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믿고 확신한 데 거하라
본문
설 교 : 조 용 기 목사
말 씀 : 막 11:22 ~ 24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론>
‘알고 믿고 확신한 데 거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한 자매님이 심각한 건강문제로 제게 기도 받으러 왔습니다. 그는 염려하고 근심하여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 같았습니다. 계속하여 식사를 할 수 없고 몸은 쇠약해지고 마음의 고통도 심각했습니다. 그는 여러 증상으로 봐서 그가 읽은 신문기사나 TV에서 얻은 지식에 의하면 위암에 걸렸다고 단정을 했습니다. 제게 기도를 받은 후 병원에 가서 위내시경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 그저 가벼운 위염이 있을 뿐 암은 아니라는 확실한 지식을 얻었습니다. 그가 느끼던 감각이나 그가 생각하던 것과는 딴판이었습니다. 이제는 흔들리지 않은 확실한 지식, 거짓되지 않은 확실한 지식을 얻었습니다. 그가 올바른 건강 지식을 갖자 믿음이 생기고 자신이 생겨 확신하게 말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후 몸의 상태를 물어보니 아직 소화는 안 되고 고통이 있지만 위암이 아닌 것을 안 이상 조금도 두렵지 않고 건강하다는 믿음 위에서 확신에 넘치는 대답을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경을 바라보거나 감각에 의지하거나 느낌에 따라서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진짜 하나님이 주신 확실한 말씀위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 없이는 결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이 자라면 확신을 갖게 되고 믿음의 선언을 하게 되고 태산을 옮기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본론>
1.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성경 롬 10:17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적인 믿음은 세상적인 지식에서 생겨납니다. 우리 감각과 경험과 이성적 깨달음에서 오는 지식을 가지고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편국에 편지를 맡기면 목적지에 도달할 것을 믿습니다. 어떻게 믿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믿습니다. 내가 미국에 편지를 붙이든지 영국에 편지를 붙이든지 그 편지는 완전히 도달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적인 지식에 의한 것입니다. 또한 많은 돈을 은행에 맡깁니다. 은행이 돈을 떼어먹을지 어떻게 압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경험상, 통념상 은행은 믿을 수 있다고 우리가 믿기 때문에 은행에 돈을 맡깁니다. 비행기 타는 것도 보십시오. 망망한 태평양, 대서양을 일엽편주와 같은 비행기에 몸을 싣고 수십 시간을 날아갑니다. 정말 아찔한 일입니다. 그러나 비행기가 무사히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몸을 맡기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믿음이란 인간적인 경험이나 상식이나 이성에 입각해서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믿음은 그런 경험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말하기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4:6)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 물질의 세계에서 초월하여 계시므로 우리의 감각으로 느껴볼 수 있거나 하나님을 경험해보거나 이성적인 연구로써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대상을 훨씬 초월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편으로부터 말씀을 우리에게 주셔서 말씀을 듣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을 깨달아 알고 믿고 의지하는 것이지 우리는 하나님을 감각으로 느끼거나 이성으로 연구해서 깨달을 수 있는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원자력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인 정근모 박사가 쓴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 되고 싶다」는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과학자인 정근모 박사에게 종종 “신이 존재하는가?”, “과학자인 당신이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합니다. 이런 물음에 대해 정근모 박사는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부르면서 말하기를 “신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벌써 신이 아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정복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할 수는 없다. 어찌 과학으로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내 삶을 통해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 때로는 세미한 음성으로 위로해 주셨고, 때로는 나아갈 길을 인도해 주셨던 하나님을 믿는다. 지나온 삶을 반추해 보면 더욱 그것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시간, 공간, 물질의 세계에서 초월하여 계시므로 인간의 감각이나 경험이나 이성적 연구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이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계시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집대성한 것이 성경인 것입니다.
딤후 3:16에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말했으며, 히 1: 1~ 2에는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전도자였던 D. L. 무디 목사는 자신의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믿음이 어느 날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뚝 떨어질 것을 기대했지만 믿음은 오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롬10:17을 읽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제야 나는 지금까지 내가 성경을 덮어놓고 믿음을 위해 기도했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이제 나는 성경을 공부하는 동안 믿음이 쑥쑥 자라나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유명한 학자인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은 자신의 임종 시 머리맡에 있는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이여, 생전에 다소나마 세상에 알려진 사람의 마지막 말을 귀담아 들어 두게. 그것은 바로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살라는 것일세.”
하나님의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집대성한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선교사 데이빗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16년간을 섬긴 후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을 때, 글래스고우 대학에서 강의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학생들은 사자의 공격으로 한쪽 팔을 못 쓰고 수십 번의 열대병으로 초췌해진 리빙스턴의 선교 이야기를 매우 감동적으로 들었습니다. 그 때 리빙스턴은 청중에게 물었습니다. “나그네의 삶이 가져다 준 외로움과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나를 붙들어준 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순간 강당에는 정막만 흘렀을 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리빙스턴은 말했습니다. “그것은 약속이었습니다. 가장 고결한 영광을 지닌 귀하신 분이 말씀하신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바로 그 약속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기도하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그의 옆에는 손때 묻은 성경책이 놓여 있었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 옆의 여백에는 ‘존귀하신 분의 말씀’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나 세상을 떠날 때나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신다는 확신을 어디에서 얻을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뿐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을 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 말씀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일점일획도 변치 않는 것을 알고 믿습니다.
성령님의 가르침도 역시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 말씀을 우리에게 깨달아 알게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성령님의 가르치심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속에 소유되는 것입니다.
요14:26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시겠다고 했습니다.
요16:13에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우리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말씀을 떠나서 하나님을 깨달을 수 없으며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 성령의 계시가 아니고는 우리 마음속에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것은 우리의 육신의 감각이나 환경이나 느낌으로써 하나님을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지식은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이 깨달을 수 있고 내가 말씀을 받을 때 우리는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무엇을 믿을 것인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언제나 우리의 환경가운데 두 가지 믿음의 충돌을 느낍니다. 육신적인 믿음과 신령한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 감각과 이성을 통해서 자연적인 인간이 가지고 있는 믿음, 그 육신적인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오는 계시적인 믿음이 충돌할 때 어느 편을 믿어야 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매일 부딪히는 문에요, 선택해야 될 난제인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체험이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라버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오라버니가 병들어 죽자 무덤에 장사한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흘 만에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찾아 오셨습니다. 자, 세상적인 지식과 하나님 말씀의 지식 중 어느 것을 믿을 것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셨을 때 세상적인 지식을 통해서 보게 될 때는 예수님이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주님, 나흘 전에 계셨으면 우리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네 오라버니가 살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적인 지식을 통해서 보면 나사로는 죽었으니 살아나지 못합니다. 인간의 경험이나, 이성적인 깨달음을 통해서 보게 되면 나사로는 죽었고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데 어떻게 살아납니까? 인간적인 경험을 통해서 그렇게 살아난 사람이 없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죽어서 썩어져 가는 시체가 살아가지 못합니다.
요11:21에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나흘 전에 안 죽었을 때는 예수님이 오셔서 살릴 수 있겠지만 이제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 되어서 썩은 냄새가 나는 이 시점에서는 결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릴 수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환경이요, 감각이요, 느낌이요, 이성의 가르침을 따라 믿는 믿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못살아난다고 확실히 그렇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뭐라고 말합니까?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리라.’ 큰일 났습니다. 인간적인 믿음을 통해서 볼 때는 절대로 못살아나는데 하나님의 아들의 계시적인 말씀은 오라버니가 살아난다고 말합니다. 세상적인 믿음과 하나님의 믿음의 충돌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기에 마르다와 마리아는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적인 환경이나 감각이나 이성이 갖다 주는 믿음을 따를 것이냐, 하나님이 주시는 그리스도의 입술을 통해서 나온 계시적인 믿음을 따를 것이냐. 두 여인은 말할 수 없는 번민에 처한 것입니다.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감각적 믿음이냐, 계시적인 믿음이냐의 기로에 선 것입니다.
요11:39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여기에서 마르다의 대답이나 예수님의 명령은 충돌했습니다. “돌을 옮겨놓으라.” 마르다는 “아니요,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무덤에 들어가서 썩은 냄새가 나는데 옮겨 놓을 수가 없습니다.” 마르다는 세상의 환경이나 경험이나 이성적인 지식에 입각한 믿음으로 말했고 예수님은 창조적인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말씀한 것입니다. 어느 것을 택해야 됩니까? 마르다와 마리아는 샌드위치가 되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같이 와 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여 그런 열광적인 비 경험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인 행동을 너희가 하지 말라. 썩은 냄새가 나는 오라버니의 무덤의 돌을 옮기면 너희는 미치광이가 된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호하게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돌을 옮겨놓으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이냐, 세상 사람들의 말을 따를 것이냐. 세상이 주는 믿음을 따를 것이냐, 주님의 말씀이 주시는 믿음을 따를 것이냐. 정말 가운데 끼어서 선택을 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럴 때 마르다와 마리아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에 늘 머뭇머뭇하고 이것도 저것도 못하고 머뭇거리면 아무것도 안됩니다. 세상을 택하려면 세상을 따라가고 예수님을 택하려면 예수님을 따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많은 세상 사람들이 세상 사람이 생각지 않은 기발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므로 욕도 얻어먹고 미쳤다는 말도 듣고 이단이라는 말을 들어도 단호한 결단을 따르고 예수님을 따라가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음에 결단은 참으로 힘이 들지만 결단해야 합니다.
요 11:40에 예수님이 머뭇머뭇하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보고 말씀하기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결단 내려라. 내 말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그러나 결단을 내리지 아니하고 환경이나 감각이나 인간적인 이성을 의지하고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나느냐? 그리고 불신앙하면 오라버니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나는 빌리 그레함 박사의 자서전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빌리 그레함 박사가 대학을 다닐 때 신신학적인 대학에 다녔습니다. 교수님이 와서 강의를 하는데 그 강의 중에 성경은 문학작품이요, 사람이 지은 책이요,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고 자꾸 깔아 내리므로 빌리 그레함 박사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 아니면 무엇을 믿을 수 있단 말이냐. 그러면 내가 무엇을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이라고 전할 수 있겠느냐.’ 굉장히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그는 달빛이 환한 학교 뒷동산에 올라가서 성경을 가슴에 안고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주님 나는 어떻게 할까요? 교수님이 와서 가르치는 강의를 들으면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고 인간의 문학 작품이요, 인간이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고 하니 내가 그 강의를 듣다가 보니까 성경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립니다. 나는 어떻게 할까요?’ 그러자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달빛처럼 그 마음속에 들려 왔습니다. ‘너는 두말하지 말고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로 마음에 결단을 내리라. 흔들흔들 하지 말라. 세상 말에도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 말씀에도 귀를 기울이게 하지 말고 단호하게 성경은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로 마음에 결단을 내리라.’ 그래서 빌리 그레함 박사가 ‘주님 오늘 이 시간부터 교수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학자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나는 상관하지 않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로 결단을 내립니다. 오늘부터 하나님을 성경을 통해서 믿습니다.’ 그리고 빌리 그레함 박사는 일생동안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설교말씀에 언제든지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절대 권위를 가지고 설교 했고 수많은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결단을 내려야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파스칼은 “신앙이란 각 개인이 결단을 내려야할 ‘도박’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도 없고, ‘하나님이 없다’는 것도 증명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있다’고 믿기로 결단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숨어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증명하려고 하면 인간의 힘으로 증명 못합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과 물질을 초월해서 계신 분이기 때문에 무엇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다고 마음에 믿기로 결단을 하고 나가면 하나님이 계시기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고요하고 잠잠하게 은혜를 주시고 성령으로 말씀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므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경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믿음의 결단을 내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나는 믿는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을 믿고 나는 나간다. 결단을 내리고 나가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네 믿음대로 될 찌어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3. 일반적인 믿음과 확신의 차이
일반적인 믿음과 확신의 차이가 있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기는 믿어도 그 믿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확신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보면 3년 여 동안 예수님과 함께 하며 말씀을 배우고 기적을 보았습니다.
요 20:30~31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3년 반 동안 따라 다니며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사역을 보고 기적도 체험했습니다. 확실히 믿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동산에서 도전을 받았을 때 다 예수님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죽는 데까지 따라 가겠다고 고백도 했습니다. 베드로가 막14:31에 보면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 하니라.” 그래놓고 난 다음 겟세마네동산에서 대제사장이 보낸 종들과 유대인의 군인들과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모두다 예수님을 버리고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어디 있습니까? 안 믿은 것 아닙니다. 믿기는 믿었는데 그렇게 믿음이 허약했습니다. 생명을 바꿀만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제임스 케네디 박사의 「크리스챤의 생활 교리」라는 책에 보면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에서 있었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지역의 크리스챤들이 여느 주일처럼 군인들의 눈을 피해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기관총을 가진 두 명의 공산당이 들어와서 예배를 중지시키고 기관총을 내밀며 사람을 위협했습니다. 소리 질러 말하기를 “이 벌레 같은 놈들아, 너희들은 이 땅에 있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너희들을 다 쏴 죽이겠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믿음을 버리고 이 모인 장소에서 떠나가면 살려주겠거니와 끝까지 믿겠다고 버티고 이 자리에 앉아 있으면 모두 다 총살하겠다.” 그 말에 몇몇 사람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만 털털 털고 그냥 “에이, 예수 별나게 믿다가 큰일 나겠다.” 그리고 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나가지 않고 죽음을 각오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몇 사람이 나가자마자 군인들이 문을 꽉 닫고 그 다음에 총을 내려놓더니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도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가짜들하고 같이 믿으면 반드시 고발할 테니까 가짜들을 먼저 쫓아내고 난 다음에 여러분과 함께 예배드리러 왔으니 이제 안심하고 예배를 드리십시다.”라고 했다는 기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희미하면 시험을 당할 때 쉽게 예수님을 버립니다. 믿고 확신한데 거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확신한데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도 믿고 확신한데 거하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람은 그냥 믿습니다. 그냥 믿습니다. 그렇게 말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버리지요. 확신한데 거하는 사람은 목숨을 내어 놓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믿기는 믿었으나 확신한데 거하지 못했습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예수님을 다 버리고 도망을 친 것은 안 믿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기는 믿었으나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그 제자들이 한사람도 남김없이 목숨을 바쳐 순교를 당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변화시켰습니까? 무엇이 그들을 일반 믿는 자에게서 확신하는 자로 변화 시켰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실상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얻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서 보니까 예수님이 끌려가서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들은 암담한 절망에 처했습니다. 그들의 스승이요, 구주라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을 보고 암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들어간 것을 보았습니다. 확실히 보았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시절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확실히 보고 무덤에 들어간 것을 확실히 보았습니다. 그것은 거짓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흘 만에 확실히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 모임 가운데 나타나셔서 대화도 하시고 생선도 잡수시고 또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바닷가에서 음식을 준비해서 빵을 구어서 주시고 생선도 구어서 주시고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분명히 그들 앞에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보았고 분명히 장사지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 예수님이 또 부활하셔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그들의 모임 가운데 나타난 것을 너무나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보는 앞에서 주님이 하늘로 승천해 올라가고 그리고 약속한 성령을 오순절 날에 부어 주셔서 그들이 다 성령을 충만히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이 너무나 확실한 지식에 이제는 일반적인 믿음이 이라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아, 예수를 믿으면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 너무나 뚜렷하게 죽은 예수님이 살아서 그들 가운데 나타난 것을 보고 승천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걱정이 없습니다. 이제는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 살든지 죽든지 주의 것이다. 살아서 천당 가도 좋고, 죽어도 천당 가니 좋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너무나 확실하다. 이제는 그냥 믿는 것이 아니라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행 2:22~24에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확신이 죽음조차 초월하게 만들었습니다. 너무나 확실하니까. 이제 죽는 것 겁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는 말씀 너무나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육신의 장막 집 무너지면 무슨 걱정할게 있나. 내가 주님 예비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것인데, 죽이려면 죽여 봐라. 나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겠다. 이런 담대함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행 4:18~20에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보십시오. 보고 들은 것이 너무나 확실합니다. 진짜로 죽고 진짜로 장사지낸 것 보았습니다. 부활해서 나타나셔서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말씀을 나눈 것을 체험했습니다. 보는 앞에서 승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시 오겠다는 약속도 들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무엇을 의심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제는 믿음이 아니라 확신인 것입니다.
행20:24에 바울선생이 말한 것을 보면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한 것입니다.
롬 8:35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롬 8:38~39)는 이러한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유세비우스 교회사에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의 순교일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확신했든지 그냥 믿었을 때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쳤으나 죽었다가 부활해서 함께 식사를 하고 승천하고 보내신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 그들의 믿음은 확신으로 변했기 때문에 모두 다 죽음으로써 그들의 증거를 인 쳤습니다. 왜 하나님은 열두제자들 다 순교하게 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죽음으로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훗날에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제자들 모두다 순교 당하도록 주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로마에 가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고, 안드레는 헬라에 가서 전도하다가 아가야 성에서 X자형 십자가에 줄로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헤롯에게 칼로 목 베여 죽임을 당했으며, 요한은 예수님의 유언대로 마리아를 모시고 살다가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에게 멸망당한 후에 에베소에 가서 전도하다가 핍박을 당해 끓는 기름 가마에 던져졌지만 튀어나왔습니다. 놀란 박해자들이 그를 밧모 섬으로 귀양 보냈고 거기서 요한은 묵시를 받아 계시록을 기록한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 부르기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기둥에 매달려 죽임 당했고, 바돌로매는 알마니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 당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 가서 전도하다가 창에 맞아 죽었으며, 마태는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목 베임 당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곱은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뜨려져 죽임 당했으며, 가나안인 시몬은 애굽에 가서 전도하고 유대에 돌아와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죽었고, 야고보의 아들 유다는 바사에 가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죽었습니다. 가룟 유다 대신 선출된 제자 맛디아는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고난 앞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던 제자들이지만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경험하고 성령을 받자 예수님의 실상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가졌기 때문에 죽음으로 증명했습니다. 말로만 증거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절대로 예수를 부인하지 아니하고 목숨을 내어 놓아서 피로써 그들의 증거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의 순교란 의미가 깊습니다. 그들이 그냥 믿는 자가 아니라 확신한 자가 된 것은 진짜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체험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는 것도 진짜고 무덤에 들어간 것도 진짜로 보았고 부활하신 것도 진짜로 부활도 보았습니다. 약속한 성령을 보내신 것을 체험한 그들은 이제는 의심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의심이 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죽음으로써 그들의 증거를 다 확인한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된 것은 확실한 사실인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거짓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하늘에 우리 있을 곳을 예비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집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 주를 위해서 섬기고 죽으면 천당 가는 것 너무나 확실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삶은 두려워하고 놀라운 삶이 아니라 편안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머릿속 믿음을 가지지 말고 마음속 확신을 가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지식은 머릿속에 있지만 깨달음은 마음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지식은 머리속 믿음이요, 깨달은 지식은 마음속의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마13:23에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고 말했습니다.
골 2: 2에서는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냥 아는 것 하고 깨닫는 것 하고는 굉장히 틀립니다. 우리가 성경을 들을 때 ‘아, 그렇구나.’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의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마음속에 깨닫지 못하면 내 것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위대한 성자요, 종교인이라고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깨달음은 내 구주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깨닫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깨닫지 못합니다. 성령이 오셔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수 십 년 교회 왔다 갔다 해도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예수님이 구주인 것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아무리 성경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면 나에게는 그 성경말씀이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깨달아야 마음속에 들려오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큰 보배를 얻는 것입니다. 늘 길거리 옆에 버려진 돌 인줄 알고 왔다 갔다 하다가 나중에 깨닫고 보니 금덩어리와 같습니다. 그저 성경말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말씀을 읽습니다. 하나님 말씀이다. 그렇게 읽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성령이 오셔서 그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면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선교사 한 사람이 간암으로 죽어가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기사를 읽어본 적이 있는데 이분이 선교사로써 복음을 외국에 가서 전도하고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간암에 걸려서 사형선고를 받고 선교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와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데 하루는 양지 볕에 걸상을 갖다 놓고 걸상에 앉아서 햇볕을 쪼이면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그냥 성경 공부하던 중 벧전 2:24을 읽게 된 것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옛날에도 그 말씀 수없이 읽었습니다. 지식도 가지고 있고 그 성경을 외우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그 성경을 읽자 그 성경에서 성령의 빛이 비춰서 마음에 깨닫게 된 것입니다.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아! 예수께서 2천 년 전에 나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시고 채찍에 맞으심으로 나는 벌써 2천 년 전에 나음을 입은 사람이군. 지금 병들어 있는 것은 거짓되고 헛된 것이다. 이 마귀의 거짓말이다. 내가 병들어 있을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전에는 깨달음이 없을 때는 ‘아, 좋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랬지만 깨달음이 오자 그는 부인에게 “여보, 여보! 나 옷을 갖다 주시오.” 그러자 부인이“왜요?” “나 이 환자복을 벗고 이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일을 해야 되겠어.” “아이 당신 어떻게 그래요?” “아니야, 나는 여태까지 병자인줄 알았는데 오늘 성경을 읽어보니까 병자가 아니네. 잘못 알았어. 여태까지 병자인줄 알고 환자복 입고 걸상에 앉아서 죽을 날을 기다렸는데 오늘 깨닫고 보니까 병자가 아니야~ 예수님 안에서 완전히 나은 사람이야.” 부인은 깨닫지 못하니까 “아니 여보, 안 돼! 무리하면 안 돼! 일어나면 안 돼!” 깨닫지 못한 부인은 성경말씀을 보고도 안 된다고 자꾸 말렸는데 깨달은 남편은 “내가 여태까지 몰랐어. 속았어. 나는 병자가 아니야! 걱정 하지마.” 그 후로부터 옷 갈아입고 그 길로부터 성경 들고 심방하고 설교하고 부흥회하고 나갔는데 깨끗이 나아 버리고 말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얼마나 중요한지요. 성령이 오신 것은 우리에게 주의 말씀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 말씀 들을 때나 성경 읽을 때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하며 성령께 깨닫게 해달라고 부탁해야 되는 것입니다.
4. 담대히 선언하라
우리가 깨달은 말씀을 믿었으면 담대하게 입술로 시인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믿고 깨달아 확신하면 인정사정 보지 말고 입술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
사람들은 저보고 말합니다. “어떻게 당신 감히 병자위해 기도하고 암이 나았다. 관절염이 나았다. 귀머거리가 나았다. 당뇨병이 나았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까?” 저의 속을 버선 뒤집어 보이듯이 싹 뒤집어 보이고 싶은 생각이 정말 간절히 나요. 병자위해 기도하고 난 다음에 깨달음이 오는 것입니다. 그냥 지식이 아닙니다. 그런 병자가 나았다는 깨달음이 성령으로 온 것입니다. 내가 마음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마음에 깨달음이 오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믿고 강하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이 산들에 명하여 저 바다에 던지라고 말해야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에 깨달음이 없는데 말하면 엉터리지요. 그러나 깨달음이 있으면 믿을 수가 있고 믿음으로써 담대하게 말하면 내가 말한 대로 이루어질 찌어다. 하나님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막11:23~24의 말씀을 우리는 마음속에 늘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깨달아지면 받은 줄로 믿게 되고 받은 줄로 믿게 되면 강하고 담대하게 입술로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입술로 시인하는 것이 우리 마음속에 믿음을 풀어놓는 것입니다.
막 9:23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고 말했었으며, 히10:38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믿은 바를 말해야 돼요. 예수님께서도 항상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 네가 고침을 받았다. 주님께서 말씀으로 용서하시고 치료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들로써 그리스도를 따라서 우리도 깨닫고 믿어진 것을 입술로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죄에서 놓여남을 받았느니라. 나는 거룩함을 입었느니라. 나는 치료함을 받았느니라. 나는 축복을 받았느니라. 사망과 음부를 이겼느니라. 나는 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은 사람이 되었느니라. 나는 택함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왕 같은 제사장이다. 나는 거룩한 나라다. 나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 담대하게 깨달은 바를 입술로 늘 시인하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불확실성과 불안과 두려움의 안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고 깨달아 확신을 하게 되면 강하고 담대하게 창조적인 신앙고백을 통하여 운명과 환경을 다스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파도치는 바다와 같습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고 물보라 칩니다. 거기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파도 위를 걸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파도 위를 걸어가다가 나중에 의심하므로 빠졌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주를 바라보고 믿고 확신하고 강하고 담대하게 선언하므로 인생의 파도를 밟고 걸어갈 수도 있고 불신앙하므로 파도에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을 깨달아 알고 진리위에 서서 승리적인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믿고 확신할 수 있는 말씀을 가지고 있음을 감사합니다. 우리 인생에 하나님이 믿고 확신할 수 있는 성경을 주신 것을 너무나 감사하옵고 또 우리 주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 보는 앞에서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시고 우리 보는 앞에서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의심할 수 없는 확신을 허락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지 말고 믿고 확신한데 살고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선언으로 기적을 동반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