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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출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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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출 20:17)



아합은 이스라엘의 왕들 가운데 가장 악한 왕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북 이스라엘의 왕으로 이방 여인 이세벨을 왕후로 삼았습니다. 이세벨은 시돈 왕 엣바알의 딸로서 바알 신과 그의 선지자들을 왕궁으로 데리고 와서 이스라엘을 우상의 나라로 전락시켰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신실한 사람들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아합의 죄 가운데 또다른 것을 말한다면 이웃의 소유를 탐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르엘에 있었던 아합의 별궁 근처에 나봇의 포도원이 있었는데 그것을 탐하다가 결국 이세벨로 하여금 나봇을 죽이는 더 큰 죄를 범하게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 한 곳에는 이웃의 소유를 탐내는 나쁜 마음들이 있습니다. 십계명 여섯째 살인과, 일곱째 간음, 여덟째 도둑질은 탐심의 실제적인 행동들입니다. 사람의 생명과 아내와 재물들은 인간이 행복을 누리는 기본 요소가 됩니다. 이것들은 모두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들입니다. 인간은 이런 것들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행복의 요소들을 감사하지 않거나 그것들을 파괴하고, 이웃의 것을 탐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계명 마지막 열 번째 계명에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탐심은 자신을 무너뜨리게 합니다.

탐심이라는 것은 내 것이 아닌 이웃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욕심입니다. 탐심은 모든 악의 근원이 됩니다. 살인과 간음, 도둑질의 출발이 탐심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탐심은 법으로는 죄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법이라는 것은 항상 행동으로 나타나는 증거가 있어야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구약 율법에서도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만 죄로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마음으로 가지는 생각을 죄로 인정했을까요? 이것은 십계명 전체를 대변하는 메시지입니다. 십계명 첫 번째부터 아홉 번째에 이르기까지의 죄는 실제로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우상숭배나 욕되게 하는 행동, 안식일을 범하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며, 사람을 죽이고, 간음하며, 도적질하고, 거짓증거 하는 것들은 사람들의 눈으로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탐심은 사람들이 볼 수 없고 다만 하나님과 자신만 볼 수 있습니다.


자신과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사람이라면 이웃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정직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정결케 하기 위해 열 번째 계명을 주셨습니다. 열 번째 계명을 지킬 수 없으면 아홉 개의 계명도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결국 십계명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지킬 수 없는 계명입니다. 자신의 마음만 다스릴 수 있다면 십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있습니다. 잠언4:23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죄를 짓는 것은 마음속에 있는 탐심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와가 그랬고, 아간과 게하시가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결정적인 이유가 탐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적과 적의 가축들을 모두 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아말렉 왕 아각과 살찐 양들을 죽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보다 돈에 관심을 가지다보다 결국 스승을 은 30개에 팔고 말았습니다. 탐심은 자신을 무너뜨리게 하는 독소가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을 탈피할 재물에 대한 탐심을 가집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명예나 권력, 더 많은 재물을 모으려는 탐심을 가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에게서 탐심만 제거한다면 죄의 90%이상이 우리에게서 사라질 것입니다.


마19:16-22에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에 대하여 진지하고 물었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주님은 그 청년에게 계명을 온전히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계명을 지켜왔다고 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탐심에 대해 우회적으로 말하기를“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이 청년은 탐심에 대한 죄가 해결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재물이 많으면 뭐하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영생으로 나아가는 길에 장애가 된다면, 그것은 우리 인생에 약이 아니라 독이 되는 것입니다. 재물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에 따라 선과 악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재물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탐심을 버릴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탐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마음에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2. 탐심은 이웃을 무너뜨리게 합니다.

십계명의 중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이웃을 왜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우리의 행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격차로 구분됩니다. 선진국일수록 차이가 거의 없지만, 후진국은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차이는 엄청나게 구분됩니다. 거지들 동네에서 부자로 살아가는 것과 부자동네에서 부자로 살아가는 것 중에 어느 것이 행복할까요? 거지들 동네의 부자는 불안합니다. 생활문화가 아름답지 못합니다. 주변의 친구들과의 정상적인 교제가 힘듭니다. 그러나 부자동네의 부자는 생활문화가 아름답습니다. 주변의 친구들과도 자연스럽게 교제가 가능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살기 때문에 재산 강탈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이 없습니다.


탐심은 이웃과의 차이가 많을수록 생기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좋은 것을 가졌을 때 사람들의 마음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나쁜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웃의 아내, 이웃의 남종이나 여종, 가축이나 소유물까지도 가지려고 합니다.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의 대부분이 탐심에서 시작되었음 알 수 있습니다. 눅12:13-15에 재산분배 문제로 주님께 나아온 사람에게 주님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레19:18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의 정신은 이웃의 것을 탐내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 땅에 행복을 만들어가는 결정적인 요소가 됩니다. 이웃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사랑은 이웃의 행복을 먼저 생각합니다. 잠언10:12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고 했습니다. 탐심은 이웃의 행복을 무너뜨리게 하는 독소와 같습니다. 폭력과 전쟁은 결국 이웃을 불행하게 합니다. 인류역사상 전쟁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행복한 가정에 불행을 안겨주었습니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는 전쟁과 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전쟁과 분쟁만 아니었어도 그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행동되지 않는 탐심은 우리 자신과 이웃을 불행하게 하는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계명으로 십계명을 마무리했습니다. 이 계명은 탐내지 않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네 이웃의 행복을 위해 힘써라는 메시지가 숨어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주님을 내 마음속으로 영접하는 것이라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와 탐심 같이 소극적으로 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실천하기를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탐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마귀가 우리에게 준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준 것은 항상 부작용이 있고, 인간의 행복을 파괴하는 독소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은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1-22)고 했습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이웃의 행복을 파괴하는 탐심을 주었습니다. 또한 마귀는 인간에게 탐심을 주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숭배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골3:5)고 경계하게 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희생입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사랑의 극치입니다. 이 사랑이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탐심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실천하므로 말미암아 이웃을 파괴하는 탐심을 극복하고, 우리자신과 이웃이 진정 행복의 길로 나가는 아름다운 삶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강정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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