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야 왕국의 네 가지 특징
본문
제목 : 메시야 왕국의 네 가지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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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며 2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3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의 귀가 기울어질 것이며 4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 5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칭하지 아니하겠고 궤휼한 자를 다시 정대하다 말하지 아니하리니 6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리며 주린 자의 심령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의 마시는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 7 궤휼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베풀어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빈핍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찌라도 그리함이어니와 8 고명한 자는 고명한 일을 도모하나니 그는 항상 고명한 일에 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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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31장과 32장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31장의 마지막 부분에는 지금 유다를 침공해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앗수르가 사람의 칼이 아닌 하나님의 칼에 의해서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기록되어 있고, 32장 1절부터는 앗수르가 멸망한 후에 유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었습니다.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며”(1). 장차 한 왕이 올 것인데, 이 왕은 의와 공평으로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의와 공평’(righteousness and justice)을 매우 강조합니다. 이것은 통치자의 중요한 덕목입니다. 이유는 지도자가 의와 공평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백성이 모두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지도자가 의와 공평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 정치와 경제가 발전하고 안정감을 찾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12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통치자 한 사람이 의와 공평으로 다스리면 국가 전체가 발전하지만, 의와 공평에서 벗어나면 국가 전체가 어지럽고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이 통치자의 일거수일투족에 많은 관심을 갖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때로는 국민들이 통치자에 관한 풍자와 유머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최근에 들은 유머가 한 가지 있습니다.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서 “롱 타임 노씨!(long time no see)”라고 인사했습니다. 오랫동안 뵙지 못했는데 만나서 반갑다는 인사입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왜 일국의 대통령에게 노씨라고 부르는가?’라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면서 “롱 타임 부시! (long time bush)”라고 대답했다는 유머입니다. 단지 유머일 뿐이지만 이런 이야기가 회자되는 것은 국민들이 통치자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말하는 ‘의와 공평으로 다스릴 장차 오실 왕’은 누구일까요? 물론 표면적으로는 히스기야 왕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본문은 장차 오실 왕을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2)라고 표현했습니다. 히스기야라는 한 사람에게 이와 같이 어마어마한 표현을 줄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장차 올 왕이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확신합니다. 라틴 벌게이트를 번역한 제롬이라는 신학자나 제가 존경하는 스펄전 목사님도 이 분이 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확실하다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가정이나 직장, 교회나 국가와 같은 사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질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말해줍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모범기도대로 늘 기도합니다. 그 가운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의 현장에 임하기를 바라는 기도, 의와 공평으로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임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질 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될까요? 오늘 본문은 네 가지를 말씀합니다.
1. 예수님이 피난처가 되신다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 같을 것이며”(2). 장차 올 왕은 광풍을 피하는 곳이 됩니다. 피하는 곳이란 영어로 hiding place, 즉 몸을 숨길 수 있는 장소를 말하며, 폭우를 가리는 곳이란 영어로 shelter, 즉 피난처나 그늘막 같은 곳을 말합니다. 또한 광풍(狂風)은 미친 듯이 부는 바람을 말하고, 폭우(storm)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이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며 몰아치는 비바람을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통치자가 자기 마음대로, 자기의 욕심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백성을 학대하는 정치를 하는 것을 광풍과 폭우라고 표현했습니다. 의로 다스리지 않는 왕은 광풍과 폭우처럼 백성을 학대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이런 통치자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독재자에게 순종해서 그럭저럭 살거나, 아니면 대항해서 죽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죽을 수도 없고, 살자니 고통스러운 폭정이 바로 광풍과 폭우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여 예수님의 통치가 시작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면 이런 광풍과 폭우가 몰려오더라도 피난처가 생기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광풍과 폭우 속에서도 우리의 몸을 가려주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며 안전을 책임지십니다. 광풍이 불고 폭우가 내리며 천둥과 번개가 번쩍거리는데 광야에서 우산을 들고 있거나 아니면 큰 나무 밑에 피신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천둥과 번개가 칠 때 넓은 장소에서 우산을 들고 있거나 큰 나무 밑에 있다가는 벼락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광풍과 폭우가 몰려올 때는 피난처로 도망가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이 세상은 광풍과 폭우가 몰아치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는 다른 피난처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피난처가 됩니다.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할까요? 예수님을 믿지 않고 광야에 홀로 서서 광풍과 폭우를 맞겠다고 하면 결론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아마 벼락구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숨을 곳(hiding place)과 피난처(shelter)가 되십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은 분들은 피난처에 오셨으니 참 잘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에게는 진심으로 권면합니다. 광풍, 폭우, 벼락 맞지 마시고 피난처 안으로 들어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은 유쾌함(Refreshment)을 주신다
베드로는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선포했습니다. 여기서 ‘유쾌하게 되는 날’이 영어로 ‘times of refreshing’입니다. 이 refresh라는 단어를 우리말로 번역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길게 표현하자면 목마른 사람이 시원한 물을 마시고 나면 갈증이 해결되고 온 몸이 시원해지며 에너지가 솟고 상쾌해지는 현상을 refresh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절 후반은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말씀합니다. 곤비한 땅이란 ‘목마른 땅(thirsty land)’을 의미합니다. 물 한 방울 없고 풀 한 포기 없는 사막 같은 땅을 가리켜서 곤비한 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막을 지나가다가 큰 바위 그늘을 만나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시원한 그늘 속에서 피곤한 몸을 쉴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미국의 루이지애나 주에서 5년을 살았는데, 그 곳은 덥기도 하지만 습도가 높은 곳입니다. 그래서 햇볕 아래 있든, 그늘에 있든 어디가나 더운 편입니다. 그러나 사막지대인 라스베이거스나 텍사스, 휴스턴 같은 곳은 밖에서 햇볕이 쨍쨍 내리쫴도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합니다. 습도가 낮기 때문입니다. 마른 땅에는 습기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른 땅에서는 큰 바위 그늘에 피하면 refresh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바위 밑 그늘에서 보니까 사막 옆에 시원한 냇물까지 흐르고 있습니다. 그늘에 피하는 것만 해도 시원한데 냇가에서 물을 떠서 그 물을 마시면 얼마나 더 시원하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은 사막의 그늘처럼, 사막에 흐르는 생수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영혼을 시원케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영혼은 마른 땅과 같습니다. 생명이 살 수 없기 때문에 생기도 없고 시원함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마른 땅 같은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성령을 받으면 영혼 속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게 됩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7-39).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영혼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지식이 많다고 할지라도 마른 땅입니다. 소망도 없고 바랄 것도 없습니다. 영혼이 언제나 목마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으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영혼이 시원하고 상쾌해질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고 기도하면서 성령충만을 받았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니 배에서 생수의 강이 진실로 넘쳐나고, “내게 강 같은 평화와 기쁨”이라는 노래도 절로 흘러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어도 생수의 강이 뭔지 모르겠다고 하는 분들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생수의 강이 무엇인지 체험할 수 없습니다. 이런 분들은 금요철야에 나오세요. 한 주일에 한 시간이라도 성령충만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마른 땅, 사막 같은 심령에 생수의 강이 넘쳐나게 하실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진리를 깨닫게 하신다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의 귀가 기울어질 것이며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3-4).
예수님을 믿으면 눈이 떠지고 귀가 열리며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혀가 열려서 어눌한 자도 “하나님이 창조주시다”라고 분명히 말할 것입니다. 인간은 원숭이가 진화된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재이며, 인간은 죄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되었지만 예수님만 믿으면 누구라도 죄사함과 구원을 얻고 천국에 가게 된다는 분명한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엔 사람들 앞에서 말을 잘 못했습니다. 반장 선거에 나가서도 제일 싫었던 일이 유세였습니다. 학급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말하는 직업을 가져서는 안되겠구나’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자 입이 열려서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 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이 임하고 하나님의 왕국이 임하면 사람들이 눈을 뜨고 귀가 열리며 혀가 열려서 분명한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주신 사명과는 정반대되는 현상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사 6:9-10). 이사야 선지자가 가서 말하니까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메시야 왕국이 임하고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자 사람들이 눈을 뜨고, 귀를 열어 말씀을 듣고 마음이 지혜로워져서 지식을 알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을 때에만이 눈이 떠져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전에는 아무리 말해도 성경이 무슨 말씀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수십 개 가지고 있다고 해도 모릅니다. 영안이 닫히고 영의 귀가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 마른 땅 같은 심령을 가진 인간은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공부 좀 했다고 철학과 예수와 종교를 논하는 말은 지식은 될 수 있을지언정 진리는 될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곳에 도달하면 결국 틀리는 말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아야 새로운 진리의 세계가 열립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성령이 충만히 임하셔서 영안과 영의 귀가 밝아지고, 마음이 지식을 깨달으며 입술이 열려 분명한 말씀으로 복음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4. 예수님은 사람을 구별(separation)하신다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칭하지 아니하겠고 궤휼한 자를 다시 정대하다 말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리며 주린 자의 심령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의 마시는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 궤휼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베풀어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빈핍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찌라도 그리함이어니와 고명한 자는 고명한 일을 도모하나니 그는 항상 고명한 일에 서리라”(5-8).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다 백성들 가운데 위선자와 사기꾼이 너무 많다는 사실로 인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사 29:1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술로는 “주여! 주여!”하는데 마음은 주님께 가 있지 않습니다. 이처럼 입과 마음이 분리된 사람이 위선자입니다.
또한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사 8:19)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성령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이상한 영적 운동을 좇으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면 말씀도 안하시는 것 같고 응답도 느린 것 같지만, 신접한 자에게 가면 금방 대답하고 예언해주니까 그리고 가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사기꾼, 위선자, 거짓말쟁이들입니다. 유다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는 자”(사 5:20),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자”(사 1:13)들도 많았습니다. 성회를 드리고 제물을 가져오면서도 속으로는 악을 품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 즉 겉으로는 종교 행사에 참여하지만 정작 속으로는 악을 품는 위선자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다 백성들 가운데 위선자들, 거짓말쟁이들, 사기꾼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과 섞여서 누가 누군지 구별할 수 없었다는 점이 바로 이사야의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고 메시야 왕국이 임하면 이런 악한 사람들과 성도들이 분명히 구별됩니다. 악한 자들은 악한 길로,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의 길로 나아가는 분리 현상이 분명하게 일어납니다. 본문 6-7절에는 어리석은 자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리며 주린 자의 심령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의 마시는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 궤휼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베풀어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위로는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역하며, 옆으로는 동료 인간에게 불의와 간사를 행하며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메시야의 왕국이 임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인간을 괴롭혔던 불의하고 간사한 자들이 유다 사회에서 존귀하고 정대한 자라고 존경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성령과 메시야의 왕국이 임하면 이와 같은 어리석은 바보들이 더 이상 존귀하거나 정대한 대접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여호와를 대적하고 인간을 괴롭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구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고명한 자, 성품이 고귀하고 참된 신앙을 가지고 바르게 살아가려는 자들은 항상 고명한 일에 서게 될 것입니다. “고명한 자는 고명한 일을 도모하나니 그는 항상 고명한 일에 서리라”(8).
예수님은 온 세상 사람들이 구원받고 천국 가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만인구원설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사역이 분리하는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양과 염소를, 알곡과 가라지를,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그리고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를 분리하십니다. 그래서 양과 알곡과 좋은 고기와 좋은 나무는 메시야 왕국에 들어오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은 점점 악한 길로 나아가다가 결국 불살라지게 될 것입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
예수님은 참된 믿음의 사람과 믿음의 사람이 아닌 자를 구별하십니다.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마음속에 불의와 악을 품은 사람은 천국에서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성령도 받지 않았으면서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아야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며 마음에 진리를 깨달아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도 못 나오고 농사 밖에 지을지 몰라도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뭐가 진리인지 분명하게 압니다. 그러나 아무리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국회의원을 지냈다고 해도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의 마음에는 진리가 없고, 살아도 비참하며 죽으면 더욱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진리를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결 론
성령이 임하시고 메시야 왕국이 임하면 이처럼 네 가지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이사야 32장 15절에 그 답이 기록되었습니다. “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메시야의 통치는 성령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성령이 우리의 영혼과 가정과 교회와 나라에 임하면 우리는 피난처를 갖게 됩니다. 아무리 광풍과 폭우를 만난 인생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께 피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이 피할만한 진리의 장소가 없습니다. 오직 인간이 피하여 숨을 수 있는 참된 피난처는 예수 그리스도 뿐인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른 사막 같은 사람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생수의 강이 넘치고, 영적인 눈과 귀를 열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깨달으며,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을 받을 때에만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왔는지 깨닫게 되고, 돌이켜 고명한 자가 되어 고귀한 일을 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말이나 학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위로 문을 열어 성신을 부어주시면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 현상을 가리켜 우리는 ‘부흥’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기도하세요. 내 영혼에도, 내 가정에도, 우리 교회에도, 우리 사회에도 성령을 부어주시도록 기도하세요. 그러면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부흥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를 통해 부흥의 때를 맞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