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부흥을 이루는 성도 (느 8:1-12)
본문
시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복을 받는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왜 인생에 복을 받는데,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함이 필요할까요?
인생의 모든 축복이,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시 1 : 3절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할렐루야!!!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인생에 소망하는 모든 축복이, 다 하나님 말씀으로 인하여 맺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에, 우리 성도들은 참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입니까? 이런 귀한 말씀을,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접하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얼마나 자주 듣습니까? 주일마다 듣습니다.
좀 더 열심을 내면 수요일이나, 금요일도 들을 수 있지요. 여기서 조금만 더 열심을 내면, 또 새벽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서만 아니지요? 집에서 T.V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된 하나님의 말씀을, 이처럼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참 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 성도들만큼 또 불쌍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됩니다. 왜입니까? 이렇게 귀한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말씀을 떠나 살면서, 인생에 복을 못 받는 것을 보면, 안타까움을 넘어서, 참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속담이 있지요? “호박이 넝쿨 채로 굴러 들어왔다.” 그런데 또 어떤 속담이 있습니까? “굴러 들어온 복을 제 발로 찼다.” 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사는 성도들은, 축복을 넝쿨 채로 그 인생에 굴러 들어오게 만드는 지혜로운 성도들이고, 하나님 말씀을 놓치고 스스로 떠나 사는 성도들은, 인생에 굴러 들어온 복을 제 발로 차 버리는, 어리석은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들은 어느 쪽에 해당되는 성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한번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며, 그 말씀을 붙잡으므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축복을 회복하고, 그들의 심령에 새로운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했던 귀한 역사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영적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시점을 보면, 꼭 필요한 때에 이러한 역사가 일어났던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이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오랜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와 보니까, 어떤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까? 오랜 세월동안 방치되어 있던 예루살렘 성벽이, 다 파괴되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뒤, 일차적으로 성벽을 재건하는데 온 힘을 다 쏟았습니다. 뭐, 그간에 여러 대적들의 방해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무사히 성벽 재건의 역사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이 영적 부흥의 역사가 언제 일어났습니까?
바로 이 성벽 재건이 이루어진, 직후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기뻐할만한 상황 이지요. 모두가 즐거워할 만한 상황입니다. 이제는 새롭게 건설한 예루살렘 도성에서, 그들이 안착하는 일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이 성벽 재건의 역사를 이룬 후에, 하나님은 학사 에스라를 통해 여호와의 율법을, 온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낭독하게 만들므로, 그들의 심령에 새 시대에 걸 맞는, 새로운 은혜를 허락해 주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영적 부흥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이루어진 다음에, 이러한 영적 부흥의 역사를 이루게 하셨을까? 아무리 새로운 도성이 건설되어져도, 그들의 심령이 하나님께로 돌아서지 아니하면, 또 다시 그들은 파괴와 멸망을 경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 오랜 포로생활을 했던 까닭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 때문 아니었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들 가운데 나타내 주셨지만, 그들은 듣기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치를 아니하고, 저마다 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것이지요. 그런 까닭에, 그들은 바벨론에 의해 침공을 당하였고, 결국에는 전쟁에서 패하여 고향을 등진 채, 머나 먼 이방 땅에서 오랜 포로생활을 경험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 127 : 1절에 말씀하지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이루어진 직후에, 학사 에스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불러 놓고, 말씀 앞에 다시 서게 하심으로, 그들의 심령에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을, 다짐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부흥의 역사는, 바로 그들의 심령의 부흥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루살렘 본성 수문 앞 광장에서 일어났던 이런 심령의 부흥, 이런 말씀의 부흥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모두가 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들은, 느헤미야가 이끌고 온 1차 포로 귀환의 백성들입니다. 아직도 많은 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그들이 먼저 하나님께 선택받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그들이 잘나서였겠습니까? 다른 이들보다 신앙이 좋아서였겠습니까? 그래서 먼저 귀환하게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신앙적인 면에서, 다른 이들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행방된 백성으로 선택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믿습니까?
오늘 여러분을 보세요. 여러분 가운데 신앙이 뛰어난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다른 사람보다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누구 입니까? 그런 분이 계시다면, 이 자리에서 한번 일어서 주시길 바랍니다. 보세요. 아무도 없잖아요. 저를 포함해, 누구도 다른 사람들보다 신앙이 낫다고 자부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이처럼 따로 구별하여 주셔서,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예수를 믿게 만드시고, 오늘까지 은혜와 축복 가운데 지내게 하시며, 또 오늘도 이렇게 성전을 찾아 예배하게 만드셨는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다른 이유가 없지요? 나를 향하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때문인 줄 믿습니다.
또 우리 성천교회가, 한 때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시련과 환난 가운데서도 흩어지지 아니하고, 이렇게 성천교회 성도로 남아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 또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천교회의 상황을 가만히 보세요. 저는 우리 교회의 상황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온 힘을 다하여,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성천교회도 한 때 무너져 내린 적이 있습니다.
이유에 어찌 되어졌건, 우리 교회가 무너져 내렸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교회가 아주 무너져 내리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이 택하여 세워 주신 남은 성도들을 통해, 무너진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이스라엘 가운데 새롭게 세워진, 총독 느헤미야의 지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였듯이, 오늘 우리 성천교회에도 새롭게 세워주신 담임 목사님을 통해, 우리 성도들이 지도함을 받고, 무너진 교회를 다시금 일으켜 세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생각을 해 보세요. 이제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오늘 본문에서와 같은, 성도들의 심령의 부흥, 그들 가운데 새롭게 시작된 말씀의 부흥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부흥을, 이제는 우리가, 이루어 나가야 된다는 것이지요.
예루살렘 성벽이 완벽하게 재건되어졌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벽의 완성이, 곧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완성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성벽은 다시금 재건되어졌지만, 그들의 심령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를 못하게 되면, 그 성벽은 한낱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시 127 : 1절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 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아무리 성벽을 완벽하게 재건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신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그들 가운데 머물지를 않는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벽이 새롭게 재건되어진 우리 교회가, 다시금 무너지지 아니하고, 계속적인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 속에, 은혜로 성장해 가며, 부흥해 가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성도들의 신앙이 다시금 하나님 말씀으로 새롭게 되는, 심령의 부흥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언제 우리가 또 다시 교회가 무너지는 아픔을 겪게 될는지 모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이러한 아픔을 겪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심령의 부흥을 위해, 우리는 어떤 신앙의 자세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영적 부흥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신앙적 자세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야 할 줄로 압니다.
첫째는, 말씀을 듣고자 하는 열심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이예요.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우리 성도들의 마음속에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1절 말씀을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 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라고 했습니다. 지금 누가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 책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까? 그들의 지도자 느헤미야였습니까? 아니면 학사 에스라였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학사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 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들의 수고로 아름답게 성벽을 복구했습니다. 그 성벽을 바라볼 때 얼마나 마음에 기뻤겠습니까? 우리 생각 같으면, 에스라나 느헤미야에게 가서, “이제 성벽공사 다 마쳤으니까, 우리 잔치 한번 합시다.” 이렇게 요청 했을 것 같은데, 그래서 마음껏 노래하고 먹고 마시고, 춤 추자고 제안했을 것 같은데, 그런데 그렇게 하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벽 재건 후에, 그들이 최우선으로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심령의 부흥, 교회의 영적 부흥의 역사는, 바로 이런 성도들의 말씀의 사모함에서부터 시작되는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런 말씀의 사모함이, 오늘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도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 119 : 131절에 보면,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모하였는지, 입을 헐떡일 정도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심령이 되어질 때, 우리 가운데 부흥의 역사는 시작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의 심령은 어떻습니까? 이처럼 말씀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말씀을 듣고자 하는 열심이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까? 그들은 수문 앞 광장에, 일제히 모였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신앙의 자세로 모여 예배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듣기를 사모하여, 열심을 가지고 주일마다 모여서 예배하되, 모든 성도들이 빠짐없이 일제히 모여 예배하는 열심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심령의 부흥이나, 교회의 부흥은 한낱 구호에 그치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했을 때, 가장 먼저 행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주일 예배에 힘쓰는 것입니다. 아멘!!!
주일 예배는 우리 신앙의 근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일 예배를 등한시 하고, 다른 데서, 다른 시간에 말씀을 듣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 아닌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천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열심을 가지시되, 온전한 주일 성수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시고, 다른 시간들을 더 투자 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듣고 배우시는, 열심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없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홍수 속에 살아가면서도, 말씀에 대한 영양이 결핍되어 있는 성도들이 오늘날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암 8 : 11절 말씀을 보세요.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라고 했습니다.
풍요 속에 빈곤으로 살아가는 이 시대의 성도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더욱 더 모이기를 힘쓰며,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말씀 배우기를 소원하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세요.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배 시간이 10분만 길어져도, 10분이 뭡니까? 5분만 길어져도 시계를 보고, 좌불안석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무려 6시간 동안이나 서서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긴 시간동안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들은 어떻게 했다고 했습니까?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다고 했습니다. 집중해서 말씀을 들었다는 것이예요. 이것이 바로 신령과 진정의 예배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말씀에 대한 열심을 가지시고, 매 예배 때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모든 말씀에 대한 사모함으로, 여러분의 심령이 부흥케 되어지는 역사가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가 영적 부흥을 이루기 위해서는, 또 어떤 신앙적 자세가 필요합니까?
두 번째로는, 우리가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 말씀을 보세요.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학사 에스라가 성경을 읽으려고 강단에 올라가 책을 폈더니, 모든 백성이 다 일어섰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일어섰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권위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국회에서 대통령이 연설하러 들어올 때, 여야 국회위원이 다 일어섭니다.
그것이 예의입니다. 그것이 그 나라 대통령에 대한 예의입니다.
우리가 방에 있을 때 연장자가 들어오면, 다른 사람들이 다 일어섭니다.
이것이 연장자에 대한 예의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이와 같은 경외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드릴 때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일어서야 합니까?
실제로 그렇게 할 수는 없지요. 어떻게 예배 때마다 서서 말씀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배할 때 마다, 말씀을 들을 때 마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을 향해 항상 일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향해 일어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오늘 6절 말씀을 보세요.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 하였느니라.” 그들이 에스라가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할 때 어떻게 했다고 했습니까? “아멘, 아멘” 응답했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영으로 하나님을 향해 일어서는 것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아멘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말씀에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아멘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 부흥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배 시간에 들려주시는 하나님 말씀에, 아멘! 아멘! 외치는 모습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속으로 아멘 하는데요. 안됩니다. 실제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라 앞에서 말씀을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만히 앉아서 들은 것 아닙니다. 모두가 일어서서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한 반응을 숨기지 아니했습니다. 두 손을 들고서 아멘, 아멘, 외쳤다고 했습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훙 강사 목사님들은, 참 여러 교회를 많이 다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집회를 첫날만 인도해 보면, 그 교회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알 수가 있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설교 말씀을 듣는 태도를 보면, 그 교회의 영성을 알 수가 있다는 겁니다. 목사가 설교 할 때, 아멘으로 화답하는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요, 영성 있는 교회요, 순종하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어도 아멘을 안 하는 교회가 있지요? 그런 교회는 대게가 영적으로 침체된 교회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숨이 죽어 있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모르는 사람이 오늘 이 예배에 오셨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우리 교회의 무엇을 먼저 보겠습니까? 영적 분위기를 먼저 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배를 드리는데 조용합니다. 맹숭맹숭 합니다.
그러면 느낌이 어떻겠습니까? “야, 이 교회 분위기 참 조용하고, 부드럽구나.” 이렇게 생각하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러나 대게는, “야, 이 교회는 영적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구나.” 이런 느낌을 받으면서 그 다음에는 안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설교를 할 때 아멘하지 않으면, 설교자가 위축이 됩니다. 일부러 아멘을 유도할 필요는 없겠지만, 여러분의 동의를 구하고자 믿습니까? 물어보는데도 아무 소리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설교자가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이 분들이 내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나?
내가 지금 설교를 잘못하고 있나?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설교가 자신이 없어집니다. 목사가 설교에 자신이 없어지면, 여러분에게 득 될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목사도 설교를 죽 쓰게 되고, 설교를 듣는 성도들도 영적 영양이 결핍되고 되는, 악순환이 계속되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천 교회 성도들은, 아멘 잘 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설교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입술로 아멘 할 때, 그것이 나의 신앙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또, 내가 하나님 말씀에 아멘 할 때, 그 말씀에 대해 순종할 의지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을 다짐하면서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은혜가 되질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말씀이 자신에게 능력이 되어지고, 이 능력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갈 때, 그 인생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멘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여러분 마음 가운데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가 영적 부흥을 이루기 위해서는,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 뒤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을 들었을 때, 다 울었다고 했습니다.
9절 말씀을 보세요.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했습니다.
그러면, 왜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서 울었을까요? 이제까지 하나님 말씀에 순종치 못한 것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었다는 겁니다.
말씀을 듣다보니까, 자신들이 이제까지 너무나도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겁니다. “야, 우리에게 이런 잘못이 있었구나.” 하나님 앞에 범죄 함이 너무나도 많은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제까지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울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은 다짐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무슨 다짐입니까?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순종을 다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순종에 대한 내용은, 느 10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했습니다. 또, 안식일에 물건을 사거나 팔지도 않습니다. 안식일을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또 무엇을 순종했습니까? 자신들의 소득 가운데,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온전히 구별하여 드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해마다 일정 부분을 분담하면서, 성전의 쓸 것을 제공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학사 에스라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그들은,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내질 않고, 이제는 그 말씀대로 온전히 실천하고 순종하기를 힘썼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들의 심령에 은혜를 주시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의 인생에 복을 주시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냥 복을 쏟아 부어주신 줄 믿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삶을 보면,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던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러한 부흥이 어디서 시작된 것입니까?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 곧 그들의 심령의 부흥, 영적 부흥에서 시작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순종이 곧 능력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해 오셨습니다. 교인들은 참 좋아 했습니다. 그 날 목사님은 요 13 : 34절을 가지고 설교하셨는데, 제목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는 말씀이었습니다.
교인들은 은혜를 참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주가 되어 주보를 보니까, 본문이 같습니다. 인쇄가 잘못 되었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목사님은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설교를 하는 겁니다. 교인들은 생각하기를, “아하, 이사 오셔서 너무 피곤하시고, 아직 짐 정리가 안 되셔서 이렇게 하셨나보다.” 하고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셋째 주가 되어도, 넷째 주가 되어도 본문과 내용이 똑같습니다.
교인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러기를 자그마치 석 달을 한 겁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사님도 대단하지만, 또 그 교회 성도들도 대단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석 달씩 똑같은 설교를 듣고 있겠습니까? 이해심이 대단한 성도들입니다.
그러나 이해에도 한계가 있기에, 집사님들이 모여 의논을 했습니다.
의논을 하고, 그 결정 사항을 목사님께 전했습니다.
무슨 결정이겠습니까? 교회를 떠나라는 거지요.
“더 이상 목사님의 설교를 듣지 못하겠으니까, 다른 교회로 가십시오.”
그런데 목사님은 저항도 없이, “교인들이 원하면 떠나야지요. 다음 주 마지막 설교를 하고 떠나겠습니다.” 그리고는 짐을 다 꾸렸습니다.
돌아오는 주일, 교인들은 오늘은 마지막 날이니 혹 다른 설교를 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역시나 마지막 주에도 똑같은 본문, 똑같은 제목의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 주일날, 성도들의 마음에 깨닫게 하셨다는 겁니다.
“목사님이 오죽했으면 떠나는 날까지 저 설교를 하실까, 목사님은 저 똑같은 설교를 석 달 동안 하기가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니까,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니까,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하니까, 저렇게 목사님이 안타까움과 아픈 상처를 가지고, 저렇게 사랑하라는 설교를 계속 하시는구나” 이런 깨달음 속에 그들이 회개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 때부터 그냥 눈물바다가 된 겁니다.
앞에 있는 김 집사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옆에 있는 한 집사님 눈에도, 박 집사님, 이 집사님 눈에도 눈물이 나기 시작 합니다. 그러더니 어느새 교회가 다 눈물바다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배가 끝났습니다.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와서 목사님을 붙들고는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가시면 안 됩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떠나지 않고 남아 계시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다음 주에 또 목사님이, 요 13 : 34절 말씀을 전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이번에는 말 3 : 15절 말씀입니다. “너희 십일조를 드려, 하나님의 창고를 풍성케 하라” 는, 제목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다음주부터 그 교회 성도들이 십일조를 했을까요? 안했을까요?
다 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순종하지 않고, 십일조 안했다간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년 내내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들을 것 아닙니까?
그 다음 주는, 전도하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교인들은 하나같이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은 기도하라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교인들이 다 새벽기도회에 나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그들의 심령에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새로운 기쁨이 넘쳐나고, 주의 모든 말씀들이 송이 꿀 같이 달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예배 시간이 절로 기다려지고, 입만 열면 감사, 찬송입니다.
그 교회에 영적 부흥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영적 부흥이 일어나니까, 그들의 육신적인 일들에도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더라는 겁니다. 경영하는 모든 일들이 잘 됩니다. 그러니 십일조가 자연히 늘어나게 됩니다.
교인들이 열심히 십일조 하니 교회 재정이 넉넉하게 되어졌습니다.
그래서 선교하고 구제하는 일에 넉넉한 교회가 되어졌고,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그들의 영이 성령에 충만하고, 그들의 육신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풍성해지니까, 교인들 간에도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또 어떤 역사가 일어납니까? 주변에 좋은 소문이 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런 좋은 소문 속에 전도하니,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게 되고, 결국에는 초대 교회와 같은 부흥의 역사가, 그 교회에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성천 교회에도 이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시고, 열심으로 예배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말씀을 경외하시고,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영적 부흥의 역사가 여러분 가운데 나타나게 될 때, 여러분 삶에 놀라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나고, 우리 성천 교회에도 큰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깊이 마음에 새기면서, 이러한 영적 부흥을 이루는 성도들과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