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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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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축복 행 1:1-5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기다려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기다린다는 것은 참으로 싫증나고 괴로운 일입니다. 어떤 사람과 약속을 하고 오랜 시간 동안 무작정 기다려본 일이 있습니까? 어떤 좋은 일을 기대했는데 그 일이 자꾸만 지연되어 계속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처해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수술을 받게 되어 수술실 밖에서 의사가 수술을 마치고 나와 수술이 잘 끝났습니다” 하는 말 듣기를 기다려본 적이 있습니까? 이런 일들 모두가 두 번 다시 맞기 싫은 것들입니다. 어느 누구도 기다리는 것을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이 축복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이 영적이고 신앙적인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합니다. 본문을 한 번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으시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신화’도 ‘꾸며낸 이야기’도 아닙니다. 아주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들이 많은 ‘사실’ (fact)입니다. 그 많은 증거들 중에 가장 확실한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그의 부활하신 몸을 40일 동안 먼저 베드로에게, 12제자들에게 그리고 500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셨다는 점입니다 (3; 고전 15:4-6). 이 기간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집중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 듣고 배우는 말씀이요 가르침이니 이 얼마나 확신에 차고 효과적인 교육이겠습니까? 사실 이 정도의 확신과 체험만 가지고도 그들은 당장 세상으로 뛰쳐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어느 때보다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래서 당장이라도 자신들의 목숨을 내걸고라도 주께서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 오던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증인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의 승천 직전에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기다리라”고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려라.
제자들 편에서는 당장이라도 빨리 나가서 주님의 부활 소식 곧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도 별로 손해되는 일이 아닐 텐데, 예수님은 오히려 “기다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며 또한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왜 우리들에게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축복이 됩니까? 준비의 축복
첫째로, “기다리라”는 말씀은 준비의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은 때때로 자신을 너무 과신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 자신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 (identity) 곧 신분을 알지 못해 생긴 과신으로 인해 타락의 길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피조물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잊고 자기들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결국 자신의 한계와 범위를 넘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했습니다. 자신을 잘 알지 못하고 자신을 너무 과신해서 생긴 인류 역사 상 최초에 일어난 비극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셨습니다. 그는 제자들이 그의 부활을 똑똑히 확인하고 그가 참 메시야이신 사실을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아담과 하와처럼 자신들의 신분을 모른 채 자신들을 과신한 나머지 또 다시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잘 아셨습니다. 제자들은 사명감에 불타서 당장이라도 세상에 나가 부활의 소식을 전하고 싶었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지속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잠간 불붙은 순간적인 감정일수도 있다는 점을 아주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효과적인 증인이 되기 전에 먼저 준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며 증인되기를 준비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물론 많은 준비들이 필요했지만 무엇보다도 기도의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10일 동안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에 힘썼다”는 기록을 보면 확실히 기도의 준비가 예수님의 뜻하신 바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반드시 준비된 사람을 쓰십니다. 일시적인 감정에 북받쳐 나서는 준비되지 않은 자원병은 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생애 마지막 40년을 쓰시기 위해 모세로 하여금 80년을 투자하고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울을 그냥 쓰시지 않으시고 그로 하여금 성령을 받게 하고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동안 훈련받게 하고 준비케 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도 적합한 준비 과정 없이 주의 일에 나서는 모습을 주위에서 종종 봅니다. 이는 본인에게도 비극이요, 하나님 편에서도 손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주의 효과적인 증인이 되기 위해서 먼저 준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기도의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이 기다림은 더 이상 짜증나는 일도, 괴로운 일도 아닙니다. 기다리며 준비하는 일은 진정 축복된 일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아는 축복
둘째로, 우리는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때’를 아는 축복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해야 하는 일에는 당장 해야 할 때가 있고, 일보 후퇴해 뒤로 미뤄야 할 때도 있습니다. 당장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거나 일보 물러서서 기다려야 할 일을 선뜻 나서서 행한다면 이는 둘 다 실패할 것이 분명합니다. 세상일도 이러할진대 하나님의 일은 더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반드시 때가 있습니다. 나가서 전해야 할 때도 있지만 기다리고 기도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고 밀고 나가야 할 때도 있지만, 뒤로 한 발짝 물러서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구하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때와 사람의 때가 다르고,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고 제 일차 선교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환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도들에게 성령께서 이방인들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셨는가를 자세히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제 이차 선교 여행을 준비했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강렬한 의지와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때 (timing)로 볼 때 먼저 아시아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의 원대한 계획과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바울이 아시아로 가는 길을 막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바울이 먼저 유럽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복음이 유럽을 통해 미국으로 아프리카로 그리고 나서는 아시아로 전파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아시아 교회 그것도 한국 교회가 말세에 복음 전파의 마지막 주자로 뛰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로마서 서두에서 자신이 얼마나 로마에 빨리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는지 그 간절한 열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13). 그러나 하나님의 ‘타이밍’은 바울의 ‘타이밍’과 달랐습니다. 로마에 대한 하나님의 ‘타이밍’은 바울이 소망했던 때보다 훨씬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바울이 기대했던 방법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로마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가 많은 주의 백성들이 환영하는 중에 복음이 전파된 것이 아니요, 죄수의 몸으로 묶인 중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신 말씀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금 너희들이 나가서 전도할 때가 아니다. 좀 더 기도하면서 나의 때를 기다려라.” 이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내 생각, 내 지혜, 내 지식, 내 경험을 앞세우지 말고, 그래서 내 멋대로 행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와 그의 뜻을 정확히 알기 위해 기다릴 줄 아는 현명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세례의 축복
셋째로, 우리는 기다리면서 결국 ‘성령세례’의 복된 체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려라”고 분부하신 가장 직접적인 이유와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효과적인 증인이 되려면 우선 무엇보다도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4)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여러 날이 되지 않아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 (5)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성령세례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눅가복음 24장 49장을 보면 예수님은 “보아라, 나는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유의해서 살펴보면 성령세례는 곧 ‘능력 세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물세례와 구별된 능력을 받는 또 다른 세례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세례 곧 성령의 능력을 받지 않고는 아무도 효과적인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경우가 아주 좋은 예입니다. 베드로는 성령세례 곧 성령의 능력을 받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만큼은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성령의 능력이 없는 베드로는 결국 예수님을 부인하고 그를 떠났습니다. 베드로가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부인했습니까? 아닙니다. 그에게는 누구보다도 더 강렬하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정말 죽기까지 그를 따르고자 하는 충정도 있었습니다. 그 마음의 동기만큼은 순수했고, 진실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에게 그렇게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주를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과 소원은 있어도 이를 뒷받침해 줄만한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는 실패했습니다. 그랬던 베드로였는데 성령세례를 받고나서는 180도 완전히 변화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를 위해 죽기까지 따르겠다는 그의 충정과 소원이 실제화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살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목숨이 아까워 소녀 앞에서도 주님을 부인했던 나약한 베드로가 성령의 능력을 받고난 후에는 칼 앞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조금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오늘 여러분도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없어 낙심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다리라”는 명령을 한 번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능력을 받지 않으면 효과적인 증인도, 원동력이 넘치는 신앙생활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께 성령세례를 구하십시오. 지금은 이 능력을 받기 위해 잠잠히 기다릴 때입니다. 이 기다림의 축복을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최완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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