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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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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의 축복
설 교 : 조 용 기 목사
말 씀 : 행 2: 1 ~ 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서론]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성령강림의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순절은 유월절이 지나고 난 다음 50일째 되는 날이 오순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이후에 50일 만에 오순절 날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순절 날에 예수님의 제자들과 여 제자들 약 12여명이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서 간절히 뜨겁게 기도했는데 아침 9시에 갑자기 하늘에서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처다 보니까 모든 사람 머리위에 불이 혀가 낼름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더니만 성령이 충만해지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데 모두다 얼굴이 벌겋게 되고 성령의 은혜가 충만해요. 술 취한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지금이 몇 시인데 새 술에 취하느냐. 아침 9시에 술 마시고 취하는 사람 보았느냐? 이는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선지자 요엘이 말씀한대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성령으로 이 땅에 다시 강림하셔야만 되었습니까?

[본론]
1. 하나님의 생기로 생령이 된 아담
먼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생기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체는 흙으로 지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땅에 흙을 가지고 생명체를 지었습니다.
창 2:19~20에 “야훼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아담은 흙으로 지으시고 하나님의 생기 즉, 히브리어로 말하면 ‘루아흐’ 하나님의 숨 바람인 것입니다. 훅! 내어 쉬는 숨 바람을 코에 불어 넣으시니 아담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창 2: 7에 “야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그래서 이 생기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숨 바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숨 바람을 흙속에 불어 넣으니 아담이 생령이 되어서 사람으로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삶은 이중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동물과 같이 흙으로 지음 받은 육체를 가지고 있으니 육체의 모든 요구를 가진 동물적인 삶과 동시에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영이 들어 있으므로 또 신령한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창 1:26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육체로 지음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을 닮은 영으로써 지음을 받아 육체 속에 거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욥33: 4에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체를 가지고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다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영이 이속에 있어서 영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고 교통하며 함께 지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 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은 영이 그만 생명력을 잃고 만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도랑물은 샘물에서 나온 물줄기에서 끊어지면 썩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이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므로 썩어져 버리고 죽은 것입니다.
롬 5장 12절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사59: 2에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허물과 죄로 인간은 죽어 버렸습니다. 다시 영적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생기인 성령이 속에 들어와야만 되는 것입니다. 죄가 사람과 하나님을 가리웠으므로 죄 사함을 받아야 되고 그다음에 하나님의 생기인 성령이 들어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사함을 가져오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를 흘려 우리 죄악을 청산하시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을 헐어 버리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생기인 성령이 우리 속에 불어 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써 거듭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롬 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 이니라”
예수를 통해서만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 수양과 도덕과 노력으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성령바람이 불어와야 됩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다시 우리 속에 들어와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오순절 날의 기적
오순절 날의 기적은 죽은 인생들 위해 불어온 하나님의 생기의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겔37: 1~10은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한번 이 성경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야훼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 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야훼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야훼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 주 야훼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야훼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 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야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놀라운 말입니다. 마른 뼈에 생기가 들어오니 살아나서 큰 군대가 되었더라. 상징적인 귀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이 세상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영이 죽어 법적으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인본주의로 마른 뼈같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볼 때는 영이 죽은 마른 뼈다귀 골짜기인 것입니다. 마른뼈다귀들이 골짜기에서 부딪히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마른 뼈다귀 같은 인생들이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보혈로 헐어 버리시고 난 다음 성령바람 불어오시므로 성령을 통하여 이 마른뼈다귀가 살아서 일어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오순절 날에 성령의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생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아담, 하와 이후로 버림받고 마른뼈다귀 같은 죽은 인생들 위해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와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신령한 자녀들로 살아 일어나게 만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령바람은 죄인을 죽은 마른 뼈 가운데서 깨어나 예수님을 믿고 영적인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롬 8: 2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선교사였던 리빙스턴은 의사라는 직업을 통해 원주민들의 병을 고쳐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사역에는 성령의 강한 역사가 나타났는데, 친구였던 베네트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이런 상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이곳에 와서 많은 일을 겪었네. 지금은 20킬로미터나 떨어진 먼 곳에서 온 병자까지 치료하고 있지. 여기 사람들은 수술할 때 아주 잘 참네. 부인들도 직경 1센티미터나 되는 상처를 칼로 째도 전혀 울지 않지. 하지만 이들도 성령의 역사 앞에서만큼은 견디지 못하네. 어떤 사람은 아이처럼 소리쳐 울기도 하고,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견디지 못하면 교회 밖으로 뛰쳐나가 도망가듯 울면서 질주하기도 하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다시 안 올 것처럼 도망간 사람들이 다음 집회에 또 출석한다는 사실일세. 그리고 이런 과정을 몇 번 거친 사람들은 순순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성령의 강한 바람은 양심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가 죄의 문제를 건드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책을 받아 괴로워 견디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임한 강한 성령의 바람은 주위의 3천 명의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있던 불신의 세력을 몰아내고 주님 앞으로 나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바람 불어오면 마음속에 죄를 깨닫게 만들어 주고 죄를 토하고 고백하게 만들어 주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살아 일어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죄악의 무거운 바위에 눌려서 죽었던 생명이 죄악의 바윗돌이 옮겨지고 죽었던 생명이 살아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바람은 사람들의 영혼을 다시 살려서 하나님과 교통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성령바람은 세상에 썩은 귀신 바람을 쫓아내고 천국이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죽었기 때문에 죽은 영인 귀신 바람이 불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온 세상에는 귀신 바람이 꽉 들어찼어요. 정치계, 경제계, 사교계, 산업계, 우리 사회생활에 모두다 귀신 바람이 불어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며 귀신 바람은 사람을 하나님께로부터 멀리멀리 몰아내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의 포로가 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귀신 바람은 모든 사람의 영과 마음과 몸을 썩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오시면 이 귀신 바람을 쫓아내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마12:28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귀신 바람을 성령이 쫓아내고 하늘나라가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롬14:17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늘나라가 임하면 의로움과 평강과 희락이 넘쳐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한 부형님의 간증을 제가 들어 보았습니다. 이 부형님은 술을 자주 마시다가 심한 알코올 중독에 걸렸습니다. 돈만 생기면 술을 마셨기 때문에 가족들의 생활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는 부형님도 사태가 심각한 것을 알고 술을 끊으려고 몸부림을 쳐도 때가 늦었습니다. 약을 먹어도 안 되고 병원에 가서 치료받아도 도저히 자기 힘으로 술 중독에서 해방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아내는 하루 참다못하여 이혼을 선언했습니다. 놀란 부형님은 아내에게 사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단호했습니다.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았습니다. 짐까지 싸서 금방이라도 집을 나갈 것 같은 아내의 모습을 보고 다급한 나머지 방으로 들어가서 침대를 부여잡고 어릴 때 교회 나가면서 들었던 복음을 기억하고 “하나님 아버지여,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오니 날 좀 살려 주십시오. 나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개인도 망하고 가정도 망하고 미래도 없이 파탄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어찌해야 됩니까? 하나님밖에 나를 도울 수 없으니 주여 나를 이 알콜 중독에서 놓아 주십시오.” 아주 애타게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고함을 치고 몸부림치며 부르짖다가 보니까 혀가 고부라져 가지고서 이상한 말이 자꾸 나오거든. 자기는 그것이 뭔지 몰랐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던지 하나님이 그의 죄를 사해 주실 뿐 아니라 성령 세례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냥 입에서 고부라지고 혀가 고부라지고 방언이 나오더니만 그다음 뱃속에서 이 주먹만 한 무엇이 울컥울컥 움직이면서 올라와서 웩하고 토하면서 입에서 더러운 침, 가래가 나오는데 그냥 온 침대를 다 적실 정도로 더러운 물을 쏟아내고 가래를 쏟아내고 난 다음 갑자기 그 영과 마음과 몸이 날라 갈 듯이 가벼워지고 해방되었다는 느낌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그를 잡고 있던 알콜 중독의 귀신이 성령에 의해서 쫓겨나간 것입니다. 귀신 바람이 성령바람 앞에 쫓겨 나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해방되었습니다. 그는 알았습니다. 나는 이제 알콜 중독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알고 뛰쳐나가 그 부인을 붙잡고 “여보, 나는 알콜 중독에서 해방되었어. 나는 새 사람이 되었어.” 그러니까 부인이 “한두 번 거짓말을 해야 내가 속지. 해방되기는 뭘 해방 돼?” “아니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귀신이 속에서 뛰쳐나갔어. 며칠만 참고 기다려봐 줘. 며칠만 기다려봐 주어서 내가 또다시 술을 마시거든 그때는 미련도 없이 보따리 싸서 가서 좋다.” 하도 간청을 하기 때문에 부인이 또 한 번 속아볼 각오를 하고 며칠 기다렸더니 진짜로 다시는 술을 대지 아니하고 완전히 변화되고 새사람이 되고 부인과 함께 우리 교회에 지금도 열심히 출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알콜 중독을 가져오는 원수마귀를 쫓아내어 주신 것입니다. 성령바람은 마귀 바람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 역사 없이는 마귀 바람을 쫓아내지 못하지요. 연탄 냄새가 방에 가득하면 창문을 열어놓고 새바람이 불게 하면 연탄가스를 다 쫓아내 버리는 것처럼 마귀 바람이 불고 있는 이 세상에 성령바람이 불어오면 개인도 가정도 생활도 사회도 새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 어떤 육체적 소욕이라도 다 태워 주시는 것입니다. 더러움을 청소하고 새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성령바람이 여러분 성경에 보면 강한 바람으로 임했다는 것입니다. 강한 바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변화시키는 강한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잠잠한 공기가 아니었습니다.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휙! 하면서 온 앉은 방에 가득한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강한 역사를 일으켜 놀라운 변화를 가져올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슥 4: 6에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야훼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야훼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후 10: 4에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18세기 초 영국은 종교적인 갈등과 사회적인 혼란이 극심했습니다. 술 취함, 싸움, 도박, 도둑질, 자살 등이 전염병처럼 만연했습니다. 음주량도 급속도로 증가해서 술 소비량이 이전보다 10배 이상 늘어났습니다. 그런가 하면 천연두로 13명 중 1명이 사망하고, 장례식 횟수가 세례식의 2배를 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존 웨슬리는 자신의 성령체험을 바탕으로 영적 각성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런던의 올더스게이트에서 로마서 강해를 듣다가 성령의 불을 받았는데, 성령의 뜨거운 불이 그의 마음에 설레였습니다. 성령의 불이 그의 마음에 들어오자 그는 나가서 성령의 능력으로 영국 전역에 복음을 증거하며 성령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영국사회는 폭력과 질병, 죄악으로 물든 어두운 영국을 광명한 복음의 나라로 바꾸었으며, 영국을 폭력 혁명에서 구출한 놀라운 역사를 일으켜 주신 것입니다. 불의 혀같이 임하신 성령은 죄악의 어두움을 밝혀 암흑천지에서 광명천지로 인도해 주시는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다음 성령은 바람같이 올뿐 아니라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사람 위에 임하여 있습니다. 불은 죄악의 어두움에서 밝혀 암흑천지에서 광명천지로 인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어두워도 불을 켜면 환하고 광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성령이 불의 혀같이 각 사람에게 임하여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어두움을 성령은 와서 모두 다 밣혀 버리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요 8:12에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사람들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자기의 모든 삶이 캄캄한 밤에서 방황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오시고 성령이 오시면 마음에 어두움이 사라지고 깨달음이 들어와서 우리가 아담의 자손으로써 버림받았으나 예수 믿고 구원받아 새사람이 되어 천국을 향해서 간다는 밝은 진리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아무런 교육을 받아도 천국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의 지혜는 가지고 있지는 몰라도 영원한 지혜는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우리에게 하늘나라 지혜를 주셔서 깨닫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학교 공부를 해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수양과 도덕을 해서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계시로 마음속에 깨달음을 주셔서 어두움에서 빛으로 들어와서 우리는 영원한 미래를 밝히 바라보고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골 1:13~14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뿐 아니라 불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얼음 같은 세상의 냉기 속에 사랑의 따뜻함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개인주의가 왕성한 때가 언제 있습니까? 오늘날은 여러분 이제는 모두 다 자기 볼일하고 개인주의로 삽니다. 옛날 농경 사회 때는 사람들이 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함께 먹고 자고 함께 논과 밭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모두 다 함께 살았습니다. 가정도 대가족제도로써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 손자, 손녀 함께 대가족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내가 아니고 우리였습니다. 사회 나가도 모두다 사람들이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요사이는 우리가 없어지고 나만 있습니다. 옛날에는 전화를 받을 때라도 다른 사람이 받아도 “야! 전화 왔다. 받으라.” 그렇지만 요사이는 내손에 있는 핸드폰이 따르릉하면 내가 혼자서 받습니다. 다른 사람이 전달해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핵가족제도가 되어서 할아버지, 할머니는 말할 필요 없고 부모도 자식 시집, 장가가면 혼자입니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도 같은 집에 살지만 혼자에요. 왜, 퇴직, 퇴거 당하고 돌아오면 부인은 부인 데로 TV앞에 앉아 있고 남편은 남편대로 신문 쥐고 TV 앞에 앉고 자녀들은 컴퓨터 앞에서 자판 두드리고 있고 자기 혼자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에 가장 큰 고독은 혼자 산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함께 삶으로 내가 좀 부족해도 옆에 사람들이 도와줍니다. 나쁜 짓을 해도 ‘야! 나쁜 짓하지 마라. 잘못 가면 너 잘못 간다.’ 서로 도와주지만 요사이는 누가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고 또 말 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러므로 모두 다 자기 개인의 운명은 자기 혼자서 책임지므로 큰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얼음장 같은 개인주의의 냉기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이익 되면 받아들이고 내게 이익이 안 되면 분토와 같이 버리는 이러한 세계 속에 살고 있는 데 하나님 성령이 오시면 다시 한 번 따뜻한 사랑의 불길을 마음속에 채워 주므로 사랑 안에서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한 가족이 함께 모여 주를 섬기고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 속에서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하나가 되어 우리들이 함께 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을 잃어버리고 이기주의적이고 개인주의가 된 우리 사회와 현실 삶을 다시 한 번 나에게 우리로 함께 살 수 있는 은총은 성령의 사랑의 역사로써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롬 5: 5에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이 들어오면 마음속에 기쁨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주의 사랑이 비칠 때 기쁨 오네. 근심걱정 물러가고 기쁨 온다고 찬송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8세기 초 미국사회는 청교도 신앙을 잃어버리고 영적, 도덕적으로 깊이 병들어 있었습니다. 특히 청년들의 방종은 극에 달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던 조나단 에드워드는 하나님께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셔서 미국을 변화시켜 달라고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는 가정마다 젊은이들을 찾아다니면서 회개와 각성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던 1733년, 청년들 사이에 강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들을 중심으로 타락해 가던 미국 사회에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에드워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의 임재로 인해 사람들은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했다. 가정마다 그 위에 임한 구원으로 기쁨을 누렸다. 성령의 임재는 교회에도 가득해 주일은 기쁨의 날이 되었고 교회는 사랑의 처소가 되었다.” 성령이 임하자 죄악이 떠나가고 미움의 냉기가 사랑의 온기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성령은 죄악의 어두움을 광명천지로 바꿀 뿐 아니라 얼음 같은 세상의 냉기 속에 사랑의 따뜻함을 가져와서 기쁨이 넘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어야 기쁨이 있지 미움이 있는 곳에는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이 임하였다는 것은 우리의 생활 속에 냉기를 없애주고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으로 채워 주므로 기쁨을 회복해주고 나아닌 우리들이 손잡고 앞에서 끌어주며 뒤에서 밀며 협력해서 살아갈 수 있는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면 사랑의 불이 임하는 것입니다. 기쁨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출석해서 교회에 사랑이 끓지 아니하면 성령의 역사가 임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교회에 기쁨이 충만하지 아니하면 성령의 역사가 임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사랑의 불길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럴 뿐 아니라 성령의 불은 더러움을 태우는 소독하는 불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좋은 소독 방법은 불로써 태우는 것이 제일 좋은 소독방법입니다. 성령이 불로써 나타난 것은 우리를 소독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죄악의 박태리아와 병균으로 꽉 들어찬 우리 삶을 영과 마음과 몸을 성령께서 임하여서 소독해 주시겠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1907년 대 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에서 선교사들이 모여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며 기도하다가 성령의 불을 받은 데서 출발했습니다. 이 불이 서울의 정동 감리교회와 승동 교회로, 평양의 남산현 교회와 장대현 교회, 남문 교회로 옮겨 붙었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평양 장대현 교회의 부흥은 놀라웠습니다. 2천 명이 넘는 신자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통회 자복하는 바람에 그들의 기도소리로 교회당 지붕을 날려 버릴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어떤 어머니는 피난을 가다가 자기 아이를 강에 빠뜨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 온 죄를 고백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간통한 죄를 자백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둑질, 간음, 미움, 질투 등 온갖 더러운 죄를 한꺼번에 토해 놓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습을 두려워서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서 뛰쳐나가 도망을 치다가 무슨 강력한 힘에 이끌려 도로 교회로 돌아와서 뒹굴며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죄를 토해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거꾸러져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춥기로 유명한 평양의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저녁 7시에 시작된 부흥회는 새벽 2시가 되어도 끝날 줄을 모르고 사람들은 모두 성령의 은혜에 취해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이 아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일입니다. 한국에 유교와 불교가 엄한 시대였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것이 한국 사회의 줄이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성령이 임하니까 만사를 제켜 놓고 아침, 저녁 7시부터 새벽 2시까지라도 성도들이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통회하고 자복하는 운동이 일어나서 그 불길이 한국에 넘쳐나 오늘날 한국교회에 기독교 부흥을 일으키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임하면 우리 안에 온갖 더럽고 흉악한 죄들이 드러나고 모든 육체적 소욕이 한꺼번에 태워집니다. 죄악의 암흑천지가 광명천지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성령이 임하실 때 그들이 다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방언이라는 것은 우리말이 아닌 이방 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말이 아닌 천사의 말을 하는 것을 방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천사의 말이나 내가 모르는 이방의 말을 말할 때 방언으로 말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방언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갖는 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말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말로 다할 수 없는 심정이 되면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 원통하고 너무나 답답하면 말이 안 나오지요. 한나가 엘리제사장이 있는 앞에서 기도할 때 말을 못하고 입술만 들썩 거리니까 엘리제사장이 “한나여! 언제까지 술이 취해 있겠느냐?” 그러니까 그때 한나가 “여종은 술이 취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마음이 답답해서 원통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입술만 들썩 거립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에 너무 간절하고 한이 서리면 사람의 말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방언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우리 속을 시원하게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고 하나님과 비밀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비밀을 말하는 사이가 되면 굉장히 친한 사이지요. 친하지 않는 사람에게 비밀 말하지 않습니다. 나하고 굉장히 친해서 운명 공동체가 되어야 비밀을 말합니다. 우리가 보통 다 하나님께 말하면 옆에 사람들이 다 듣지요. 그러나 방언으로 말하면 옆에 사람이 들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가 영으로 하나님과 비밀을 말합니다. 방언으로 말하면 그만큼 하나님과 우리를 친밀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그 때문에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많이 말하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고전14: 2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고전14:15에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고 말로써 기도하고 방언으로 노래하고 말로써 노래하겠다고 바울은 말한 것입니다.
또 방언은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서 친히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합니다. 내일 일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내 주변에 어떠한 어려움이 다가올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령은 그것을 알잖아요. 성령이 우리를 통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롬 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우리를 점령해서 우리의 혀를 통하여 직접 기도하는 것이 방언기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려움을 당할 때 내 주위 환경에서 부모, 형제, 자녀 중에서 문제를 당할 때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럴 때 방언으로 기도하면 기도가 응답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자매님 한분 남편이 시외버스 기사인데 부흥회 참석해서 낮 부흥회 참석했는데 갑자기 마음이 너무 무거워지고 너무너무 억압되어서 무엇때문지 그런지 모릅니다. 방금 부흥사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있는데 앉아있는데 미칠 것 같아요. 마음이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입을 가리고 방언으로 자꾸 기도했습니다. 부흥회가 다 끝날 때까지 방언으로 기도를 했는데 부흥회 끝날 쯤되서 마음이 시원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얼마 있지 않으니까 남편이 얼굴이 백지장같이 되어서 들어왔더랍니다. 하는 말이 “누가 나를 위해서 오늘 기도했지? 기적 아니었으면 내가 죽었다. 버스를 운전하고 가는데 경사진 곳을 올라가다가 그만 엔진이 꺼졌는데 버스가 뒤로 물러가는 것을 브레이크를 걸어놓고 버스 뒤에 돌로 고아놓고 사람들 다 내리게 하고 사람들이 마지막 내리자 버스가 그만 돌을 넘어서 뒤로 물러가서 벼랑에 두 바퀴만 걸려서 달랑달랑…” 벼랑에 떨어졌으면 자기는 박살이 나서 죽었을 것인데 차가 어떻게 바퀴가 벼랑에 걸려서 달랑달랑 하냐 말입니다. 그래서 벌벌벌 떨면서 그가 기어 나오자마자 버스가 벼랑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기적을 베풀어 주셔서 나를 살려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누가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까?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럴 때 그 시간을 맞춰보니 부인이 부흥회 참석해서 설교 듣다가 마음이 너무 무거운데 무엇을 위해서 기도할지 몰랐으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방언을 해서 기도해준 그 시간과 일치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방언기도는 우리가 연약해서 알지 못하고 기도할 바를 모를 때 성령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방언은 또한 마음을 청소하는 하나님의 빗자루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집 구석구석마다 청소를 해야 집이 깨끗해지잖아요. 저희가 어릴 때 우리 아버지, 어머님이 건물장사를 했습니다. 제가 있는 방 다락에 방 다락에 멸치, 미역, 명태 굉장히 많이 갖다 놓았어요. 그래서 다락문을 닫아 놓으면 안보이지요. 그런데 내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와서는 영락없이 무슨 고리타분한 냄새가 굉장히 난다고 이것이 뭐냐? “아니, 아무것도 없어.” “그래도 냄새가 나는데…” 저희 코에는 냄새가 나는데 친구들은 영락없이 냄새난다고 그래요. 나중에 보니까 다락 안에 있는 멸치, 명태, 미역 그런데서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집안에 그 냄새를 없애려면 보이는 곳만 소재하지 말고 다락방에 있는 그것을 치워야 냄새가 안 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삶속에도 우리의 마음속에 다락방이 있습니다. 우리 현재의식,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말하고 느끼는 현재의식 밑에 잠재의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감춰진 의식 다락방이 있습니다. 그 잠재의식 속에 우리가 세상에서 체험한 모든 고통과 괴로움, 슬픔, 좌절, 절망은 거기에 다 밀어 넣고 있습니다. 우리가 쓸데없는 것은 다락방으로 들어가라. 다락방으로 들어가거라. 내가 억울하고 원통하고 슬프고 탄식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은 기억에서 잊어버리려고 현재의식에서 잠재의식인 다락방으로 다 집어넣어 버리는 것입니다.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락방에 있습니다. 이것이 자꾸 우리 생애 속에 냄새를 내는 것입니다. 그 냄새가 골치가 아프기도 하고 관절염이 되기도 하고 폐병이 되기도 하고 위장병이 되기도 하고 암도 되기도 하고 마음에 불안, 좌절, 절망도 되기도 하고 다락방에서 자꾸 냄새를 풍깁니다. 이 다락방을 누가 청소합니다. 오늘 심리학자들이나 정신분석학자들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성령이 다락방에 들어와서 이것을 다 청소해 주고 마는 것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할 때 방언 빗자루를 들고 우리 다락방속에 마음속에 있는 것 다 싹싹싹싹… 쓸어서 성령으로 방언으로 기도하면 마음이 상쾌해집니다. 어느 학자가 발표한 것을 보니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 중에 정신병 들리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다락방 소재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28:11~12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라고 한 것입니다.
이 세상 삶에 곤비하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사람들 방언으로 말하면 마음에 상쾌하고 안식이 올 것입니다. 마음속에 모든 더러움을 다 청소해 내고 씻어내어 버리기 때문에 심신이 깨끗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결과로 안식이요, 상쾌함이 오는 것인데 성경에는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이 안식으로 주라고 말한 것입니다. 성령 받고 방언 말하기를 허락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순절 날에 방언을 주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소재해서 청결하게 해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인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오순절 마가다락방이 임하신 성령님은 오늘의 마가다락방인 교회에도 임하여서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강한 바람 같은 성령은 하나님의 생기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 제자들 모인 곳에 나타나셔서 후~욱 생기를 불어 넣으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이 성령은 하나님의 입 바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기인 것입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임한 하나님의 입 바람인 성령의 생기는 우리를 떠나지 않고 오늘날도 교회 가운데 불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마가요한의 다락방인 것입니다. 이속에 성령바람 불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강한 바람같이 불같이 방언으로 우리 속에 임하여서 오늘날도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강한 바람 같은 하나님의 생기로 불의 혀같이 어두움을 물리치고 세계 만민을 품는 만국 방언으로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이 성령을 우리가 마음에 받아들이면 우리가 새롭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3. 기독교는 성령의 역사
오늘 기독교는 학문이 아닙니다. 연구한 신학이 우리 기독교가 아닌 것입니다.
사11: 2에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라고 말씀했는데 성령이 강림해서 역사하는 것이 교회지 지식을 흠양하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성령이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으므로 교회에서 아무리 이론적으로 학문적으로 예수를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성령이 역사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주로 시인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의식이나 형식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장엄한 교회당, 내부 장식, 엄숙한 의식 등을 해놓는다고 해서 그 곳 속에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아닙니다.
요 4:24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성령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곳이 마구간이라도 성령이 계시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장사집안이라도 성령이 오시면 그것이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장엄한 교회, 아름다운 내부 장식에 엄숙한 의식이라도 성령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후 3:17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인간적인 활동이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조직을 해서 사회개혁이나 구제나 시민운동을 하는 처소가 아닙니다. 물론 교회는 우리가 사회개혁도 하고 구제도하고 시민운동도 하지만 그것이 중심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마18:20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엡 1:22~23에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고전 3:16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는 곳이지 인간의 단체가 모여서 단체 활동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당을 짓는 것은 하나님이 굉장히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조직을 해서 인간적인 일을 펼치는 것은 하나님이 원수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을 중심으로 해서 성령을 모시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봉사하는 것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흑인이 백인들만 모이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려고 하다가 못 들어오게 해서 문 밖 계단에 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엉엉 울고 있는데 교회 안에서 백인들은 모여서 예배드린다고 야단입니다. 울고 앉아 있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는데 잠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야! 너 교회 계단에 앉아서 울고 있니?” “주님, 나는 흑인이라고 해서 백인들이 예배드리면서 나를 교회당에 못 들어오게 쫓아내서 이 자리에서 울고 있습니다.” “울지 마라. 너만 우는 것이 아니라 나도 운다.” “주님이 왜 웁니까?” “나도 쫓겨나서 이 교회당에 한 번도 못 들어가 봤다.”
주 예수 대문밖에 기다렸으나 단단히 잠가두니 못 들어오시네. 오늘날 주님이 들어오지 못하게 단단히 잠궈 두는 것은 인간의 제도와 조직과 의식으로 말미암아 인간중심의 교회를 만들고 주님 중심의 교회를 만들지 않기 때문에 주님조차 쫓겨나가서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이 오셔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갖고 살아서 역사하시는 성령운동을 하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려서 죄를 용서하시고 세상과 마귀에서 해방시켜 거룩하고 은혜를 주시고 치료하시고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죽은 영혼을 살려 천당 보내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성령의 역사를 베푸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총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임하여 우리에게 크나큰 변화를 가져오는 역사를 체험해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 말하는 곳이 바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날 우리 성령 없는 교회를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 없는 교회는 비 없는 구름이요, 물 없는 우물이요, 불 없는 화로와 같습니다. 형식과 의식은 있으나 내용은 없습니다.

[결론]
오순절 날 강한 바람같이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님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바람같이 불같이 방언을 통하여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는 처음 보혜사 예수님이 오신 날이지만 오늘은 둘째 보혜사 다른 보혜사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셨다가 33년 만에 천국으로 돌아가셨지만 성령은 오순절 날에 오시고 떠나지 않고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고 역사하시는 영으로 지금도 이 자리에 함께 계신 것입니다. 성령을 인정하시면 아멘 하십시다. 환영하시면 아멘 하십시다. 의지하시면 아멘 하십시다. 성령은 오늘도 여러분 속에 강한 바람같이 불같이 생수같이 방언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을 우리에게 성취하시기 위해서 성령께서 임하셔서 우리와 같이 계심을 감사합니다. 2천년 오순절 날에 성령강림하시고 임하고 난 이후에 성령은 하늘로 올라가시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같이 거하시며 오늘 오순절 다락방인 교회를 중심으로 역사하고 계심을 감사합니다. 오! 보혜사 성령이여 강한 바람같이 불같이 방언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운행하고 역사하여 주시옵시고 살아계신 그리스도 영광을 나타내 주시옵시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이 우리 속에 체험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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