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고전1:26~31/2007년 6월 10일 설교 > 설교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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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 고전1:26~31  2007년 6월 10일 주일 낮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설교: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어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지만 이 역시 이 교회는 불완전한 사람들이기에 문제가 많이 발생합니다. 교회에서의 문제중 가장 힘들고 어려운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관계 갈등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교회를 옮기고 하는 요인 중에 가장 큰 요인은 인간관계에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가르치심처럼 서로 사랑해야 하고 섬겨야 하고 서로 이해하고 아껴주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말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무심코 내뱉은 말이 치명적인 상처를 줍니다. 그래서 결국 해결책으로 모임에 참여를 안합니다. 만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홀로 신앙생활을 하고 그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 세상사람 되거나 다른 교회로 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의 해결책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에 그런 사람 또 있습니다. 거기서도 또 상처를 받고 시험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에도 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교회에서도 2~3년을 견디지 못합니다. 결국 또 옮깁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이 자라지를 못하고 늘 제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인간관계를 승리로 이끌어 갈 수 있을까요? 1)사람을 이해해야 합니다. 교회 안의 사람이라도 다 불완전한 사람이다. 교회 안에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다 불완전한 존재요. 미성숙한 존재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물론 불완전 존재이지만 직분에 맞게 어느 정도 성숙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성숙도가 우리가 기대하는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장로로서 기대치가 있었는데 그게 못 미치면 문제가 생기고 아픔과 갈등이 있습니다.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 속에서 한 노인이 손을 뒷짐을 진 채 묘한 포즈로 아주 젊은 여자의 젖통을 쪽쪽 빨고 있습니다. 그 그림을 보면 더럽고 아주 추찹하고 그렇습니다. 세상에 저럴 수가 있을까 합니다. 배경을 전혀 모른다면 젖을 빨리는 여인을 두고 음란하거나 파렴치한 인간으로 몰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그림은 침으로 거룩한 그림입니다. 왜일까요? 이 그림속의 두 사람은 부녀간입니다. 늙은 노인은 여인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독립운동가로 그 나라 독재정권은 체포된 늙은 투사에게 가한 형벌은 음식물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굶겨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노인이 죽기 직전에 딸이 면회를 왔었습니다. 마침 그 딸은 해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젖이 퉁퉁 불은 상태라고 합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해서 곧 절명할 것 같은 아버지의 헐떡이는 숨소리를 듣던 딸이 부끄럼과 염치 같은 것을 내던집니다. 딸은 그 자리에서 자기 젖을 꺼내 아버지의 입에 물렸습니다. 자기 젖을 빨리는 딸- 이 그림은 바로 그 때의 숭고한 장면을 기리기 위해 그린 작품입니다. 설명을 다 듣고 난 지금 이 순간에도 이 그림이 외설적으로 보입니까? 이해를 못하면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이해를 하면 다른 시각으로 보입니다.
우리도 교회안에서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의 성장 환경, 그의 형편과 처지를 이해하면 그 사람을 이해 할 수 있고 수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다른 사람의 허물과 단점은 비판의 대상이 아닌 내가 섬겨야 할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의 허물과 약점을 비판하기 보다는 그것을 이해하고 그 연약한 자들을 지극정성으로 섬겼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섬겼듯이 우리도 다름 사람의 연약한 부분이나 모자라는 부분을 내가 섬겨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을 바꾸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왜 하나님이 저런 사람을 내게 붙여 주셨을까? 왜 하나님은 저란 연약한 사람을 우리 교회에 보내 주셨을까? 그 목적이 섬김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심각한 약점과 허물을 갖고 있는 그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사용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성도를 위해 십자가의 피를 흘리셨고 그 성도를 진심으로 사랑하시고 복을 주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정말 못됐고 내가 보기에는 정말 맘에 안들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대단한 존재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맘에 안들고 내 보기에는 정말 시원찮은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긴다면 그런 사람을 내가 멀리 한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생활만이 아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도 신앙생활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 다른 지체와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도 신앙생활이고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도 신앙생활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세요. 오늘 봉독한 말씀은 고린도 교회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고린도 교회는 현대 교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다 가지고 있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런 교회를 주님은 사랑하셔서 그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 교회의 문제중 가장 심각한 것은 교회 분파주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세운 바울파, 현재 담임하고 있던 아볼로파, 사도 베드로인 게바파, 이것도 저것도 싫다 나는 예수파다 하고 파당이 생겨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심각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파당이 생긴 이유가 무엇일까요? 좀전에 말씀드린 그런 여러 요인들이 그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의 단점과 허물만 보았고 섬기려하지 않고 상호 비판만 하다 보니 심각한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러게 된 이유중 가장 큰 이유는 교만입니다. 한마디로 자기가 제일 잘났다는 것입니다. 내가 제일 똑똑하고 나는 다 옳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다 어리석고 미련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되기 어렵고 힘든 것입니다. 사람은 연약합니다.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자기는 제대로 볼 줄 모르면서 남의 허물과 약점은 어찌 그리 잘 보이는지요? 그러나 그런 상태로는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설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면 더 좋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다르게 행하십니다. 우리가 보기에 하나님이 교회 일꾼을 세울 때 좀 똑똑하고 잘난 사람 좀 세우고 부자와 강한 자들을 세우셔서 그들을 통해 일하시면 좋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교회 안에 재벌들 좀 불러주셔서 그들을 통해 일하시면 교회가 큰일을 할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제가 가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교회에 재벌 좀 보내주시면 교회가 크게 성장할 터인데....우리 교회에 삼성의 이건희 회장님이 등록되어 있다면 큰 교회 될 터인데....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안하십니다. 왜요? 그래서 교회가 커지면 우리 교회는 이건희 회장이 성장시킨 교회가 되거나 삼성교회라 불릴 것입니다. 교회 안에 유능한 학,박사들, 판검사들, 좀 힘이 있는 사람들을 세우셔서 일하시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이 저 김정일이 마음을 확 바꾸시면 북한이 복음화 되는 것은 간단한 문제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계십니다. 왜일까요? 여기에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가 보기에도 미련하고 약한 자 천한 자를 들어 쓰실까요? 1. 자랑치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26절을 보세요.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오히려 세상에 미련한 자, 약한 자, 천한 자, 멸시받는 자들을 택하신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났고 똑똑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뭐라고요? 29절을 보세요.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주님이 심술을 부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그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교만하여 내가 했다고 자랑치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실상은 모든 일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이 이것입니다. 교만하기 그지없습니다. 다들 잘났습니다. 그래서 서로 물고 뜯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하나님은 그렇게 잘난 사람은 쓰시지 않고 연약한 자, 부족한 자. 힘 없는 자를 들어 쓰셔서 그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소위 말하는 잘나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직 자랑할 것이 있다면 31절 말씀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라고 자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나 된바가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했던 바울처럼 우리도 그렇게 고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잘나서 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능력이 있고 똑똑해서 된것이 아닙니다. 나의 나된 바는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레미야9:23~24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뭔가를 안다고요? 내가 힘이 있고 능력이 있다고요? 내가 고귀하고 가치 있다고요? 천만에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오직 자랑할 것은 주님의 은혜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감사하며 그 은혜를 자랑하여야 할 것입니다.
2. 겸손한 사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을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세요. 26절을 보세요.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하나님이 누구를 부르시는가?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 많지 않다. 이 말은 지혜로운 자가 많지는 않은데 더러는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능한 자, 문벌 좋은 자, 더러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많지 않고 더러 있을까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자, 능한 자, 문벌 좋은 자...이들은 가진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 교만하기 그지없습니다. 자기가 잘나서 똑똑한 줄 압니다. 자기가 능력이 있어서 힘이 있는 줄 압니다. 그러기에 어리석고 미련한자를 알기를 우습게 알고 무시하고 깔봅니다. 그러다 보니 파당이 생기고 그러다 보니 상처가 생기고 인간관계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건방지게 교만하면 어떻게 하십니까? 27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십니다. 28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십니다. 왜요? 교만하고 건방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국 나중에는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부끄럽게 하신다는 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신다는 것일까요? 졸짱 망하게 하고 머리 숙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조건 겸손해야 합니다. 잠18:12을 보세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했습니다. 뭐 좀 가졌습니까? 좀 배웠습니까? 돈 좀 있고 힘깨나 씁니까? 그럴수록 겸손하고 낮아져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더욱 높이시고 크게 쓰십니다.  주님께서도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미련한 것도 괜찮다고 합니다. 공부 좀 못해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학문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연약한 것도 괜찮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연약한 사람을 통해서 큰일을 이루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더욱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천한 것, 멸시받는 것, 없는 것도 괜찮다고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세상 사람들이 멸시하는 어떤 부분이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너무 속상해 하지 마시고 안타까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괜찮다고 하는데 무슨 더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미련한 것, 연약한 것, 천한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겸손하게 하나님 의지하고 주님을 닮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택하여 변화시키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택하사’라는 구절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 택함을 받습니까? 겸손한 심령이 되어야 택함을 받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개척을 하여 세워놓고 떠나자 곧바로 세상문화인 헬라문화가 교회 안으로 침투했습니다. 그래서 철학을 하는 사람들, 성적으로 부패한 사람들, 빈부 격차의 문제들, 결혼과 이혼문제들이 심각한 상황이 빠져 들었습니다. 그럴 때 누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파당이 생기고 서로를 비판하고 정죄하고 하다 보니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도 비슷한 현상이 있습니다. 교회의 갖가지 갈등과 아픔이 어디서 출발한 것일까요? 그 원인이 똑똑하고 힘 있다는 자들, 소위 있는 기득권층의 교만하여 생기는 것입니다. 오히려 섬겨야하고 오히려 낮아져야 할 사람들이 교만하여 남을 비방하고 정죄하기에 이런 심각한 현상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와 여러분이 주님이 택하여 변화되어 쓰시는 사람 되기를 축원합니다. 좀 부족하고 연약하고 미련하지만 그런 사람을 택하여 부르시고 변화시켜 겸손해지고 더 낮아지고 더 섬김의 자세를 갖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가치 판단이 우리와 다릅니다. 하나님은 어떤 것을 더 귀하게 여기시는가? 모든 사람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가치 판단이 보통 사람과 같으면 정상이지만 보통 사람과 너무 동떨어지면 미쳤다고들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더 귀하고 덜 귀하고의 가치 판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치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일치하면 그 사람은 주님을 닮은 성숙한 크리스챤입니다. 그러나 그 가치가 주님을 닮지 않고 세상과 닮았으면 미성숙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가치관이 일치될 때 복을 누림을 믿어야 합니다. 그 가치관이 일치될 때 신앙생활이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그 가치관이 일치될 때 주님의 일을 온전히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때 그 가치관이 일치 될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성경과 예배입니다. 성경말씀을 통해 우리주님이 가지고 계시는 가치관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그분과 늘 교통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의 모습을 우리도 모르는 사이 닮게 되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늘 성경을 보아야 하고 늘 교회 중심의 삶을 통해 예배를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세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당대에 똑똑하고 능력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런 사람들 다 마다하고 갈릴리 촌에서 고기 잡던 사람들을 제자로 선택하십니다. 당대 사람들의 기피대상인 세리도 뽑아 쓰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좀 더 똑똑한 사람들을 썼으면 더 큰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들어 쓰셨습니다. 왜요?  그것은 사람들을 대하신 주님의 가치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지혜, 사람의 능력, 사람의 힘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의 연약함을 알고 있는 겸손한 사람이 더 크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보는 사람에 대한 가치와 주님이 보시는 가치는 분명 다릅니다. 좀 미련해도, 좀 연약하고 부족해도, 그리고 가진 것 없어도 하나님 앞에서 귀한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할 지라도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가치를 배워야 합니다. 가롯 유다의 가치관과 예수님의 가치관이 달랐습니다. 가롯 유다의 가치관은 300데나리온의 옥합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것이 미친 짓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만 두어라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나라 하고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것이 가치관 차이입니다.  결국은 가치관이 달랐던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합니다. 그리고 팔아버립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저와 여러분도 성경적 가치관, 예수님의 가치관이 없으면 언젠가는 주님을 버리고 떠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어떤 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가치에 맞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택하셔서 사용하십니다. 택하신다는 말이 세 번씩이나 사용됩니다. 이말은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택하셔서 일을 하게 하시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택하시어 일하게 하시는 사람이 누구냐? 세상이 보는 가치로 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가치로 구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고 쓰시는 일에 주도권을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이사야 55장8~9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했습니다. 그러기에 세상 코드에 맞추면 성공할 것 같으나 실패합니다. 오히려 하나님 코드에 맞추어 살아야 찬된 성공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릅니다. 누가 고쳐야 합니까? 나와 다르다고 내 뜻과 내 생각을 앞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생각을 앞세우고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복종하며 하나 되어 하나님 공동체를 섬겨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나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귀히 여기는 삶을 행복하고 복되게 살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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