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가 무너지면 무엇을 할꼬?”
본문
시11:1-7
얼마 전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면서 시편 11편을 읽다가 “터가 무너지면 무엇을 할꼬?” 라는 말씀과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라는 말씀이 제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마침 그때가 “용서를 넘어선 사랑” 이란 창작극을 관람하면서 손양원 목사님의 삶과 죽음이 제 가슴에 깊은 감동을 불러 일으키고 있던 때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1950년 6월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즉 나라의 터가 무너졌을 때, 전쟁을 피하라는 권면을 받았지만, 전쟁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선교사들이 1950년 7월경 손 목사님과 가족이 피난을 갈 수 있도록 애양원 앞 신풍리 앞 바다에 배 한 척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손 목사님은 “내가 피할 곳은 예수님의 품입니다”고 말하면서 피하지 않았습니다. 애양원을 떠나지 않았고 나환자들을 떠나지 않았고 주님의 품에 안겨 있다가 1950년 9월 28일 순교의 죽음을 당해 주님의 품에 영원히 안겼습니다. 2년 전인 1948년 10월 19일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인 동인군과 동신군도 반란을 피하라는 권면을 받았지만 자기들이 피할 곳은 예수님의 품이라고 말하면서 피하지 않고 주님의 품에 안겨 있다가 1948년 10월 21일 총살 순교를 당해 주님의 품에 영원히 안겼습니다. 오늘 아침 시편 11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첫째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터가 무너지는 절망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가정의 터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도 되고, 경제의 터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도 되고, 건강의 터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도 되고, 나라의 터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도 됩니다. 공의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도 됩니다. “용서를 넘어선 사랑” 창작극은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손동희 궈사님의 고백이지요. “누구에게나 뒤돌아보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야 했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 불의의 사고로 부모와 형제를 잃어야 했던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살다 보면 기쁜 일보다 가슴 아픈 일을 더 자주 경험하는 게 우리들 인생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나는 그 아픈 기억 속으로 떠나고자 합니다. 그리움과 함께, 눈물과 함께, 그러나 모든 일 가운데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와 도움과 함께…” 손동희 권사님은 터가 무너지는 절망적인 경험을 너무나 많이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터가 무너지는 절망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선지자 이사야도 터가 무너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안 그래함 롯츠 여사가 지적한 대로 이사야는 웃시아 왕이 죽으므로 정서적인 터와 정치적인 터와 경제적인 터가 무너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친구가 죽었고 후원자가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이 뒤 흔들렸습니다. His life was shaken. 주님의 제자들도 모두 나라의 터가 무너지는 슬픈 경험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두들겨 맞고 또 두들겨 맞아 몸의 터가 무너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외롭게 유배되므로 정서적인 터와 정치적인 터와 경제적인 터가 모두 무너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터가 무너지는 절망적인 경험을 하게 됩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터가 무너지면 무엇을 할꼬?”
둘째 우리는 터가 무너질 때 도망치고 싶은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내 속에서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여기 의인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도 터가 무너질 때 도망치고 싶은 생각을 가지게도 됩니다. 터가 무너질 때 또한 주변에서 도망치라는 말을 하게도 됩니다.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치라 함은 어찜이뇨.” 산으로 도망치라는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미국으로 도망치라는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그까짓 하나님을 믿어서 무얼 해? 그까짓 교회를 나가면 무얼 해? 세상으로 도망쳐 버려” 라는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그까짓 기도를 해서 무얼 해? 의사를 찾아가 보든지, 점쟁이를 찾아가 보든지, 은행을 찾아가 보든지 해” 라는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로마에 박해가 일어나서 교회의 터가 무너지고 있을 때 로마를 떠나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로마를 등지고 도망을 치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환상 중에 베드로에게 나타났습니다. 로마를 향해서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쿠오 봐디스 도미네?” “나는 네가 버리고 도망치는 로마를 향해서 간다.” 베드로는 가던 걸음을 돌이켜 로마를 향해서 다시 걸어갔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로마에 들어가 붙잡혀서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는 위대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터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될 때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받게 됩니다. 절망과 불안과 두려움에 쌓이게도 됩니다. 경제의 기반, 건강의 기반, 가정의 기반이 무너질 때 절망과 불안과 두려움에 쌓여 모든 것을 다 집어치우고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받게도 됩니다. 소화불량에 걸리기도 하고 불면증에 걸리기도 합니다. 원망 불평 분노에 사로잡히게도 됩니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은 주님을 떠나 골프나 등산이나 여행이나 술이나 세상 취미에 빠지게도 됩니다. 다 집어치우고 산 속으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받기도 됩니다.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도망을 치던가 아예 세상을 떠나 죽고 싶은 충동을 받게도 됩니다.
어제 아침 명동 유네스코 빌딩에서 모인 “기독교사회복지 expo 2005” 홍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 택시를 두 번을 탔습니다. 갈 때 탄 택시의 기사는 기득권층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강남의 부자들이 집을 여러 채 가지고 있고 주말이면 고속도로가 미어지도록 놀러 가는데 자기 같은 사람은 놀라가기는커녕 전세 집 값 벌기도 힘이 드니 다 집어치우고 산으로 들어가 산삼이나 찾아보는 것이 낳을지 모르겠다고 토로 했습니다. 올 때 탄 택시의 기사는 영어 방송을 듣고 있을 정도로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이었는데 요사이 젊은 이들의 무분별한 행동에 실망을 느낀다고 토로했습니다. 서울 시내를 달리는 자가용의 40%가 20대가 몰고 다니는 차들인데 이들은 주로 놀기 위해서 바다로 산으로 또는 시내 곳곳으로 차를 몰고 다닌다고 했습니다. 자녀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돈 많은 부모들의 문제도 심각하다고 말하며 다 집어치우고 떠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택시 값을 2천 몇 백원씩 더 주자 기사들은 ‘이러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고맙게 받곤 했습니다. 우리는 터가 무너지는 듯한 절망에 처할 때 모든 것을 다 집어 치우고 산으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셋째 터가 무너질 때 우리가 피할 곳은 하나님의 품입니다.
다윗은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치라 함은 어찜이뇨” 라고 중얼거리다가 이렇게 마음을 확정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다윗은 터가 무너졌을 때 하나님의 품을 바라보았고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바라보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전쟁이나 환난을 당할 때 전쟁이나 환난을 피할 수도 있습니다. 다윗도 전쟁과 환난을 당했을 때 이 곳 저 곳으로 피해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비록 몸은 전쟁과 환난을 피해 다닐지라도 마음과 영혼은 주님의 품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지금 자기의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께 피하였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다른 시편에서도 하나님께 피한다고 고백해곤 했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시7:1).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 이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2). 터가 무너질 때 우리가 피할 곳은 하나님의 품입니다. 우리가 몸과 마음과 영혼이 완전히 주님 품에 안기기 위해서 때로는 전쟁이나 환난을 일부러 피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그 길을 택했고 저의 아버지도 그 길을 택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주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 너무너무 귀중함을 강조하면서 이렇게까지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피하기 위해서 죽음이 임박한 것 같은 위험이 있기를 사모해야 된다.” 참으로 대단한 고백입니다. 터가 무너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품을 떠나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차라리 터가 무너지는 위기를 주시므로 나로 하여금 오직 주님의 품안에 안기게 하시옵소서!” 이것이 다윗의 기도였고 손양원 목사님의 기도였고 박윤선 목사님의 기도였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은 건강의 터가 무너졌을 때 주님의 품에 온전히 안기기 위해서 건강의 회복이나 교인들의 찬사까지도 모두 포기했습니다. “나는 14 시간의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에 돌아와 주일을 맞았다. 면회 시간에 교인 몇 명이 들어와 ‘목사님의 수술이 잘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교인들이 축제 분위기입니다’ 라고 전해주었다. 순간 내 속에서 ‘별세 4수 하는 종에게 축제 분위기라니…’ 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세 4수에 들어온 종에게 축제라니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날 밤은 참으로 무섭고 떨렸다. 눈을 뜨나 감으나 사탄이 나타나 나를 사로잡아 캄캄한 어두움으로 끌고 가려 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외쳤으나, 물러갈 생각도 않고 큰 용이 내 몸을 휘감을 듯 달려들었다. 나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 살려달라고 외치고 외쳤으나 응답 없는 흑암이었다. 헛소리…. 사탄과의 나의 싸움은 그렇게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누가 그 싸움의 절박감과 공포를 제대로 알 수 있을까. 밤이 지나고 드디어 하늘로부터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빛이 내리고 ‘축제를 못 박아라. 영광을 못 박아라’는 음성이 우레처럼 들렸다. 그리고 사탄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그날 밤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하늘이 열렸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밤이었던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친다.” 이중표 목사님은 건강의 회복으로 피하지도 않았고 교인들의 찬사에로 피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가 받을 수도 있는 찬사와 영광을 모두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주님의 품에 피하고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대단한 분입니다.
다윗은 터가 무너졌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다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바라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다윗의 시편들 중에는 성전을 바라보는 시가 많습니다.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65:4).”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시69:9).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122:1). 결국 다윗은 성전을 사모하고 사모하다가 성전 건축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터가 무너질 때 우리가 피할 곳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우리에게 은혜와 복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이 졸지에 총살을 당하는 터가 무너지는 비극을 당했을 때 교회당으로 달려가서 땅을 치고 통곡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터가 무너질 때 우리가 피할 곳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도 없고 죄 사함도 없고 축복도 없고 은혜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터가 무너졌을 때 이사야는 성전에 들어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고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았고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는 사명 부여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눅18장에 나오는 세리도 성전에 올라와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칭함으로 받는 은혜를 받고 내려갔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간곡히 권면합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교회를 떠나지 마십시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교회와 예배를 등한이 하지 마십시오. 제가 최근에 여러 번 드린 말씀을 다시 반복합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오던 사람이 육개월 동안 교회에 나오지 않든지, 저녁 예배에 나오던 사람이 육개월 동안 저녁예배에 나오지 않으면 그의 영혼이 마비되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는 영적 위기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터가 무너질 때 하나님께 피하고 하나님의 성전으로 피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됩니다. “정직한 자는 주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성도의 최고의 행복은 주님의 얼굴을 뵈옵는 일입니다. 다윗은 주님의 얼굴을 항상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17:15).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139:18). 우리가 죽음의 잠에서 깨어날 때 주님의 얼굴 대신 사탄 마귀의 얼굴을 보게 된다면 그보다 더 저주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 성도들의 삶의 최고의 목적은 ‘비지오 데이’(Visio Dei) 즉 ‘하나님을 봄’이었습니다. 하나님께 피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매일 잠에서 깰 때에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되고 그리고 죽음의 잠에서 깰 때에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 모세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얼굴을 향하여 우리는 보시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행복이요 최고의 은혜요 최고의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5,26).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터나 무너지는 절망을 경험합니다. 가정의 터, 경제의 터, 건강의 터, 나라의 터, 공의의 터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도 됩니다. 그때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집어치우고 산으로 세상으로 도망하고 싶은 충동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피할 곳은 오직 하나님의 품이고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다윗처럼 오직 주님의 품에 피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얼굴을 뵈옵고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현세와 내세에서 충만히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김명혁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