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할꼬?
본문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처럼 메시지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 때가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신학적인 훈련을 잘 받은 목회자들이 수많은 강단에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 현대 목회자들은 손쉽게 책, 카세트테이프, 비디오, 인터넷 등의 매개를 통해 메시지를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현대 교회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설교는 그 어느 때보다 능력이 있고 따라서 더 큰 청중들의 반응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 큰 문제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초대교회의 설교가 현대교회의 설교보다 더 능력이 있었고 훨씬 더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현대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결여된 것을 초대교회와 그 당시 목회자들은 갖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한 번 설교에 3천명의 청중들이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응답했습니다. 그들은 곧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단지 회개하고 세례 받은 것에 그치지 않고 ‘제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그들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헌신되었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그들로 그렇게 결단하도록 만들었습니까?
베드로의 설교
첫째로, 베드로의 설교가 우리들과 달랐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3천명을 회개시키고 제자로 만드는 결과 때문에만 훌륭한 것이 아니라 그 설교의 내용도 훌륭했습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현대 교회의 모든 강단에서 외쳐야 할 설교요, 메시지입니다. 한 마디로 모범적인 설교의 원형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1. 성경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설교자요 부흥사인 빌리 그레함 (Billy Graham) 목사의 설교는 그 특징이 1) 쉽고 2) 간결하며 3) 성경을 많이 인용하는 데 있습니다. 위대한 설교, 훌륭한 설교는 하나님 말씀 자체를 전하는 것이지, 사람의 말이나 지식이나 세상 소식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 교회 강단에서 수많은 설교들이 전해지지만 많은 설교자들이 하나님 말씀 대신 자기의 신학, 사상, 철학을 전하기 때문에 그 메시지가 사람들의 귀에는 좀 솔깃할지는 몰라도 생명도 없고 힘도 없는 공허한 메시지가 되고 맙니다. 본문을 보면 베드로는 그의 설교를 성경으로 시작하여 성경으로 마쳤습니다. 그는 단 한 마디도 자신의 말이나 생각이나 사상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설교는 철저하게 성경에 근거한 메시지였습니다. 그는 120명의 제자들이 성령 세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는 것을 보고 “새 술에 취하였다”고 사람들이 비웃고 조롱할 때, 그들을 향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다 오래 전 선지자 요엘이 예언했던 것임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요엘서 2장 28절, 29절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사실 유대인들은 지금 120명의 제자들이 성령의 부으심을 받아 방언을 말하고 있는 것인 줄 전혀 상상조차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나 왕이나 제사장 같은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성령이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부터는 요엘의 예언이 성취되어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령을 인종에 관계없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똑같이 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성에 관계없이 남자와 여자에게 공히 그의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나이와 신분에 관계없이 노인들과 젊은이들에게, 주인들과 종들에게 공평하게 물 붓듯이 부어 주셨습니다.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을 공부해서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은 그때서야 자신들이 비웃고 조롱했던 일들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진정으로 회개했습니다. 결국 베드로의 설교가 하나님 말씀에 근거했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 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뚤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내기도 합니다”(히 4:12) 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런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베드로 한 사람의 힘과 능력과 지식과 사상, 그리고 그의 설득력 가지고는 그런 역사가 절대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 자체가 그들의 굳고 완악한 마음을 깨뜨리고 부수고 움직였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 66권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심적이요,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설교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합니다. 설교 전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그가 전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 메시지를 듣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중생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바로 그런 설교 곧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였습니다. 그는 설교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를 믿게 하는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짧은 메시지였지만 그 안에 복음의 진수가 되는 ‘케리그마’ (kerygma)가 다 들어 있었습니다. 씨 에이취 다드 (C. H. Dodd)라는 신학자는 복음의 진수인 ‘케리그마’에는 1) 예수의 생애와 지상 사역 2) 그의 십자가 고난 3) 부활 4) 승천 5) 예수의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 되심 등의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 속에는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2:22-36). 이처럼 베드로의 설교는 성경적이요, 그리스도 중심적이었기 때문에 그 메시지 자체에 힘이 있었고 생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3. 성령의 기름 부으심 때문입니다. 피터 와그너 (Peter Wagner)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성령의 기름 부으신 설교’ (anointed sermon)라고 했습니다. 본문 2장 14절에서 영어 성경과 한국어 성경은 아주 중요한 부분을 빠뜨렸습니다. 단지 “소리를 높여 ... 가로되” (raised his voice and declared...)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2장 4절에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 말하다” (as the Spirit was giving them utterance)라는 단어가 똑같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단지 목소리를 높여 말씀을 전한 것만 아니라, 성령께서 기름 부르셔서 말씀을 전하도록 하셨다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는 설교는 아무런 힘도 없고 생명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설교처럼 성령께서 기름 부으실 때 그 메시지는 힘이 생기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됩니다. 현대 교회 설교자들이 다시 한 번 도전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또한 현대 교회 성도들은 설교자들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힘입고 메시지를 전하도록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청중들의 반응
둘째로, 청중들의 반응이 우리들과 달랐습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그토록 충격적이고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것은 그의 설교가 성경적이요,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성령의 기름 부으심 때문이라는 우선적인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도 그의 설교를 들었던 유대인들의 합당한 반응도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은 우리들과 달리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에 합당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의 반응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1.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암도, 에이즈 (AIDS)도 아닙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병은 ‘영혼 무감각증’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자신의 영혼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들은 종교에도 내세에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단지 이 땅에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것에만 관심을 쏟습니다. 이는 불신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아직까지 예수를 알지 못해서 그렇지 자신들의 영혼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영혼의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앙을 위해, 자신들의 영혼을 위해 머나 먼 길을 사양하지 않고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아왔던 순례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구약 성경에 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구약 성경을 풀어 설교하자 그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겨 그런 합당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우리들도 그들처럼 영혼의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우리의 영혼의 감각을 치켜세워 하나님 말씀을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2. 그들은 들은 말씀을 자신들에게 적용했습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자신들을 책망하자, 말씀을 받자마자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바로 자기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씀을 받은 후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응답했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응답은 우리들에게도 꼭 필요합니다. 현대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설교를 들으면 그 설교를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고 남에게 적용시키려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 오순절 날 유대인들처럼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고백을 좀처럼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고백은 말씀에 사로 잡혀 자신의 지나간 죄들을 회개하는 응답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인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고 그 죄를 자신에게 돌리는 응답입니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면 언제라도 듣고 고치겠다는 자세가 있을 때 이런 반응이 가능합니다.
3. 그들은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괴로워하는 유대인들을 보고 베드로는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38)라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더 이상 주저하거나 지체하지 않고 베드로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그대로 순종하여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말씀대로 먼저 회개했고 그 증표로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로 중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신자나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그 후로 자신들의 삶을 주께 헌신하여 그리스도의 제작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회개는 그 열매가 순종과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의 말씀을 받는 자세는 어떠합니까? 그들처럼 나 자신의 영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들처럼 받은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가 아니라, 바로 나에게 바르게 적용시키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들처럼 받은 말씀대로 “예” 하고 순종하여 행하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이 질문들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바로 우리들 가운데 제 2의 오순절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최완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