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 (약 1:5-8)
본문
화관을 쓴 봄의 계절이 우리 눈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면 우리는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마음 화사해지기도 하지만, 또 꽃이 지는 때의 여릿한 모습을 생각하면 애잔한 심정을 가지기도 합니다.
우리 삶의 일상이란 화사한 면도 있지만 또 다른 아픈 면이 있는 법입니다.
고통스러운 것이 있으면 또 한 번 위로받을 면이 있어 우리는 언제나 겸손할 만하고 또한 위로받을 만합니다.
아무리 삶의 눈물이 겹쳐오는 것 같아도 그 가운데 먹장구름 속에 희끗희끗 비치는 햇빛이 있으니 우리는 위로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리 일이 안되고, 혹은 어렵고 잘 풀리지 않는 것 같은 삶이라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망을 찾아 누리며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길을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시험을 당하면 기뻐하라’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시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인내를 이루게 하시며, 그 인내는 우리를 온전케 하여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게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 당할 때 우리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대하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일 것입니다.
삶에는 참 많은 지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고 결정하는 것이 옳을까하고, 정말 지혜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잘해 보려고 생각했고, 또 그런 마음이 들어서 결정했는데, 결과는 엉뚱해서 마음에 실패를 끼칠 때가 있습니다.
또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다보면 급기야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신뢰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전에도 그렇게 확신했던 일들이 몇 번이나 거듭 잘못됐을 때 내가 도대체 어떤 일을 결정할 수 있을까하는 마음의 상실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때로 지혜가 없으므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축되기도 하고 어렵고 난처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것을 꼭 어려움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실패는 일어설 수 없는 기회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의지하여 새로운 은혜로 승리를 이루는 시대로 우리를 이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구하라’ 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요즘 저는 정말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혜가 부족함을 여실히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될지, 어떻게 결정해야 될지, 그리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또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정말 지혜가 없다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와 같은 생각들을 하면서 오늘 말씀을 절실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지혜가 부족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지혜가 부족하고, 그 지혜를 하나님께 구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정말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우리는 삶속에서 느낍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지혜만 가지고는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하물며 영적인 일은 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현재의 수준과 단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지혜 이상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것은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이며,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을 기대하는 믿음입니다.
내 지혜의 한계를 느끼는 것은 나 스스로를 부정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고 느끼는 겸손의 출발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충분히 은혜를 주실 능력이 있음을 믿고 또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내게 그 은혜를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대한 믿음의 기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믿음을 보여 드리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이 그것을 귀히 여기셔서 ‘네 마음에 원하는 것을 구하면 내가 주리라’ 하고 말씀하셨을 때 솔로몬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한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것을 너무 귀하게 여기셔서 그 지혜와 더불어 ‘부’와 ‘귀’와 ‘명예’를 더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진정한 지혜를 구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바른 지혜입니다. 지혜가 부족하다고 느낀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 싶다’는 마음과 ‘더 잘해보고 싶다’하는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진보를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족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내 현재보다 더 높은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겁니다. 또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는 진실한 발견입니다.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만이 좀 더 나은 지혜의 지경에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순간 발전한다는 것은 내 무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구하는 것-지혜의 부족함을 느끼고 깨달아 구한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어떤 지혜를 구해야 될까’ 하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저는 요즘 세 가지로 지혜를 구하여야 되겠다는 것을 마음에서 생각해 보곤 합니다.
첫째는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는 지혜>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그 마음을 살 수 있는 지혜를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내 어리석음과 부족으로 인해서 사람을 얻지 못해서 하나님의 일까지 망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보다 내가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진정으로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상대방의 마음을 살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성품과 매너와 방법 때문에 그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사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을 격분시킴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일까지 그르치게 합니다. 아니라고 할지 모르지만 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어리석은 내 의를 주장하고-그리고 지극히 어리석은 내 우월성을 주장하고-이런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나는 의롭고 수고하고, 상대방은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착각에서 벗어나 진심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내 앞의 사람을 존중하고 배우고 따르려는 지혜가 있을 때 사람을 사게 되고 그 일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가 없으니 내 자신이 우월해 보이는 것이고, 지혜가 없으니 내가 꽤나 수고한 것 같아 보이고, 지혜가 없으니 항상 어리석게도 다른 사람을 늘 나보다 낮게 보다가 결국은 사람도 잃어버리고 일도 망하게 되고 내 가슴이 더욱 더 아파지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지혜가 매우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일을 이룰 수 있는 지혜>입니다.
기본적인 목적보다 방법과 매너가 좋지 않아서 하나님의 일을 스스로 내 부족 때문에 그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자랑이나 나를 앞세우면 그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다른 이의 의견을 존중하고 수용하고 인정하고 내 것으로 삼아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함께 갈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나하고 마음 맞는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봐도 나하고 얼굴 똑같이 생긴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다 구별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도 다 구별이 됩니다.
참 하나님의 능력이 너무나 신비합니다. 이 세상 그 수십억의 사람의 얼굴이 어떻게 그렇게 다 다릅니까? 이건 경우의 수로 따져도 너무 신비한 겁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이 그렇게 다를 수 있는지.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수많은 사람의 마음이 다 다릅니다. 저 사람이 내 마음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이 세상에 내 힘만 가지고 이룰 수 있는 일은 거의 드물어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 그 사람의 힘을 잘 활용해서 같이 힘을 합해야 이룰 수 있는 것이 인간들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도 결국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데, 내 기분에 맞추기 위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을 이루기 위해서 내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데 내 기분을 채우기 위해서 일을 망가뜨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을 이룰 수 있는 지혜를 구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지혜가 또한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내가 잘나서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사랑 때문에 우리를 축복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함과 하나님께 대한 진실 됨-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보여드릴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진정한 기쁨으로 삼아 하나님이 우리를 기쁘게 해 주실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내가 어떤 일을 잘한다는 것은 내가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이 인정해서 그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시기 때문에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게도 뭐 하나 하면 그것이 내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나의 부족을 하나님이 치신다고 생각하면 이 가운데 살아남아있을 사람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지혜, 일을 이룰 수 있는 지혜,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자비를 입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이런 지혜가 필요합니다.
내 능력이 우수해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우리가 지혜를 구할 때 꾸짖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후히 주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요즘 이 지혜를 구하라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이 왜 이렇게 마음에 와 닿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지혜가 없다는 생각이 들고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하심으로 돕고 세워 빛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할 때 형편없다고 생각하시고 우리를 판단해서 싫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짜증내고 귀찮아하는 분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어떤 것도 짜증나지 않습니다. 기쁘게 돕고 싶은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혜를 구할 때 ‘이제야 우리의 부족을 알고 하나님께 구하는구나!’ 라고 생각하셔서 기뻐 여기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운 분만이 아닌 사랑하고 돕고 인도하는 분으로 인정하시기 시작할 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두려운 하나님께 우리가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싫어하고 피하기 원하는 하나님께 우리가 뭘 구하겠습니까? 적어도 우리를 이해하고 도와주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우리가 구하는 것이니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 무엇인가를 부족하여 구하는 것을 결국 꾸짖지 아니하십니다.
부모님께 자녀가 이렇게 말한다고 합시다.
“엄마, 아빠, 나는 지금 엄마 아빠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나를 좀 도와주세요.”
라고 말하면 달려가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좋은 예를 생각하려고 했는데 잘 생각이 나지 않아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제 집에도 아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시험을 잘 볼 때도 있고 잘 못 볼 때도 있지 않습니까?
시험을 잘 못 봐서 아이가 성적이 안 좋아서 낙심할 때 보면 애 공부 안했다고 혼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고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미안하다 아빠가 머리가 좋았으면 공부 잘 했을 텐데, 아빠가 머리가 나빠서 너까지 이렇게 공부를 못했으니 정말 미안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빠가 머리가 조금 더 좋았으면 좋았을 뻔 했는데, 아빠 잘못 만나서 미안하다’
성실히 공부를 안했다고 생각하면 “미안하다, 아빠가 언제든지 반듯하고 모범된 모습을 보여서 네가 아빠를 보기만 해도 감동을 받고 도전을 받아서 잘 했으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해서 참 미안하다” 이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머리 나쁜 것은 할 수 없고, 고칠 수 없으니 내가 너를 위해 기도라도 더 많이 하마.’
그렇게 생각해보니까 정말 이 말씀이 너무나 와 닿더라고요.
<지혜가 부족하거든 지혜를 구하라>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께 지혜가 부족하니 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뭐라고 생각하시겠는가 하고 생각해 보세요.
‘너 지혜가 부족해 이런 바보 같은 것’ 하고 우리들에게 뭐라고 꾸짖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미안하다 내가 머리가 나빠서 네가 머리도 나쁜가 보다’-아마 하나님은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으실 텐데 정말 우리를 꾸짖지 않고 후히 주실 것 같습니다.
네가 그렇게 가슴아파하니, 네가 정말 그렇게 안타까워하니 세상에 없는 것도 만드신-창조하신 하나님인데 우리 있는 모습 속에 무엇인가를 변화시킨다는 것이 왜 하나님께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 생각하면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부모의 기쁨은 자녀가 부모를 필요로 하고 그 필요가 자녀를 세운다고 생각할 때 그 자녀에게 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부모의 기쁨입니다.
언젠가 저희 집의 아이 하나가 저에게 말하더군요.
“아빠, 나 매일 인터넷에서 물건을 사니까, 매일 싼 것만 사니까 별로 사용도 못하고 쉽게 망가져. 아빠 나 비싼 구두하나 사 주세요.”
그래서 얘가 웬일인가 생각하고 너무 고마웠습니다. 왜냐하면 걔가 제가 구두하나 사 줄 정도는 능력이 있다고 절 믿는 거잖아요.
“우리 아빠한테는 말해봤자 능력도 없는데 말해봤자 소용없어.”
이러면 구두 사달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저보고 하나 사달라고 얘기한 것이 적어도 날 인정해 준 것 같아요.
“그래 싼것만 사지 말고 이번엔 좋은 것으로 한 번 사 줄게.” 하고 제가 백화점에 가서 분에 넘치는 것을 하나 사줬어요.
그랬더니 얘가 신고 다니다가 한참 후에 제게 얘길 하더군요.
“그런데 아빠 내가 그것을 신고 갔더니 애들이 너무 너무 좋다고 그래.”
“그래?” 제가 기뻐서 “그럼 내가 하나 또 사줄게.” 제가 그랬어요.
너무 좋아하더라구요. 친구들도 좋다고 얘기했다는데 제가 또 하나 사주고 싶더라구요. 애가 그렇게 좋아하고 기뻐하는데 내가 그것 못해줄 것도 없잖아요.
저는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늘 생각해 보곤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내가 하나님께 뭘 많이 드려서-내가 하나님께 뭘 많이 해드리고 바쳐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늘 누리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일전에 성도님 한 분에게 말씀을 드렸는데 중학교 남자아이가 우리 성도님에게 그랬대요. 생전 그런 말을 안 하더니 어느 날 전화를 해서 “엄마, 사랑해” 그랬대요. 이 분이 생전 그런 말을 못 들어보다가 애한테 그 얘길 듣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신을 못 차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사랑해.” 하고 얘기했다는데 너무너무 좋아하시더라고요. 목사한테까지 그 말을 해요. 너무 감격스러워서요.
이제까지 그 아이 때문에 얼마나 많이 기도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한마디 들었다고 해서 그 마음이 그렇게 달라지는 겁니다. 그 한마디 들은 것으로 감격스러워서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많은 것을 드려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인정하고 고백함으로 기뻐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헌금 많이 내세요? 봉사 많이 하십니까? 헌신 하십니까?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헌금내면 하늘로 가지고 가시나요? 우리가 봉사하면 하나님이 그걸로 뭘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겁니다. 그 나머지는 이 세상에서 주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때의 그 마음을 받으시는 겁니다.
우리 마음의 믿음의 고백 그것들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까?
실제로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의 은혜를 베풀어주실 때 우리 인간들의 모든 기쁨과 은혜와 영광을 위해서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시는 겁니다.
저는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신다는 이 말을 생각할 때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 부모의 도움을 받아서 잘 활용하고 사용하면 그것이 더 기쁨이겠지요.
하나님은 결코 우리들에게 야박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귀찮아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요. 사랑하면 허물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날 문득 허물이 보이면 그 사람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사랑이 없거나 식어진 것입니다.
그 사람의 행동을 바로 잡으려고 하지 말고 내 마음에 사랑을 회복하셔야 합니다.
내 마음의 사랑을 회복하지 않는 한, 그 허물은 끊임없이 발견될 것이고 끊임없이 확대되고 재생산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약점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약점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정말 사랑스러우면 잠 많이 자도 전혀 밉지가 않아요. 그런데 마음에 괘씸한 생각이 들면 잠만 잔다고 얘기합니다. 뭐라고 얘기 하냐면 잠만 쳐 잔다고 얘기합니다.
사랑하면 허물이 안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심지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다고 우리를 귀찮아하고 꾸짖겠습니까?
정말 우리가 그렇게 지혜를 구할 때 너무너무 애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는 이와 같은 마음이 우리들에게 필요하겠지요.
세 번째,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때 우리는 아무런 의심 없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이 성경구절은 설명이 필요 없는 것 같아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 주께 얻기를 생각 말라 두 사람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하나님께 구할 때 의심치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과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믿으셔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에 대해 말씀드리면 탕자는 백가지 다 잘못했습니다.
아버지를 그냥 괴롭혀서 아버지의 재산을 반분해서 가져가서 탕진하고 돼지치기가 되어서 주협열매를 먹고, 그것도 못 먹어서......
그런데 탕자가 한 가지 잘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탕자는 아버지의 사랑을 인정하고 믿었던 것입니다.
정말 내가 모든 것을 다 잘못했지만 내 아버지는 내가 이런 모습으로 가도 나를 버리지 않고 나를 종중의 하나로 써달라고 하면 나를 받아 줄 거야. 내가 정말 이런 모습으로 가도 ‘나가 내 눈에 보이지도 마’ 하고 얘기하지 않고 나를 받아 줄 거야.
적어도 탕자는 아버지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고 분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탕자의 모든 삶을 다시 한 번 바꿀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세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내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하지만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들어 주실 거야.’
여러분 제가 오늘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드릴게요. 여러분 이것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이런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을 거야. 하나님은 내 이러한 모습과 상태로 하나님께 가면 하나님이 정말 내가 미워서 나에게 아무것도 안 해 주실 거야. 나는 씻지 못할 죄를 지었어.
이런 마음 가지고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시지 않을꺼야 하고 생각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제가 말씀 드릴게요.
이 말은 하나님은 매우 속이 좁고 용렬하고 나와 같은 비슷한 수준의 치사한 분이야-이 말하고 똑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용서하지 못해요. 나는 누가 그렇게 요청하면 못 받아 줍니다. 나는 누가 그와 같은 것을 요구하면 나는 그걸 용납 못한다는 겁니다.
나는 내 자신도 용납 못해요. 그런데 하나님도 나를 용납 못하면 하나님하고 나하고 동격수준 아닙니까?
내가 용서 못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용서 못할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감히 생각도 못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수준이 다릅니다. 나는 이 정도 밖에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하나님은 무한한 수준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머릿속에서 생각하는-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다 된다고 품으실 만큼 하나님은 크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우리하고는 수준이 다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고 못 박은 사람까지 예수님은 용서해 주셨어요.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수준이 다른 겁니다.
만약에 내가 용서 못할 것 하나님도 용서 못하리라 생각하고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안 들어 주실 거야라고 생각하는 건 하나님과 내가 동격수준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치사한 분으로 보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파악했다면 하나님은 어떤 상태이건 나의 상황을 어떻게든 변화시켜 주실 것이야. 마치 하나님이 용서해 주실 수 있다, 없다, 은혜와 지혜를 주실 것이다, 아니다, 하고 판단하는 것은-하나님, 당신 이것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이 말과 똑같은 겁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도 지혜롭게 할 수 있고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신뢰를 보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뻔뻔스러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마음 넓으심을 믿는 겁니다.
여러분 내 능력에 기인해서 은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기인해서 은혜를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는 것이 지혜고 믿음입니다.
정확히 생각해 봅시다. 믿음이 도대체 뭘 믿는 겁니까?
믿음이 도대체 뭘 믿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믿는 겁니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믿는 거잖아요.
내 죄를 속해 주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믿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는 겁니다.
지혜라는 것은 사실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실과 사실과 능력에 접근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상태에서든 우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큰마음의 소유자시고 어떤 상태에서도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시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보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무엇을 보시는 것인가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현재의 능력, 잘 됨을 보시고 우리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넘어서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어리석고 가증한 우리 인간들에 대하여-하나님은 자격 없는 우리 인간들에 대하여 끊임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베푸시고 은혜로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신 겁니다.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은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신다는 분임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서 왜 의심하지 말라고 할까요?
의심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입니다. 우리의 구함에 대한 의심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사랑의 베푸심에 대한 약속을 의심하는 겁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주실 것이요, 찾게 하실 것이요, 문이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심이 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지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확신해야 됩니다.
여러분 믿음은 감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하는 겁니다.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확신하고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은 느낌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에 아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 같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 같아 라는 느낌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이와 같은 사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마음의 느낌, 정서라는 것은 수시로 바뀌지만 사실이라는 것은 한 가지 있는 그대로 불변하는 것입니다.
의심은 결국 사단이 우리에게 주는 것으로 우리 자신을 흔드는 겁니다.
내 마음에 의심이 든다는 것은 과연 하나님이 주신 생각일까 사단이 주는 것일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아주 중요합니다.
언제든지 내 마음의 생각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냐, 아니면 사단이 준 것이냐 라는 것을 분별하셔야 됩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든 사단이 준 것이든 둘 중에 하나라는 말입니다.
자 따라서 합시다.
어떤 생각이든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사단이 준 것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누가 의심을 주었을까? 내가 하나님께 기도해요. 그런데 내 눈앞의 현실은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이게 정말 들어질 것인가 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다음 뭐지요? 하나님 이 과정을 통해서 어떤 결과를 주시려고 합니까? 하고 우리는 기대해야 되고, "하나님 내게 이와 같은 내 눈에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주셨는데 이 가운데 하나님의 비밀이 있다면 내가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쓰게 하옵소서."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호두를 주세요." 라고 했을 때 여러분, 그 딱딱한 껍질을 기대했습니까?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을 기대했을 겁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호두를 주십시오. 했을 때 그 딱딱한 껍질을 기대하고 얘기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 안에 먹는 것을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호두 딱딱한 것을 주시잖아요. 그럼 그 다음은 왜 안 주셨습니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 그럼 이것을 어떻게 하면 제가 호두를 먹을 수 있겠습니까?
깨뜨려야죠.
우리 삶에는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의심 없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왜 우리는 담대히 구해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여 지혜로워 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겁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마음의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담대해 지는 것입니다.
내 모든 삶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우리는 위축되지 않고 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물질을 구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돈이 필요합니다. 물질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정말 잘 먹고 잘 살고 쌓아두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생각합시다.
우리 마음에 기본적인 양심이 있어요.
내가 이렇게 구하는 것이 뭔가? 내가 정말 기복적인 사고로 구하는 것인가?
내가 이렇게 말로 구해서 이루어진다면 도대체 땀 흘려 일하고 수고한 사람들의 수고는
무엇인가?
그러면 하나님은 공평의 하나님이신가? 씨 뿌린 대로 거두는 하나님이신가?
이런 생각을 하면 기도하다가도 우리 마음속에 어떤 위축됨이 와요.
도대체 내가 무슨 기복적인 사고를 가지고 구하는 것인가?
그런데 분명한 명분이 있다고 합시다.
“하나님, 내가 이번에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고 싶은데, 하나님 이번에 꼭 물질의 축복을 주십시오.”
“하나님 내가 이번에 정말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은데, 하나님 이번에 주시는 축복은 저 사람의 몫입니다. 저들의 몫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이번에 꼭 축복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면 기도하면서도 마음이 위축되지 않고 담대해요.
왜 그렇죠? 명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명분이 있을 때 사람은 담대해지는 겁니다.
대의명분이 있으면 사람은 어떤 일을 해도 담대해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영적인 명분을 가지고 살 수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구하면서도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있다는 분명한 방향과 현실적으로 바른 위치와 구조가 갖추어졌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 책임감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광고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믿음이 없으므로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믿음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어떻게 깨닫는가 하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를 보고 하나님이 어떠하실 것이라는 것을 유추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광고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으니까 우리를 보고 하나님은 어떤 분이야라고 말해요.
예수 믿는 사람보고 “아, 하나님이 뭐 그래.” 이렇게 얘기하는 것 당연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들의 수준에서는.
여러분 손님 대접할 일이 있어서 음식점을 정한다고 합시다. 어느 음식점이 잘하는지 가서 다 먹어보고 결정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그 음식점 가본 사람에게 물어봐서 결정하잖아요.
그 음식점 맛있어? 깨끗해? 직원은 친절해? 이렇게 물어볼 거 아닙니까?
그 사람이 말하면 성경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 믿고 결정하잖아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 말하는 것 듣고 결정해 버려요. 가보지도 않았으면서.
맛도 있고 깨끗하고 직원도 친절해. 그러면 거기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거기 더럽고 불친절하고 맛도 없어 하면 가보지도 않으면서 그냥 나쁜 집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하나님을 판단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광고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책임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주를 위해서 아름다운 삶을 살 수 밖에 없어야 합니다. 자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따라서 합시다.
담대하고 자신 있게 삽시다.
겸손하고 남을 세우는 여유를 가지고 삽시다.
자비롭고 관대합시다.
하나님의 축복을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는 축복까지 받읍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되 그 축복을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는 축복까지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축복이라는 것은 내가 받아서만이 아니라 그것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축복까지 받아야 하는 겁니다. 이런 마음의 준비와 실천구조가 되어 있으면 담대히 구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어요.
축복받아야 헌신할 사람은 생전 축복도 못 받고 헌신할 수도 없습니다. 축복을 받아서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임한 축복을 가지고 하나님께 헌신할 때 하나님의 새로운 축복이 오는 겁니다.
축복 받아서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헌신해서 더 큰 축복이 임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내 상태도 이미 축복을 받은 상태입니다. 내 상태를 봐도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리면 너무나 많은 축복이 임재하고 있는 겁니다.
여건이 되어야만 헌신하는 분이라면 여건이 되면 또 다른 이유가 생기는 겁니다.
평생 핑계하는 성도가 될 것인가, 평생 감사하고 헌신하는 성도가 될 것인가 결정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가 부모를 사랑한다면-사랑은 부족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신뢰하고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 불손하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사랑의 모습과 방법으로 주님을 위한 수고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담대히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구하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요즘은 정말 지혜가 부족한 것 같아요. 우리 마음에 울컥하는 울분 때문에.
여러분 나무 한그루 자라는 데는 수십 년 걸려요. 자르는 것은 단 몇 분 만에 잘라요.
사람 하나 세우는 데는 오래 걸려도 잘라버리는 것은 순간에 자르는 겁니다.
공든 탑 세우기는 정말 어렵지만 한 순간의 울컥하는 울분하나 때문에 수십 년 쌓은 탑이 다 무너지는 겁니다.
여러분, 수고하고 말 한마디 때문에 저 아래로 굴러 떨어진 사람 많이 보잖아요. 우리는 그 순간에 어떻게 우리 자신을 잘 엄호하고 다스릴 것인가? 이게 지혜입니다.
우리가 어떤 목표를 정하고 정말 큰 실수를 하지 않고 날마다 한 걸음 한 걸음 가서 목표에 도달했다고 합시다. 의외로 주변을 돌아보면 거의 사람이 없어요. 왜죠? 대부분 중간에 속 썩어서 거의 망해버리죠.
제가 오늘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저는 요즘 생각하는데 우리는 도를 닦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산 속에서 도 닦는 사람은 아니지만, 도를 닦는 사람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를 믿으면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늘의 백성이 되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구원받고-이것은 단 한 순간에 끝나는 것이잖아요.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도를 닦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만들어져 가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 믿어서 무엇이 바뀌어졌습니까?
우리 예수 믿고 천국가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이것은 한번으로 끝나는 일회적인 사건입니다. 한번으로 영원히 끝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도대체 우리의 삶이 무엇이겠습니까? 뭐가 달라지셨습니까? 마음 씀이 달라지셨습니까? 깨달음이 달라지셨습니까? 내 언어와 내 생각의 모든 수준이 날마다 달라지고 계십니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더 커지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이 더 커지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좀 더 관대해지고 또 뿐만 아니라 내 자신에 대하여 더 많이 깨닫고 삶을 깨닫고 더 많은 것을 깨닫습니다.
자,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인간에 대한 이해, 삶의 상황에 대한 이해, 하나님에 대한 이해 이 세 가지가 결국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해해야 되고 인간을 이해해야 되고 우리 삶의 상황을 이해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해가 부족합니다. 하나님도 잘 몰라요. 도대체 인간이 뭔지도 잘 모르고 삶의 상황에 대해서도 잘 이해가 안 되고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내가 무엇인가 깨달아지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은 이해,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깨달아가는 과정이지요.
도대체 내가 이전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내가 예수 믿고 5년 전, 10년 전, 3년 전, 1년 전, 한 달 전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내가 예배 한 번 드리고, 일 년 드리고 이년 드렸는데 내가 뭐가 달라졌는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도 초보적이고 유치한 성질이나 부리고, 아직까지도 내 마음에 안 들면 뭐든지 기분 나쁘고 이런 수준에서 언제까지 사시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산다면 뭔가 이제는 나날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내 생각의 달라짐을 내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우리를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목적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도대체 내 삶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목적은 분명히 정해진 경우가 많아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산다. 영광을 위해서 산다. 그런데 문제는 방법과 매너가 미숙해서 우리는 목적이 바르면서도 그 일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사람을 움직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지혜, 사람의 마음조차 얻지 못하니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잠언 16장 7절>을 보면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수까지도 내 편이 돼서 나를 돕는데 내가 이 세상에서 못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물을 키워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겁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면서 그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면서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반복, 확대, 재생산, 확산시켜 나갈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정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지혜, 일을 이루는 지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지혜, 우리 삶 가운데 이런 지혜가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지혜가 필요한 시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그 지혜를 누리는 성도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