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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요구에 답하는 성도 (막 9: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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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요구에 답하는 성도 (막 9:14~29)

1. 해결책을 찾는 사람들

어느 기독교 상담 싸이트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상담 내용 가운데 “결혼 3년째인데 아기가 생기지 않아요”하면서 고민을 의뢰해 온 새댁이 있었고, “남편과의 대화가 없어서 외롭습니다”라고 호소하는 중년의 부인, “남편의 무기력한 모습이 보기 힘들어요”하는 여자분, 아버지에 대한 미움, 시동생의 이혼 문제, “재혼을 앞두고 있는데 또 실패할까봐 두려워요”, 자신을 제대로 자라게도 가르치지도 않은 부모에 대한 원망, 신앙이 다른 언니와의 관계에서 갈등하는 동생 등 가정사에 대한 다양한 고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생활과 교인들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들도 있었고, 신자로서 직장 생활하기가 무척이나 힘들다는 고민을 올린 분도 있었습니다. “남편이 경마장에서 돈을 벌자고 합니다. 신자가 이런 방법으로 돈을 벌어도 됩니까?”라고 상담하신 분, 그리고 비만으로 인해 고민하는 사람 등 다양한 고민과 아픔과 문제들을 상담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담 내용을 보면, 그 문제들이 그렇게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고민과 문제들입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여도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문제와 아픔과 고민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문제를 해결받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상담 싸이트라든지,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자신의 문제를 맡기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저와 여러분이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중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기웃거리고, 성도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자신들의 문제의 실마리를 찾거나 해결을 받고 싶어 합니다. 어쩌면 오늘 이 자리에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기를 바라고 앉아 있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그리고 교회와 신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해결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이 사회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우리 주변의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찾아오는 교회이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교회입니까?

2.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를 가진 사람들

오늘 본문은 ‘변화산’ 아래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헤르몬 산’일 것으로 추정되는 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시는 가운데 그 얼굴과 옷 등이 신비한 모습으로 변화되었고, 구약 시대의 인물인 모세와 엘리아가 나타나 함께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과 동행했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너무나도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변화가 놀라웠고, 아주 오래 전의 사람들인 모세와 엘리야를 만난 것도 놀라운 일이었고, 자기들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은 그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산 아래 남아 있던 아홉 명의 사도들과 나머지 제자들, 그리고 주님을 따라 다니던 많은 군중이 있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아홉 명의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그들은 서기관들과 열띤 토론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서로 말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군중들은 그들이 옥신각신 싸우고 있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일행이 가까이 다가오자, 제자들이나 서기관들과 무리들은 예수님을 바라보았고, 그때 무리 가운데서 튀어나와 예수님께로 오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로 온 남자였습니다. 그가 가진 문제는 한 참 자라고 있는 아들이 심각한 질병에 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이 남자가 예수님께 한 말을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마 17:14)”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오늘 본문은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그가 가진 문제는 아들의 질병인데, 겉 모습은 간질병이지만, 그는 아들이 간질병 이상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간질병은 뇌 속에 비정상적인 조직이나 뇌 기능의 이상 때문에 일어나는 병인데, 그 정확한 원인이나 치료법은 아직 없다고 합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간질병은 난치병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의 간질병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귀신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아들의 인격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귀신이 마음대로 그를 움직이면서 온갖 짓을 다 하고 있었습니다. 자주 불에도 넘어지게 하고 물에도 넘어지게 하여, 목숨을 잃을 뻔한 일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게다가 귀신은 아들을 아예 말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남자는 “벙어리되고 귀먹은 귀신”이 들렸다고 했습니다(25).

자신의 아픔이나 형편을 말로서 표현도 못하고 귀신에 의해 온갖 위험한 일을 다 당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귀신만 아니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텐데, 귀신 때문에 간질병을 앓고, 귀신 때문에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귀신에게 농락당하는 본인도 괴로웠겠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이러한 일을 겪는 것은 지켜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그 아버지의 고생 또한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늘 곁에서 지켜보아야 하고, 어디를 가든지 항상 동행해야 하고, 밤에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깨어서 지켜보아야 하는 등, 늘 초긴장 상태로 지금까지 지내 온 아버지였습니다. 고칠 길도 없고, 어떻게 해결할 뾰쪽한 수도 없는 가운데, 아이는 점점 자라가고 자신은 늙어 가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자신이 곁에서 늘 함께 있으니까 괜찮다지만, 자기가 없으면, 즉 이 아버지가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이 남자의 고민과 아픔은 커져갔습니다.

설교 시작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주변에는 이 남자처럼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현대인들은 학자들이나 그 어떤 전문가도 알지 못하고, 심지어 본인 스스로도 모르는 문제들을 가지고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3. 무기력한 교회와 성도들

이 남자에게 희망이 생겼습니다. 예수라는 분이 모든 병과 귀신들린 것을 능히 고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그의 제자들도 여러 동네를 다니면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쳤다는 소문도 들렸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이 계신다는 곳으로 온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이 계시지는 않았지만, 이미 귀신을 쫓아 본 경험이 있는 제자들이 있었기에 그는 안심하고 제자들에게 아들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주님으로부터 받았고, 얼마 전에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들 역시도 경험을 살려서 얼마든지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악한 귀신아 물러가라” 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액센트를 주어서 “예쓔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물러가라”면서 안간힘을 써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안됐습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제자들에 대해서 고자질한 것이 무엇입니까?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 이 말은 ‘그들은 그럴 힘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기력했습니다’, ‘그들은 빈껍데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이 장면에서 떠오르는 구약의 사건이 있습니까? 이 장면에서 우리는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더불어 ‘어느 신이 참 신인지 겨루어 보자’면서 종교대결을 벌였던 바알의 선지자들을 떠 올리게 됩니다. 그들은 바알에게 자신의 제물에 불을 내려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응답이 없자 단 주위를 미친 듯이 뛰놀았습니다. 그래도 답이 없자,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찌르고 베어 가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응답이 없었고, 그들은 미친 사람처럼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약속한 하루가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의 신 바알은 응답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신은 반응이 없었고, 그들은 수많은 무리들과 엘리야가 지켜보는 가운데 창피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제자들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이로부터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지만, 그 모든 것은 헛수고일 뿐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창피가 어디 있습니까? 아이와 그 아이를 사로잡고 있는 귀신, 아이의 아버지, 수많은 군중들, 그리고 호시탐탐 예수와 예수의 모든 것을 깔아뭉갤 기회만 엿보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도와 준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서기관들이 제자들에게 뭐라고 했겠습니까? “당신들 진짜 예수의 제자 맞아?”, “당신들이 예수의 제자라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예수가 사기군이라는 것이 분명하구만! 당신들과 예수가 했다는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은 전부 거짓말이고 사기 아냐?”

기독교가 단순히 하나의 종교일 뿐이라면, 저는 예수를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회자가 다른 직업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저는 목사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시기 때문에, 어저께나 오늘이나 영원불변하시기 때문에, 성경의 기록이 오늘도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저는 제가 예수쟁이 된 것과 목사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오늘 교회에서, 오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살아계신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교회와 성도들이 입증하여 보이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도리어 교회와 성도의 현실은 오늘 본문의 제자들처럼 무기력하기가 짝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처럼 오늘 교회와 성도들 역시 ‘당신들 예수쟁이 맞어? 무늬만 예수쟁이 아냐?’, ‘당신들이 그렇게 믿는다고 하는 그 예수 역시 다른 신들과 똑 같은 그렇고 그런 신 아냐? 당신들의 신앙 역시 기독교라는 하나의 종교에 불과한 것뿐이지 않느냐?’,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나 아무런 종교를 가지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지 않느냐?’하는 비난을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독교는 말로만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20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 외쳤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4절에서도 “내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한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교회는 변론의 장소가 아닙니다. 역사와 능력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능력을 잃은 교회에는 말만 무성합니다. 말이 많은 교회는 제자들처럼 세상의 우스갯감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런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19절에서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성경에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야단치셨습니다. ‘아직도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 ‘나의 제자라는 너희들이 이 세대 사람들,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구나!’라는 뜻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나 똑 같은 신자들, 맛 잃은 소금, 빛을 내지 못하는 등잔, 불이 켜지지 않는 형광등 램프 …. 이것은 오늘 본문의 제자들의 모습일 뿐 아니라, 지금 우리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정말 다양한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교회와 성도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없는지 그 여부를 알기 위하여 교회와 성도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문제를 풀어 주어야 합니다.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그들의 눈길을 끌만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여러분을 지켜보면서 뭔가 다르다는 것, 그래서 자신들의 문제를 풀 수 있는 희미하거나 작은 실마리라도 여러분에게서 발견한다면, 그들은 당장 여러분에게 자신들의 문제를 풀어 달라고 요청해 올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은 무기력한 성도들을 가만 두지 않습니다.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한 것이 세상입니다. 그들은 약한 제자들을 얼마나 흔들어 댔습니까? 제자들을 향한 서기관들의 비웃음, 주위를 둘러 선 사람들의 손가락질 … .

예수님 역시 능력 없이 사는 성도들을 가만 두지 않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나름대로 변명을 했을 것입니다. “저희가 예수님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 저희가 예수님과 같을 수 있습니까? 저희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는데 안 되는 걸 어떻게 합니까?”, “마음은 간절하지만 육신이 약해서 ….”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분노와 책망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을 책망하셨던 예수님이 지금 지켜보고 있는 것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이 사람들의 문제를 풀어주는지 못하는지, 아니면 제자들처럼 무기력한지 어떤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세상의 요구에 응답하고, 예수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제자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4. 우리에게 필요한 것

1) 오직 믿음

사람들로부터의 조롱과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은 그 이유를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는 말씀으로 규정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믿음은 지식이 아닙니다. 믿음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루터교 목사인 마틴 마티(Martin Marty)는 “내 인생에서 주변의 절친한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과 직접적인 만남을 가진 경우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체로서 만난 경험이 그의 삶에 너무나 드물었다는 말이며, 나아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사람 역시 그만큼 드물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삶이 이 세상과 이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전부라고 여기는 세상에서, 성도는 세상 너머 천국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을 삶의 현장에서 체험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어떤 것으로 칭찬을 받으시고 싶습니까? 물질으로는 예수님의 칭찬을 들을 수 없습니다. 지혜만으로도 주님의 칭찬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는 주님을 놀라게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기쁘게 하고, 그리고 그 믿음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에게 바로 이 믿음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2) 오직 기도

그렇다면 이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우린 왜 못 고칩니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성도가 능력 있는 믿음을 가지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능력 있는 삶을 사는 지름길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병든 아이를 고치신 것은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변화산에서 기도하신 후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신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마틴 루터는 하루를 시작할 때 “아침에 두 시간을 기도하지 않으면 마귀가 나를 이긴다”고 하면서 기도 생활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한 “바쁠 때일수록 더 많이 기도한다. 그것은 바쁠수록 실수가 많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바쁠수록, 피곤할수록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믿음이 충만하고,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자신의 모든 문제들이 풀려지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 여러 가지 문제로 고통 하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보고서 주님께로 와서 그것들을 해결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5. 기도를 통해 자란 믿음으로 세상의 요구에 답하는 성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온 한 남자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지 못하여, 실패하고 비난받고 책망 받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이 하나 고치지 못해서 쩔쩔매고,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제자들의 무능함, 이런 모습을 보시고 한편으로는 진노하시면서 가슴 아파하시는 우리 주님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이 땅에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수많은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역시 문제를 안고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 있습니다. 지금 그들의 모습은 어떨 것 같습니까? 그 가운데 믿음으로 능력을 경험하고, 그것으로 이웃에게 살아 계신 주님을 증거하고, 그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교회와 성도들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문제를 가지고 나온 사람들을 만족케 하는 교회, 사람들의 문제를 풀어 주는 성도!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와 성도의 모습이자, 세상이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있고 역사하는 믿음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와 교회를 통하여 일어나기를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믿음이 충만하고, 믿음의 능력을 가지고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며,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되시고, 우리 교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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