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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신 주님을 섬기는 방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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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신 주님을 섬기는 방법들
본문 : 마태복음 21장 1 - 11절 마경훈 목사


본문은 종려주일에 합당한 본문입니다. 지난 주일은 종려주일이었습니다.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전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 하는 말의 유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평화의 왕으로 나귀타고 입성하였습니다. 말은 전쟁의 상징입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에 보면 거의 말이 전쟁의 상징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주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그때 많은 백성들이 주님을 환영하면서 옷을 깔아 펴놓고 그 다음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면서 "호산나!" 하는 찬송을 부르면서 환영을 했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실 때에 이런저런 섬김의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제자들과 군중들로 하여금 주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귀까지도 사용하셔서 주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섬김을 살펴보면서 왕이신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매임에서 풀린 봉사자
2절 말씀을 보면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감람산 벳바게에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맞은 편 마을에 가면 매인 나귀와 마귀 새기가 있는데 풀어서 주님에게로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나귀를 쓰시기 위하여 먼저 풀어오게 하셨습니다.
만약 나귀가 매인 채로 계속해서 있다면 주님은 그 나귀를 쓰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도 주님에게 씀임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매인 것을 푸는 일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무서운 사자도 매여 있으면 매여 있는 범위만큼만 활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매인 만큼의 범위만큼만 활동할 수 있습니다.
강아지를 보세요. 요즘은 강아지 줄도 잘 나와서 강아지가 주인 가까이 오면 줄이 저절로 감겨서 강아지 불편하지 않게 해줍니다. 강아지가 멀리가면 강아지가 당기는 힘에 의해서 줄이 풀려서 강아지가 멀리가게 해줍니다. 하지만 줄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아주 멀리갈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에 매여 있습니까? 텔레비전에 매인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10시 드라마에 매인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10시가 되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다가도 10시쯤 되면 일어나야만 합니다.
감정에 매인 사람이 있습니다. 기분이 좋을 때는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조금만 상해도 봉사의 자리에 앉지를 않습니다. 누가 조금만 좋지 않은 소리를 하면 거기에 매여서 일하지 봉사하지 않습니다.
돈에 매인 사람이 있습니다. 돈 버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일보다 우선입니다. 도 돈이 좀 벌릴 때는 일하지만 돈이 잘 안 벌리면 일하지 않습니다.
사람에 매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를 살피세요. 나는 무엇에 매여 있지는 않은가? 자기를 살피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기 바랍니다.

2. 멍에를 메는 봉사자
5절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여 주님이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 지방에서는 일상생활에서 나귀에게 멍에를 메워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소에 멍에를 메워 사용하듯이 이 나귀도 주인이 멍에를 메우면 멍에를 메야하고 또 벗기면 벗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는 벗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메워주는 대로 메고 순순히 봉사하는 나귀를 예수님께서는 선택하여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나귀처럼 봉사라고 하는 멍에, 사명이라고 하는 멍에는 내가 메고 싶다고 해서 메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아니라고 발버둥치면 안 됩니다. 예 하고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필요로 해서 부르시거든 순순히 따르세요. 만약에 이리저리 핑계를 대면서 빠져나가려고 한다면 주인이 나귀를 때려서라도 멍에를 메게 하듯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실 것입니다.
멍에를 매는 것은 나귀에게는 고역입니다. 그래도 나귀는 말없이 멍에를 매고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왕이신 주님을 섬기는 사람도 주님이 매게 하시는 일이 때로는 나를 힘들고 피곤하게 하지만 말 없이 섬기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출 4:10-14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르심을 받은 모세가 주님에게 자기는 말을 잘 못고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니 다른 사람을 보내라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자신이 입을 만드셨으니 가라고 하시면서 주님이 함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모세가 “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하자 주님이 모세를 향하여 노하셨다고 합니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매야합니다. 원하지 않지만 해야 하는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새벽기도의 멍에도 매야 하고, 십일조의 멍에도 매야 합니다. 주일 성수의 멍에가 있죠. 직분의 멍에도 있습니다. 주의 일을 하는데 직분을 받은 사람은 더 큰 멍에가 있는 것입니다.

3. 주님 제일주의의 봉사자(막 11:2)
마가복음 11장 2절에 보면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만 있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어미와 새끼 두 마리를 끌어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미 나귀를 타신 것이 아니라 아무도 타보지 않았던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어째서 예수님께서 이 새끼 나귀를 타셨는가 하면 누구를 위해서도 아직 봉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제일 먼저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주님 제일주의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보다도 먼저,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무슨 일을 해도 이것은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할 때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나의 생활 중심에 주님이 주인이 되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며, 주님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고 또 주님께서 기쁘시게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나귀가 주님을 위해서 했던 봉사에서 우리가 배울 것이 참 많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봉사하면서도 생색을 내거나 자랑하지 않았고 목에 힘주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쓰시는 대로 묵묵히 쓰여지다가 말없이 물러갔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는 봉사, 그리고 우리가 섬기는 섬김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 앞에서 머리를 들고 제 자랑을 하면 안 됩니다. 헌금을 많이 한다고, 기도 많이 한다고, 전도를 많이 한다고 교만해질 것이 아니라 이 나귀처럼 말없이 조용히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왕의 왕을 섬기는 법입니다.

4. 즉시 순종하는 봉사자(3절)
3절에 보면 제자들이 나귀를 글고 오려고 하는데 주인이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즉시 보낼 것이라고 하십니다.
어떤 주경 신학자는 주님과 나귀 주인은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약속이 되어 있었더라면 예수님의 제자들을 몰라볼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나귀의 주인은 예수님께서 필요하시다고 했을 때 즉시로 보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아마 어떤 사람은 나귀 새끼 키워서 한번도 부려보지 못했으니 아까워서 오늘은 내가 쓰고 내일 주님이 쓰시면 어떻겠는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나귀의 주인이 그렇게 했다면 예수님에게는 그 나귀가 필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 내일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오늘 요구하실 때 오늘 순종해야 합니다. 감동 올 때 순종해야지 미루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오늘 나에게 봉사하라고 하실 때 “주님, 오늘은 좀 바쁘니 급한 일을 먼저 하고 내일하면 안되겠습니까?”하고 내일로 미루는 봉사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내일이 아니라 지금 즉시로 하는 봉사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미국의 유명한 교육가요, 철학가요, 정치가요, 언론인이었던 프랭클린에게 하루는 한 농부가 달구지에다 자기가 농사지었던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을 싣고 왔습니다. 깜짝 놀란 프랭클린이 농부에게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농부가 하는 말이 "제가 얼마 전에 워싱톤에 왔다가 존경하는 선생님을 뵈옵고 그냥 돌아가기가 섭섭해서 저한테 일생동안 필요한 말씀을 써 주셨던 것을 혹시 기억하시겠습니까?" 그러자 프랭클린은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해서 "제가 무엇이라고 하였던가요?" 하고 농부에게 묻자 이 농부가 하는 말이 선생님께서 저에게 메모해 주신 말씀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너무 좋아서 다른데다 옮겨 적지도 않고 안방 벽에다 붙여 놓고는 매일 보면서 좋아했습니다. 저는 농사를 많이 짓기 때문에 일꾼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과 일하면서도 이 말씀을 잊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해서 밀농사가 아주 잘되었습니다. 그래서 밀을 수확할 때가 되어 밀을 다 베었는데 해가 기울어 들판에 그대로 두었는데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힘들어도 밀을 창고에 다 들여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꾼들이 얼마나 불평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룰 수 없어서 일꾼들에게 사정을 하면서 다 들여 놓았습니다. 그날 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우박이 쏟아져서 들판에 있던 밀이란 밀은 우박을 맞아서 못 쓰게 되었지만 저희 밀만은 하나도 손해 본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선생님 덕분이기 때문에 너무 고마워서 이렇게 예물을 가져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감동도 즉시 순종하세요. 즉시 순종하지 않으면 갈등이 생깁니다.
과거에 주님이 주신 감동이 있는데 즉시 순종하지 않아서 교회를 떠난 사람이 있습니다. 저하고 상담을 하면서 1천만 원 헌금 감동이 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기다렸는데 자꾸만 미루더니... 시간이 지나니까 형편도 바뀌고 아까운 마음도 들어가는 것 같더니만 결국은 말은 해놓고 순종을 못하니 저를 볼 면목도 없고 하니 교회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또 떠날 때는 다른 핑계를 대고 가더군요. 제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5. 명한 대로 순종하는 봉사자(6절)
6절 말씀에 보면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라는 말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께서 명하시니 그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건너편 마을로 가서 매여 있는 나귀를 풀어오라고 하셨습니다. 주인이 뭐라고 하면 “주가 쓰시겠다.”고만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건너편 동네에 에쿠스 자동차가 있는데 그냥 가져오라는 것과 같습니다. 주인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대로 순종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도 그렇지요? 그렇다면 동행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를 소개 할 수 있습니다.
마 28장에 보면 복음을 증가하는 생활을 하면 주님이 동행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창 6:9에 보면 하나님은 노아와 동행하셨습니다. 22절에 보면 노아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동행하실 수 있었던 것은 노아가 주님의 말씀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는 제사를 통해서 주님이 섬김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 제도에 대해서 주님은 일일이 명령하셨고 구약의 백성들은 그대로 행했습니다.
유월절 같은 경우도 어린양을 잡아서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즘 유대인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습니다. 닭고기로 대신합니다. 말씀대로 하지 않습니다.

6. 본을 받아 봉사하는 봉사자
7절에서 9절까지 보면 제자들이 나귀를 끌고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펴고 주님을 낮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무리의 대다수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서 지금으로 말하면 레드 카펫을 만들었습니다.
무리들이 제자들이 어떻게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했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섬기는 봉사자들은 다른 사람의 잘하는 점을 본받아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장서서 봉사를 잘하는 것도 좋지만 남들이 봉사할 때 본을 받아서 봉사하는 것도 매우 귀한 것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라고 하면 20세기의 양심이요,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슈바이처는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살고 있는 불쌍한 원주민들을 돌보기 위해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슈바이처가 독일에 살았다면 얼마든지 행복하고 넉넉하게 살 수 있었지만 아프리카의 밀림을 찾아가서 '람바네네 오고에'라는 강가에 병원을 짓고 죽을 때까지 그들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신당동에 가면 신일교회라고 예배당이 잘지어진 교회가 있습니다. 그 당시 담임목사인 이일선 목사님도 목사이면서 의사였는데 슈바이처 박사를 통해서 많은 깨달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가기위해 교회에 사표를 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가서 1년 동안 열심히 보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울릉도로 갔습니다. 그 당시에는 울릉도에 교회하나 제대로 변변한 곳이 없었고 병원도 쓸만한 것이 없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울릉도에다가 병원을 세우고 또 교회를 세우고 슈바이처 박사처럼 죽을 때까지 울릉도의 주민들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일선 목사님을 가리켜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본을 받아 봉사하는 것도 매우 귀중한 일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 보게 되면 말없이 묵묵히 주의 일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새벽기도, 전도, 선교, 찬양단, 주일학교, 차량 봉사, 교회청소, 주방 봉사 등등의 봉사를 하면서 말없이 봉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보고 배워야 합니다.
주님은 그런 봉사자를 찾고 계십니다. 작은 일을 해놓고도 생색내고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앞서간 사람들을 본 받아서 봉사하는 봉사자들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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