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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승자박(自繩自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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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승자박(自繩自縛)
설 교 : 조 용 기 목사
말 씀 : 잠 6: 2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서론>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오늘 ‘자승자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한자의 사자성어에 ‘자승자박’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자기가 만든 밧줄로 스스로 묶는다는 말입니다. 원수 앞에서 자기를 자기가 묶는다면 고스란히 밥으로 원수에게 내어주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와 비슷한 성경말씀에는 잠 6: 2에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신약 마16:19에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심으로 우리가 땅에서 자승자박하면 하늘에서도 그대로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930년대 미국이 대공황의 위기에 처했을 때 루스벨트 대통령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이다.”라고 말하며 국민들을 격려해서 공황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에서 패배하면 현실에서도 패배한다는 것을 루즈벨트 대통령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인간은 생각으로 자승자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생각에서 승리하고 이겨야 승리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생각으로 스스로를 묶는다.
인간의 그 생각으로 자승자박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으면 죄의 힘으로 자승자박됩니다. 자기는 세속과 마귀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이 자기 스스로를 묶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된 존재인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죄와 사망의 세력은 우리에게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롬 8: 1~ 2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해방된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죄에서 해방되고 사망의 세력에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해야지 나는 죄와 사망의 종으로 죄와 사망에 묶여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그대로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생각으로 자승자박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늘 죄인이라고 생각하면 죄의 힘에서 결코 벗어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병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으로 자승자박하여 병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병을 감당할 수 없다. 나는 병의 노예다. 결국에는 병으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 생각에 자기를 묶어 놓고 말기 때문에 병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 마음에 나는 병의 노예가 되고 병에 정복당했다고 생각하면 그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불안과 초조, 근심이 뼈로 마르게 하는 것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다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즐거움이 생기고 그 즐거움이 약 공장을 가동해서 온몸에 치료가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생각이 여러분을 자유인으로 만들기도 하고 종으로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렇게 생각하고 난 다음 내 운명이 바로 되기를 고대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자유인으로 생각할 때 자유가 주어지고 종이라고 생각할 때 노예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무능력하고 실패자며, 가난하고 패배자라고 생각하면 그대로 자승자복하게 됩니다. 인간의 생각은 그 자체가 운명을 만들어 갑니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생각 없이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의 삶속에 늘 ‘나는 패배자다. 나는 실패자다. 성공하지 못한다. 나는 가난하다. 나는 무능력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나를 완전히 얽어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승자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저가 나의 저주를 다 담당하시고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축복의 생각으로 마음을 가득히 채우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고 말한 것입니다. 생명이 마음에서 나오고 사망도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욥 3:25에 욥은 그의 가산을 다 잃어버리고 자녀들이 비명횡사하고 자기는 몸에 병들어서 처참하게 되었을 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그는 재산을 다 잃어버리기 전에 재산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늘 두려워했습니다. 자녀들이 비명횡사하기 전에 자녀들에게 비극이 일어날까 늘 두려워했습니다. 자기 몸이 병들고 처참하게 될까 주야로 두려워하고 떨었습니다. 그 생각한대로 마귀가 그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게 된 것입니다. 먼저 마귀의 공격이 있기 전에 생각으로 자기 자신을 묶어 놓았기 때문에 마귀가 그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게 된 것입니다.
미국의 강철 왕이며 자선사업가인 카네기는 ‘실패한 사람들의 10가지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첫째, 모든 책임을 남에게 전가한다. 이런 사람은 핀잔을 들으면 본능적으로 핑계를 댄다. 나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나라 때문에, 이웃 때문에, 사회 때문에, 부모 때문에 내가 이 모양이라고 자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고 스스로 자백하고 자기를 고치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둘째, 열등의식과 자기비하에 빠져 있습니다. 늘 자기는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는 비극적인 자화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셋째, 삶의 목표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부르신 거룩한 부르심을 모르고 목표를 가지지 않고 떠돌아 가는 떠내려가는 삶을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넷째, 모든 것을 너무 쉽게 포기합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다가오면 두 손 들고 뒤로 물러가는 것입니다. 다섯째, 과거에 지나치게 연연합니다. 현재에 살고 미래를 계획하지 않고 늘 과거에 묶여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섯째, 독창력 없이 남의 흉내를 내기에 전전긍긍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일곱째, 계획 없이 생활한다. 여덟째, 인생의 지름길을 찾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노력은 하지 않고 성공의 왕도만 찾아다닌다. 어떻게 하면 쉽게 돈벌이 할 수 있을까? 쉽게 성공할 수 있을까? 쉽게 잘 살 수 있을까? 자꾸 쉬운 길을 찾습니다. 땀 흘리고 고생하고 노력해서 승리를 가져오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홉째,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자기가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열째로 패배에 대한 원인 분석이 없이 실패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실패를 했으면 왜 실패했는지 원인을 분석하고 돌이켜서 대책을 세우려고 하지 않고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포기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실패할 때는 그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원인은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는 무능력하고 실패자며 가난하고 패배자라고 생각하면 그 생각대로 자승자박하게 되어 그러한 운명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2. 자화상으로 스스로를 묶는다.
인간은 그 자화상으로 자승자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육체적인 모습을 항상 거울을 통해 봅니다. 자기가 누구인가를 몰라보면 큰일이지요. 오늘도 여러분 교회 나오시기 전에 모두다 거울을 들여다보았을 것입니다. 저도 여러 번 거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거울을 통해 돌아보고 머리가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얼굴을 더럽지 않은지 옷매무새가 바른지를 늘 찾아보는 것입니다. 잘못 되었으면 거울을 보고 자기를 교정하는 것입니다.
1900년도 원산에서 케이트 쿠퍼(Kate Cooper) 선교사가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때 선교사 집에 놀러온 촌부가 벽에 걸린 거울 앞에서 서서 놀라 고함을 치고 선교사님을 불렀다. “선교사님 누가 벽 속에 숨어 있어요. 저분이 누구예요?” 생전 처음 보는 자기를 몰라본 것입니다. 그 때만해도 우리 한국에 거울이 없었습니다. 선교사님이 와서 전신을 볼 수 있는 큰 거울을 벽에 걸어 놓으니까 촌부가 그 집에 와서 자기 모습을 보고 놀라 까무라쳤습니다. 누가 벽속에 들어있는 것을 보고 놀랐던 것입니다. 자기의 모습을 모르면 자기의 모습을 보고도 기절초풍을 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모습은 거울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적인 모습도 우리가 보아서 잘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모습이 부정적이면 결코 성공적인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내적인 모습이 자기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잘못 보면 패배적인 것으로 자승자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삼 1: 2에 있는 말씀대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주님이 그려주신 모습을 마음속에 늘 그려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담은 우리에게 삼대재앙을 주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배반하고 에덴에서 쫓겨나올 때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었고 자기의 사는 환경은 가시와 엉겅퀴가 나 저주받아 이마에 땅을 흘려 고생 고생해야 살게 되고 육체는 병들고 늙고 죽게 되는 삼대재앙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자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마음속에 삼대재앙의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죄인이다. 저주받고 고통스럽고 낭패당하고 실패하며 산다. 나는 병들고 노약해지고 죽는다.’는 3대재앙의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구주로 믿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 새로운 자화상을 마음속에 그려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용서받은 의인이 된 자화상 그려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저주가 다 사라지고 아브라함의 복이 주어지는 것으로 자기를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시고 우리를 건강하게 하신 자화상을 마음속에 그려서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난 다음 마음에 자기를 보는 눈을 바꿔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거울을 통하여 새로운 자화상을 바라보고 자기의 새로운 모습을 마음속에 깊이 아로 새겨야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죄와 세속과 마귀의 종으로 보지 말아야 됩니다. 바라보는 것을 그대로 우리가 갖게 되기 때문에 바라봄의 법칙의 무서운 힘을 인식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나무 밑에 서서 늘 선악과를 바라보았습니다. 선악과를 바라보니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를 얻기에 탐스럽게 된지라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바라보면 거기에 끌려 들어가고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죄와 세속과 마귀의 종으로 자꾸 바라보고 죄가 나를 이긴다. 세속이 나를 끌고 간다. 마귀가 나를 점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바라본 대로 마귀와 세속과 죄의 종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갈 5: 1의 말씀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으니 십자가를 통하여 종의 멍에에서 해방된 자신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죄의 멍에가 꺾인 자기를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병의 멍에에서 해방된 자기를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저주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은 자기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고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병자라고 보지 말라. 병자라고 바라보고 늘 자기의 병약함을 생각하면 그는 병자인 것입니다. 자기의 모습이 병약하다고 늘 마음속에 상상하고 그렇게 보는 사람은 어떠한 의사도 어떠한 약도 어떠한 환경도 그를 건강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비록 병들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자기의 본모습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거울을 통하여 고침 받은 자기 모습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치료받고 건강하고 활달하게 되었다는 모습을 마음속에 상상하고 그를 바라볼 때 그대로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해 주는 것입니다.
벧전 2:24의 말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 말씀으로 자기를 언제나 바라보고 건강한 모습을 소유하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기는 가난하고 무력하며 복이 없는 사람이라고 보지 마십시오. 그것은 자기를 자승자박합니다. 나는 가난하고 무능력하며 복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기를 상상할 때마다 자기는 비천하고 열등의식에 잡히고 능력 없는 사람으로 바라보면 그것이 자승자박하여 절대로 복을 받지 못합니다. 항상 실패하고 낭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바라보는 눈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거울을 통해서 자기를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저주를 친히 짊어지고 청산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저주는 다 청산되어 버린 옛날이야기인 것입니다. 옛사람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지나간 이전 나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형통한 사람이 된 자기 자신을 상상하고 늘 마음속에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새 모습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을 통하여 우리는 자승자박한다는 것을 늘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바네아에 왔을 때 모세가 열두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내어서 사십일 동안 정탐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중에 열 명은 와서 보고할 때 완전히 부정적인 자화상을 가지고 보고했습니다.
민13:33에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보세요. 얼마나 비극적인 자화상입니까? 원수들은 거인들로 보고 우리는 메뚜기 같이 보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메뚜기 자화상을 가지고 결코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메뚜기 자화상을 가지고 주님의 축복의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잘못된 자화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를 보는 눈이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있는 자기들을 보지 않고 하나님 없는 메뚜기 같은 인생을 보았기 때문에 가나안땅에 못 들어갔지요.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화상이 달랐습니다.
민14: 9에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야훼가 우리와 같이 계시므로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우리의 밥에 불과하다. 그들은 아무도 보호해 줄자가 없다. 연약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같이 계신 대장부들이다. 하나님과 함께 있으므로 우리는 들에 가서 그들을 쫓아내고 점령할 수 있다.” 그들의 자화상은 대장부의 자화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같이한 강력한 자화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메뚜기 자화상을 가진 사람하고 자기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대장부의 자화상을 가진 사람하고 천양지차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가지입니다. 여러분 북한을 바라볼 때 북한이 원자탄을 가지고 미사일을 가지고 우리 대한민국을 협박하고 있으나 우리는 이제 절단 났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메뚜기 자화상인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원자탄이 없고 미사일을 장치해 놓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5만 교회 1,200만 성도가 있어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 자화상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은 원자탄 보다 미사일보다도 어떠한 무력보다 강하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우리가 주님과 같이 있는 자화상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메뚜기 자화상으로 보지 않게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이 여러분과 같이 계신다는 자기의 모습을 상상하고 바라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터 모펫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물을 청소하는데 주의를 기울이기 보다는 차라리 그대의 마음을 청소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라. 그대의 양떼보다는 그대의 마음을 살찌게 하라. 그대의 집을 방어하기보다는 그대의 마음 지키기를 더욱 힘쓰라. 그대의 돈을 지키기보다는 그대의 마음을 지키기에 더욱 힘쓰라” 청교도인 존 훼블은 “어떠한 조건 하에서도 마음을 지키고 바르게 관리하는 일은 기독교인의 생활에 있어서 위대한 사명에 속한다.”고 말했습니다. 영국의 시인 밀턴은 “마음은 천국도 만들고 지옥도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마음을 지켜 자기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그 자화상으로 자승자박하는데 자기를 죄와 세속과 마귀의 종으로 보면 죄와 마귀와 세속의 인간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용서와 의와 영광을 받은 사람이요, 거룩하고 성령충만한 사람이요, 치료받은 사람, 축복받은 사람, 천국 영생복락을 받은 사람으로 상상하고 바라보면 네 믿음대로 될 찌어다.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3. 믿음으로 스스로를 묶는다.
인간은 믿음으로 자승자박합니다.
성경 마 8:13에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죄와 마귀와 세상이 너무 강하다고 믿지 마십시오. 믿음은 스스로를 묶는 밧줄이 됩니다. 죄가 너무 강하다. 마귀가 너무 힘세다. 세상이 너무나 무시무시하다. 나는 도저히 마귀와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없다. 자기 마음속에 자기가 무능력하다고 믿고 있으면 그는 세상과 마귀가 자승자박합니다. 무엇이든지 여러분 믿는 데로 되는 것입니다.
요일 4: 4에는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아무리 죄가 크게 다가와도 내속에 계신 예수님은 저 죄보다 크다. 아무리 마귀가 공격해 와도 우리 속에 있는 예수님은 마귀보다 크시다. 아무리 세상이 파도처럼 다가와도 내안에 계신 예수님은 세속을 이미 이긴 분이다. 십자가를 통하여 죄와 마귀와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있다고 믿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나가면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권세로 어떠한 죄도 이기고 어떠한 마귀도 짓밟고 어떠한 세속도 극복하고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올바르게 믿어야 돼요. 우리는 우리 인간 혼자 살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처럼 오셨고 사람을 위해서 죽었고 사람을 위해서 부활 하셨은즉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살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이기고 세속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질병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우리는 사는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병으로 고통당하거나 불구가 되거나 죽을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아무래도 이 병으로 죽겠지. 내가 불구가 되겠지. 나는 패배자가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믿으면 큰일 납니다. 부정적인 믿음은 아예 여러분 마음속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믿음을 갖다 주고 그를 따라서 마귀가 들어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병은 다 2천 년 전에 벗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등을 내밀어서 채찍으로 때리도록 허락한 것은 여러분과 나의 질병을 청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성경은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이 말씀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이러므로 여러분은 이 말씀을 통해서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환경을 믿지 마십시오. 말씀을 믿고 감정을 믿지 마십시오. 말씀을 믿고 감각을 따라 행하지 마십시오.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기적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될 찌어다.” 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성공할 수 없다.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고 믿으면 그대로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해서 도저히 성공할 수 없다. 돈이 없고 밑천이 없고 자본이 없는데 무슨 일을 하느냐? 패배자다. 무능력하다고 그렇게 부정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스스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농사지을 논도 없고 밭농사할 밭도 없고 물도 없고 양식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바위산, 광야밖에 없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살아가려고 한다면 다 병들고 굶어 죽고 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메마른 광야를 지나서 살아온 것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인생을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 때문에 여러분 환경을 바라보고 감각이나 느낌을 바라보고 좌절하고 절망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로 여러분을 살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이름 안에서 나는 성공할 수 있다. 나는 승리한다. 나는 축복받는다. 나는 은혜를 입는다고 믿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귀에 들리는 것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손으로 만져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거센 풍파 위를 걸어갔습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고 물보라가 쳐도 그는 물위로 걸어갔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눈을 돌이켜 환경을 바라보고 바람소리를 듣고 파도를 바라보고 물보라를 느끼고 두려워했을 때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믿음이란 환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느끼는 것도 아니고 감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란 사나 죽으나 말씀에 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나는 저주에서 해방된 사람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나는 형통한 사람이라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대로 될 것인 것입니다.
신 28:12~14에 “야훼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야훼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야훼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라는 매우 유명한 작품이 있습니다. 초라한 3층 집의 지붕 밑에 사는 소녀가 폐렴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는데 의지마저도 약해져서 나중에는 건너편 집 담장이 넝쿨을 바라보며 그 넝쿨의 잎이 다 떨어지면 자신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계절이 지나자 담장의 넝쿨이 단풍이 들어 한잎 두잎 떨어지니까 이 소년은 창문너머 바라보면서 ‘나도 저 담장의 넝쿨처럼 죽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마지막 담장의 넝쿨이 떨어지는 그 날에는 자기도 죽는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셋집에 무명의 화가가 한사람 살았습니다. 그 화가가 이 소녀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이 소녀를 살리기로 작정했습니다. 어느 날 초겨울에 큰 바람이 불고 장대같은 비가 내렸습니다. 그러니 모든 단풍든 잎사귀는 다 떨어지지요. 담장의 넝쿨에 마지막 잎새도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소녀는 바람소리를 듣고 비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침이 되면 담장의 넝쿨이 하나도 없이 다 떨어질 것이다. 그러면 나도 죽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침이 되어서 창문을 열어 보니까 마지막 담장이 잎새 하나가 강인하게 붙어 있습니다. 그렇게 바람이 불고 비가 왔는데도 바람에 날리면서도 담장이 넝쿨에 마지막 잎사귀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소녀가 그것을 보고 ‘야! 저 마지막 잎사귀가 저렇게 강인하게 붙어서 바람과 비를 이긴 것 보니 나도 살겠구나. 저 잎사귀가 내 생명이니 저것이 안 떨어지는 것을 보니 내가 살겠구나.’ 그는 마음에 믿음을 돌이켜 먹고 산다는 믿음을 가지자 병을 이겼는데 그와 동시에 그 전셋집을 얻으러간 나이 많은 미술가는 폐렴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그 비바람이 치는 날에 그 미술가는 담장에 넝쿨을 하나 그려 가지고서 철사 줄로 그 벽을 사다리를 놓고 타고 올라가서 그렸습니다. 비를 종일 맞았습니다. 온몸에 빗물이 다 스며들어왔습니다. 그는 감기에 걸리고 폐렴에 걸리더라도 그 소녀를 살리겠다고 마지막 담장넝쿨을 그려가지고서 철사 줄로 묶어 놓았습니다. 그러니 그려서 놓은 담장이 넝쿨이 떨어질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담장이 넝쿨은 떨어지지 않아서 이 소녀가 믿음을 얻어서 살았지만 이 노인은 폐렴이 걸려서 죽고 말았다는 단편소설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보십시오. 이 소녀의 마음속에 부정적인 믿음을 가졌을 때는 죽음이 그를 붙잡고 있었으나 그가 담장이 넝쿨 하나 보고도 긍정적인 믿음을 가졌을 때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를 위해서 몸 찢고 피 흘려서 구속의 선물을 주신 예수님을 보고 믿지 못한다면 정말로 우리는 절망인 것입니다. 문제는 마음에 있습니다. 자신은 병자이고 병으로 인해 죽는다고 생각하면 그가 보는 그 병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히포크라테스는 마음은 위대한 의사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채찍에 맞았으므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한 잎 잎사귀처럼 우리의 믿음이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나은 것입니다.

4. 입술의 말로 스스로를 묶는다.
말로써 묶이고 잡히게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살고 죽는 권세가 혀에 있기 때문에 사람은 혀의 사용을 통해서 자승자박하는 것입니다.
잠18:20~21에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얼마나 강한 말입니까? 죽고 사는 권세가 혀에 달렸다. 혀를 사용하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 우리는 너무나 무작정하고 혀를 낼름거리고 마음대로 말을 합니다. 말로 자신의 미래를 망친 대표적인 사람들을 들라하면 1984년 올림픽에 출전했던 매리 데커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육상 선수로 미국의 위대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올림픽 경기가 열리기 전에 출연한 한 TV 토크쇼에서 “난 운이 따라 주질 않아요. 난 늘 운이 없는 사람이에요.”라고 그렇게 부정적으로 말을 하고 탄식을 했습니다. 그 후에 그녀는 큰 압박감에 시달렸고, 그 후 올림픽 육상 경주에서도 패배하고 만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하면 천사가 찾아오지만 악마의 말을 하면 악마가 찾아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무명의 젊은 권투선수였던 클레이라는 청년은 큰 시합을 앞두고 기자에게 “난 세계 최고다” 그 말이 신문에 떠들썩하게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이 이번 시합에서 일방적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에 찬 말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습니다. 결국 그는 시합에서 이겼고, 이후의 경기에서도 대 부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어떤 말을 만 번 이상 되풀이하면 반드시 미래에 그 일이 이루어진다.”고 말한 격언이 있습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늘 못한다고 말하면 그 말의 그물에 걸려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습관이란 계속해서 반복해서 말을 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정적인 말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말하면 습관이 되어서 그 말을 하게 되고 부정적인 말로써 자승자박합니다. 사망으로 얽히고 패배로 얽히고 질병으로 잡히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을 조심해야 됩니다.
「가정과 상담」4월호에는 에모또 마사루 박사가 물에 대해 연구한 내용이 실렸는데 참으로 놀랍습니다. 박사님은 물에 말이나 글을 들려주거나 보여준 뒤 물의 반응을 연구했습니다.
한 컵의 물에는 ‘감사 합니다’를, 다른 한 컵에는 ‘짜증나네, 죽여 버릴 거야’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영하 20도에서 3시간 정도 얼린 다음 그 물의 결정체를 현미경으로 찍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감사 합니다’를 보여준 본 물은 아름다운 육각수의 결정체를 하고 있었지만, ‘짜증난다.’ 는 말을 보여주었던 물은 완전히 어지럽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에모또 마사루 박사는 실험을 통해 ‘사랑’과 ‘감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물의 결정체가 가장 아름답고 안정적이며 치밀한 구조를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몸은 60%가 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몸속에 있는 물이 아름다워야 몸도 건강하고 아름다워 지는 것입니다. 물이 깨어지고 흐트러지면 온몸에 건강도 깨어지고 흐트러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에 있는 물이 당장 여러분이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아름답습니다. 하고 그렇게 말하면 온몸이 육각수로 아름답게 되어서 심신이 건강해 집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밉다. 저주한다. 절망적이다. 나는 소망이 없다. 부정적인 말을 하면 물이 악마처럼 어그러집니다. 속에 60%의 물이 악마가 되어서 여러분을 물고 찢는 것입니다. 당장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로 우리 몸에 있는 물이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하고 천사가 되게도 하고 악마가 되게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입의 말은 다른 사람을 욕하기 위해서 저주하기 위해서 멸하기 위해서 하는 말 같지만 다른 사람에게 하기 전에 자기의 몸을 망처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입의 말로 내가 묶였으며 내 입의 말로 내가 사로잡힌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은 남을 해코지하기 전에 그것이 먼저 자기에게 해로움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남에게 흑칠을 하려면 내손에 흑을 먼저 묻여야 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 하나하나가 이처럼 생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죄와 세속의 말을 하면 죄와 세속에 우리가 묶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죄와 세속의 말을 하면 죄와 세속이 와서 우리를 칭칭 묶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엡 5: 4~ 5에 보면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말을 잘못하면 사탄의 권세에 잡히게 된다. 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조심 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골 3:17에는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늘 병약함에 대하여 말하면 병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동정을 받으려고 사람만나면 “아이고, 몸이 불편해요. 소화도 잘 안돼요. 잠도 잘못자구요. 허리도 왜 이렇게 아픈지 모릅니다. 내가 이제 나이를 많이 먹었나봅니다.” 사람들에게 동정을 받으려고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동정받기를 원하지요. 그러나 사람들에게 동정 받으려고 그 말을 하다가 그 말이 자기를 묶어서 진짜 그렇게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저도 종종 남에게 동정 받으려고 그런 소리를 하는데 나 오늘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저도 종종 “아이고, 나이가 많으니까 요사이 눈도 침침하고 귀에 말도 잘 안 들리고 스테미나가 부족해요. 자꾸 피곤하고 놀고 싶고 쉬고 싶다.” 그런 말을 합니다. 하면서 은근히 상대방의 동정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 값싼 동정 받아봤자 아무효과 없어요. 그 말이 내 마음에 거미줄처럼 엮어 가지고서 나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건강에 관해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나는 나이 먹었어도 젊은 사람과 같습니다. 눈도 잘 보입니다. 귀도 잘 들립니다. 잘 먹고 잘 잡니다. 평안합니다. 건강합니다. 할렐루야! 남에게 동정은 받지 않을지라도 자기 말로 생명으로 넘치게 만들어 놓고 마는 것입니다. 늘 병약함에 대하여 말하면 병이 떠날 날이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늘 못산다고 하면 그 말의 그물에 걸리게 됩니다. 못사는 것 자랑하지 마십시오. 못산다고 하면 사람들이 여러분을 동정도 안합니다. 못살고 패배한 사람은 다 떠나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낭패와 실망을 당해 보십시오. 동창생이나 형제, 자매까지 여러분 집을 다 떠나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러분이 승리하고 축복하고 성공했을 때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못산다고 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를 다 떠나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축복의 사자들이 떠나가 버리고 못산다고 하면 못살게 하는 귀신들이 여기 내 친구 있다고 다 모여드는 것입니다.
고후 8: 9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부요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부요하고 심적으로 부요하고 생활적으로 부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함께 살기 때문인 것입니다. 광야에 나갔을 때 빌립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을 못 먹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예수님이 같이 계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일 수 있다고 나오매 예수님이 축복을 해주셔서 그 사람들을 다 배불리 먹이고 열두 바구니 남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같이 계신 것을 보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적극적으로 말하고 축복을 말하면 주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같이 계셔도 바라보지 아니하고 나는 못해요. 안돼요. 할 수 없어요. 가난해요. 저주 받았어요 그러면 아무것도 못하게 되고 낭패와 실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 9: 8에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무리 착한 일을 하려고 해도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착한 일을 합니까? 있어야 착한 일을 하지요. 화산이 폭발해서 인도네시아에 많은 이재민이 생겼다. 우리 구제를 좀 하자. 뭐가 있어야 구제를 하지요. 없으면 구제 못하지요. 많은 에이즈 환자가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는 아프리카를 위해서 도움을 베풀자. 베풀고 싶어도 있어야 베풀지요. 없으면 못 베풀지요. 무엇이든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착한 일을 넘치게 하기 위해서 너희에게 복을 준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복을 가지고 우리 혼자 잘 먹고, 잘 입고, 잘살라고 준 것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님께서 넘치게 주는 것은 우리가 넘치게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떡을 가져오면 고물도 떨어진다고 여러분이 떡을 다른 사람에게 주면 여러분에게도 축복의 고물은 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도와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는 것이지 내 스스로 복을 혼자 누리게 하려고 주시는 복은 아닌 것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돌려 줄 것이니 곧 후이 되어 눌러 흔들어 넘치게 해서 안겨 주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러므로 늘 못산다 하면 그 말의 그물에 걸리게 되는 것이니 못산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뇌세포의 98%가 우리말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혀는 몸에 적은 것이로되 온몸을 다 다스린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잘하면 온몸이 그 말에 순응하고 말을 잘못하면 온몸이 그 잘못한 책임을 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헬라 속담에는 “혀는 뼈 하나 없이 아주 약하고 작으나 많은 사람을 찌르고 죽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라비아에도 “네 혀가 네 목을 베지 못하게 하라. 칼은 쓸수록 더 무디어 가지만 혀는 쓸수록 더욱 날카로워진다.”고 말했습니다. 페르시아인들의 속담에는 “혀는 길어지면 생명이 짧아진다.”고 말했었습니다. 중국 고사에는 “세 치의 혓바닥으로 다섯 자의 몸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고 말했었습니다. 영국에는 “현명한 자는 긴 귀와 짧은 혀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각 나라마다 인간의 언어생활에 대해 격언이나 속담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모두 인간의 살고 죽을 권세가 혀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부터 여러분 말할 때 조심하십시오. 말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서 말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말이 결국 여러분의 환경과 운명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결론>
인간은 많은 경우에 운명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 운명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즉 자승자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으로 자화상으로 믿음으로 입술의 고백으로 자승자박합니다. 내가 나를 묶어놓고 난 다음 누구에게 탄식하고 누구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생각을 통해서 여러분을 묶거나 풀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화상을 통해서 묶거나 풀어 놓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통해서 여러분을 묶거나 풀어 놓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입술의 말로 여러분을 묶거나 풀어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하여 여러분을 해방시켰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었은즉 그러므로 믿음으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이냐, 자유인이냐, 축복받은 사람이냐, 저주받은 사람이냐, 성공자냐, 실패자냐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자화상과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잘 사용하면 여러분과 나는 상상 이상으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삶을 살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오늘 우리를 불러 주셔서 하나님 말씀으로 경계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내 아버지여 모든 것을 운명에 내어 맡기고 자승자박하는 삶을 살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네 말로 네가 묶였으며 네 말로 네가 사로잡혔다고 한 것처럼 우리는 생각으로 묶이고 사로잡히고 자화상으로 묶이고 사로잡히고 믿음으로 묶이고 사로잡히고 말로써 묶이고 사로잡히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 묶이고 사로잡힌 것을 자세히 생각하고 오늘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해방되고 자유를 얻게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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