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삽시다 (약2:14-26)
본문
본문 : 야고보서 2장 14 - 26절 마경훈 목사
본문 : 야고보서 2장 14 - 26절(개역개정)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오늘 설교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가 아니라 나 자신을 보는 거울이 되기를 원합니다.
어느 날 한 젊은 여자가 어린 딸을 데리고 길가 모퉁이에서 돈이든, 음식이든 무엇이든지 도움이 될 만한 것을 구걸하며 초라하게 서 있었습니다. 엄마뿐 아니라 딸도 아주 형편없는 옷차림이었습니다. 수치심이 일 정도로 더럽고 지저분했습니다. 잘 차려입은 한 중년 신사가 모퉁이를 지나가면서도 불쌍한 소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신사가 자신의 좋은 집, 행복하고 편안한 가정으로 돌아와 잘 차려진 저녁을 먹었을 때 문득 모퉁이에 서 있던 그 젊은 여자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들이 존재하도록 내버려두는 하나님에 대해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항의에 찬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도록 방치해 둘 수 있습니까? 왜 이 여자와 딸을 도울 수 있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습니까?"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존재 깊은 곳에서 다음과 같은 답변을 들었습니다. "난 분명히 조취를 취했다. 너를 세상에 보냈지 않았느냐?"
우리는 하나님께 가난한 자들, 억압받는 자들,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우리를 통해 돕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에 사랑이 부족하다고 불평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가정에서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부족함에 대해서 불평하지만 하나님은 불평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그 부족함을 채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된 것을 찾아내고 부족한 것을 발견하는 눈을 갖는 것보다 나 자신이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부족한 것을 채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문제 점 중에 하나는 신앙과 생활이 이분화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신앙이고 생활은 생활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한국교회 신자들 머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장훈태 목사님이 성경책을 잃어버려서 서울역에 있는 서점에 가서 성경책 사려고 했는데 원하는 스타일의 성경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다른 스타일의 성경책은 없는지 물었더니 주인의 답변이 기가 막힌 말이었습니다. 현재 서점에 남은 성경이 두 권인데 하도 훔쳐가는 사람이 많아서 더 이상 갖다놓지 않을 것이랍니다. 성경을 많이 잃어버린 서점 주인은 기독교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라고 생각할까요?
도시의 복개천 지하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나서 경찰이 들어가 봤더니 도둑놈들이 복개천 지하에 있는 철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잡아다가 조사를 했더니 한 달이 넘도록 철근을 빼갔는데 주일과 수요일은 훔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주일과 수요일은 훔치지 않았을까요? 교회 가서 예배드리느라고 주일과 수요일은 쉬었다는 것입니다. 성수주일 하느라고 도적질도 쉬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주일과 수요일이 없었다면 1주일에 7일 동안 계속해서 도적질을 했을 텐데 주일을 지키고 수요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도적질을 1주일에 5일 밖에 못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사건은 긍정적으로 생각할 그런 종류의 사건이 아닙니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에 그리스도인이 1천만 명이나 되니까 그 많은 사람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도 나올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신앙과 생활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보이지 않는 믿음을 보기를 원하고,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에 믿음을 보여줘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을 세상에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요? 18절에 보면 야고보는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행함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줄타기 선수 불론딘(Blondine)의 이야기입니다. 블론딘이 나이아가라폭포 위에 줄을 매고 줄을 타게 되었습니다. 미국 쪽에서 캐나다 쪽으로 먼저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는 줄을 타기 전에 운집한 군중에게 확성기를 통해서 소리쳤습니다. "제가 이 장대 하나만 들고 이 쪽에서 저 캐나다 쪽으로 건널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때 많은 관중은 입을 모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정말 나이아가라폭포 위에 맨 줄을 막대 하나만 들고 건넜습니다. 사람들은 손을 쥐고 아슬아슬한 스릴을 느끼면서 지켜보다가 블론딘이 성공하자 우레 같은 박수로 환호했습니다. 이번에는 캐나다 쪽에서 미국 쪽으로 건너가려 하면서 또 물었습니다. "여러분, 여기 조그만 손수레가 있습니다. 이 수레를 제 몸에 걸고 건너려고 하는데 성공하라 믿습니까?" 관중들은 "믿고 말고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드디어 블론딘은 그의 몸에 수레를 걸고 장대를 들고 아슬아슬하게 건너는 데 성공했습니다. 관중들은 흥분해서 수건을 던지고 모자를 벗어 던지며 환호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주 엄청난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성원으로 나이아가라 폭포 위를 줄을 타고 건너는 일에 성공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제 등 뒤의 손수레에 사람을 태우고 건너가려 합니다. 성공하리라 습니까?” 그랬더니 두 번씩이나 성공한 그가 이번에도 성공할 것을 믿고 모든 관중은 박수를 치면서 “네, 믿습니다.”라고 응답했습니다. 그러자 블론딘이 관중 속에 용감해 보이는 한 청년에게 가서 "자, 타십시오" 했더니, 그 청년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면서 "아니오, 아니" 하면서 달아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믿는다고 말한다고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청년이 정말로 블론디가 수레에 사람을 태우고 나아아가라 폭포를 건널 수 있다고 믿었다면 수레 위에 올라탔을 것입니다.
21, 22절을 보면 야고보 장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로 듭니다. 그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행함이 있었기 때문에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행함과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동전이 온전하려면 양면이 온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면만 있다면 온전한 동전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행함이 없이 온전한 믿음이 없고 믿음이 없이 온전한 행함이 없습니다. 행함이 있을 때 믿음이 온전하고 믿음이 있을 때 행함이 온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26절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하는 것이고, 바울 사도는 롬 14:23에서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결국 자기 신앙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 7장에 보면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거짓 믿음을 자진 자들이 심판을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아마도 그들은 세상에 있을 때에 대단한 믿음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 앞에 서서 주님에게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했지만 주님은 밝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한 비유를 통해서 행함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그 집이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건강한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반대로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그 집이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할 것입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결국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과거에 어느 집사님은 늘 끝까지 주님을 믿고 주님을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 제목을 내놓고는 했습니다. 믿음은 지금도 중요하지만 나중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지혜로운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잘 믿는 것 같지만 행함이 없는 믿음은 결국은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럼 행함 있는 믿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확실한 믿음을 가지라.
믿음이 확실하면 행함은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손바닥과 손등처럼 하나가 가면 다른 하나도 가고 하나가 멈추면 다른 하나도 멈추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라운 행함을 보여주는데 그들의 놀라운 행함은 놀라운 믿음에서 온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넌 것과 여리고를 무너뜨린 사건은 행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요단을 건너기 위해서는 넘치는 요단강을 밟아야 했습니다. 여리고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견고한 여리고 성을 13바퀴 돌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요단강을 밟고 여리고를 돈 것은 믿음이 충만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만약 믿음이 없었다면 행함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요단강 물이 넘치는 시기에 요단강물을 밟는 것은 생명을 거는 위험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가르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광야 40년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다양한 방법으로 체험했고 그 결과 요단강을 밟을 수 있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요단강을 밟는 행함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여리고를 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견고한 성 여리고를 13바퀴 돌아서 무너진다는 것은 인간적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믿음을 가지면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확실한 믿음이 생기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되는 것입니다. 롬 10:17에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가쳐줍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경을 읽어야 하고 예배를 드리면서 설교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Your child's brain 당신 아이들의 두뇌” 라는 글이 있습니다. 샤론 베글리(Sharon Begley)라는 분이 아이들의 뇌가 어떻게 발달되어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쓴 글입니다. 이 글에서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는데,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받는 일이고, 듣는 일이랍니다. 그 내용을 잠깐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의 뇌는 컴퓨터와 같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나누어지는데, 인간의 하드웨어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오는 본능적인 기능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심장을 박동 시킨다든지, 먹으면 소화를 시켜서 밖으로 내 놓는다든지, 위험이 오면 본능적으로 피한다든지 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머리 속에 입력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소프트웨어와 같은 것은 아무것도 입력되지 않은 빈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 두뇌의 용량은 무려 100조에 이르는 신경원(neurons)이 있는데, 여기에는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곳에 어떠한 것을 입력시키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생각과 삶, 일생이 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논리적인 두뇌는 태어나면서부터 네 살까지 형성되는데 그 이전에 논리적인 분야를 가르쳐주면 그쪽 분야의 신경세포에 신경회로(muscle) 같은 것이 생기게 되고요, 음악적인 뇌는 세 살부터 열 살까지 형성되는데 그 때에 음악을 계속해서 들려주면 음악분야의 신경세포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음식 맛은 세 살 이전에 형성되는데 그 이전에 어떠한 것을 자주 먹이느냐에 따라서 음식 쪽의 신경세포가 형성이 되어서 나이를 먹어도 세 살 이전의 맛을 떠나지 못하고, 언어는 태어나면서 열 살까지 형성되는데, 열 살 이전에 언어를 가르쳐주면 언어분야의 신경근육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이중 언어를 익혀주려면 적어도 열 살이 되기 전까지는 가르쳐주어야 원어에 가장 가까운 발음을 할 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이를 데리고 기타를 계속 치면서 노래를 불러 주면서 키우면 그 아이가 자라서 기타를 배우게 될 때에 본능적으로 코드를 잡는다는 겁니다. 어릴 때에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 아이는 이미 기타에 대한 신경세포가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엄마를 따라서 교회에 나온 아이들은 자라면 음악을 잘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음악가의 집안에서는 음악가가 나오기 쉽고, 의사 집안에서는 의사가 나오기 쉽고, 운동 잘하는 집안에서는 운동선수가 나오기 쉽고, 목사 집안에서는 목사가 나오기 쉬운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시작을 어떠한 것을 입력하느냐에 따라서 삶이 결정된다는 것은 인간의 두뇌뿐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해당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아무 것도 입력되지 않은 100조의 인간의 두뇌처럼, 아무 것도 입력되지 않은 신앙생활에다가 처음에 어떠한 것을 입력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믿음 생활이 달라지고,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믿음생활을 보다 더 잘 하기 위하여 어떠한 것으로 채워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분들은 성경을 많이 읽으십시오. 그러면 믿음이 더욱 성장할 것입니다.
컵 속에 들어있는 내용물에 의해서 컵에서 나오는 것이 결정되고, 컵의 색깔이 결정되는 것처럼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할 때 말씀대로 살아지는 것이고 말씀대로 충만할 때 말씀의 색깔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2. 성령으로 충만하라.
성령은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고 능력을 주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 땅에 이루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속에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요 16:13에 보면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진리를 깨닫게 한다는 뜻과 진리를 행하게 하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보면 말씀을 많이 알지만 행함은 없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치 영문법은 많이 알고 있는데 회화가 안 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러시아의 어떤 사람이 영문법 책 6권을 출판했습니다. 책의 구성과 내용이 너무나 훌륭해서 영문학 박사들도 놀랄 정도로 좋은 책입니다. 그 책을 본 미국의 한 대학의 교수가 책의 저자를 만나고 싶어서 러시아로 갔습니다. 그리고 저자와 인터뷰를 시작했는데 말이 통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책의 저자는 문법은 기가 막히게 잘 정리했는데 회화는 한 마디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 가운데 이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성경 지식은 풍부한데 성경적인 생활은 전무한 나이롱 신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데 성경대로 살아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성경대로 살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마치 엔진은 좋은데 기름이 떨어진 자동차 같습니다. 능력을 행할 수 있는 조건은 갖췄지만 기름이 없어서 능력을 행할 수 없는 자동차처럼, 말씀이 있어도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말씀을 행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겔 36:27에 보면 에스겔이 성령으로 충만하면 말씀대로 사는 생활을 할 수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여기서 ‘내 영’은 성령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성령을 보내시고 그 성령의 능력을 따라 살 때 말씀대로 살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3.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는 생활을 하라.
말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은 우리의 생각과 신체의 기관들과 행동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에 보면 큰 배가 지극히 작은 키 하나에 의해서 사공의 뜻대로 움직여지는 것처럼 혀도 작은 지체이지만 온 몸을 조정한다고 말씀합니다.
롬 10:8에 보면 바울이 전파한 말씀은 믿음의 말씀입니다. 믿음의 말씀은 믿음의 사람의 마음에 있고 입에도 있는 말씀입니다. 즉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는 시인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믿음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버울은 디모데에게 신자들은 이 믿음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으며(딤전 4:6), 롬 10:10에서는 이 믿음의 말씀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 30:14에서는 이 믿음의 말씀을 가질 때, 즉 말씀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말씀을 행할 수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저는 다윗의 인생은 신앙고백으로 승리한 인생이라고 봅니다. 다윗은 많은 시편을 기록했는데 그의 시를 보면 그는 환경이 좋을 때에도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의 고백을 했을 뿐만 아니라 환경이 어려울 때에도 확실한 신앙의 고백을 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힘이며 방패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능력이십니다. 나의 반석이십니다.” 다윗의 이런 고백들은 그가 위경에 처할 때 이겨낼 능력을 주었으며 그를 더 확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나갔던 것입니다.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은 바다가 잔잔해서 배가 흔들림이 없을 때에도 그 배 안에 있어야 하고 큰 파도가 일어서 배가 심하게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그 배 안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4. 말씀대로 사는 것을 훈련 하라.
믿음이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로 일방적으로 주어지지만 믿음이 성장하고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려면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자신의 경건생활을 훈련했고, 디모데에게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고 했는데 이 말씀을 표준 새번역에서는 “경건함에 이르도록 자기를 훈련 하십시오”라고 번역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적이 존재합니다. 사단도 적이고 유혹하는 세상도 적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물리쳐야 할 적입니다. 어찌 보면 신앙생활은 자신과의 싸움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주님을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생활에서 자기만을 주장하면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행복한 가정이 되듯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자기를 부인해야 행복한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김득구라는 권투 선수가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세계챔피언에 도전했다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김득구 선수의 생애를 다룬 영화가 2002년에 “챔피언”이란 제목으로 상영되고 있습니다. 그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14세에 강원도 바닷가 마을 거진에서 무작정 상경한 김득구는 당시 권투를 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꾸던 꿈을 꿉니다. 맨주먹으로 세계 챔피언이 되어서 부와 명예를 얻겠다는 것인데, 이 영화에서는 그 성공, 즉 “챔피언”의 개념을 의미 있게 선정합니다. 체육관에 입관하려는 득구와 몇 젊은이들에게 김현치 관장이 말합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똥지게를 져도 그 분야에서 최고면 그 사람이 바로 챔피언이다” 김득구가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할 수 없어서 방황할 때 관장은 거울 앞에 득구를 세워놓고 말합니다. “권투선수는 미스 코리아보다 더 거울을 많이 본다. 그 이유는 싸워야 할 상대가 바로 거기 있기 때문이다. 거울 앞에 있는 바로 그 사람, 자기 자신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승리다. 최선을 다하는 게 승리이고 그렇게 하는 자가 바로 챔피언이다” 정말 의미 있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그렇듯 신앙생활도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죽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말을 하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그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이 그렇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훈련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반복적인 훈련이 되면 실전에서 자동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군대생활 할 때 저희 부대에서는 공수부대에 가서 약4주 정도 훈련을 받고 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키가 좀 작어서 열외 되었지만 말입니다. 훈련을 받고 온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3주간은 훈련을 받고 마지막 4주째에 낙하산을 탄다고 들었습니다. 낙하산을 타기 전에 막타워를 탑니다. 용어가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 3주간 훈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공중에서 떨어지면서 착지하는 자세연습이라고 합니다. 수천 번 수만 번 연습을 합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상공에 오른 후에 낙하산을 타고 땅에 떨어지면 그동안 연습했던 자세가 그대로 나와서 안전하게 착지한다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훈련해야 합니다. 대인관계도 훈련합시다. 상대를 보고 웃는 훈련도 하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한 마디를 해도 부드럽고 따뜻하게 말하는 훈련도 하시고, 예배를 철저하게 드리는 훈련, 엎드려 기도하는 훈련, 복음을 전하는 훈련 등 자신을 훈련하셔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며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훈련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십시오. 자신이 자신을 훈련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훈련하는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훈련이 될 만한 사람을 만나게 하시기도 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어떤 사람을 만나도 훈련이라고 생각하시고 기쁘게 받으십시오. 훈련 후에 주어지는 큰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