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한 백성의 특권과 의무 (롬 2:1~11)
본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는 자들에게 참으시다가 마지막에는 내버려두겠다! 내버려두는 자체가 심판이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봤습니다. 그런데 2장에 와서는 이 죄를 구체적으로 구분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2장에 와서 1절에서 11절까지는 유대인, 즉 하나님의 택함을 제일 먼저 받은 자들에 대한 죄 책망! 이것이 오늘 말씀이고 다음에 볼 12절에서 16절까지는 이방들에 대한 죄의 책망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의 요지는 몇 가지로 구분이 됩니다. 그 첫째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은 타락이다.”라고 것입니다. 이 말이 나오게 된 동기는 유대인들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확실히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정신 상태는 자신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죄인이기는 죄인이지만 이방 사람들보다는 깨끗한 죄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의 생각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은 죄인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죄에 대한 편견과 우월감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시정하기 위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도 크리스챤으로서 간혹 오만한 생각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안 믿는 사람과 죄성에 있어서는 그래도 다르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 측면에서 예수를 믿는 자아라는 그 자체 하나가 다른 것이지 죄성에 있어서는 똑같은 기회에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학에 ‘죄론’이라고 하는, 어떤 면에서는 ‘기독론’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완전 타락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의로움이 조금이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는 많은 노력을 해서 내가 쌓은 의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데 도움이 되는 신학의 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주의 구원관의 신랄한 비평을 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만약 너희가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갈라디아서 5장에 “그 사람은 율법 전체를 지킬 의무가 있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인간 자신을 구원할 아무런 능력이 주어져있지 아니한 타락한 존재를 하나님의 완전 구원으로 우리가 은혜를 입은 것뿐이지, 만약 인간이 구원의 요소를 1퍼센트라도 가지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그런 결과가 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그 의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공로에 의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지, 만약 내 의가 쌓여서 그것이 구원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었다면 십자가는 필요가 없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완전 타락에서 완전 구원함을 받은 것이 십자가 구원의 사건이다. 그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다.”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아마 이것은 수천 년 내려오면서 교리적인 문제로 가장 심각하게 다루어져 내려온 교리입니다.
종교 개혁운동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내가 고난을 겪으면서 의를 쌓으면 그것이 구원에 도움이 되는 그런 기쁨 때문에 라테라노 성당의 그 딱딱한 참나무로 된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면서, 피를 흘리면서 고통을 뿌릴 때 이 의가 쌓여서 구원에 이른다.” 그래서 마틴 루터가 그 계단을 올라가다가 ‘그렇다면 내가 공로를 쌓아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시는 것이라면 십자가는 뭐하는데 필요 하느냐? 아무 쓸데없는 것 아닌가?’ 이제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기독교 기초적 진리를 말하게 된 것입니다. “완전 타락에서 완전 구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점에서 이방인과는 다르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냉철한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헌신적 노력을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몸을 바쳐 헌신적 일을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선교사처럼 선교하러 외지에 나갈 수도 있고, 어떤 때는 헌금을 해서 하나님의 일에 결정적 도움을 주기도 하고, 자선 사업에 투신해서 고아들이나 장애인들을 돌볼 수도 있고, 때로는 순교를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인간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어떤 능력도 되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몸을 바치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지 내가 내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줄지라도 그것이 의가 되어서 구원을 이루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우월감은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으니까….” 그래서 지옥 갈 생각을 아예 안하는 겁니다. 자기들이 어떻게 살던지 어떻게 믿고 있던지 아브라함 때 이미 선택 받았다는 그 한가지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에 대한 잘못을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많이 한 사람, 즉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대단히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구원에 영향이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모태 신앙으로 출발해서 일평생 80~90년 긴 세월을 예수 믿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오랜 신앙생활도 구원의 조건은 안 됩니다. 이미 하나님이 택함을 주셔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지 긴 시간동안 예수를 믿은 내용이 자신의 의가 되어서 구원의 조건이 되는 교리는 절대 아닙니다. 십자가 위에서 말 한마디 잘해서 구원받은 강도나 80~90년 긴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나 영생의 구원문제는 똑같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말 한마디 하고 그 자리에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이런 구원을 받은 사람과 모태에서부터 평생을 신앙생활한 사람과 영생의 영혼 구원 문제는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런 사람은 이런 때 구원해 주고 저런 사람은 저런 때 구원해 주고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이 되는 것이지 “네가 쌓은 그 의 때문은 절대로 아니다.” 유대인이 가지고 있는 이 우월감, 구원의 교리 우월감을 바울이 지금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 시간 생각을 좀 수학적으로 계산하실 것 같습니다. ‘괜히 일찍 예수 믿어가지고 고생만 하고 말이야. 실컷 죄 짓고 좋아하는 일만 평생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목사님 좀 오라고 해!” 그 자리에서 세례 받고 그 자리에서 하늘나라 가게 해달라고 하면 될 것을….’ 이렇게 계획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면서부터 예수의 은혜 안에서 평생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말 한마디 하고 구원받은 사람보다 더 행복하고 복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재미를 좋아하는 사람은 도대체 세상의 뭐가 그렇게 재미있다고 하는 건지, 내가 해보지 않아서 몰라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웬만한 것은 다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경험하지 않아도 간접 경험은 하니까 다 알 수 있는데 세상에 무슨 재미가 그렇게 많은지 저를 보고 목사 하면서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물어봅니다. 이제 바울 선생은 유대인을 책망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라.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네가 이방 사람과 다른 것이 뭐냐? 네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서 이방 사람에게 우월감을 가지고 말하는데 다른 게 뭐냐? 너도 똑같이 살고 있으면서 무엇이 잘났다고 남을 판단하고 있느냐?”하고 1~11절은 유대인에 대한 책망입니다. “네가 네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만약 생활면을 따진다면 이방 사람보다도 네가 더 악하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착하거나 더 훌륭하게 산다는 무슨 보장이 있습니까? 착한 일만 따지면, 선행만 따진다면 마음 착한 사람이 세상에 더 많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깨끗하게 사는 사람, 정직한 사람 교회 안보다 밖에 얼마든지 더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죄 사함의 은총을 얻게 된다면 오히려 이방인 가운데 구원받을 사람이 훨씬 더 많다. 너희가 하나님께 택함 받았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바울이 지금 이렇게 말합니다. 도덕적 양심의 기준으로 따진다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즉, 예수 믿는 자나 불신자나 다를 바가 전혀 없다고 죄성에 있어서는 똑같다는 겁니다. “너도 똑같은 죄를 짓고 다니고, 너도 똑같이 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택함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다른 것이다. 네가 무엇을 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그냥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생각에 의해서 나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뿐이지 네가 뭐가 달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를 다녀보면 죄의 개념이 문화에 따라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문화적으로 죄의 개념이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나라에서는 굉장히 큰 죄가 되는데도 다른 나라에서는 아무 죄도 안 되고 오히려 의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국경 하나만 넘으면 달라지기 때문에 아주 조심해야 됩니다. 캄보디아, 베트남을 가보면 오토바이가 택시입니다. 여자들이 오토바이 택시를 많이 이용합니다. 그러면 다리를 한쪽으로 모으고 타야 됩니다. 다리를 벌리고 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게 그 나라의 문화입니다. 만약 캄보디아에서 오토바이 운전하는 사람과 똑같은 동작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 그 여자는 아주 품행이 나쁜 여자로 취급받습니다. 그런데 국경을 싹 넘어와서 베트남 사이공에서는 그렇게 한쪽으로 타는 여자들이 한명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보신탕 얼마나 좋은 음식입니까? 그 좋은 음식을 못 먹고 사니까 의사들이 환자에게 그것을 먹으라고 권하는 것도 봤습니다. 그러면 빨리 회복되고 영양적으로 좋은 거니까 먹고 건강하라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 이렇게 자꾸 말이 많고 싸우느냐? 개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싸운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문화에서는 개고기를 나쁘게 생각한다던지 먹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냥 식성상 안 먹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프랑스나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식인종 같은 취급을 받습니다. 이것이 문화입니다. 또, 이 죄의 개념은 문화적으로 다른가 하면 개인적으로도 다릅니다. 내가 어떤 가문에서 어떤 지역에서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이 사람은 이게 큰 죄라고 생각하는데 저 사람은 아무 죄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흑백 논리를 적용해서 “이것은 나쁘다. 이것은 틀리다.” 이렇게 하기가 힘듭니다. 죄론을 공부하면 매우 복잡하고 어떻게 말하기가 어려운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텍사스에서 목회를 할 때 아주 우스운 일이 교회 안에서 벌어졌었습니다. 한국에서 전혀 교회를 모르던 사람들을 상대로 전도를 하니까 그 시절만 해도 한국 사람이 얼마나 살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수십 명 모여 예배를 드리고 그랬는데 텍사스에 와서 예수를 처음 믿은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한국에서 아주 유흥가에 몸이 젖은 바람둥이였습니다. 미국에 와서 답답해 죽을 지경인 겁니다. 찾아보면 인간이 사는 동네에 다 그런 게 있게 마련이어서 어떻게 찾아냈는지 미국에 와서도 그런 생활을 그대로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나옵니다. 그렇게 한 사람이 그러면 주변의 남자들이 같이 다니는 그런 분위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한국에서 모두 그런 곳에서 살았으니까 여자들이 비상이 걸렸습니다. “이거 이민까지 와서 가정이 파괴되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냐? 주범을 잡아내야 된다.” 여자 몇 명이 모여서 “앞장서서 주동자 역할을 하는 남자를 때려잡아야겠다. 이 사람 때문에 우리 남편까지 망가지고 이게 뭐냐?” 그래서 여자들이 무서운 정도로 독이 올랐습니다. 여자 5~6명이 어떻게 전략을 짰느냐 하면 “아무래도 이 사람의 부인되는 여자는 이걸 모르는 것 같다. 그러니 저렇게 태연하게 내버려두지! 우리가 그곳에 가서 이 일을 폭로해 버리자!” 일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자기 남편들도 이제 피해자가 되고 그러니 “이판사판으로 뒤집어엎어서 결정을 내야지 안 되겠다!” 그런데 그 부인은 충청도 아줌마인데 마음이 좋아 생긴 것도 편안하고 마음도 편안하고 미국에 와서 그때부터 처음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들이 나한테도 몰려와서 “목사님도 알고 계세요. 일이 이렇게 되어 가는데 이걸 어떡합니까?” “내가 그런 일까지 어떻게 합니까? 다 본인들이 알아서 하시겠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하시려면 하시고 나는 참견 안하겠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자들이 그 부인에게 몰려가서 “이 마음 좋은 아줌마가 남편이 그러고 다니는 것을 아무래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 부인에게 가서 “알아요, 몰라요?” “무얼 말이요?” “뭘 말이냐니? 당신 남편이 바람피우고 우리 남편들까지 다 물들어 간단 말이야? 만날 바람피우며 돌아다니는데 그것도 모르고 말이야! 뭐하는 거야?” 막 야단치면서 당장 어떻게 하라고 소리를 치는데 이 아줌마의 대답! 이게 유명한 휴스턴 사회의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가만 두어! 메뚜기도 한 때여!” 죄의 개념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우리 남편 재미나게 잘 사는데 왜들 가지고 그러는 거야?”
아주 우스운 얘기로 지나갔는데, “이방인과 똑같은 삶을 살면서 너희가 뭐가 잘났다고 남을 판단하느냐?” 유대인들 보고 책망을 가하는 겁니다. 간혹 우리가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나쁘다.” 저는 이렇게 인정합니다. “더 나쁘다는 말보다는 ‘똑같다’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그 사람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더 나빠진 것은 아니다. 더 나쁜 사람이 예수를 믿은 것이다.” 이게 맞는 말입니다. 특별하게 더 잘난 것도 없고 특별하게 더 못난 것도 없고 사회인으로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뭐가 다르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이 다를 뿐입니다. 유대인들의 책임이 뭔가? “너희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면 그 이유는 그 은혜를 나누어주라는 뜻이다.” 예수 믿은 자가 뭐가 다른가? 먼저 예수 믿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먼저 택함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직 은혜를 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합니다. 죄의 개념도 예수를 안 믿을 때와 예수를 믿을 때 개념이 다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큰 죄가 뭡니까? 불신 죄입니다. 하나님 안 믿고 사는 죄가 가장 큽니다. 그것은 내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알게 된 죄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하나님 안 믿는 죄가 제일 큰 죄라는 것을 사람들은 전혀 이해를 못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은혜를 입어 죄의 개념을 알게 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것을 빨리 전해주어야 될 책임이 있는데 유대인들이 이 일은 하지 않고 우리들만이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하는 국수주의에 사로잡혀 막 비판하는 겁니다. 사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죄 짓는 것과 모르고 죄 짓는 것은 큰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여기 4~5살 어린이가 총을 가지고 놀다가 발사가 되어서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아이를 재판합니까? 그 아이를 감옥에 보냅니까? 아닙니다. 총을 쏴서 사람을 죽인다는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죄가 아닙니다. 그냥 모르고 장난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그렇게 했을 경우 일급 살인에 속해서 자기도 죽어야 합니다. 똑같이 총을 쏴서 사람을 죽였는데 알고 한 사람과 모르고 한 사람의 차이는 사형 죄와 무죄의 차이입니다.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겁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먼저 알고 있습니다. 먼저 알게 된 자는 그만큼 책임이 따른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알고도 지은 죄는 모르고 지은 죄보다 더 큰 죄인이 되는 이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좋아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앙이 좋아질수록 자신의 죄성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겁니다. 마지막에 바울을 뭐라고 그럽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니라.” 신앙이 좋아졌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겁니다.
인간은 과연 거룩하여 질 수 있는가? 그러면 인간의 거룩이나 성화와 중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의 죄성을 깊이 깨닫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을 가리켜 “거룩해졌다. 중생했다. 성화된 인간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 의롭게 보인다는 것은 세상이 어둡기 때문에 그나마 아름답게 보일 뿐이지 죄성에 있어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본성의 타락성은 똑같습니다. 세상이 너무나 어둡기 때문에 사람들이 조금만 의를 행해도 그것이 의롭게 보일 뿐이지, 본래의 인간은 다 의로워야 되는 것인데 너무 어두워진 세상 때문에 누가 무슨 조금 좋은 일을 했다든지 의로운 일을 했다든지 하면 그것이 밝게 빛나게 됩니다.
아주 오래전, 30년 전에 있었던 일인데, 제 대학원 동기생 한명이 “솔로몬”이라는 집을 오픈했다고 동기생들을 다 오라고 초청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 전도사 시절이니까 ‘솔로몬이라, 이게 뭐하는 집인가?’ 아주 관심이 많아서, ‘이 친구가 아주 믿음이 좋은 친구인데, 대학원 다닐 때도 동기였는데 내가 몰랐구나!’ 그러니까 동기들이 꽃을 하나 사들고 광교라고 하는 지역에 축하해 주러 모두 모였는데 ‘솔로몬’이라는 간판을 한 곳에 들어가 보니까 뭐냐 하면 최고급 룸살롱 술집을 낸 겁니다. 이 전도사가 꽃을 하나 사들고 갔는데 이게 앉아있어야 되는지, 나가야 되는 건지, “축하합니다!” 해야 되는 건지 “이거 집어치워라!” 해야 되는지 정말 혼란했습니다. 그러나 동기들이 “아! 오랜만이야!” 그래서 엉거주춤 거리며 “아니, 불이나 좀 켜! 왜 이렇게 컴컴해? 이거, 컴컴해서 잘 분간도 안 되네!”, 그 친구가 저를 보고 “우리 전도사님은 여전히 전도사님이구나! 세상을 너무 모르는구나! 이런 곳은 컴컴해야 돼! 그래서 컴컴하게 해놓고 불그스름하게 해 놓아야 사람들이 예뻐 보이는 거야! 주름살도 안보이고, 여드름도 안보이고, 주근깨도 안보이고, 흰머리도 안보이고 윤곽만 보이니까 뼈다귀는 누구든지 다 잘 생겼으니까 그래서 기분이 좋아서 사람들이 돈을 많이 쓰고 가는 거야!” 30년 전인데도 기억이 납니다. 사람의 의로움이란 세상이 죄로 어두워져서 그것에 묻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의로운 것이지 하나님의 의의 불을 밝혀버리면 다 죄인이고 다 드러납니다. 다 똑똑히 보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많아지면 눈이 침침해지도록 한 것은 하나님이 잘 하신 겁니다. 부부 간에도 침침해져서 주름살도 안보이니까 옛날처럼 그냥 예쁘게 보고 사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유대인이 된 죄! 더 크다! 너희가 더 죄가 많다! 왜? 먼저 은혜 받은 사람들이 자랑만 하고 이방인 멸시나 하고 뭐하는 거냐? 너희가 죄가 더 많다! 왜? 먼저 알았으니까! 이방 사람들은 그게 죄인지 모르고 산다. 왜 알려주지 않았느냐? 먼저 알았으면 다른 사람에게 알려줄 책임이 있는데! 하나님이 너희들을 택한 백성으로 선택하신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과 구원을 온 세상에 빨리 나눠주라는 뜻 아니냐? 왜 안하고 너희들 그렇게 사냐?” 지금 책망하는 겁니다.
맞습니다. 먼저 받은 자는 나눠줄 의무가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 두 달란트 받았던 자는 열심히 나가서 활동했다고 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보이지도 않게 감춰버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심판 때 어떻게 됐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이렇게 주었는데! 그 있는 것을 빼앗아 있는 자에게 주라!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왜 일 안하고 그렇게 하는 거야? 내가 준 거 가지고 나가서 열심히 일해야 될 거 아니야?” 그래서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자꾸만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주는 소비 기관입니다. 왜? 주라고 주시는 겁니다. 여러분, 좀 걱정되시죠? 금년에 314명의 선교사를 1년 파송했으니 그 경비가 얼마입니까? 그런데 제가 우리 행정 목사와 지난 10월 말에 계산을 해봤습니다. 일 년에 헌금 얼마 들어왔고 얼마 냈느냐? 10월 말까지 금년에 새로 정해서 선교비 나간 거만큼 헌금이 더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또 그만큼 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지혜롭게 생각해서 먼저 받은 자는 아직 그것을 받지 못한 자에게 주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나누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라는 그런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역사에서 가장 선교를 많이 하는 나라를 복되게 하셨습니다. 그때는 그 나라가 제일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도 한때 가장 강대국이 되었고, 독일도 한때는 그런 역사가 있었고, 영국이 그런 역사가 있었고, 근래에 와서는 미국이 그런 역사 속에 있고, 지금 21세기는 한국이 그 역사로 가고 있고 그런 것 아닙니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에 대해서 모르느냐 말입니다. 먼저 받은 자는 나눠줘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유대인을 그대로 두시는 것인가? “그 인자하심이 너를 회개케 하기 위하여 길이 참으시매 풍성함이 있는 것이다.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죄를 용납하시는가?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내용이 바로 기다리심입니다. 대다수의 인간을 향해서 하나님은 길이 참으십니다. 죄 짓는 현장을 금방 그 자리에서 때려잡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현장 심판을 해버리신다면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겠습니까? 누구나 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끔가다 고삐를 잡고 계십니다. 가는 데로 두었다가 어느 한때는 잡아당기십니다. 여러분, 시골에서 소를 부려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처음 송아지가 태어나면 자기 맘대로 뛰어다닙니다. 그런데 어느 시기가 되면 코를 뚫습니다. 불을 달궈서 사방을 다 묶어 놓고 새빨간 부젓가락으로 강제로 생살에 뚫습니다. 그러면 소가 얼마나 아픕니까? 소리를 지릅니다. “지~익”하면서 코를 뚫고 그것을 또 넓히기 위해서 막 돌립니다.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코에 엄지손가락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어 거기에 막대기를 깎아 낍니다. 그래서 딱 묶어 버립니다. 고삐를 매고는 뒤에서 그거 하나만 가지면 됩니다. 말만 안 들으면 뒤에서 잡아당기면 “으악”하면서 따라옵니다. 아프니까 꼼짝 못합니다. 그러니까 소가 말을 안들을 때는 그 고삐만 잡아당기면 꼼짝을 못합니다. 다른데 잡아봤자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도 다 고삐를 잡고 계십니다. 말 안 들으면 잡아당기십니다. 어떤 때는 그냥 둡니다. 넓은 들판에서 풀 뜯어먹도록 가만 둘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망가면 고삐를 잡아당깁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이냐 유대인이냐 이게 문제가 아닙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을 섬기느냐 아니냐에 관심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한 대로 하십니다. “심판에 있어서 유대인이 첫째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헬라인이 나중이다.”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네가 먼저 받았잖아?” 반대로 유대인의 특권이 뭐냐? “존귀와 영광도 너희들이 먼저 받을 것이다. 네가 잘하면 존귀와 영광의 특권이 먼저 주어진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이 받은 은혜를 선하게 사용했을 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존귀와 영광이 먼저 오고, 이것을 사용하지 않았을 때는 심판이 먼저 오게 되어있다. 누구도 다 마찬가지이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 우월감 버려라.” 이렇게 지금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선생된 자가 심판이 더 크다.”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잘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심판이 더 크고 잘하는 것에 대해서는 영광이 더 큰 것! 이것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의 하나의 위치다.” 맞지 않습니까? “그러니 알아서 해라!” 그런 뜻입니다. 11절에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 유대인이라고 하나님이 특별히 봐주시는 것이 없다. 목사라고 해서 더 봐주는 거 없다. 잘하면 영광이 클 것이다. 잘못하면 심판이 더 크다. 아느냐?” 그래서 우리는 존귀와 영광을 크게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고, 아니면 심판을 더 많이 받을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먼저 된 자의 위치입니다. “너희들이 그 자리에 있다. 그것을 아느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축복의 결론은 고집을 버리고 회개하는 심령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죄인됨을 깊이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어가고 내게 주신 큰 구원의 은혜를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하여서 아직 은혜의 개념 속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의무다! 너희 유대인들은 왜 안하느냐? 유대인에게 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냐? 그래서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이방 나라로 보내셨으며 거기에서 온 세상의 구원의 빛을 전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오늘도 흩으신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빛을 흩어놓으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나라가 확장되도록 하신다. 먼저 받은 자는 주어야 한다.” 이것이 책임입니다.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80년 예수 믿은 사람이나 말 한마디 한 사람이나 똑같다. 지금부터라도 내가 그만두고 죽을 때 임박해서 회개하고 하늘나라 가자!” 약삭빠른 그런 길이 있고, “나는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부름 받은 것을 지금까지 못했다. 나의 남은 생애는 내게 먼저 허락해 주신 은혜를 지금부터라도 노력해서 온 세상에 알려주는데 내가 협조하자!”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대로 믿음대로 선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유대인된 특권과 유대인된 하나님의 심판이 무엇인가? 먼저 받은 자는 나눠주어야 되는 책임을 유대인들이 잊어버리고 있는 것에 대한 바울 사도의 책망을 이 시간 저희들이 생각했습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건강하고 또,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믿게 된 은총을 감사하오니 먼저 허락해주신 저희들의 사명은 아직 이 은혜 개념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하여 주어야 되는 책임이라는 것을 저희들이 깨달아서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 모든 주님의 거룩하고 영적인 사역을 훌륭하게 감당해 나갈 수 있는 주님의 사랑받는 청지기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