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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연 믿음의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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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연 믿음의 사람인가?
설 교 : 조 용 기 목사
말 씀 : 롬 4: 17~25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서론]
오늘 저는 ‘나는 과연 믿음의 사람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믿음의 사람의 특성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도 그 나라와 지역에 따라 민족적, 문화적 특성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의 특성도 확실합니다. 스페인 격언에 “돈을 잃어버린 자는 큰 것을 잃은 자다. 친구를 잃어버린 자는 더 큰 것을 잃은 자다. 그러나 믿음을 잃어버린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삶의 원천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확실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본론]
1.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살 때는 인간의 수단과 방법과 노력으로 일해서 그 대가로 떡을 사서 먹었습니다. 혹은 농사를 지을 때는 나일강물을 대서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사는 모든 삶은 인간으로 계획하고 인간으로 애쓰고 인간으로 노력해서 결실을 맺어서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왔을 때 이제는 인간의 힘으로 살수가 없었습니다. 물도 없고, 밭도 없고, 논도 없고, 종자를 뿌려봤자 자라날 수도 없습니다. 황막한 광야, 황막한 산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찌할 도리 없이 그들은 하늘을 처다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를 바라보고 살수도 없고 환경을 바라보고 살수도 없습니다. 살아남을 길이 하늘밖에 없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의지해야만 살수가 있었고 하나님 말씀을 의지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애굽에서 살 때는 인본주의로 인간의 수단과 방법과 노력으로 살았는데 광야를 지날 때는 신본주의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출 16: 4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요 1: 1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는데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에 굳세게 서므로 모든 환경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파도가 몰려옵니다. 해안에 당장 삼킬 것 같이 휘몰아 옵니다. 바깥에서 볼 때는 야! 저 거대한 파도가 저렇게 높이 몰아쳐 오니 해안에 있는 바위는 완전히 파도에 박살이 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바다에 파도가 와서 해안에 있는 바위를 때려 칩니다. 순식간에 바위는 사라져 버리고 바닷물은 바위에 넘실거리는 것 같지만 그 다음에 바닷물은 흰 물보라가 되어 날아가고 물러간 뒤에는 오직 반석은 그대로 서있는 것입니다. 바로 말씀은 이 반석인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시험과 환난의 파도가 쳐옵니다. 인간으로 볼 때는 이제 죽었다고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위세를 가지고 강한 바람과 더불어 우리에게 처 올 때 우리가 그 앞에 견뎌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될 것은 말씀을 마음속에 모시고 말씀에 서있으면 우리가 반석인 것입니다. 반석에 서있으면 결국 그 시험과 환난이 우리를 감싸고 내려쳐도 순식간에 그 파도는 산산조각이 나고 물보라만 날리고 떠나가고 반석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하여도 쌓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아도 버림 바 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반석이요,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와 계시기 때문에 이 반석을 무너뜨릴 힘은 우주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인데 이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요,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요 2: 5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머니와 그 제자들을 데려오시고 잔칫집에 갔습니다. 그런데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어머님이 나와서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 하인들 보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무슨 말씀이든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대로 하면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상황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더라도 예수님께서 물통에 물을 채우라고 하시고 그를 떠서 연회장에 갖다 주라고 하실 때 그 물은 포도주로 변화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말씀이 운명과 환경을 변화시키는 기사와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 8: 8에 보면 백부장의 종이 중풍으로 걸려 죽어갈 때 주님께 나와 간구하니 주님이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했습니다. 그때 백부장이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말씀만 주시면 말씀이 어떠한 병도 물리치고 문제를 해결할 것이니 말씀만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감탄하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라. 네 믿음대로 될 찌어다.” 했는데 그 하인이 즉시로 고침을 받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떡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요, 말씀으로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살지 않고 우리의 환경을 바라보고 살지 않고 하늘을 처다 보고 하나님 보좌에서 넘쳐 나오는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듣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믿고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면 우리가 만세반석 위에 서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말씀 위에 서있기 때문에 어떠한 풍파가 닥쳐와도 우리를 삼키지 못하고 그 풍파는 산산조각 나버리고 말게 될 것입니다. 승리는 말씀 속에 서면 가질 수가 있습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그의 고향 미주리 주 인디펜던스에서 당선 기념 도서관을 개관했습니다. 그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을 방문했는데 사람들은 대통령을 구경하기 위해 구름 떼같이 모여들었습니다. 거기에 아이들도 많았는데, 한 아이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대통령 아저씨는 우리 만할 때 무엇을 하셨나요? 학교에 반장을 하셨나요?” 트루먼은 “아니다, 나는 너희 만할 때 아주 볼품이 없었어. 운동도 못하고 눈이 아주 나빠서 안경을 벗으면 책도 읽지 못했어.” “그럼 대통령께서 어떻게 대통령이 되셨나요?” “나는 매일 성경을 읽었단다. 그리고 내 뒤에서 밀어주시는 하나님의 힘을 믿었지. 나는 빌 4: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는 말씀을 굳게 믿고 담대하게 밀고 나갔단다.” 그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을 통해 대통령까지 올라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내가 믿음의 사람이냐 아니냐를 알고 싶으면 말씀에 서느냐, 안 서느냐 그것을 살펴봐야 되는 것입니다.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죠지뮬러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는 3개월에 한 번씩 성경 전체를 통독했습니다. 일생동안에 200번이나 성경을 정독했습니다. 어떤 이가 그에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왜 약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뮬러가 대답하는 말이 “항상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약한 것입니다.” 5만 번 기도의 응답을 받은 죠지뮬러의 이러한 믿음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얻은 능력인 것입니다. 롬10:17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믿음의 생활은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간직될 때 믿음의 사람이 되고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말씀의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2. 꿈을 품고 사는 사람
여러분 닭장에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것을 본적이 있지요? 그 눈을 반짝반짝 하면서 알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 컨데 그 닭은 알을 품고 있지만 그 머리 속에는 병아리를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언제나 마음속에 꿈을 품고 있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애굽의 고센 땅에 살았습니다. 부조전래로 고센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으니 좀처럼 그 기름진 땅을 버리고 알지 못하는 가나안 땅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닌 430년 동안 고센 땅에 살았습니다. 또 고센 땅은 굉장히 기름진 땅입니다. 초목이 많고 물도 넉넉하고 목축도 할 수 있고 농사도 지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내실 때 그냥 나오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꿈을 심어준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자. 여기에 나일 강이나 여기에 있는 초목은 비교할 것도 없다.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그들이 모세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마음속에 폭발적인 꿈을 가진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다니. 세상에 그런 땅이 있느냐? 그들이 마음속에 젖이 강물같이 흐르고 꿀이 강물같이 흐르는 것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 꿈을 마음속에 품었기 때문에 부조전래로 살아온 고센 땅을 등 뒤로 버리고 떠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꿈이 있어야 우리 생활 속에 변화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꿈이 있어야 개혁이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꿈이 있어야 현실을 떠나고 앞으로 전진 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레20:24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너희에게 주어 유업을 삼게 하리라 하였노라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의 하나님 야훼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에 와서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할 때 모세가 12정탐꾼을 택해서 40주 40야를 가나안땅을 정탐하게 한 것입니다. 그들이 저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보고할 때 10명은 꿈을 잃어버린 보고를 한 것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보든지 하나님이 함께 계시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을 수 있다는 꿈을 가져야 되는 것인데 꿈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인본주의에 서서 관찰한 것을 보고했습니다. 그들의 관찰은 인간적으로 볼 때는 맞았습니다. “우리가 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광막한 광야요 사막이다. 그리고 그곳에 성은 굉장히 높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네피림의 후손 아낙자손 대장부라 우리가 보기에는 메뚜기 같다. 그들도 우리보고 메뚜기라고 말할 것이다.” 완전히 꿈이 없습니다. 인간적인 관찰로써 본 그대로 말을 했습니다. 그것을 들은 사람은 그들 마음속에 “와! 우리가 가는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광막한 광야구나. 그리고 우리가 들어갈 곳은 성은 높고 그곳에 사는 사람은 네피림의 후손 아낙자손 대장부라.” 우리는 메뚜기 같다고 했으니 모두다 자기들을 메뚜기로 상상했습니다. 절대로 들어갈 수 없겠다. 들어가면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고 우리는 죽을 것이다. 우리 장관을 세워서 애굽으로 도로 돌아가자. 완전히 좌절과 절망에 처한 것입니다. 부정적인 상상력을 동원해서 부정적인 꿈을 꾸자 그들은 미약해지고 연약해지고 패배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사물을 보았습니다. “아니다. 우리가 본 땅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더라. 그리고 물론 성은 높고 그들은 아낙자손 네피림의 후손 대장부지만 그들의 보호자는 떠났고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우리 들어가서 점령하자.” 그들은 사물을 볼 때 하나님과 함께 사물을 봤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보니 하나님의 약속대로 광야로도 젖과 꿀이 흐르게 될 수 있고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아무리 높은 성도 무너지고 하나님이 함께 계시므로 아무리 큰 대장부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꿈을 가지고 보고를 했고 10명의 정탐꾼은 꿈이 없이 보고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 없이 사물을 바라보면 안 믿는 사람들이 보는 관점에서 사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님과 언약 맺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시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말씀을 통하여 꿈속에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오늘과 내일에 대한 꿈을 마음속에 품어야 되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알을 속에 갖지 않는 닭은 알을 낳을 수 없습니다. 속에 알이 있기 때문에 알을 낳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꿈을 품어야 꿈이 현실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꿈이 없으면 현실에 새로운 창조적인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민14:36~38에 보면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이 모세를 원망하게 한 사람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야훼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서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
보십시오. 꿈을 잃어버린 사람은 재앙을 만납니다. 그러나 꿈을 잃어버리지 않은 여호수아와 갈렙은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꿈이 없으면 그 자체가 재앙인 것입니다. 내일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꿈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서 꿈을 받고 그 꿈을 품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육신을 쓰고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올라가서 우리의 원수들과 싸워서 이기신 것입니다.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죄 많은 우리들이 용서받고 의롭게 될 수 있는 꿈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더럽고 추악한 우리가 씻음 받고 거룩하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는 꿈을 품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병약하고 연약한 우리가 치료받고 건강하게 될 수 있는 꿈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저주받고 가난하고 낭패와 실망을 당한 우리가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형통하게 되는 꿈을 품을 수 있고 죽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부활, 영생, 천국 사람이 되는 꿈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꿈은 십자가를 통해서 마음속에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꿈을 품지 아니하면 그 꿈은 결코 현실 속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먼저 꿈으로 마음속에 잉태되고 난 다음에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하신 그리스도의 은총을 우리는 마음속에 꿈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받아 드리고 그것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된 모습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나는 새것이 된 나 자신을 꿈꾸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 받은 의인이 된 자기를 꿈꾸어야 되며 거룩하고 성령 충만한 자기를 꿈꾸어야 되며 치료받고 건강하게 된 자기를 꿈꾸어야 되며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을 받은 자기를 꿈꾸어야 되며 부활, 영생, 천국을 얻은 자기를 꿈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꿈을 잉태하고 꿈을 꾸는 사람은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들은 모두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꿈을 갖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주를 믿지 않는 사람은 꿈을 꿀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꿈을 꿀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값 주고 위대한 삶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기 때문에 십자가 밑에 가서 꿈을 꾸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꿈을 꿀 수 없는 사람은 어느 곳에 가서도 꿈을 꿀 수 없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꿈을 꾸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새로운 삶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오시는 것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한 꿈과 환상을 굳게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젊은이의 마음속에 있는 환상을 그리고 늙은이의 마음속에는 꿈을 그려 주시고 성령께서 환상이나 꿈을 품은 사람을 통해서 능력과 권세를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그냥 아무나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성령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꿈이라는 그릇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 보십시오. 불학무식한 제자들, 어부들 갈릴리를 떠나 본적이 없는 촌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3년 반 동안 가르치고 위대한 꿈을 넣어 주었던 것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증거 하라. 비행기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배도 없이 도보로 다닐 때 그들에게 천하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라. 얼마나 놀라운 꿈을 주셨습니까? 그리고 성령이 오시면 성령이 능력을 주어서 이것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자 그들의 마음속에 주님이 주신 꿈이 폭발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현실과 삶을 초월한 위대한 하나님의 꿈을 받아 들였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그들은 마음속에 품자 꿈이 그들을 이끌어 나갔습니다. 평범한 어부와 촌뜨기가 아닙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역군으로 사용하셔서 그들을 통하여 3백년 만에 로마제국이 기독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세계가 변화되고 만 것입니다. 꿈을 품으면 꿈이 여러분을 품어 주시는 것입니다. 꿈을 품으면 꿈이 여러분을 만들어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꿈이 있으면 내일이 있고 꿈이 없으면 내일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늘도 꿈이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유명한 슈바이쳐 박사는 “꿈의 힘은 무한하다. 한 방울의 물은 무력하게 보이나 그것이 바위 틈새에 들어가 얼면 바위도 터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한 방울의 물 그 자체는 무력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큰 바위틈사이로 물이 들어가서 추운 겨울날 물이 얼어서 들어가면 바위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꿈은 바로 그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톨스토이는 “꿈은 길잡이다. 그것이 없으면 확실한 방향이 없어진다. 방향이 없어지면 행위도 없고 생활도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꿈이 미래를 만들고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3. 모험적인 사람
믿음의 사람은 인간으로써 상상할 수 없는 담대한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저의 삶을 볼 때 일생을 살아오면서 번지점프를 한 그런 기분입니다. 여러분 번지점프 하는 것 보았지요? 높은데 올라가서 뒤에 줄을 달아매고서 뛰어내린 거의 밑바닥에 닿을 때까지는 그냥 자유낙하를 합니다. 거의 밑바닥에 닿으려고 할 때 줄이 철컥 붙잡아 주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여러분 말씀을 마음속에 품고 말씀의 줄에 묶여서 번지 점프를 하는 것입니다. 벼랑에 서서 몸을 날리는 것입니다. 눈으로 볼 때 아찔합니다. 귀로 들으면 저 밑에 계곡의 물소리가 들립니다. 피부로 느껴도 밑에 불어오는 바람이 피부를 스쳐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볼 때 위험하다. 위험하다. 뛰어 내리면 절망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그 낭떠러지 곁에 안가지요. 될 수 있으면 멀리 서 있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런 낭떠러지까지 갑니다. 왜, 우리는 눈에 안보이지만 말씀이 나를 묶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말씀의 밧줄이 나를 묶고 있으므로 번지점프 하는 것처럼 벼랑에서 몸을 날려도 나중에 땅에 부딪힐 정도가 되면은 철컥하고 그 말씀의 줄이 나를 붙잡아 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란 번지점프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처음부터 여러분을 붙잡아 주는 것 아닙니다.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입니다.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립니다. 손에는 잡히는 것 없습니다. 내 앞길 캄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줄을 잡고 뛰어 내리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모험의 사람이 아니고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모험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 양을 칠 때 사자와 곰이 와서 양 새끼를 물고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17살쯤 되는 초립동이 사자나 곰에 대항해서 싸울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 하나님의 같이 하고 계신다는 믿음이 없으면 결코 사자나 곰에게 덤벼 들 수가 없습니다. 아주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무모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모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사자와 곰과 싸울 때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신다는 것을 믿고 나가서 싸워서 이겼던 것입니다.
삼상17:34~35에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나중에 이스라엘의 적군인 골리앗을 대항해서 싸울 때도 엄청난 모험입니다. 사울 왕이 두려워서 뒤로 물러가고 백전백승을 했던 용사들도 다 벌벌 떨고 뒤로 물러간 것입니다. 그런 백전노장을 제켜 놓고 초립동 다윗이 골리앗을 대항해서 나간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입니다. 자기 스스로 봐서는 키를 재 봐도 어림도 없고, 몸무게를 재 봐도 어림도 없고, 전투경험을 재어 봐도 어림도 없습니다.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벼랑에서 몸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같이 계신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모험을 한 것입니다. 사울은 믿어도 모험을 안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용서들도 하나님을 믿긴 믿었어도 모험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모험을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골리앗에게 나가서 대항을 한 것입니다.
삼상17:36에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삼상17:45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다윗은 하나님을 못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못 보았어요. 하나님이 계신지 안계신지 알 수 없습니다. 눈에 안보였어요. 하나님 음성 귀로 못 들었어요. 몸으로 못 느꼈어요. 믿음으로 하나님이 같이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할례를 받은 것은 하나님이 같이 계신다는 언약으로 할례를 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할례보다 더 위대한 언약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언약 맺은 사람이 오늘 예수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같이 계시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윗이 할례 베푼 하나님과 언약을 믿고 나갔다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보혈의 언약을 맺은 사람이 어떻게 담대하게 모험을 하고 나가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모험이 없으면 아무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아도 한 마리 잡지 못하고 새벽녘에 와서 배에 그물을 싣고 있는 예수님이 배를 빌려 달라고 하셔서 배를 좀 빌려 드렸습니다. 배에서 말씀을 전하고 난 다음 해가 중천에 또 오를 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원래 갈릴리 호수는 물이 맑기 때문에 밤에 물고기가 해변으로 나오고 해가 뜨면 전부 물 한가운데 들어가서 물 밑바닥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그물을 쳐도 내려가지 않습니다. 못 잡습니다. 어이없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어이가 없어 예수님을 처다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형형한 눈빛과 그 권위에 눌려서 그는 말하기를 “밤이 맞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잡은 것이 없으되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리리라”
모험입니다. 다시 예수님을 모시고 바다 한가운데로 배를 저어가니 모든 어부들이 다 보고 비웃었습니다. “저 정신없는 사람 봐라. 여태까지 해변 가에서 고기를 못 잡은 사람이 이제 대낮에 물고기를 잡아가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저런 엉터리 같은 일이 어디 있는가? 저런 모험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믿고 모험을 하니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자기의 배에도 채우고 동료의 배를 불러서 가득히 채운 것입니다.
눅 5: 4~ 6이 바로 그 말씀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고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왜 수제자가 된 것입니까? 왜 사도 중에 사도가 된 것입니까? 베드로는 믿음으로 모험을 했던 사람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험을 안했습니다. 베드로는 믿음으로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죽기 아니하면 살기로 모험을 잘한 사람이었습니다. 밤에 그들이 밤바다를 건너가는데 예수님은 그 배에 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큰 풍랑이 다가와서 노를 젓는데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다위에 예수님이 희뿌연 빛을 발하면서 걸어왔습니다. 모든 뱃사람들은 풍랑 일은 바다위에 유령이 나타나면 배가 침몰한다는 징크스가 있습니다. 유령이 나타났다고 고함을 치고 절망에 처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나니 두려워 말라!”고 하시니까
“주시면 나도 주님께로 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고 배가 일렁거리는데 누가 감히 그 배에서 나가서 예수님께로 걸어가겠습니까? 이것 보통 모험이 아닙니다. 저보고 그러면 저는 못가겠어요. 그것이 대낮도 아니고 캄캄한 밤이고 앞이 안보입니다.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고 물보라가 날리고 배가 기우뚱 거리는데, “주시어든 나로 물위로 걸어오게 하소서.” 예수님이 “오라!” 베드로는 두말하지 않고 배에서 나가서 물위로 걸어서 예수님께로 향해 갔습니다. 야! 이것 보통일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해서 모욕을 가한적도 있지만 그러나 주님을 믿을 때 진짜로 모험적으로 믿어보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무엇이 달라도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모험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는 그 믿음을 실천하는 그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마14:28~29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라고 말한 것입니다.
야! 참 놀랍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베드로처럼 되어 보시지요. 아마 배에서 나오려고 안할 것입니다. 저도 못나가겠는데 여러분 나가시겠어요? 그러나 베드로는 나갔습니다. 우리가 그냥 성경을 읽으니까 심상하게 생각하지만 실제 현실에 부딪히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험을 행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 부활승천하시고 성령 받고 난 다음에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기도하러 갈 때 앉은뱅이가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승천하시고 난 다음 성령 강림하시고 처음으로 큰 기적을 행한 것이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우리를 바라보라!” 무엇을 줄줄 알고 손을 내밀고 바라보니까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 손을 잡고 일으켜 버린 것입니다. 보통 환경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배 보러 오는데 그 많은 사람 앞에서 그렇게 담대하게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손을 내밀어 잡아 당겨서 일으키는 그 담대함을 보십시오.
옛날에 박종선 목사님이 앉은뱅이 일으키겠다고 못 걷는 사람을 업고 저 골목에 가서 아무도 안 보는데 가서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 하니까 일어나지 않고 돌맹이를 들고 때리기 때문에 “걸음아 나 살려!” 라고 달려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담대하려면 사람들 보는 앞에서 해야지 왜 업고 골목길에 들어가서 아무도 없는데서 그러다가 돌만 얻어맞고서 도망을 칩니까? 믿음의 사람은 모험의 사람인 것입니다. 담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담대함은 정말로 주의 말씀에 의지하지 않고는 그런 담대함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4. 언어가 다른 사람
믿음이란 환경이나 감각이나 느낌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막11:22~23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이 산들에 명하여 저 바다에 던져라. 말하면 그리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된다.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산을 보고 바다로 던지라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말을 사용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감각적인 말이 아닙니다. 이성적인 말이 아닌 것입니다. 인간적인 체험의 말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상상을 초월한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초환경, 초감각, 초느낌 즉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이 99살 때 전능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갱신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겠다.” 하시고 또 “네 아내는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될 찌라.”고 하시고 그들의 이름을 바꾸어 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고귀한 아버지라는 이름인데 아브라함 ‘열국의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바꾸어줬습니다. 사래는 공주라는 말인데 사라 ‘여주인, 열국의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준 것입니다. 그들은 나이가 100세가 다 되었습니다. 사라는 아흔 살이 다 되었습니다. 육체로 보아서 자식을 낳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주겠다고 하나님이 약속을 하시고 난 다음에 그들의 입술의 고백을 바꿔 버린 것입니다.
창17: 5에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고 하셨고
창17:15~16에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하나님께 언약을 받은 사람은 말을 바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아직 없습니다. 눈에 안보여요. 손으로 잡을 수 없습니다.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말을 해야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 천국에 안 올라갔지만 나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요, 천국에 내 집이 있고 나는 천국 사람이라고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병이 안 나았지만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네가 나음을 입었다고 하셨으므로 나는 말씀에 입각해서 기도를 했으므로 나음을 입었습니다. 말을 그렇게 바꿔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도 성공하지 못하고 시험과 환난과 고통이 많지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나를 해방하여 주시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해주셨으므로 나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기어코 나는 복을 받은 사람이니 복이 나를 따라오는 것입니다. 말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바꿀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내 인간의 힘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그리고 이 산들에 명하여 저 바다에 던져라. 말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가 언어를 바꿔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옛날에 감각적인 언어, 지성적인 언어, 이성적인 언어, 체험적인 언어만 말한다면 인간적인 삶밖에 살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려면 말을 바꿔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말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주님께서 한번은 산에서 변화되고 아홉 제자들하고 내려오니까 많은 사람이 남은 제자들하고 모여 있는데 정간을 하는 아들을 데린 아버지가 와서 예수님께 뛰어와서 “주여, 내 아들이 귀신에 잡히면 물에도 자빠지고 불에도 자빠집니다. 귀신이 내 아들을 죽이려고 했는데 내 아들을 데리고 왔는데 당신의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더이다. 무엇을 할 수 있거든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주님께서 당장 그 아버지 입술의 고백을 꾸짖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입술의 고백을 잘못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그러자 그 아버지가 입술의 고백을 바꾸었습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아까 전에는 “할 수 있거든”이 라고 말하다가 이제는 입술의 고백을 바꾸어서 “주여 내가 믿나이다.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시옵소서.” 그러자 주님께서 그 소년을 향해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이 아버지가 믿음의 고백을 잘못 했을 때는 예수님께서 꾸짖으시고 어린 아이를 고치지 아니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라고 말 할 때는 “도대체 무슨 말을 그렇게 말하느냐? 그런 입술의 고백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 꾸짖으니까 당장에 아버지가 회개하고 “믿습니다.” 이제 ‘할 수 있거든’이 아닙니다. “믿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고쳐 주신 것입니다. 정말 신앙의 고백에 주님이 감탄한 것은 수로보니게 여인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딸이 귀신 들렸다고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나와 간증할 때 예수님이 “자녀에게 줄 떡을 취해서 개에게는 안준다. 이방 개인 너에게 치료해 줄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수로보니게 여인이 말했습니다. “옳소이다. 주님, 개입니다. 그러나 개들도 밥상에서 떨어지는 자녀들이 먹는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받아먹습니다.” 그 신앙고백을 하니까 주님이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오호!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느니라.” 조금 전까지 주님께서 자녀에게 줄 떡을 취하여 개에게는 안준다고 했는데 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신앙고백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예 옳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자녀의 밥상 밑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받아 먹이니 제게 부스러기 하나만 주십시오.” 그 말에 주님이 감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말을 잘해야 주님을 감동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하고 내게 은혜를 받으려고 하느냐?” 이렇게 꾸짖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님 할 수만 있으면 나를 좀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할 수만 있으면 나를 고쳐 주시옵소서. 할 수만 있으면 내게 평안을 주시옵소서. 할 수만 있으면 성공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 사람아! 할 수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말 도로 고쳐서 오너라! 말 배워서 오너라!”고 하십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곰곰이 생각하고, 회개하고 난 다음에 “주여, 믿습니다. 아까 믿음 없는 말을 한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할 수 있습니다. 믿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래, 네 믿음대로 될 찌어다.”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히10:35에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담대하게 말을 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등의 좋은 찬송가를 많이 남겼던 영국의 존 뉴턴 목사님은 “세상에서 낙심하게 하는 것들이 많이 있으나 믿음의 사전에는 그런 말이 없다. 다른 사람에게는 낙심되는 것들이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길로 들어가는 신호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믿음이란 환경이나 감각이나 느낌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말이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불가능을 가능하다고 말을 할 수 있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런 성격을 가지신 하나님과 동행을 하면 하나님처럼 우리가 믿고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결론]
믿음의 사람이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야 함께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따라 생각하고 하나님을 따라 꿈꾸고 하나님을 따라 믿고 하나님을 따라 말하게 되면 하나님과 더불어 생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 모든 사람들이 다 믿음의 사람이 되어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이 사람이 가지는 특성을 우리가 알아보았습니다. 아버지여, 믿음의 사람은 말씀의 사람이고 믿음의 사람은 꿈꾸는 사람이고 믿음의 사람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모험을 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의 요소를 갖추고 우리를 주와 함께 동행하게 도와주시옵시고 하나님의 기적의 도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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