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를 바라봅니까?
본문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의 도움으로 일어났을 때 그는 너무나도 기뻐서 걷고 뛰면서 자신을 고쳐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본 유대인들은 그 고침 받은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이 자신을 고쳤다고 말하자, 곧 베드로와 요한에게로 몰려 왔습니다. 성경은 그날의 사건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 곁에 머물러 있는데 사라들이 크게 놀라서 솔로몬 행각이라고 하는 곳으로 달려와서 그들에게로 모여들었다 (11).
아마도 고침 받은 앉은뱅이는 물론 그 자리에 모여든 모든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마치 신처럼 여겼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쉽게 치유의 원천이신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그 치유의 도구에 불과한 사람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일이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 베드로는 그들을 향해 큰 소리로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어찌하여 이 일을 이상히 여깁니까? 또 어찌하여 여러분은 우리가 우리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하기나 한 것처럼 우리를 바라봅니까?” (12) 하고 외쳤습니다. “왜 우리를 바라봅니까?” 하는 베드로의 외침은 이전의 베드로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이전에는 항상 머리되기를 원했고 남보다 우쭐대며 교만했던 베드로였는데, 이제는 다른 베드로의 모습 곧 겸손의 모습, 지극히 겸비한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조금만 자기에게서 능력과 기적이 나타나면 그런 것을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곧 우쭐대며 교만해집니다. “저 사람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걸인을 일으켰대...” 하면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경이에 찬 찬사를 듣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오순절 날 성령 세례를 받고난 후의 베드로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왜 우리를 바라봅니까?” 하면서 자기들을 주목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꾸중하며 호통을 쳤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를 바라봅니까?” 하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말이 오늘 우리들에게 어떻게 적용되어야 합니까?
우리도 너희와 같은 사람이다
첫째로, “우리도 너희와 같은 사람이다”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참 신분을 아는 사람은 절대로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진정한 겸손은 자신들이 누구인지 바로 알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 군중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똑같은 사람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고침 받은 앉은뱅이와 모든 백성들이 그들을 칭송하고 그들에게 영광을 돌리고자 할 때 이를 막고 “왜 우리를 바라봅니까?” 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당신들이 그렇게 바라보는 것처럼 더 이상 기이하게 여길 대상이 아닙니다”라는 뜻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조그만 능력이나 기적을 행하고 나서, 조그만 업적을 남기고 나서 쉽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들 주위에 처음에는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다가 종국에는 교만해져서 결국 타락하거나 이단으로 전략하고 마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민수기 20장을 보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그런 전력이 있었습니다. 신 광야에서 르비딤이란 곳으로 이스라엘이 진을 옮겼을 때 그곳에 물이 없어서 백성들이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반석에게 명하면 물이 그곳에서 흘러나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8). 그러나 같은 사건을 출애굽기 17장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로 그 반석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하여 반석에서 물이 흘러나와 이스라엘과 가축들의 목을 축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20장 10절과 11절을 보면 모세가 백성들에게 “우리가 이 바위에서 당신들이 마실 물을 나오게 하리오?” 하며 팔을 높이 들고 그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마치 자신의 능력으로 물을 내는 것처럼 반석을 쳤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주신 직후에 교만해져서 그런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누구보다도 자신들의 무력함과 연약함을 잘 알았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자신들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종이 더 이상 종인 것을 알지 못할 때 주인에게 불순종하게 되고 반역하게 되며 주인이 받아야 하는 영광을 가로채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혹시 남들 보기에 주목할만한 어떤 일들이 생길 때, 조그만 업적이라도 쌓게 될 때, 우리를 통해 어떤 이적들이 나타날 때, 그때는 바로 베드로와 요한처럼 더욱 겸손하고 겸비한 자세로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이 아니다
둘째로, “우리의 권능과 경건이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침 받은 앉은뱅이는 물론 모든 유대인들이 다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이 그런 기적과 이사를 행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가 베드로와 요한에게로 모여들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이미 오신 메시야를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을 메시아와 그의 선지자로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그들을 향해 “왜 우리를 바라봅니까?” 하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교훈 두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1. 흔히 많은 신자들이 쉽게 범하는 실수는 하나님의 종들 배후에서 직접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사람들을 보는 것입니다. 기적과 능력이 나타날 때 그것이 자신이 행한 것처럼 교만해지는 사람도 문제지만 이를 보고 그런 사람을 마치 하나님처럼 떠받드는 사람들이 더 문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16절에서 그들의 권능과 경건으로 그 사람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과 능력으로 그 사람이 일어난 것이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어 말했습니다.
2.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이 지속되는 비밀은 계속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만 인정할 때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이 비밀을 가장 깊이 깨달은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교만해질 이유가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문으로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고, 학문으로는 당시 석학이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종교적으로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가 후에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삶이 주를 위해 바쳐졌을 때 그에게 수많은 이적과 기사와 능력이 뒤따랐습니다. 또한 그는 3층천에 올라갔다 오는 신비한 체험까지 했습니다. 이런 바울이었기에, 그도 사람이기에 쉽게 교만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가시를 주어 그를 낮추셨습니다. 이 가시가 바울에게 너무도 참고 견디기 어려워서 그 가시를 제하여 달라고 세 차례나 가도했지만, 주님은 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바울은 자신이 강해지면 자기 안에 계신 주께서 약해지기 때문에 자신도 주님도 약해질 수밖에 없으나, 자신이 약해지면 주께서 강해지기 때문에 자신도 주님도 강해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약할 때 곧 그때가 강함이니라”(10)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주안에서 자꾸만 낮아져 내안에 주께서 더 크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바라볼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셋째로, “바라볼 이는 우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일으킨 이는 베드로와 요한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들 안에서 역사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소개했습니다. 오로지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 후에 그는 그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모든 이들에게 소개했습니다.
1. 그는 우리 모두를 대신하여 해 받고 죽으신 분입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 못 박아 죽인 것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죄인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이 이유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말할 때마다 유대인들이 범한 죄를 지적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유대인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이 영화롭게 한 분이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아브라함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했다면, 그의 후손들인 유대인들은 더욱 더 그를 영화롭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정 반대의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는커녕 그를 부인하고, 빌라도에게 그를 넘겨주었습니다. 빌라도가 그의 죄 없음을 알고 놓아주려고 했지만, 살인자 대신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죄를 그 십자가 위에서 다 담당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 문제가 영원히 해결되었습니다.
2.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메시지는 부활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교회가 존재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사도들과 제자들의 존재도 불가능했습니다. 부활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오, 생명의 주이심을 입증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부활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 뒤에는 하나님이 계셨고, 그래서 어떤 권세도 그를 더 이상 해할 수 없었다는 마지막 증거요, 선포입니다.
3. 그는 자신의 부활을 통해 능력을 제자들에게 부여해 주셨습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은 절대로 자신들이 그런 능력과 기적의 근원이 아니라 주님만이 근원이 되시며, 자기들은 오직 능력과 이적의 통로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들 자신들에게는 능력이 제한이 있지만, 주님 안에는 어떤 제한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님을 의지할 때 그들을 통해 주의 능력이 무한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도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주님만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불가능한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마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진실로 고백할 때, 주님은 비로소 그때부터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최완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