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럴 수 없는가? (로마서 11장 11절~21절)
본문
이방인의 사도, 이방인을 위한 택한 그릇이라 불리우는 바울은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살았다. 오직 이방인 구원에 몰입하는 것이 동족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알았기에 더욱 열심을 내었다. 바울의 관점은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사람 구원이었다. 이방인 구원, 더욱 나아가 동족 구원, 세계 구원이었다.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가? 하나님 사랑의 관점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을 품은 사람의 관점에서 동족을 보았고 세계를 보았다.
로마서 11장은 동족 구원의 문제에 대한 바울의 진지한 설명이다. 물론 바울의 해답은 내 동족이 구원된다는 것이다. 롬11:14, 26을 보면 이스라엘이 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 때가 아직 되지 않은 것일뿐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 구원을 얻지 못한 것,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미치고 하나님의 사랑에 울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산 바울은 자기 동족에 대해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롬11:1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롬11:11 “그러므로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즉, ‘완전히 쓰러져 망하게 되었는가?’ 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그들은 외형적으로 보면 그렇다. 행함에 의지하는 저들은 버려지고 넘어지고 실족한 모습이다.(롬9:32) 그런데 바울은 확신을 가지고 대답한다.
“그럴 수 없느니라.”
왜, 그럴 수 없는가? 왜 버림 받은 것이 아니고 멸망 받은 것이 아닌가?
첫째, 남은 자가 있기 때문이다. (롬11:5)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신다. 구약 시대, 엘리야는 하나님께 아뢰었다. 아합 왕의 우상 숭배 정책이 온 세상을 덮고 두려움 속에서 떨 때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엘리야도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나 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하나님께 하소연 하였다. 그 때 하나님의 대답은 왕상19:18에서 남은 자가 있다고 말씀해 오셨다. 네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인을 남겨 두었노라. 모두 다 신앙을 버리고 모두 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로 나아간 것 같아도 남은 자가 있다.
롬11: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2007년은 평양의 대부흥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외국인들의 눈에 경이와 놀라움의 소식을 전해 준 평양, 그 거룩한 예루살렘의 불이 지금 다 꺼졌다. 100년 전 거룩한 그 땅의 부흥의 불이 서울과 목포까지 확산되었는데 지금은 아픔의 땅, 고난의 땅, 마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린 버림의 땅처럼 되었다. 남한은 교회가 흥왕하고 도처에 십자가가 보여지는데 북한은 어떻게 되었는가? 바알의 시대에도 칠천이 남겨 있었다면, 예수의 복음을 거절하고 외면하는 초대 교회 시대에도 은혜로 남은 자가 있었다고 하면 반드시 남은 자가 있을 것이다. 나는 남은 자가 북한에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께 무릎 꿇는 남은 자, 하나님께 예배하는 남은 자, 신앙을 지키며 사는 남은 자가 있음을 믿는다. 그러므로 그 남은 자가 다시 불을 붙일 것이다. 남은 자가 일어나 부서진 제단을 수축할 것이다.
사6:13을 보라. “그 중의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찌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그렇다. 그루터기에서 다시 상수리 싹이 올라오듯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손에 잡히지 않아도 거룩한 씨가 북한에도 남아있다. 우리는 토양에 물이 적셔지고, 겨울의 찬바람이 가시면 따스한 봄날에 싹이 돋아날 씨가 남아있다고 믿자. 그렇기에 기도가 포기되면 안된다. 그 땅은 절망의 땅이라고 미리 말해버리면 안된다. 포기하면 안된다.
둘째,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 때문이다. (롬11:11)
개인의 고난과 민족의 고난, 그것은 사람이 다 풀 수 없는 삶과 역사의 미로이다. 분단이 되어서 허리에 고난의 상처를 입고 산 지 6.25이후 57년, 그 이산 가족의 고통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랴! 한국의 예루살렘인 평양은 불이 꺼지고 남한의 사람들이 온 세계의 제사장 나라가 선교사적인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롬11:11下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이 민족이 분단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더욱이 북한이 실족하고 넘어진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게 되듯 평양의 제단이 무너지므로 남한이 구원을 얻는 역사가 일어났다. 언제 이 남한 땅이 예수 잘 믿는 사람들로 넘쳐나게 되었는가? 환난과 고통 속에서 흩어진 이북 사람들이 남안으로 와서 믿음을 보여 주었다. 예배 생활을 보여 주었다. 십일조를 보여 주었다. 지금에서야 알았는데 어렸을 적 논에서 벼 가마니 통째로 1/10을 구분하여 마차에 싣고 온 장로님은 이북 사람이었고 과수원에서 수확한 사과 상자 중 1/10을 구분하여 드린 이도 북에서 내려온 장로님이었다. 가마니 위에 앉아서 신앙 생활의 모범을 보인 영락교회가 바로 북한에서 땅과 집을 버려두고 맨 손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그 시작의 일원이었다. 남한을 잘 믿게 하고 남한을 잘 살게하는 이 하나님의 섭리는 다 측량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여기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 38선에는 하나님의 엄청난 비밀이 있다. 우리가 일어난 것, 잘된 것이 북한의 넘어짐 때문이다. 아직도 짓밟힌 걸레처럼 우리나라가 강대국 틈에서 분단의 아픔으로 신음하는 것에는 섭리가 있다. 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구원을 얻고 불교, 회교권의 모든 나라가 우리 한국 때문에 구원을 얻어야 되는 뜻이 있다. 왜, 우리가 고통 받아야 하는지, 답답하고 억울하지만 예수가 십자가 고통을 짊어지므로 모두를 살려내듯 우리의 고통 속에, 역사의 신음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섭리를 믿어야 한다. 그래야 개인의 고난도 참고 민족의 분단을 참고 기다릴 수 있다.
셋째, 셀 수 없는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롬11:12)
롬11:12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하였다. 이 말씀은 ‘넘어지고 실족한 것처럼 보이는 이스라엘이 바로 설 때에는 그 복이 얼마나 엄청나겠느냐’라는 뜻이다. 저들이 넘어진 것, 저희들이 실패한 것도 우리에게 복이 되었다. 그렇다면 만약 이스라엘 전체가 바로 서게 되는 날의 받을 복은 상상할 필요 조차도 없다. 결국은 이젠 잘 될 일만 남은 것이다. 북한도 이 땅에서 넘어진 자처럼 보였다면 더 이상 낮은 바닥에서 더 내려갈 것도 없다. 북한은 이제 일어날 일만 남은 것이다.
복을 받는 원리는 모두 다 같다. 이스라엘이 바로 서기만 하면 되듯 이 나라 북한 땅이 바로 서기만 하면 그 예비된 복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잘 될 것, 일어날 것만 남아있는 소망을 가지고 우리는 북한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무신 사상을 버리고 바로 서기만 하면 셀 수 없는 복의 나라가 된다.
넷째, 책임을 짊어지라는 시청각 교육이기 때문이다. (롬11:21)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하나님의 거룩이 임하는 것은 책임이다. 은혜 받은 자는 먼저 된 자로서 감람나무 열매를 잘 맺어야 한다. 참감람나무가 꺾어졌다. 왜 꺾어졌는가? 자긍하는 마음, 우월감만 가지고 사명을 감당하지 않았기에 주인이 꺾어 버렸다. 쓸모없는 나무, 아무리 참감람나무라 자랑하여도 소용이 없다. 그런 가지는 잘려지고 돌감람나무 가지라도 뿌리에 접을 붙여 사용하신다.
그렇다. 은혜 받은 것, 성령 받은 것, 예수님의 신부가 된 것 모두 다 책임이다. 사명이다. 롬11:21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책임을 외면하고 은혜 받은 것만 자랑하고 우월감에 방향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이 자르신다. 이 엄위한 시청각 교육을 통해 하나님은 책임을 요구하신다.
우리는 구원의 사명, 선교의 사명, 제사장 나라의 사명 이 모든 것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제단이 무너진 곳에 다지 제단을 수축하고 가까우면서도 먼 땅, 평양에도 복음이 믿게 되도록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북한의 평양이 남한보다 더 잘 믿던 참감람나무였다. 그런데 그 가지가 꺾이고 우리가 접붙임되어 그 뿌리로부터 진액을 공급받고 있다. 민족의 분단의 38선도 바로 시청각 교재이다. 우리는 잘난 척 해서는 안된다. 뿌리 되신 예수가 주시는 힘으로 여기까지 성장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의 힘이다. 예수의 능력으로 잘 된 것이다. 이제는 세계 구원, 열방 구원, 북한 선교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책임을 느껴야 한다. 우리 믿는 자들이 바로 서야 한다.
북한도 뭔가 달라지고 있다.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교회를 세우고 신학원을 운영하기 시작한 부쪽의 움직임은 과연 무엇인가? 개방인가? 일시적인 모습인가? 그 땅을 밟으면서 바로 보아야 할 책임을 느낀다.
롬11:11, 14을 보라. “우리가 예수를 잘 믿을 때 이스라엘이 시기나게 된다.”고 하였다.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한다.”고 하였다.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잘 믿어 잘 되면 유대인도 예수께로 온다. 예수를 외면했던 북한도 문을 열 것이다. 돌감람나무 남한이 예수를 믿고 잘 되는 것, 정말 시기가 나서 열방까지도 시기가 나서 복음도 믿고 선교의 문도 열고 개방 정책으로 신학교도 세우고 그래서 구원을 얻게 되는 일을 갈망하게 도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잘해야 한다. 저희들이 우리를 보고 시기가 나도록 잘 살아야 되고 잘 믿어야 되고 멋있고 아름답게 신앙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시기란 탐내는 마음이다. 부러워하는 마음이다. 지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남한의 잘됨과 경제 성장, 윤리와 도덕이 자리잡은 나라, 기독교의 부흥으로 성결해지는 나라, 소외계층을 돌보는 나라, 세계 10대 선진국에 들어간 나라, 북한이 시기가 나도록 그래서 부러워 하다가 경제의 문을 열고 예술의 문을 열고 문화의 문을 열고 마침내 교회의 문도 열어 모든 문을 열고 구원을 얻게 되는 복이 임해야 하겠다. 그래서 교회와 복음 때문에 통일이 임하여야 한다.
이제 개인적이든, 민족적이든 동족의 구원을 위해 울고 엎드리는 열정이 있어야 하겠다. 지금은 아니어도 언제인가 모두가 구원된다는 믿음을 가지자. 책임을 느끼자. 그 강한 부담감 때문에 바르게 신앙 생활할 수 있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