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을 보게 하신 예수님
본문
박상훈목사
오늘은 우리가 요한복음에 기록된 여덟 가지 표적 가운데서 여섯 번째에 해당하는 표적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이 소경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예수님이 소경을 보게 하신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회수만 살펴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열병이나 혈루병 또는 중풍병을 고쳐주신 구체적인 사례는 각기 단 한번씩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문둥병을 고쳐주신 경우는 두 번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경우는 세 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고쳐주신 경우는 구체적으로 기록된 경우만 해도 다섯 번이나 됩니다.
마9:27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마12:22 그 때에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막8:22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막10:46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요9: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이외에도 예수님은 여러 소경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눅7:21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이처럼 성경은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표적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고쳐주신 표적에 대해서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당시에 소경들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일까요? 그 보다는 더 깊은 영적 의미가 여기에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소경이 눈을 뜬 경우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이는 언제나 하나님 자신이 행하실 사역으로서, 장차 메시야가 오시면 비로소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예언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시146:8 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시며
사29:18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사35:5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사42:7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처럼 소경을 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메시야만이 이 일을 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시다.” 요한복음은 이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표적들 가운데서, 대표적이고도 독특한 표적들만 골라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요한복음이 소경의 눈을 보게 하신 이 표적을 빠뜨리지 않고 소개하고 있는 이유는 이 표적이 그만큼 예수님의 신성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메시야이심을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시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소경 되어 어둠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안을 열어주셔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영적 세계를 볼 수 있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뜻 깊은 맥추감사주일을 지키면서, 예수님의 이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서 깊이 감사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과 소경의 만남입니다(The Encounter, 1절).
요9: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1) 상황(Situation)
오늘 본문 바로 앞 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8: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돌을 들어 치려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자신의 친아버지라 칭함으로서 자신과 하나님을 동등시하는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성전 공사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주변에서 쉽게 돌을 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자를 돌로 처형하는 율법의 규정에 따라서 예수님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들었습니다.
레24:16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이에 예수님은 숨어 성전에서 나가셨습니다. 아직은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때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셔서 유대인들이 눈은 떠있어도 예수님을 보지 못하도록 만드셨을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자신을 돌로 쳐죽이려는 유대인들을 피해서 성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성전 밖으로 나있는 길을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유대인의 추격을 피해서 나가시는 길이기에, 자연히 그 걸음은 빠르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2)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A man born blind)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서 성전을 나가시던 예수님은 성전 밖에서 한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그는 소경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날 때부터 소경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니까, 그가 날 때부터 소경이었다는 사실도 환하게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2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그가 날 때부터 소경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 소경은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 소경은 이미 오랫동안 그곳에 있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다음에 나오는 8절에 있는 말씀대로, 그는 그곳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에는 항시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이 구걸하기에는 그곳이 매우 적합한 장소였을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주권적 은혜(Jesus' sovereign grace)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은 예수님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지금도 자기 앞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외칠 수도 없었습니다.
“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고쳐주소서.”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를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눈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다시금 그를 만나서 그의 영혼도 구원해주셨습니다. 이처럼 소경이 눈을 뜨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된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주권적 은혜였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도 전적으로 예수님의 주권적인 은혜였음을 잊지 맙시다. 본시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우리도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예수님은 찾아주셨습니다.
영적으로 소경 된 우리가 예수님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친히 우리를 찾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밝은 빛을 비추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주셨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주권적인 사랑과 은혜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예수님은 급히 성전 밖으로 나오신 길이었습니다. 자신을 돌로 치려 하는 유대인들을 피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 앞에서 가시던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이 처한 위급한 상황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가련한 우리 앞을 그냥 지나쳐 가시지 않고, 언제나 우리 앞에 멈추어 서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가까이 다가오셔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질병을 치유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소원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찾아주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예수님의 주권적인 사랑과 은혜가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게 임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실명의 원인입니다(The Cause, 2-5절).
요9: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요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요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1) 제자들의 질문(The disciples' question)
예수님이 베데스다 연못가의 삼십팔 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뒤에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제자들은 사람의 병이 죄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 눈앞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 소경이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두 가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첫째는, 소경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을 내리게 될 때는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그 소경은 날 때부터 눈이 멀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태어나기 전에 죄를 지었어야 하는데, 과연 그가 어느 시점에서 죄를 지었느냐 하는 의문입니다.
창25:22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 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이 말씀에 근거해서 그 당시 랍비들은 사람이 어머니의 태에서 죄를 짓게 되면, 그 죄 값으로 인하여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병을 가질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머니의 태에서 죄를 지으면 무슨 죄를 그렇게 크게 짓겠습니까? 따라서 제자들의 생각에, 그 사람이 태아 때의 죄로 인해서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로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둘째는, 소경의 부모가 지은 죄 때문이라는 결론입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두 번째 결론이 훨씬 더 이해하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부모가 성병과 같은 몹쓸 병에 걸리면 자식들이 소경으로 태어날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부모가 경건한 사람들인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자식이 그 부모의 죄 값을 치러야 한다는 사상을 명백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겔18:2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겔18: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겔18:20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따라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그 동안 계속해서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사항에 대해서 이제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을 하고서 예수님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렇지 않으면, 그 부모오니이까?”
(2) 예수님의 답변(Jesus' answer)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이 생각했던 두 가지 결론을 모두 거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러면서 예수님은 하나의 새로운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그를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소경으로 만들어놓으셨다는 뜻이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너무 잔인한 분이 되시고 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런 뜻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소경이 당하고 있는 불행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기회가 되느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소경이 당하는 불행이라도 얼마든지 전화위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을 미리 내다보신 것입니다.
(3) 고난에 대한 시각(Perspective)
우리는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통해서, 고난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시각과 예수님의 시각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 가지로 간추려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제자들은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그가 그렇게 된 원인이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걸하는 사람이 당하는 고통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시고, 그 일을 통해서 크게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제자들은 과거 지향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걸하는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를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미래 지향적인 대답을 하셨습니다.
셋째, 제자들은 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예수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실제적이면서도 사명적인 답변을 주셨습니다. 사실 왜 예수님이 그 급한 상황에서 그 자리에 멈추어 서셨습니까? 신학적으로 그 사람이 실명하게 된 원인을 따져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를 도우시며, 그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를 만나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어떤 고난이 있습니까? 제자들처럼 부정적이고, 과거 지향적이고, 이론적으로 따지고 들지 맙시다. 예수님처럼 긍정적이고, 미래 지향적이고, 사명적으로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을 한번 예로 들어서 생각을 해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아 로마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또 감옥에서는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는 그가 해야 할 사명이 지장을 받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긍정적으로, 미래 지향적으로, 사명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로마의 감옥에 갇혔을 때 기록한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1: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실제로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네 권의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시위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로마의 고관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면서,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로마가 기독교 국가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힌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될 것이라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고난을 당할 때도 긍정적이고, 미래 지향적이고, 사명적으로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병들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 같습니다. 몸은 고통스럽습니다. 물질적으로도 손해가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해야할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무엇 하나 득 되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신의 고난을 긍정적이고, 미래 지향적이고, 사명적으로 생각하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그 자신에게 주는 이득이 참으로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선 사람은 병이 들면 겸손해지고, 진실해집니다. 모든 잘못을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를 회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이 병들어 보아야 다른 사람이 병들 때 그 처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그가 자신의 주변에 있는 병든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위로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낙심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병든 것이, 또는 내가 사업에 실패한 것이 도리어 내 믿음의 진보를 위해서는 크게 유익하였음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한 믿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4) 소경을 고쳐주어야 할 이유(The reason to heal a man born blind)
지금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서 쫓겨가고 계셨습니다.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소경 앞에서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자신이 그 소경을 고쳐주셔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오늘 본문 4절과 5절에서 밝혀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4절 말씀처럼 예수님은 사명을 가지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은 5절 말씀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소경은 문자 그대로 빛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육체와 아울러서 뒤에 가서는 그의 영혼까지 자신의 빛으로 환하게 비추어주셨던 것입니다.
(5) 우리의 사명(Mission)
예수님은 오늘 본문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내가 하여야 하리라.”
예수님은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예수님은 지금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입니까?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들도 예수님과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를 예수님은 바라시는 것입니다.
때가 아직은 낮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어둠은 곧 닥치게 될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섯 달란트를 맡았던 종처럼, 두 달란트를 맡았던 종처럼 우리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에 충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행여 한 달란트를 맡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한 달란트가 두 달란트가 되고, 두 달란트가 네 달란트가 되고, 네 달란트가 여덟 달란트가 되며, 여덟 달란트가 열 여섯 달란트가 되어서 얼마든지 다섯 달란트를 맡았던 종보다 더 많은 것을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예수님의 안타깝고도 절박한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세상적인 일, 육신적인 일에 몰두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에 더욱 충성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을 우리 모두가 받아쓰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입니다(The Sign, 6-7절).
요9: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요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1) 방법(Manner)
예수님은 소경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으셨습니다. 그것으로 진흙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소경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처럼 독특한 행위를 하셨을까요?
사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도 얼마든지 소경을 고치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이처럼 독특한 행위를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가 7절 말씀에 밝혀지고 있습니다.
(2) 실로암 못(The pool of Siloam)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예수님이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신 것은 그를 실로암 못으로 보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안에는 두 개의 연못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베데스다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실로암이었습니다. 베데스다가 자연적인 연못이었다면, 실로암은 인공적으로 만든 저수지였습니다.
왕하20:20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권력과 못과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중으로 인도하여 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대하32:30 이 히스기야가 또 기혼의 윗 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 좇아 다윗 성 서편으로 곧게 인도하였으니 저의 모든 일이 형통하였더라
유다 왕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의 포위 공격에 대비해서 예루살렘 성안에 못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성밖에 있는 기혼 샘물을 막아 그곳에서부터 암반을 뚫고 터널 곧 수도를 만들어서 물이 성안으로 흘러들어 오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안에 만든 못이 구약시대 사용했던 히브리어로는 실로아, 신약시대 사용했던 헬라어로는 바로 실로암이었습니다.
(3) 영적 의미(Symbolism)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실로암이라는 히브리어의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성밖 기혼 샘물에서 터널을 통하여 성안 연못까지 물이 보내어졌다는 의미에서 그 못의 이름을 실로암이라고 지었습니다. 이 실로암 못은 바로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실로암, 곧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메시야이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 선지자였던 이사야는 실제로 이 실로암 못을 메시야의 모형으로 보았습니다.
사8:5 여호와께서 다시 내게 일러 가라사대
사8:6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라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
사8:7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곬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사8:8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 하셨느니라
유다 백성은 실로아 물을 버렸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지자 이사야는 장차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보내실 임마누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게 될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이처럼 실로암 못은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자신을 실로암에 비유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7: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해마다 장막절이 되면 제사장은 칠일 동안 실로암 못의 물을 길어 제단에 부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반석에서 물을 마셨던 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명절 끝날이 되면 그러한 의식도 끝이 나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자신이 참 실로암이시며, 자신이 반석이시기에 자신을 통하여 생수를 마실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본시 실로암은 기혼 샘물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은 인공적인 연못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소경을 실로암으로 보내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그의 육신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까지도 밝은 빛을 비추어주실 참 실로암이신 것을 깨우쳐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참 실로암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온전한 실로암이십니다. 죄와 허물로 영적 소경이었던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실로암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인 것을 잊지 마십시다.
(4) 소경의 순종(Obedience)
오늘 본문 7절 끝부분의 말씀입니다.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여기에 소경의 순종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이에 소경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로암 못으로 갔습니다. 소경이 그 눈에 진흙을 바르고서 거리를 지나가는 것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실로암 못으로 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실로암 못으로 갔습니다.
그 당시 실로암 못에는 서른 세 개의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한 사람도 조심해서 내려가야 하는 계단이었습니다. 따라서 소경이 그곳에 내려가서 자기의 눈을 씻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물론 소경이 자기 혼자의 힘으로 실로암 못으로 가서 자기 눈을 씻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지 않고, 조금도 지체함이 없이 그대로 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실로암에 가라고 말씀하시니까, 그는 가기 힘들어도 그곳으로 갔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그곳에서 씻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는 씻기 힘들어도 그곳에서 씻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이 그에게 베푸신 표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밝은 눈으로 왔더라.”
소경은 자신의 눈이 밝아졌을 때, 이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은혜인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예수님을 만났던 그곳으로 얼른 되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자리에 머물러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뒤에 가서 다시금 그 사람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영혼에도 밝은 빛을 비추어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는 언제나 무한합니다.
(5) 교훈(Lessons)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영적으로 소경 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주권적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에게 밝은 빛을 비추어주셨습니다. 우리를 빛의 아들로 삼아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들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그 은혜에 깊이 감사를 드립시다.
둘째, 이제는 모든 어둠의 일을 벗어버리고, 날마다 빛 가운데로만 행하십시다
셋째, 밤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일에 더욱 충성하십시다.
넷째, 고난이 있더라도 이를 긍정적으로, 미래 지향적으로, 사명적으로 생각하십시다.
뜻 깊은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해서, 빛 되신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찾아주시고 만나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어둠을 물리쳐주시고, 그리스도의 빛을 환하게 비추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참 실로암이신 예수님이 이 시간 우리 모두를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서 우리의 추함이 정함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풍성하게 임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