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주란 말인가?/눅6:27~…
본문
설교: 예수를 구주로 믿는 성도는 한 차원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부러 다르게 살려고 노력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이 다르고 인생관이 다르기 때문에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는 영생을 믿고 살고 천국을 믿고 살기에 삶의 자세나 방향, 목적이 믿지 않는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삶의 자세나 방법 똑같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점검해 봐야 할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를 믿는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뭐가 달라야 할까요? 여러 가지가 달라야 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관계를 맺는 자세가 달라야 합니다. 예수 믿기 이전과 예수를 믿은 이후가 똑 같아서는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산상수훈을 자세히 보면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한 차원 높은 삶의 자세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처럼 원수를 사랑하며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십니다. 차원이 다른 진리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 을 보세요. 38절을 다같이 보세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여기서 “주라” 하고 시작되는데 과연 무엇을 주라는 것일까요? 앞뒤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단순히 어려운 사람 구제하라는 것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주라는 것일까요?
1. 축복을 하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축복을 하라는 것일까요? 27절~28절을 보세요. “27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를 어떻게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를 어떻게 선대할 수 있나요? 저주하는데, 모욕하는데 어떻게 그를 축복하고 어떻게 그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을까요? 제정신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주님 사랑으로만이 가능합니다. 왜 그들이 우리를 향해 저주하고 우리를 향해 모욕하는 것일까요? 이해가 부족하고 세상적 가치관만을 가지고 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은 대적하지 말고 오히려 축복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렵고 힘들지만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십니다. 이런 일에 대표적인 인물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 하고 자기를 모욕하고 괴롭히는 사울 왕을 한 번도 대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토록 오랜 세월 자기를 괴롭히고 어렵게 해도 끝까지 견디어 냅니다. 결국 하나님이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십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 해도 욕하고 대적하지 마세요. 아무리 나를 미워하고 나를 저주할지라도 맞대항하여 싸우지 마세요, 하나님은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십니다.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하십니다.
마5:11~12절을 보세요.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할렐루야 ! 하늘의 상이 크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롬12: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어떻게, 어디서 이런 능력이 나오는 것일까요? 내 속에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내 속에 거하여 내 생각과 가치관을 바꾸어 주시면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거룩한 능력과 은혜를 힘입게 됩니다. 그래야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는 권능을 얻습니다. 힘을 얻고 능력을 얻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처럼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됩니다.
주님 제자들을 보세요.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는 다들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그들 속에 임하신후에는 그들은 전혀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4:40~42절을 보세요. “40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매를 맞았는데도 오히려 기뻐하고 떠났고 날마다 성전에서든지 집에서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욕을 먹었습니까? 기뻐하세요. 그리고 축복하세요. 그것 때문에 핍박을 받습니까? 그래도 축복하세요. 그러면 축복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그것이 세상의 어떤 선물보다 귀한 것입니다.
2. 대접을 하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대접해야 할까요? 눅6:29~31절을 보세요. 29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30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31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내게 손해를 입히고 내 것을 빼앗아 가는 자를 행해 똑 같은 방법으로 대적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대접해 주라고 명하십니다. 사람들은 욕먹는 것도 참고 무시하는 것도 참고 다 참는데 돈을 빼앗기면 그것은 난리 납니다. 절대로 빼앗기지 않으려 합니다. 악착같이 붙잡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엔가 다 내 것이 아닙니다. 다 날라 갑니다. 그냥 움켜잡으려고 애를 쓰고 살아보지만 세월이 흐르면 다 남의 것이 되고 맙니다. 제가 예언을 하나 하면 여러분이 수유한 집이 여러분의 이름으로 등기되어 있으나 50년 후에는 다른 사람이름으로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행20:35 하반 절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하셨듯이 정말 베풀고 나누는 것이 복임을 믿으셔야 합니다. 세상은 받는 것이 복이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는 것이 복이라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 여기저기서 베푸는 자가 복을 받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드렸을 때 오천 명이 넘게 배부름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시돈 땅 사르밧 과부 여인이 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으로 먼저 엘리야를 섬겼더니 기근 내내 일용할 양식을 채워주셨습니다. 아브라함도 천사들을 잘 대접했다가 아들을 약속으로 받습니다. 히브리서에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저는 노무현 대통령이 하시는 일이 맘에 안 드는 일이 많으나 하나는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생각이 다른 분도 있을 것이나 그런 분은 아멘을 안 해도 됩니다. 저 북한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지도자가 잘못이지 그들이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제 굶주려 죽어갑니다. 굶어 죽는 사람을 살려놓고 이야기해야지 아예 죽게 두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역사와 후손들 앞에 할 말이 없습니다.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이 그때 당신들은 뭐 했소 하면 뭐라 할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이만큼 살게 하신 것은 베푸는 나라가 되라고 하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 우리나라도 수없이 많은 나라의 도움을 받아 일어섰습니다. 이제 우리도 돕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개인도 그렇고 사업체도 그렇습니다.
3. 칭찬과 격려를 하라는 것입니다. 37절을 보세요. “37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그렇습니다. “비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누구를 비판하지 말라는 것인가요? 누구를 정죄하지 말라는 것인가? 우리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그들을 비판, 정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보면 오히려 그들의 장점을 칭찬하고 잘하도록 격려 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심오한 욕구는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까지도 그렇다고 합니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하고 식물도 잘 자라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칭찬과 격려를 잘하는 사람은 놀라운 힘을 가지게 되고 그 사람 주변에는 늘 사람이 모여 들게 됩니다. 결국 그 사람은 사람을 움직이고 기적을 만드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비판과 정죄는 적을 만들고 힘이 빠지게 하고 사람을 떠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그런 사람은 차라리 입이 무거우면 중간이라도 가는데 입이 가벼워서 화를 자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칭찬해야 할까요? 여기에 훈련이 필요하고 기술이 필요합니다. 저와 같은 세대, 그 이전 세대에 출생한 세대들은 힘들고 고된 세상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입에 욕을 달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욕이 아니라 일상 용어였습니다. “00끼” “숫자 18,” 그러다 보니 어릴 때 학교 선생님이 욕을 못하게 하기 위해 욕표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내입에서 욕을 하면 한 장식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주간동안 지나고 “욕표”가 제일 적은 사람은 벌을 받았습니다. 요즘은 참 많이 달라졌으나 그래도 심각합니다. 요즘 영화를 보세요. 욕이 없으면 영화가 안 됩니다. 인터넷 댓글문화를 보세요. 욕으로 시작하여 욕으로 끝이 납니다. 이제 변화되어야 합니다. 칭찬의 말, 격려의 말이 훈련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합시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잘했습니다. 대단합니다. 멋있습니다. 훌륭합니다. 최고입니다. 환상적입니다. 당신과 함께 하니 기쁩니다. 와! 좋은 생각입니다. 탁월합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정말 맛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을 칭찬해야 할까요? 잘한 일을 찾아내어 칭찬해야 합니다. 세계적인 코미디언인 마크 튀윈은 “나는 한번 칭찬을 받으면 두 달간은 잘 지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친절한 행동에 감사를 표해야 합니다. 작은 일에도 반드시 고맙다는 표현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쁨이 있고 다음에 또 도와주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은 부족해도 미래를 보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자식을 기르다 보면 속상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야단치고 책망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자식들이 변화 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미래를 내다보면서 과거의 나를 돌아보면서 칭찬하고 격려하면 그것이 큰 힘이 되고 격려가 됩니다. 남들에게는 잘 되는데 이상하게 내 자식에게는 잘 안됩니다. 제가 고백하는 것입니다. 온유하게 정중하게 부탁해야 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부탁하는 것이지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바람과 필요를 요구하지 말고 정중하게 부탁해야 합니다. “밥 줘!” 가 아니고 “배가 고프니 밤 좀 주시겠습니까?” “공부해!” 가 아니고 “공부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정중하게 부탁하는 것은 상대방의 인격과 가치와 능력을 인정하는 것이며 선택권을 상대방에게 주는 것이다. 자기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다고 짜증을 내거나 회유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억지로라도 수락하도록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4. 용서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37절 하반 절을 보세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나를 미워하는 자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에게 욕을 얻어먹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적인 가치 기준으로 보면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 이해가 안 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를 욕하고 거스려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욕을 얻어먹게 될까요? 왜 세상 사람이 우리를 거스려 악한 말을 할까요? 그것은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일조 하는 것이 그들의 시각으로 보면 미친 짓입니다. 우리가 새벽 기도하는 것을 보면 미친 짓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방언하고 울고불고 하면 그들이 보기에는 완전 맛이 간 것입니다. 그러니 욕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그들이 욕을 한다고 맞대항하여 싸우면 잘하는 짓일까요? 그들이 이해를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해’와 ‘양보’그리고 ‘용서’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어른이 팔씨름 하면 누가 이깁니까? 힘으로는 어른이 이기지만 실제로는 어린아이가 이깁니다. 왜요? 어른이 어린아이를 이해하고 져주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어른이 힘으로 이겨 놓고 내가 이겼다 소리치면 누가 바봅니까? 그러나 어른이 져주면 어린아이는 자기가 진짜 힘이 있어 이긴 줄 알고 좋아서 펄펄뜁니다. 여기에 뭐가 있는 것입니까? 이해와 양보입니다. 그러기에 한 차원 높은 삶을 살아야 할 우리 기독교인은 성숙한 자로서의 이해, 양보, 그리고 용서를 할 줄 아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영적 성숙의 기준으로 보면 어른이 있고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세월로 비례되는 것이 아닙니다. 연조와 상관없이 주님을 닮은 믿음으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일 년 뿐이 안 믿었어도 성숙한 어른이 있고 몇 십 년 믿었어도 미숙한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성숙한 성도가 이해하고 양보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감동을 주고 그런 사람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장면을 보세요.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할렐루야! 순교자 스데반도 그랬습니다. 행7:59~60 59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모습이 그분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그들처럼 이해하고 양보하고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중에 최고의 사랑은 용서입니다. 그 사랑이 이미 우리에게 임했고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이 바로 이해요, 양보요, 용서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셨다면, 그래서 우리가 용서 받지 못하고 즉결 심판을 받았다면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렇게 축복하고/ 대접해 주고 /칭찬과 격려를 해주고 /용서해 주면 결과는 어떤 것일까요? 그렇게 베풀어 주면 오늘 본문에 보니 하나님이 보상해 주신다고 합니다. 어떻게요? 여러분, 옛날에 쌀가게에 가면 쌀장사가 쌀을 어떻게 되어줍니까? 요즘은 kg로 사서 먹지만 옛날은 말과 되로 팔아다 먹었습니다. 쌀 가계 주인이 말 위를 싹 깎아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때 그렇게 주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4단계 채움의 복입니다. 1) ‘후히 되어’입니다. 2) ‘누르고’입니다. 3) ‘흔들어’입니다. 4) ‘넘치도록’입니다. 후히 되어 주십니다. 인색하게 주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꾹꾹 눌러서 조금이라도 더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곡식을 담는 말을 ‘탁’쳐서 흔들면 쑥 들어갑니다. 곡식과 곡식 사이에 빈틈이 하나도 없도록 하나님께서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안겨 주리라’입니다. 손을 쫙 벌리고 겨우 안아야 받을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내가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겨 주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는 것이고 심은 만큼 거두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베풀어 주는 생활이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 주었는가에 따라서 하나님께 다시 돌려받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생활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보시고 다시 평가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