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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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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과 기사 행 5:12-16
사도행전에 많이 나오는 표현들 중에 단연 으뜸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표적과 기사" (signs and wonders)입니다. 2장 22절에 베드로는 그의 오순절 설교에서 나사렛 예수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행하셨던 "기사와 이적"을 언급했습니다. 같은 장 43절에서는 예수의 분부를 받고 사역을 행했던 사도들에게 나타났던 많은 "기사와 이적"을 말합니다. 4장 16절에 보면 그 당시 사도들을 통해 나타났던 "유명한 표적" 곧 성전 미문 앞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일으켰던 기적으로 인해 그 소문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장 22절에는 그 "표적"으로 인해 병 나은 사람의 나이가 약 사십여 세라고 증거합니다. 또 30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다 투옥되었다 풀려난 사도들이 성도들과 함께 "표적과 기사"가 예수의 이름으로 나타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기도의 결과로 우리가 이미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성령을 속인 것을 베드로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알고 책망하는 또 다른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즉결심판을 당해 그 자리에서 죽었고, 이로 인해 온 교회와 이 소문을 들은 모든 이들이 크게 두려워하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본문은 "사도들의 손을 통해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다" (12)는 말과 함께 시작됩니다. 우리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데에는 뭔가 의미심장한 이유들이 있을 것이라는 자연스러운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즉 "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통해 표적과 기사를 나타나게 하셨는가?" 하는 질문이 야기됩니다. 만일 오늘 우리들 가운데에도 초대교회 때처럼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게 된다면, 거기에는 무슨 목적들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사도행전 전체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킴
첫째로, "표적과 기사"는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 복음과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갖게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초자연적인 일들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마술 (magic)입니다. 사람들은 마술이 따지고 보면 하나의 속임수에 불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술에 대해 모종의 경외심 같은 태도를 보입니다. 라스베가스의 데빗 카퍼필드의 매직 쇼는 그 비싼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인파들이 몰려 연일 매진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데빗 카퍼필드가 크게 성공하자, 라스베가스에 많은 마술사들이 몰려 너도 나도 매직 쇼를 공연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라스베가스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 된 현상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본성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부터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 중풍병자를 일으키는 기적, 눈 먼 자와 귀 먹은 자를 보고 듣게 하는 기적, 나병 환자를 고치는 기적, 귀신 들린 자를 자유케 하는 기적, 죽은 자를 다시 살리는 기적 등,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적들이 일어나는 현장마다 공통적인 현상은 많은 군중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다는 점입니다.
사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순절 날 120명의 제자들이 "다른 방언" 곧 그들이 배우지 않은 외국어들로 말하는 표적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몰려왔고, 그때를 놓치지 않고 베드로는 그 유명한 오순절 설교를 통해 한 번에 3천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서론에서 이미 살펴본 바처럼,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성전 미문에서 일어나는 표적을 보고 들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12절은 사도들이 백성들 앞에서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한 결과로 이를 믿는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는 기사로 문단을 시작합니다.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곳에 사람들이 몰린다는 사실은 복음서와 사도행전 전체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영적 진리입니다. 이 영적 진리는 물론 현대교회에도 적용됩니다. 세계 최대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도 초창기부터 계속해 나타난 "표적과 기사"로 인해 사람들이 몰려와 크게 부흥했습니다. 현재 개신교 중 최대의 부흥을 일으키고 있는 남미의 교회들도, 다 "표적과 기사" 사역의 결과입니다.
최근 한국의 경우, 개신교는 성도수가 줄었지만, 가톨릭은 크게 늘었다는 통계가 발표되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한국교회에 70년대, 80년대에 크게 나타났던 "표적과 기사"가 최근 들어서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반면에 남미의 경우, 가톨릭교회에서 개신교로 많은 사람들이 개종해 몰려오고 있는데, 흥미 있는 점은 남미 개신교의 90 퍼센트 정도가 "표적과 기사" 사역을 하는 은사주의 혹은 오순절 교회라는 것입니다. 이 경우를 봐도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곳에 사람들이 몰린다는 사실은 절대적인 진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도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기도했던 것처럼, "표적과 기사가 우리 안에 나타나게 하옵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구원으로 인도함
둘째로, "표적과 기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게 하는 데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피터 와그너 (Peter Wagner) 박사는 사도행전 5장의 제목을 '구원으로 이끄는 표적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표적"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는 싸인 (signs), 곧 표시판들이요, 잃은 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고 바르게 해석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람들이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 확장과 하나님의 영광은 생각지 않고 단지 사람들의 흥미와 시선만 끄는 "표적과 기사"들을 나타내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면, 그것들은 마술을 행하는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사도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행했던 "표적과 기사"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표적과 기사"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크게 확장되었고, 또한 하나님께 영광이 크게 돌려졌습니다.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새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주를 믿는 남녀의 수효는 날로 늘어났다.
개역성경은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고 번역했습니다. 사도들이 행한 "표적과 기사"들은 구원과 부흥이라는 귀한 열매들을 맺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만 관심이 있었지, 요즈음 어떤 목회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자기들의 왕국 건설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순수한 마음과 동기를 갖고 사역을 하니까, 하나님은 그들에게 날이 갈수록 더 큰 능력을 부여해 주셔서 "표적과 기사"가 더 많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지난 25년 동안 많은 "표적과 기사"들이 나타났습니다. 중풍병자들도 일어났고,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고침을 받았으며, 최근에 천국가신 임 소아 권사님 같은 분은 병원에서 3개월 밖에 못산다고 했는데, 근 3년을 더 사시다가 가시는 일도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는 자매들도 아이를 갖는 기적도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물론 대다수의 형제, 자매들이 직장 문제나 다른 이유들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주해 갔지만,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크게 확장되었고, 하나님께 큰 영광이 돌려진 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우리 교회 안에 "표적과 기사"들이 나타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며, 하나님께 큰 영광이 돌려지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전인적인 구원
셋째로, "표적과 기사"는 전인적인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주관심사는 영혼구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육체적 건강에도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출애굽 직후 마라의 쓴물을 달게 하신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여호와 라파" 곧 "치료하시는 여호와" (출 15:26)라고 하셨습니다.
너 이스라엘이 너희 하나님 야훼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그가 보기에 바르게 살며 그 명령을 귀에 담아 모든 규칙을 지키면, 에집트인들에게 내렸던 어떤 병도 너희에게는 내리지 아니하리라. 나는 야훼, 너희를 치료하는 의사이다.
또한 말라기 4장 2절에서도,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그의 공생애 기간에 수많은 각양각색의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병들이 다양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중풍 환자, 간질 환자, 눈먼 자, 귀먹은 자, 혈루병 환자, 앉은뱅이, 귀신들린 자, 문둥병자 등 그 종류가 다양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사역들을 크게 셋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설교 (preaching), 가르침 (teaching), 그리고 신유 (healing)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의 삼분의 일을 병 고치는 일에 할애하셨습니다. 이를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사람들의 육신적 건강에 관심을 가지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구원 뿐만 아니라, 육신의 구원에도 큰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증거들입니다. 곧 성경적인 구원은 '전인적 구원' (wholeness of salvation)입니다.
사도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15절과 16절에서 우리는 사도들이 행한 "표적과 기사"에 병 고치는 일들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병자들을 길거리에 메고 나가 들것이나 요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 행여나 그 그림자만이라도 그 몇 사람에게 스쳐 갔으면 하였다.
베드로가 지나가는 길에 사람들은 병자들의 요나 들것을 가져다 놓아, 그 그림자만이라도 닿으면 병이 낫는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그에게로 모인 많은 사람들을 다 감당할 수 없으니까, 병자들이 그의 근처에만 가도 병들이 낫는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또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 근방에 있는 여러 동네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병자들과 악령이 들어 고생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몰려 왔는데 그들의 병도 모두 고쳐졌다.
베드로를 포함한 사도들이 행한 병 고치는 표적들로 인해 그 소문이 곧 온 예루살렘 장안에 퍼졌습니다. 사람들은 곧 많은 병자들을 그들에게로 데리고 왔고, 그들의 병들이 모두 고침을 받았습니다. 정말 엄청나고 가슴이 뛰는 역사입니다. 우리들이 바로 그 현장에 있었다고 한 번 가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얼마나 경이로운 일입니까? 그런데 본문은 사도들의 복음전도 사역에 엄청난 결과가 나타난 것을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행여나 이런 기적들로 인해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고, 사도들에게 돌아갈까 보아,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우리들에게 적용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1. 과연 "표적과 기사"는 사도들만이 행할 수 있었던 사역이고, 현대에 사는 우리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역입니까? 현대 주석가들 중 어떤 이들은 "기적은 사도시대 이후로 종결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병 고치는 은사도 사도시대로 끝났다고 합니다. 그런 초자연적인 역사는 예수님의 12제자들과 사도들에게만 국한된 특수 은사이지, 평신도들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교회사를 연구해보면 이런 주장들이 얼마나 잘못 된 것인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요 14:12)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12제자들뿐만 아니라, 70명 전도단을 파송하셨는데, 그들은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했다고 누가복음 10장은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스데반 집사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 (6:8)고 했고, 빌립 집사 또한 "그가 행한 큰 기적을 사람들이 보았다" (8:6)고 말합니다. 교회사를 통해 지금까지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평신도들이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 뭇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했고, 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한 것은 좀처럼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예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우리들 가운데 "표적과 기사"가 충만하게 나타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2. 16절에 병자들 "다" "모두" 고침 받았다고 했는데, 과연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면 100 퍼센트 다 낫는 것일까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 말 개역성경은 "다" 라고 번역했고, 새 공동번역 성경은 "모두" 라고 번역했습니다. 헬라어 문법을 보면, 사도들 앞에 나온 병자들 모두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고침 받았다는 해석도 가능하고, 또 대다수가 고침 받았다고 함축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문맥을 잘 살펴보면, 적어도 이 기사에서 만큼은 사도들에게로 나온 병자들이 다 고침 받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옳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당시 사도들이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면 100 퍼센트 다 고침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물론 대다수의 병자들이 고침 받았지만, 고침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병 고침은 반드시 상호관계적인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도들이 믿음이 크고 성령 충만 했다 할지라도, 기도를 받는 사람들의 믿음이 없거나 적으면 고침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병자들을 고치실 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고향 나사렛에 가셨을 때에도, 그곳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보시고 표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가 병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100 퍼센트 다 낫지 않습니다. 피터 와그너 박사는 자신의 5년간의 치유 사역을 평가하기 위해 병자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는데, 약 25에서 30 퍼센트가 완전하게 치유 받았고, 50에서 60 퍼센트는 약간의 치료 효과가 있었으며, 나머지 20 퍼센트는 전혀 치유 경험을 하지 못했다고 보고했습니다. 다른 치유 사역자들도 이와 비슷한 결과를 체험한다고 합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 땅에서의 육신적 치유는 극히 제한적이요 한시적이라는 점입니다. 치유 효과도 부분적이고, 일단 치유 되었다 하더라도 결국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인적인 구원을 말할 때, 육신의 건강은 결국 이 땅에 살 때 하나님과 교회를 잘 섬기도록 주시는 제한적이요, 한시적인 축복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궁극적인 구원은 영혼구원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 이로 인해 모든 성도들이 육신이 건강한 축복을 받아 주님과 그의 교회를 잘 섬기고, 궁극적으로 영혼이 구원받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최완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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