그곳에 가서 김일성 동상에 엎드려 절하고도 가슴을 펴고 돌아와서 교회에서 찬송 부르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나요? 그런 위선을 하나님이 받아줄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목숨을 바쳐서 다른 신에 절하지 않고 우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말을 즉시로 왕에게 고자질하매 왕이 진노해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불러서 “너희 과연 그렇게 했느냐?” 그리고 왕이 명령하기를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 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최후의 통첩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벼랑 끝에 섰습니다. 어찌할까요? 뒤로 물러가서 임금의 명령대로 금신 상에 절을 할까요?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죽음을 향해서 한발자국 내딛을까요? 이 세 사람은 믿음을 택했습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 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느브갓네살왕이 치를 떨고 분도막심해서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풀무 불을 칠 배나 뜨겁게 하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묶어서 당장 저 불 가운데 던져라 했습니다. 불길이 얼마나 센지 던지러 들어간 군인들조차 타 죽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불속에 들어가는데 결박이 풀리자 세 사람이 아닌 네 사람이 불 풀무 가운데서 춤을 추고 함께 손을 잡고 뛰놀았습니다.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했을 때 낭떠러지에서 믿음으로 나갔을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셔서 받아 주신 것입니다. 불의 세력을 멸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손을 잡고 춤을 춘 것입니다. 불은 모든 묶은 밧줄은 태워 버렸지만 그들은 조금도 불에 상함을 받지 않았습니다. 놀란 느브갓네살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하나님의 종이여 밖으로 나오라. 그들이 나왔는데 보니 머리도 타지 않고 옷에 그은 냄새도 없었습니다. 얼마나 느브갓네살이 감탄을 했던지 그가 조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자가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 터로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더라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이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벼랑 끝에 서서 세상을 택하지 않고 하나님을 택한 그들의 믿음은 위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살면서 크고 작은 벼랑 끝에 서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온갖 비난을 당합니다. 주일날 큰 대가 집에서 제사 지내는데 오늘은 교회 나가지 말라고 하는데 교회를 갈 것이냐? 집안에 함께 모여서 제사를 드릴 것이냐? 내가 교회를 나가면 온 집안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고 욕을 얻어먹고 비난을 당할 것인데 벼랑 끝에 섰습니다. 타협할 것이냐, 믿음으로 갈 것이냐? 이것도 벼랑 끝에 선 것입니다. 주일날 모임이 있는데 하나님 섬기러 교회에 나갈 것이냐, 안 나갈 것이냐. 이것도 선택의 벼랑 끝에 선 것입니다. 내가 빚을 지고 생활이 굉장히 어렵고 먹고 살기도 힘든데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릴 것이냐, 드리지 말 것이냐. 선택의 벼랑 끝에 섰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벼랑 끝에 설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적은 벼랑 끝에 설 때도 있고 큰 벼랑 끝에 떨어져서 다리나 부러질 정도의 벼랑이면 좋겠지만 천길만길 벼랑위에 서있으면 떨어지면 가루가 되는 것입니다. 벼랑 끝에 서서 우리가 살아남을 길은 믿음의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없습니다. 귀에는 아무소리 안 들립니다. 손에는 잡히는 것 없습니다. 인간으로써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오직 주를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만 의지하고 눈 딱 감고 벼랑에서 한 발작 내딛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위대한 선조들이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3. 우리가 당하는 크고 작은 벼랑 끝 인생
우리가 당하는 크고 작은 벼랑 끝 인생을 우리가 한번 살펴보십시다.
왜 우리는 벼랑 끝에 서야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냐, 세상이냐를 결단할 것을 요구합니다. 정말 네가 하나님을 택하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택하느냐? 그 선택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벼랑 끝에 세우는 것입니다. 죽고 망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겠느냐? 하나님이 물으신 것입니다. 바로 다니엘이 그런 벼랑 끝 체험을 했습니다. 파사왕 다리오가 전 나라를 새 총리에게 맞기고 총리 밑에 관리들을 세워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다니엘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지혜와 총명이 탁월하고 정직, 성실, 근면, 충성했습니다.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특별히 사랑해서 총리 중에 수장 총리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총리들이 시기를 하고 관리들은 동원해서 다니엘을 아무리 책잡으려고 해도 흠 잡을 데가 없어요. 그래서 그들은 다니엘의 신앙으로 책을 잡을 것입니다. 착실한 신앙으로 포로로 잡혀온 땅에 있으면서도 하루에 세 번씩 꼭 예루살렘을 향해서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하는 다니엘을 보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리오 왕에게 가서 “다리오 왕이여 다리오 왕만 숭배하기 위해서 30일 동안 이 나라에 어떠한 사람이나 신에게 절하든지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 어명을 내리소서. 나라의 기강을 잡아야 됩니다.” 왕이 들으니 귀에 고소한 소리란 말입니다. 그래서 30일 동안 어떠한 사람이나 어떠한 신에게 기도하거나 절하면 사자 굴에 던진다는 어명을 발표하고 의인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그들은 다니엘의 집에 숨어서 망을 봤습니다. 그때는 감시 카메라가 없었기 때문에 눈 카메라를 쓸 수밖에 없어요. 두 총리와 관원들이 다 다니엘을 보니까 다니엘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세 번씩 동쪽 창문을 열어놓고 다락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다니엘은 백척간두에 진일보한 것입니다. 벼랑 끝에 서서 타협하지 않고 죽으면 죽으리다 믿음으로 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 하였더라”
그러니 뭐 다니엘이 별도리 없이 잡혔지요. 다리오가 다른 총리들과 관리들이 시기해서 그런 줄 알아서 다니엘을 구출하려고 했지만 자기가 스스로 어명을 내리고 도장을 찍었기 때문에 거부할수 없어서 다니엘을 잡아서 포박해서 사자 굴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밤새도록 왕은 근심하고 염려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사자 굴에서 “네가 항상 섬기는 하나님이 너를 능히 구원하였더냐? 다니엘아!” 사자 굴에서 다니엘이 말했습니다. “왕이여 만 세수 하옵소서. 나의 섬기는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서 사자의 입을 봉하여 나를 안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왕이 기뻐해서 다니엘을 끌어내고 다니엘을 참소한 총리들과 그 가족들은 사자 굴에 던져 넣으니 땅에 떨어지기 전에 사자가 일어나서 발톱으로 할퀴고 뼈를 깨물어서 먹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백척간두의 진일보를 할 때에 하나님이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타협하면 안 됩니다. 뒤로 돌아서면 안 됩니다. 성경에는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벼랑 끝에 서서 살아갈 길은 믿음의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을 때 적고 큰 벼랑을 체험해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냐 세상이냐를 확실하게 마음속에 선택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또 벼랑 끝에 서는 이유는 진짜 믿음이냐 가빠 믿음이냐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가짜 믿음은 절대로 벼랑 끝을 떠나지 않습니다. 가짜 믿음인데 내가 벼랑에 발을 내디딥니까? 가짜 믿음은 그냥 뒤로 물러가고 말지요. 교회 그냥 왔다갔다 형식적으로 의식적으로 믿는 사람이 벼랑 끝에 서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 한국이 일정 36년 동안에 큰 고난을 겪었습니다. 교회는 모두다 교회에 강대상 뒤에 일본 신 가미다나를 설치해 놓고 그 가미다나에게 먼저 절하라고 했습니다. 많은 교회와 주의 종들이 타협했습니다. 일본 신에 절하지 아니하면 잡혀가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순교까지 당했습니다. 많은 성도들과 많은 주의 종들이 타협을 해서 일본신 앞에 절을 했습니다. 진짜 믿음이냐, 가짜 믿음이냐 시험해서 벼랑 끝에서 그들은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또 많은 주의 종들과 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걸고 일본 신에 절하지 않고 믿음으로 발을 내딛었습니다. 그들은 잡혀서 혹독한 고문도 당하고 죽임도 당했습니다. 대표적인 순교자가 주기철 목사님이 아니십니까? 나는 주기철 목사님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저리는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 형사가 나중에는 판자에 못을 거꾸로 다 박아 놓고 못이 숭굴숭굴 난 곳에 주기철 목사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으면 맨발벗고 그 못위로 걸어가라 했습니다. 여러분 못 위에 맨발벗고 어떻게 걸어갑니까? 그러나 주기철 목사님은 옷을 그대로 들고 맨발벗고 그 못이 박혀진 판자 위를 걸었습니다. 발자국마다 못에 찢어져서 피가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판자 끝까지 걸어 올라갔습니다. 그 이후로 주기철 목사님은 병을 얻어서 세상을 떴습니다. 순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그렇게 핍박한 일본형사는 그 이후로 자살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입니다. 여러분 타협하지 않고 백척간두에 진일보한다는 것은 진짜 힘든 일입니다. 진짜 믿음이냐, 가짜 믿음이냐는 것은 벼랑 끝에 세워야 증명이 됩니다. 진짜 하나님을 믿으면 벼랑에서 뛰어 내리라고 그럽니다. 못 뛰어 내리면 안 믿는 것이지요. 믿음이 약한 것이지요.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나이 75살입니다. 1살 때부터 75살까지 갈대아 우르에서 살았습니다. 이제 은퇴할 나이에 하나님께서 하루 그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 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 내 나이 75살에 어디로 갑니까?” “갈 곳은 몰라도 좋다. 너는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빈 손들고 너의 아내와 함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우리 그것 쉽게 생각하지만 요사이 하나님이 우리보고 이렇게 말하는 것과 한가지입니다. “너 한국에 있는 모든 재산 다 버리고 아내 손잡고 이민을 떠나라.” “어느 나라를 갑니까?” “그것 물을 필요 없다. 공항에 가면 알게 될 것이다.” 기막힌 일입니다. 재산 다 버리고 아내 손만 잡고 어느 나라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공항으로 나가라고 하니 모든 사람이 미쳤다고 할 것이 아닙니까? 자기 자신도 자기를 미쳤다고 생각할 것 아닙니까? 정말 벼랑 끝에 선 믿음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정말로 믿으면 그대로 순종할 것이고 안 믿으면 순종 안할 것입니다.
창 12: 1에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히 11: 8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어디로 갈지 모르고 나갔어요. 그는 정말로 벼랑 끝에 서서 눈 딱 감고 믿음으로 인생을 재출발한 것입니다. 나이 75살에 인생을 재출발한다. 자기 아내를 데리고 이민을 떠난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런 점에 있어서 우리보다 탁월한 믿음의 용사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가 되어 아들을 얻었는데 그 아들이 소년이 되어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친구가 되고 대화의 대상이 되고 함께 자고 함께 먹고 함께 생활하는 그 귀한 아들을 하나님께서 하루 말씀하셨습니다. “네 독자, 네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 데려가서 잡아서 각을 떠서 장작불로 태워 재물로 드려라.”
창 22: 1~ 2입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청천벽력입니다. 이것이 왠말입니까? 100살에 낳은 아들이 이제 소년이 되었는데 이를 잡아서 각을 떠서 장작불에 태워서 재물로 드리라니 벼랑 끝에 서도 보통 벼랑 끝이 아닙니다. 천길만길 난간에 떨어질 벼랑 끝에 섰습니다. 순종을 안 하자니 하나님을 배반하고 버리는 것이고 순종하자니 너무나 힘이 들고 괴롭습니다. 아마 밤새도록 아브라함이 울고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차라리 나를 재물로 드리게 해주십시오. 나를 죽여서 재물로 드리라면 내가 하겠습니다. 아들만은 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이것만은 면하게 해주시옵소서.’ 밤새도록 아브라함은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기록 안 해도 부르짖을 것은 예수님조차도 십자가를 앞두었을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했는데 아브라함이 기도 안했을 리가 있습니까?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시험만은 옮겨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안 돼! 그 아들을 바쳐!’ 벼랑에 선 아브라함은 ‘나는 못 믿겠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 수 없습니다. 뒤로 물러가겠습니다.’ 물러 갈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묵묵하게 그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사흘 길을 걸어가서 아들을 묶어서 장작불 위에 묶어 놓고 그의 목을 자르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말씀했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아들 네 독자 이삭에게 손대지 말라. 네가 외아들도 아끼지 않고 내게 드리는 것을 보니 참으로 나를 사랑하는 줄 아노라.’ 시험에 합격했던 것입니다.
히 11:11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백척간두에서 그는 믿음으로 발을 옮겨 놓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거에요. 우리 보통 사람은 그렇게 못해요. 하나님이 이런 시험은 여러분이나 제게 내리시면 우리는 감당 못해요. 아브라함이 얼마나 위대한가. 그는 이런 시험을 당했을 때 백척간두에서 발을 내디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TV를 보시면 번지 점프하는 것 종종 보시죠? 우리 한국에 탤런트들이 가서 번지 점프하는 것 저도 여러 번 보았는데 그 줄을 묶고도 번지점프 뛰라면 내려다보고 못 뛰고 내려다보고 못 뛰고 벌벌 떠는 것을 보았습니다. 번지점프 줄을 분명히 묶어 놓은 것을 알면서도 뛰어 내리기가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 번지점프는 줄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냥 믿음으로 뛰어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택하지 않고 하나님을 택한다는 이 마음에 결단, 믿음이 진실성을 보여주는 이 시험 정말 힘든 일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시험을 여러분에게나 저에게는 안주시기를 바랍니다. 겁이 나서 감당할 것 같지가 않아요. 하나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정말로 여러분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 있고 감당하지 못할 시험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할 때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치 말아 달라고 우리가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험을 감당할 수 있으면 그는 위대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벼랑 끝에 서는 이유는 천국 소망의 진실성을 시험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가 진짜 천국 소망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냥 종교적으로 형식적으로 의식적으로 왔다 갔다 하고 천국 소망이 진실하지 않느냐. 이것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고난이 다가오는 것은 진짜로 믿느냐? 안 믿는냐? 진짜 천국 소망이 있느냐 없느냐를 시험하기 위한 것입니다.
롬 8:17에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고난을 통해서 우리 천국 소망이 진실함을 하나님은 증명해 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벧전 4:12~13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멘소래덤(Mentholathum)을 만들어 미국의 거부가 된 A. A. 하이드(Hyde)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사이는 별로 맨소래덤이 없지만 우리 어릴 때는 추우니까 손발이 터지잖아요. 쩍쩍 갈라지는데 그때 유일한 치료제가 맨소래덤이었습니다. 맨소래덤을 바르면 쏴악하고 부드러워지고 낫습니다. 여러분도 맨소래덤 발라본적 있습니까? 노인들은 있어도 젊은 사람은 맨소래덤이 뭔지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맨소래덤은 미국의 A. A. 하이드(Hyde)라는 사람이 발명해서 사업을 한분인데 초창기에 맨소래덤 사업을 하다가 10만 달러의 빚을 지고 도산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너무 너무나 사업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그만 두느냐, 안두느냐의 백척간두에 섰습니다. 낭떠러지에 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십일조를 냈습니다. 그러니까 온 가족들이 다 “당신 미쳤어? 10만 불이나 빚을 지고 있으면서 십일조를 내?” 사원들도 다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10만 불 빚은 사람에게 진 빚이요, 십일조는 하나님께 진 빚이다. 하나님께 빚지고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느냐? 하나님이 복을 주면 사람의 빚은 쉽게 갚을 수 있다.” 그는 백척간두에서 믿음으로 발을 내딛었습니다. 낭떠러지에서도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 충성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사업이 성공하기 시작해서 거부가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습니다. 10만 불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 갚아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때이후로 맨소래덤을 통해서 그는 많은 선교 사업을 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가 낭떠러지에 섰을 때 믿음의 진실성을 확정하고 정말 하늘나라가 그에게 중요한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늘나라가 확실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드릴 십일조는 하나님 앞에 드릴 세금이다. 하나님께 빚지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해서 그들은 하나님께 큰 복을 받은 것입니다.
또 벼랑 끝에 서는 이유는 믿음에는 기적의 날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독수리가 새끼들을 길러서 상당히 자라게 한 이후로 둥지에서 아무리 새끼들을 나오라고 해도 안 나와요. 그러면 독수리가 새끼들을 굶주립니다. 굶어서 배가 고파서 못 견디니까 나중에는 어미 날개위에 올라타지요. 타면 높이 하늘로 올라가서 새끼를 떨어뜨립니다. 그때까지 독수리 새끼는 날개가 있는 줄 몰라요. 자기 날개가 있음에도 날개가 있는 줄 모르는데 높은데서 떨어뜨리니까 안 죽으려고 발버둥을 치다 보니까 ‘어? 날개가 있네? 내가 나는 줄 몰랐어. 왜 내가 높은 데를 두려워했는가!’ 그렇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이 벼랑에서 밀쳐 버리는 이유는 여러분은 모르는 사이에 예수 믿을 때 믿음의 날개가 달린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왜, 믿음에는 기적이 따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음은 어떤 기적이 따르는지 보세요.
막 11:23~24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야! 그거야 보통 사람이 될 수 있느냐? 특별한 사람이 되지요.’ 아니요,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었는데 아직 믿음의 날개가 난 줄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벼랑에서 밀어 버려야지요. 떨어지다 보니까 발버둥을 치고 철야기도도 하고 새벽기도도 하고 혹은 금식도 하고 벼랑 끝에 서서 발버둥을 치다 보니까 믿음대로 되는구나. 야~ 나도 믿음이 있구나. 벼랑에 떨어진 경험이 많이 있을수록 믿음이 있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한 번도 벼랑에 안 떨어진 사람은 믿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나 벼랑에 떨어질 때는 죽기 아니면 살기라. 주여 믿습니다하고 얼마나 고함을 칩니까? 그래보니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벼랑 끝에서 믿음의 날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벼랑 끝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크리스챤 교회의 로버트 슐러 목사님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절벽 가까이로 나를 부르셔서 절별 가까이로 다가갔습니다. 절벽 끝에 더 가까이 오라고 하셔서 더 다가갔습니다. 그랬더니 절벽에서 겨우 발을 붙이고 서있는 저를 절벽 아래로 뒤에서 밀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는 그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하고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때까지 내가 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곤두박질하며 떨어지면서 갑자기 발견한 것은 내게 날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훈련을 통하여 우리는 믿음의 기적의 날개가 있음을 깨달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벼랑 끝에 서야 믿음으로 인생을 살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아, 이제는 인간의 수단과 방법과 노력으로 살지 않고 내가 주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신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지난 4월 23일 순복음 가족신문에 류근하 장로님의 이야기를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 장로이시고 서울 e병원 원장이신 류근하 장로님은 전통적인 유교 가정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 친구를 따라 동네 교회의 부흥회에 갔다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그만 신앙을 다 팔아먹고 교회 안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청년이 되어서 장가를 들었는데 신부가 열심 있는 신앙인이라 오늘 우리교회 김희원 권사님인데 그 신부의 격려로 다시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장가 잘 들어야 돼요. 예수 믿는 부인 안 만났으면 류근하 장로님은 세상으로 흘러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부인의 권유에 의해서 다시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 장로님은 동료들과 히말라야 카라코람 산맥을 등반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파키스탄과 중국 접경에 위치한 카라코람 산맥을 오르기 시작해서 8천m 봉우리에 도착했습니다. 여러분 8천m 봉우리란 굉장히 높습니다. 저도 4천m까지 올라가 봤는데요. 숨이 답답해서 기적초풍을 했습니다. 허허허허. 숨이 턱에 닿는데 정신을 못 차리겠어요. 장로님이 뭐한다고 8천m까지 올라갔는지… 좌우간 8천m에 올라갔는데 점점 눈보라가 매섭게 치고 대원들의 호흡이 거칠어졌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앞에 가던 대원 한사람이 발이 미끄러지면서 천길만길 벼랑에 떨어져서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순간에 같이 가던 대원들은 전부 얼어붙었습니다. 그들은 모두다 벼랑 끝에 섰습니다. 인생이 이렇게 순식간에 죽을 수 있구나. 인생은 언제나 벼랑 끝에 선 존재구나 거기에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입니다. 장로님은 출발 때 아내가 가방에 넣어줬던 작은 성경책을 꺼내서 베이스캠프에서 추도예배를 인도했습니다. 동료의 죽음 앞에서 그들 모두는 얼마나 인간이 연약한가를 숙연하게 느꼈습니다. 장로님 역시 창조주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절감하고 예수님을 섬기는 일이 가장 가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아서 그날이 바로 장로님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등반에서 돌아온 장로님은 모든 일의 최우선을 하나님 섬기는 일,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하루도 빠짐없이 가정예배를 인도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니 축복받아서 병원도 번창하고 돈도 많이 벌었어요. 현재 류근하 장로님은 베트남, 필리핀, 아프리카, 케냐 등지로 의료선교를 다닙니다. ‘선한사람들’을 통해 아프리카 케냐에 케어센터를 짓는 데에도 동참했습니다. 무섭기로 소문난 마사이족을 찾아가 의료봉사도 하고, 한국에서는 쪽방과 탑골 공원 노인들, 장애인들의 베다니 마을을 찾아다니며 정기적으로 진료도하고 있습니다. 매년 한 차례씩은 우리 교회 선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오는 선교사님들에게 무료로 건강 검진을 베풀어 주시고도 있습니다. 교회에 등한했던 한 청년이 인생의 벼랑 끝에 서는 경험들을 통해 진정한 신앙인으로 변화되어 버리고 만입니다. 벼랑 끝 인생은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진실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도 한몫하고 하늘나라도 한 몫 하던 타협적인 신앙은 벼랑 끝에서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허무하고 순식간에 있는 것 없는 것 다 잃어버리고 생명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류근하 장로님은 바로 히말라야 등반에서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나면은 그 다음부터는 세상 중심으로 살지 않고 하늘나라 중심으로 살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사는 것만이 인생에 유일한 가치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사람들은 벼랑 끝에 서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크고 작은 벼랑을 우리 생활 가운데 늘 보내어서 벼랑 끝에서 우리 인생이 결단을 내리고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진실한 신앙이냐, 가짜 신앙이냐,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세상을 사랑하느냐, 믿음으로 살겠느냐, 세상을 따라 살겠느냐?”를 결단 짓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 벼랑 끝에 선 신앙에 살아남을 길은 믿음의 길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벼랑 끝에 섰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서 함께 고난당할 것이냐, 도망칠 것이냐, 예수님이 사로잡힐 때 그들은 다 벼랑 끝에서 도망치고만 것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 그들이 다시 하나님 사업에 들어섰을 때는 벼랑 끝에서 목숨을 바치고 믿음으로 발을 내딛었습니다. 한 사람도 뒤로 물러가지 않고 끝까지 순교를 당할 때까지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벼랑 끝에서 우리가 믿음을 실천할 때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받아 주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벼랑 끝에 섰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서 믿음의 결단을 내리고 뒤로 물러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뒤로 물러가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주여 믿나이다. 믿음을 보여 다오. 어떻게 보여 드릴까요? 벼랑 끝에 서라. 나를 믿고 뛰어 내리라. 이것이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에게 명하시는 명령인 것입니다. 벼랑 끝에 설 때에 이상한일 당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은 이 벼랑 끝에 서므로 증명되고 성장하고 발전하고 능력 있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인생에 크고 작은 벼랑 끝에 끊임없이 서게 됩니다. 벼랑 끝에 서므로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중심에 서게 되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벼랑 끝 시험에서 뒤로 물러가지 말게 도와 주시옵시고 낙심하여 패배하는 자 되지 않게 도와 주시옵시고 벼랑 끝에서 벼랑 끝을 통하여 믿음의 날개를 활짝 펴고 믿음으로 기적으로 나는 성도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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