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줄 (호 11:1~9)
본문
감옥을 자기 집 드나들듯 드나들며, 어머님의 마음에 고통을 주던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범죄 하면 교도소에 들어가서 몇 개월을 살다가 다시 석방되어 나옵니다. 그러면 어머니 앞에 와서 다시는 그런 범죄의 자리에 들어가지 않고, 정직하게 살고, 바르게 살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작심 3일이라고 얼마지 나면 다시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서 범죄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교도소에 들어갔다가 또 출소하고, 교도소에 들어갔다가 또 출소하는 일들이 반복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좀 더 큰 범죄를 저질러서 오랫동안 교도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이제 출소하는 날이 가까워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어머니! 제가 어머님의 얼굴을 볼 낮이 없습니다. 제가 번번이 어머님께 약속을 드렸지만 어머니를 배신하고 어머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번에 나가면 꼭 좋은 아들이 될것입니다. 이번에도 어머니가 저를 용서하시고 아들로 받아 주신다면 제게 답장을 써 주세요.” 그렇게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로부터 답장이 오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몹시 상실했습니다.
이제 며칠 있으면 교도소 문을 나서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또 편지를 썼습니다. “제가 이번에 출소를 하면 저의 고향을 지나갈 것인데 어머니가 저를 용서하시면 저희 집 앞 대추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달아주세요. 그러면 어머니가 저를 용서하는 것으로 알고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나 노란 손수건을 달지 않으면 그냥 세상으로 가서 또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들은 고향으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그 버스가 고향을 지나서 라스베가스로 가는 버스이었습니다. 라스베가스는 미국 최고의 환락의 도시이며, 카지노의 도시입니다. 라스베가스로 가는 시끄러운 버스 안에 한 사람만이 고개를 숙이고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라스베가스가는 길이 기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슬퍼하시오.” 이 젊은이는 지나간 과거를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불효자입니다. 몹쓸 아들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번번이 약속을 어겼습니다. 이번에도 제가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과연 어머니가 저를 받아 주실는지 용서해 주실는지 걱정이 됩니다.”
버스가 동네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차에 탄 사람들도 관심이 있어서 흥분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동네를 돌아서는 순간에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젊은이 저것 좀 보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봤더니 온 동네 나무에 노란손수건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버스는 세워졌고 이 젊은이는 버스에서 내려서 어머님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머니에게 이러한 이유를 물었더니 어머니는 몇 개월 동안 병으로 앓아 누워있었습니다. 자식에게 병을 알리고 싶지 않으셔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편지가 도착했을 때는 병이 너무 심해서 아들에게 편지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아들 출소일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동네사람들에게 이이야기를 했더니 온 동네 사람들이 감동해서 나무마다 노란 손수건을 달아 아들을 돌아온 탕자처럼 맞아 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바로 이어머니의 사랑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사랑도 위대하지만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작가는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 할 수 없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했던가를 아주 절실하게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호세아라는 선지자는 주전 8C기에 이스라엘이 가장 어둡고 부패했던 시대, 영적으로 침체 되었던 시대의 예언자였습니다.
여로보암이라는 왕이 다스리고 있었던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떠나 있었고 우상에게 분향하며, 우상에게 예배하며 우상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서 전반부에는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호세아가 결혼을 했는데 아주 품행이 좋지 못한 고멜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툭하면 집을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외간 남자와 외도를 합니다. 그러면 호세아는 아내를 달래서 집으로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집에 며칠 있다가 또 밖으로 도망갔다가 다시 데리고 오곤 했습니다. 한번은 몸을 파는 창녀촌에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 팔려 간 것입니다. 그래서 몸값을 치르고 그 여인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여러분 고멜이 누구입니까? 바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남편 된 하나님의 품을 떠나고 우상의 품에 안겨서 음행을 저지르는 여인이 고멜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고멜과 같은 이스라엘을 용서하고 다시 받아 주고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 1장에는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고 이스라엘은 자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녀가 번번이 아버지에게 불순종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아버지는 더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를 사랑해주시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도 아이를 키워보면 어릴 때 참 예쁘고 귀엽습니다. 그런데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면 사춘기를 맞이하고, 아이들이 부모에게 반항하기 시작합니다. 삐딱하게 보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중학생 때 “왜 우리 아버지는 목사일까?”라고 생각하고 좋지 않게 아버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학교 가면 친구들이 교회가 어떻다고 흉을 봅니다.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도 사춘기가 되면 반항 할 때가 있습니다. 사춘기 자녀들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떠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 안타까운 목소리로 그들을 부르시면서 그들에게 사랑의 손짓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범죄 함을 보면 그들을 다 심판해야 되지만 하나님은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기에 그들을 용서하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 우리들의 마음에도 부어주었습니다. 로마서 5장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확정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불러내신 사랑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태동하기 전에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그들을 불러내셨습니다. 왜 불러내시고 그들을 사랑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많은 민족가운데 이스라엘을 택해서 하나님의 자녀 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 땅에 60억의 인구가 있는데 그 중에 우리를 불러내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언젠가 한번 우리교회 최 집사님이 사순절기간에 찬양을 하는데 “왜 날 사랑하나?”라는 찬양을 해서 우리가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실까? 내가 잘나서, 내가 순종을 잘해서, 착해서, 정직해서, 나를 사랑하시나? 그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조건을 가지고 사랑합니다. 예뻐야 사랑하고, 무언가 재능이 많아야 사랑하고, 나한테 잘해야 사랑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만세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죄인의 자리에서 부르셔서 의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고아 같은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방황하는 우리를 부르셔서 성도라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10절에 “너희가 그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지 다르게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왜 하필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민족을 택하셨을까요? 그들의 수가 많아서가 아닙니다. 부강해서가 아닙니다. 순종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들을 택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릴 때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어머니 태속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청년 때에, 어떤 분들은 장년 때에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어릴 때 디모데처럼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더 감사한 것입니다. 때묻기 전에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청년의 때, 노년 때, 세상의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나를 죄악에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사랑은 더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 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사랑은 보호하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어린 이스라엘을 부르셔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돌봐주십니다. 어린아이를 낳으면 혼자 커지 못합니다. 적어도 초등학교, 중학생이 될 때까지는 부모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성경말씀 3,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찌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오늘 성경에 보니까 걸음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조금 성장해서 걸음마를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걸음마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1년이 지나면 걷기 시작합니다. 뒤뚱뒤뚱 걷다가 엄마가 따라 가면서 지켜봅니다. 그러다 넘어지면 울음을 터트립니다. 그러다가 쫒아가서 품에 안고 먼지를 털어주고 침을 닦아주고, “얘야! 울지 마라! 괜찮아!” 하고 달래줍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지라도”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품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더라고 합니다. 고친다는 것은 치유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병들 때 마다 하나님이 치료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어린아이가 아프면 엄마들은 밤을 새면서 간호를 해줍니다. 열이 나면 찬물을 가지고 와서 이마에 물수건을 가지고 와서 밤새도록 아이를 간호해줍니다. 바로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성경에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또 그것만이 아닙니다. 조금만 크면 막 도망을 다니려고 합니다. 탕자와 같은 마음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의 줄이 아닌 사랑의 줄로 붙들어 매셨다고 합니다.
탈무드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으면 탯줄을 끊습니다. 탯줄을 끊는 순간 천사가 와서 어머니와 아이 간에 사랑의 줄을 매어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속에는 놀라움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어머니는 어머니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늘 그리운 겁니다. 보이지 않지만 그곳에서 사랑의 줄이 이어져 있습니다.
어릴 때 보면 시골에서 어떤 아줌마는 아이들은 많고 김은 매야 되는데 시간이 안 되고,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 2~3살 아이가 위험해서, 아이들의 발에 부드러운 천을 맵니다. 그리고 반대쪽은 엄마의 허리에 맵니다. 아이가 기어가다가 줄이 당기면 더 이상 가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아가야!”하고 불러서 아기를 안전한 곳에 놓고 일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냥두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짐승에게 상할 수도 있고, 도랑에 빠질 수도 있고, 함정에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줄을 매놓고 일을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다고 합니다. 오늘도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사랑의 줄로 여러분을 이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사랑의 줄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사랑과 동시에 징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6절에 보면 “칼이 저희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 하리니 이는 저희의 계책을 인함이니라.”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잘못할 때마다 그들을 채찍질 하십니다. 히브리서에서도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신다고 합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길을 지나가다가 내 아이가 잘못하면 꾸지람을 하고 매도 때리고 벌도 세웁니다. 그러나 남의 아이가 잘못을 하면 가서 매를 때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저 꾸짖을 정도입니다. 내 자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그릇된 길로 갈 때에 하나님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힘들고 어려워도 징계를 감당해야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게리 토마스라는 한 기독교 학자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자기 아들이 어릴 때 장난을 많이 쳐서 난로에 넘어져 눈이 많이 찢어졌습니다. 병원에 가서 찢어진 곳을 꿰매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아빠! 이 사람이 나를 죽이려고 해요. 나 좀 살려주세요.”라고 외쳤습니다. 아빠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호사와 의사와 싸워야 합니까? 아들을 사랑하는 아빠라면 그 고통스러운 소리를 듣고 참고 기다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과정을 거쳐야지 아이의 상처가 치료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하고 연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징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징계를 받을 때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연단을 받을 때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징계와 연단을 통해서 나를 바른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아이가 어릴 때 가게에 가서 사탕도 그냥 집어 오고, 문구점에 가서 연필도 그냥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그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훔쳐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꾸지람을 해야 되는데 그냥 두는 것입니다.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더 큰 것을 훔쳐 가지고 왔습니다. 시계도 훔쳐오고, 다이아몬드도 가져와서 어머니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엄마는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는 더 큰 도둑이 되었습니다. 큰 도둑질을 하다가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사형수가 되었습니다. 사형일자가 다가 왔을 때 마지막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만나서 그는 이야기 했습니다. “어머니 제 볼에 마지막으로 뽀뽀한번 해주세요.” 엄마가 그 죽어가는 아들에게 뽀뽀를 해주는데, 그만 아들이 엄마의 귀를 물어 뜯어버린 것입니다. 왜 물어뜯었냐면 어머니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 사탕하나를 훔쳐 왔을 때 나를 매를 때리고 벌을 세워야지 왜 그냥 두었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옳은 줄 알고 그렇게 살다가 사형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원망하십니까? 우리로 하여금 바른길로 가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반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포로로 끌려가서 도저히 회복의 길이 없을 때 이제 영원히 이 지상에서 끊어져야 할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버릴 수가 없어서 다시 그들을 끌어안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네 번째 하나님의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자식들이 아무리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그들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아들이 재수를 하고 삼수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이 아버지에게 너무 미안합니다. 아버지 참 어려운 살림에 제가 재수도 2번씩해서 너무 죄송합니다. 아버지가 “얘야! 그런 이야기 하지 마! 네가 척척 대학도 붙고 문제도 안 일으키면 내가 아들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르지 않겠니? 네가 재수도 하고 삼수도 하니까? 내게도 아들이 있구나? 생각하고 나도 행복하게 살고 있다. 걱정하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라!” 잘못해도 나의 아들인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택한 그 백성을 영원히 사랑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실수하고, 죄를 범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성경 8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여러분 유명한 내용을 담고 있는 구절입니다.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애칭입니다. 품에서 놓는다는 것은 그것을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품에서 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너희들이 아무리 악하게 살아도 나는 너희를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나의 자녀이고 나는 너희의 영적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찌 너희를 아드마,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아드마,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 도성이 있던 그 지역의 두 개의 도성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고 하나님 앞에 범죄를 해서 징계를 받아서 사라질 때 아드마와 스보임도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결코 아드마처럼 스보임처럼 그렇게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라고 표현합니다. 다른 번역으로 보면 “너희를 향한 나의 사랑이 불붙듯 일어난다.”라는 뜻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이스라엘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죄를 범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다시 끌어안고 다시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다.”라고 어느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인데 사랑하는 이스라엘의 범죄함을 징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누군가가 죄 값을 치러야 하였고, 이 땅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대신에 십자가를 달리셔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누군가가 죄 값을 치러야 하는데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 그분이 우리 되신 십자가를 지셔서 공의를 만족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공의와 사랑의 입맞춤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려운 시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큰 확신이 있다면, 하나님이 오늘도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노만 빈센트 필 이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미국의 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분의 얼굴을 알아 본 한 사람이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말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 좀 도와주세요. 제가 아내와 이혼을 했습니다. 가정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사업은 파산했습니다. 저는 이제 비행기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려고 공항에 왔습니다. 오늘 목사님을 만나서 너무 좋은데 저에게 한 마디만 말씀해 주세요. 뭐라도 말씀해 주세요.” 목사님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이 나지 않아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번쩍 영감을 주시는 것입니다. “젊은이 하나님은 자네를 사랑하신다네. 이것이 내가 줄 수 있는 말이야! 하나님은 변함없이 자네를 사랑하셔. 자네 가정이 깨어졌더라도, 아내와 이혼했을지라도, 파산을 당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자네를 사랑한다네, 모든 사람들이 자네를 향해서 돌팔매질을 하고 손가락질을 해도 하나님은 자네를 사랑한다네.” 그 말 한마디에 그 젊은이가 기뻐서 눈물을 흘리며 비행기를 타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위대한 고백보다 더 위대한 고백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독생자의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는데 포기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이 있기 때문에 절대로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이 사랑을 꼭 붙드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승리의 확신 속에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믿었던 줄이 하나씩 끊어지는 것입니다. 연세가 드실수록 이제 옛날에 가졌던 권력도 다 무상한 세월에 묻혀 버리는 것입니다. 명예의 줄도 다 끊어져 버립니다. 국회의원, 장관하시는 분들이 어디가면 “장관님이시군요? 국회의원님이시군요?” 라고 인사를 합니다. 그러나 10년만 지나면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허무하다고 합니다. 자식도 품안에 자식이지 출가해서 결혼시켜 놓으면 일 년에 한번 얼굴 볼까 말까 합니다. 자녀를 더 이상의 의지할 수 없습니다. 자녀의 줄도 끊어집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래도 젊을 때는 건강이 좋았는데 요즘에는 건강도 좋지 않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쑤시고 아프고 결리고 보통이 아닙니다. 돈을 한창 벌 때는 돈을 좀 쓰는 것도 아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단돈 천원이 아쉽습니다. 재물의 줄도 끊어져 버렸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우리에게 아직도 남아있는 하나의 줄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줄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사랑의 줄을 붙들 수 있다면 우리는 낙심하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랑을 의지해서 오늘도 소망과 용기를 가지고 일어서는 우리 모두가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