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 것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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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현 목사 [성경본문] 삼상15:10-15
삼상15:10-15
기본적으로 병원에서 의사들은 환자를 치료할 때 자기의 온 정성과 마음과 기술을 다해서 환자를 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정말 골치 아프고 손을 떼고 싶거나 돕고 싶지 않은 환자가 몇 있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가 치료하는 의사보다 더 많이 아는 척하는 환자라고 합니다. 진찰 결과라든가, 처방이라든가, 약이라든가, 의사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답니다. 자기가 다 압니다. 이런 환자는‘병원 오지 말고 차라리 당신 스스로 고치라’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대하기 싫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성격이 급한 환자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항생제를 투여하고 나서 효과가 나타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야 됩니다. 그런데 약 한 봉지 먹자마자 왜 안 낫느냐, 아침에 치료받고는 저녁에 왜 안 낫느냐, 그리고 이 병원은 도대체 왜 이렇게 아프냐고 한답니다. 그래서 보따리 싸가지고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옮겨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 만나면 아주 골치 아프고‘빨리 다른 병원으로 가라’하고 싶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든 치료에A+B=C라는 공식이 성립 되는 것이 아닌 듯싶습니다. 단지 의사는 그 치료법에 따라서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살고 죽고가 어디 우리 마음대로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따지니까 의사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대답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이 사람, 참 골치 아픈 환자구나’생각할 수밖에요. 이런 거는 있겠지요. 환자를 보니까 성격도 온순하고 인품도 아깝고 그래서 이 환자가 제발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치료 할 수는 있겠지요. 그런데 의사보다 잘 아는 척하고 따지기나 하고 그러면 이런 간절한 마음이 더 생기겠어요? 솔직히....그러니 병원에서 자꾸 떠드는 환자는 제 손해 보는 짓입니다. 그러고 보면 의사라는 직업도 상당히 피곤한 직업입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별의 별 사람 다 상대해서 끝까지 고쳐줘야 하니까 제가 볼 때는 목사 다음으로 피곤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왜 이런 것입니까? 우리의 인격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신앙도마찬가지입니다. 영 순종할 줄을 모르고, 영 믿음이 없고, 만사를 조급하게 생각하는 이런 인격은 구제불능입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참 힘이 드는 겁니다. 언제나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 자기를 내세우려는 사람은 정말 피곤한 사람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자기를 꼭 나타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령 자기의 똑똑한 것을 남이 알아줬으면 하는 맘으로 자꾸 말이 많은 사람도 있고, 자기의 부자인 것을 알아주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비싼 옷 자랑을 하기도 하고 없는 사람을 상대적으로 무시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어떻게든 나를 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지요. 특히 내가 무슨 업적을 남겼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남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강합니다. 어떻게든 내 공로를 인정받았으면 좋겠고 그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을 잘 압니다. 그런데 이 말을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에 이 말을 누구든지 세상에 이름을 떨칠 만큼 유명한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한다고만 생각하면 이 세상은 유명해지려고 하는 사람들로 싸우고 다투고, 죽이고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몰론 지금도 이런 일이 일각에서는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지만 아마 훨씬 더 썩은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전부가 대통령 되려고 하면 국민의 의무는 누가 합니까? 전부가 일등만 되려고 한다면 이등은 누가 합니까? 이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속담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 태어나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인륜에 부끄럽지 않게 살다가 죽어서는 자기 이름을 더럽히지 않을 정도의 삶을 살았다는 평가를 받아야하지 않느냐는 의미일 것입니다. 인간은 어차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영웅호걸이든 천한 사람이든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련해서 자기가 세상 떠난 다음에도 꼭 자기 이름을 길이길이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그 이름이라는 것이 기억하나마나 별거 아닙니다.
여러분, 공동묘지에 가보셨을 것입니다. 그 곳에는 묘비가 있습니다. 그 묘비에 적힌 묘비명을 보면서 발걸음이 멈추어지고 항상 관심이 가는 묘비가 있습니다. <성도 아무개>라고 적힌 묘비입니다. 혹은 장로 아무개, 권사 아무개, 집사, 아무개라고 적힌 묘비들을 보면 왜 그리 제 마음이 흐뭇하고 편안한지 모릅니다. 그 속에는<이 땅에 태어나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다가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왠지 이 묘비 하나에 그 사람의 전 생애를 보는 듯해서 감개무량할 때가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들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 보다 더 좋은 일로 기억되어야 할 내용이 필요합니까?<이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 밖에 모르고 다른 사람 생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안 해보고 제 배불리는 데만 혈안이 되었고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뼈 빠지게 노력하느라 돈도 많이 썼는데 그러느라고 신앙은 액세서리로 여기다가 죽었노라>이렇게 적혔으면 좋을 사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삶의 목적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최종목표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하루 한 순간이 그 목적지를 향한 중요한 과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울 왕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말렉과 전쟁을 벌여서 이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승리를 주셔서 그야말로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는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오래도록 느끼고 싶고 후대에까지 그 업적을 남기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자기 승전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었고, 자손대대에 자기의 유명세를 나타내고 싶었던 사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것이 책망 받는 이유가 되고 맙니다. 오늘본문을 지나17절 이하를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에게 하는 말이 나옵니다.“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때 그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스스로 작게 여길 때에 하나님이 높여 왕이 되게 했는데, 이제는 스스로 자기를 높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낮추십니다.”라는 말입니다. 스스로 높이는 자를 하나님께서 용납치를 않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높아지고 있는 동안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요. 하나님을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입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성경을 가만히 연구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사실 의롭고 불의하고, 선하고 악하고 이것이 큰 문제가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겸손 하냐 교만 하냐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가만히 보세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절대로 의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나 다를 바 없는 사람들입니다. 단지 기준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교만하고 그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사울은 교만했습니다. 은혜로 전쟁을 이겼는데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셔서 그 명령대로 따르는 중에 승리한 건데 하나님이 약속해주시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승리인데 이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내가 이겼노라’는 바벨탑적인 자랑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얼마나 초라하다는 것을 우리는 한눈에 보았습니다. 인간의 문명이 아무 것도 아니요. 장담할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뿐인데 이것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영광을 자기가 취하게 됩니다. 내가 이것을 이루었노라고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자기자랑을 하려고 자기 명예를 높이고 오래오래 기억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보세요. 자기는 승리자로 기념되려고 했지만 성경이 말하는 대로 가장 부끄러운 사람으로 남았습니다. 당대에 왕위가 끊어지고 심지어는 온 가족, 가문 전체가 일시에 죽고 맙니다. 그대로 대가 끊어집니다. 가문이 망하는 그런 부끄러운 왕이 되었습니다.
또한 사울에게 가장 치명적인 잘못이 무엇이냐 하면 회개할 기회를 얻을 때에 회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교만한 사람은 회개할 줄을 모릅니다. 마음은 먹으면서도 회개 못합니다. 뉘우치면서도 회개는 못합니다. 후회하면서도 회개를 못합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가 책망할 때 사울이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엉뚱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변명을 하고 있습니다.[로라 슐레징어]라고 하는 사람의 책을 보면 변명이 인생을 망친다고 그랬습니다. 변명하는 순간 진실도 떠나고, 은혜도 떠나고, 복도 떠납니다. 변명하는 데는 회개가 없습니다.
우리가 잘 하는 변명이 무엇입니까?“인간인고로”라는 변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잘될 때는 인간인 저가 잘 나서 된 것처럼 자기를 내세우지만 일이 잘못되었을 때는 꼭 나도 인간인고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변명은 좀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예 처음부터 죄를 짓도록 창조한 것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지을 것이 아니라 죄를 다스리도록 부탁하셨습니다. 단지 처음 인간이 죄를 지었을 뿐이지요. 인간인고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보면 얼마든지 피할 길도 있었고 그리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넉넉한 힘을 주셨고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지혜도 주셨습니다. 그런 고로 우리 책임이지 하나님께 돌릴 책임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것은 내가 한 것 하나도 없으면서 내가 한 것처럼 나를 내세울 때입니다. 우리 삶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하나도 없음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야 겸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교만할 수 없도록 창조된 인간임을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삶을 돌아보십시오. 내가 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있습니까? 그것마저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사울처럼 자신을 내세우고 길이길이 자랑하고자하는 마음으로 자기 기념비를 세워가고 있는 어리석은 우리 삶이라면 신앙 안에서 얼른 돌이켜 지혜로운 자리로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