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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인내와 결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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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인내와 결말 이야기” 2006. 9.10 .
약5:11, 욥42:1-6

지난 주일 "히스기야의 행복과 불행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욥의 인내와 결말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 히스기야의 불행 이야기를 하면서 한 가지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히스기야가 마지막에 두 손 들고 하나님께 항복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가 모든 것이 잘 되었을 때, 자기 자랑과 자기 과시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임했는데, 그때 히스기야가 두 손 들고 항복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심판이 선고되었을 때, 원망 불평 반항하는 대신,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두 손 들고 항복을 했습니다. 참으로 귀한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욥의 인내와 결말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욥도 견디기 어려운 고난과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당한 다음 두 손 들고 하나님께 항복을 했습니다. 욥이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께 항복한 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리울뿐이로소이다"(욥40:3,4).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1,3,6). 히스기야도 마지막에 가서 두 손 들고 항복했고 욥도 마지막에 가서 두 손 들고 항복했습니다. 아니 모세도 마지막에 가서 두 손 들고 하나님께 항복했습니다. 원망 대신 축복 기도를 하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다윗도 나단 선지 앞에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나이다" 라고 말하면서 두 손 들고 항복했습니다. 탕자도 마지막에 가서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두 손 들고 항복했습니다.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오늘 아침 설교를 시작하면서 ‘항복’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자기 자랑이 많았는데 매를 맞고 하나님께 항복을 했습니다. 욥도 자기 변명이 많았는데 매를 많이 맞고 하나님께 항복을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랑이 많고 자기 변명이 많습니다. 우리는 매를 많이 맞기 전에 두 손 들고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항복하지 않고 버티어보았자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항복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축복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아침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욥의 인내와 결말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약5:11에서 가져왔습니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야고보서는 욥기 1장에서 42장까지 나타난 많은 가르침을 단 두 단어로 요약해서 기록했습니다. ‘인내’라는 단어와 ‘결말’이라는 단어입니다. 욥에게서 배울 것은 ‘인내’이고 ‘결말’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인내'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드립니다. 욥의 인내를 배우라고 했습니다. 욥이 그렇게도 견디기 어려운 고난과 고통과 환난과 슬픔과 아픔과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인내'했다고 했습니다. 인내는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인격이 단련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을 당겨오게 됩니다. 욥이 인내하므로 온전한 인격이 되었고 욥이 인내하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과 축복을 당겨 받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서는 인내의 귀중함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4).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약5:11). 사도 바울도 인내의 귀중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롬5:3,4).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가 인내이고 사랑의 특성 중의 하나가 인내라고 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인내를 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혼하는 사람도 많고 자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사회 안에 분쟁과 분열이 많습니다. 자기 생각과 기분에 많지 않으면 토라지고 화를 내고 싸우기를 잘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욥의 인내를 배우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인내하면 온전해지고 인내하면 복되고 인내하면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결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의 중심은 욥이 '인내'하므로 얻은 '결말'입니다. 욥이 '인내’하면서 얻은 ‘결말’이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께서 욥에게 주신 ‘결말'이 물론 물질적 축복과 자녀 손들의 축복과 장수의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욥42:10-17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물질적 축복과 자녀 손들의 축복과 장수의 축복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저도 우리 강변교회 성도들이 고난을 잘 견디고 인내하므로 물질적 축복과 자녀 손들의 축복과 장수의 축복을 받게 되기를 소원하며 축원합니다. 그런데 욥이 얻은 '결말'이 그것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보다 더 값진 '결말'을 주님께서 욥에게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욥이 고난과 인내의 과정을 거치면서 얻은 값진 '결말'이 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보다 깊이 알게 된 것과 사람들을 보다 깊이 알게 된 것과 그리고 하나님을 보다 깊이 알게 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욥에게 주신 세 가지 ‘결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욥은 고난과 인내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보다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욥은 자기가 미천한 죄인이고 무지한 죄인이고 쓸데없는 말을 많이 지껄인 수다쟁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입을 가리게 되었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어거스틴과 칼빈의 간절한 소원과 기도도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과 함께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과 칼빈은 말년에 가서 “나는 망할 자입니다. 나는 망할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거듭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기를 잘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말을 많이 합니다. 자기가 옳다는 말을 많이 하고 남이 잘못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욥은 아마 자기를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욥이 말을 잘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말을 많이 했습니다. 자기가 의롭고 순전한 사람이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나도 너희 같이 총명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 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 받는 자가 되었으니 의롭고 순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욥12:1-4). 욥은 자기를 의롭고 순전한 자라고 말하고 또 말했습니다. 아마 자기를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또 한 사람은 바로 여기서 설교하는 저 자신일 것입니다.
욥은 고난과 고통과 환난과 슬픔과 아픔과 괴로움을 겪으면서 그리고 그것을 인내하면서 자기 자신을 조금씩, 조금씩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고난과 고통과 환난과 슬픔과 아픔과 괴로움은 자기 자신을 바로 알게 하는 교사이기 때문입니다. 욥이 수 많은 고난과 고통과 환난과 슬픔과 아픔과 괴로움을 겪으면서 그리고 인내를 배우면서 발견한 자기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입을 가릴뿐이로소이다.”(욥40:4).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3,6). 욥이 고난과 인내를 통해서 얻은 귀중한 '결말' 중의 하나는 자기 자신이 미천하고 무지한 죄인임을 보다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둘째, 욥은 고난과 인내를 통해서 사람들을 보다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욥은 고난과 고통을 당하면서 그리고 인내를 배우면서 친구도 형제도 친척도 아내도 이웃도 모두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불리하면 언제나 등을 돌릴 수 있는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란 사랑의 대상은 될지언정 믿음의 대상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되었고, 사람은 기도의 대상은 될지언정 믿음의 대상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욥의 가까운 세 친구도 나중에 기도의 대상은 될 수 있었지만 믿음의 대상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욥이 세 친구들을 향해서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구나”(욥16:2).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데 없는 의원이니라”(욥13:4).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꾸짖고 나는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욥19:3).
욥은 형제들과 친척들과 종들을 향해서도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나의 형제들로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외인이 되었구나 내 친척은 나를 버리며 가까운 친구는 나를 잊었구나 내 집에 우거한 자와 내 계집 종들은 나를 외인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청하여야 하겠구나 내 숨을 내 아내가 싫어하며 내 동포들도 혐의하는구나 어린 아이들이라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대적이 되었구나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 내 살을 먹고도 부족하냐”(욥19:13-22).
욥은 이제 사람은 사랑의 대상은 될지언정 믿음의 대상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사람은 기도의 대상은 될지언정 믿음의 대상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욥은 세 친구들로부터 극심한 조소와 비난과 공격과 정죄를 당했지만 마지막에 가서 저들을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욥은 저들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욥42:10).
사실 다윗도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나 기도의 대상이 될지언정 믿음의 대상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미워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대저 저희가 악한 입과 궤사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거짓된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무고히 나를 공격하였나이다. 나는 [저희를]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는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109:2-4). 욥과 다윗은 극심한 고난과 고통 중에서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서글픈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사람들을 너무 좋아하고 사람들을 너무 잘 믿습니다. 제가 사람들을 얼마나 좋아해야 하는지, 사람들을 얼마나 믿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도 인생은 믿을 것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2:22). 욥이 고난과 인내를 통해서 얻은 귀중한 결말 중의 하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과 기도의 대상은 될지언정 믿음의 대상은 될 수 없다는 서글픈 사실을 보다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셋째, 욥은 고난과 인내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다 깊이 알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달려가게 되었습니다.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욥16:20). 욥이 고난과 인내를 통해서 새롭게 발견한 하나님은 자기를 변호해 주시는 구속주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구속주 하나님을 향해서 달려가게 되었습니다. 욥은 극심한 고통과 절망 중에서 구속주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었고 구속주 하나님을 향해서 달려가게 되었습니다. 욥이 극심한 고통 중에서 발견한 구속주 하나님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땅아 내 피를 가리우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으로 쉴 곳이 없게 되기를 원하노라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보인이 높은데 계시니라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변백하시기를 원하노니"(욥16:18-21). 욥이 극심한 고통 중에서 발견하고 향해서 달려간 하나님은 자기를 변호하시고 변백하실 보증인이 되시는 구속주 하나님이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 내 살을 먹고도 부족하냐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욥19:22,25-27). 욥이 극심한 고통 중에서 사모하며 바라본 하나님은 사실은 후일에 죽음에서 부활하실 구속주 되시는 예수님이셨습니다. 욥은 극심한 고통 중에서 죽음에서 부활하실 구속주 예수님을 초급한 마음으로 사모하면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분은 창조주 하나님보다는 구속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구속주 예수님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도 알게 됩니다.
욥은 구속주 예수님을 알게 된 다음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고 섭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보다 깊이 알게 되었고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볼 수가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을 쏟아 부어주셨는데 그 말씀 가운데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고 섭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 같이 넘쳐 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었느냐 광명의 처소는 어느 길로 가며 흑암의 처소는 어디냐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뢰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 누가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축축하게 하고 연한 풀이 나게 하였느냐 비가 아비가 있느냐 이슬 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얼음은 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물이 돌 같이 굳어지고 해면이 어느니라 네가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겠느냐 삼성의 띠를 풀겠느냐 네가 열두 궁성을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 북두성과 그 속한 별들을 인도하겠느냐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하늘로 그 권능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마음 속의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 네가 암사자를 위하여 식물을 사냥하겠느냐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욥38:1-41).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알 수 있느냐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 누가 들 나귀를 놓아 자유하게 하였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들 소가 어찌 즐겨 네게 복종하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타조는 즐거이 그 날개를 친다마는 그 깃과 털이 인자를 베푸느냐 그것이 알을 땅에 버려두어 모래에서 더워지게 하고 발에 깨어질 것이나 들 짐승에게 밟힐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그 새끼에게 무정함이 제 새끼가 아닌 것처럼 하며 그 구로한 것이 헛되게 될찌라도 괘념치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 내가 지혜를 품부하지 아니하고 총명을 주지 아니함이니라 그러나 그 몸을 떨쳐 뛰어갈 때에는 말과 그 탄 자를 경히 여기느니라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네가 그것으로 메뚜기처럼 뛰게 하였느냐 그 위엄스러운 콧소리가 두려우니라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방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의지함이냐 그것이 낭떠러지에 집을 지으며 뾰족한 바위 끝이나 험준한데 거하며 거기서 움킬만한 것을 살피나니 그 눈이 멀리 봄이며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살륙 당한 자 있는 곳에는 그것도 거기 있느니라"(욥39:1-30).
욥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모습 앞에 벌레 한 마리 같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그저 입을 가리고 무릎을 꿇고 두 손 들고 항복을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내가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라고 말하면서 통곡을 했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너무 무지합니다. 우리는 너무 미천합니다. 우리는 너무 교만합니다. 우리는 너무 잘난 척 합니다. 우리는 너무 말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욥을 치셨습니다. 극심한 고난과 고통과 슬픔과 아픔과 괴로움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인내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무지함과 미천함을 보게 하셨고, 인생의 허무함을 보게 하셨고, 그리고 하나님만이 욥의 구속주이심을 깨닫게 하셨고 하나님만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고 섭리하심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결국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항복하게 하셨습니다. 스스로 한탄하며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게 만드셨습니다. 그 길을 사도 바울과 어거스틴과 성 프랜시스가 걸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주셨던 은혜와 결말을 무지하고 미천한,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는 말만 많이 하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바랍니다.

김명혁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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