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을 떠난 모세의 간증 (히 11:27)
본문
옛날 어떤 나라의 왕이, 사람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수도자를, 자기 왕궁으로 초청했다. 수도자는 왕궁 입구까지 마중 나온 왕에게, 감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의 여관은 대단히 크군요.” 왕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수도자에게 말했다. “이 곳은 왕궁이지 여관이 아닙니다.”
잠시 후 왕이 그를 응접실로 안내하자, 이번에는 화려한 실내 장식을 바라보며, 수도자가 말했다. “폐하의 여관은 정말 아름답군요.” 그러자 왕이 화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곳은 왕궁이지, 여관이 아닙니다!” 그리고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물었다.
“아니, 당신처럼 훌륭한 수도자가, 어찌 여관과 왕궁도 구별하지 못한단 말이오?” 이에 수도자가 웃으며 왕에게 물었다. “폐하!, 폐하가 계시기 전에는, 이 왕궁에는 누가 계셨습니까?” “아바마마가 계셨소.” “그럼 그 이전에는 누가 계셨지요?” “할바마마가 계셨소.” “지금 그분들은 어디 계시나요?”
그분들은 “이 세상을 떠나셨소.” 왕의 대답에 수도자는 말했다. “보십시오. 벌써 두 분의 나그네가, 이 여관에 묵었다가 떠난 사실을, 폐하께서는 방금 확인해 주셨지요. 다만 이 여관은 보통 여관과는 달리, 하루 이틀이 아니라, 좀 길게 묵고 갈 뿐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폐하?” 인생은 나그네다.
성경은 인생을 “나그네”라고 했다. (창23:4) 아브라함은 자신을 나그네라고 했다. (창47:9) 야곱도 자신을 나그네라고 했다. (레25:23) “…너희는 나그네”라고 했다. 떠날 수밖에 없는 나그네이기에, ‘떠남’의 준비가 가장 지혜로운 준비다.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준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가 떠나야 한다. 세상이 싫어서 떠남이 아니라, 나그네기에 떠난다. 아무리 좋고 살기 편해도, 또 정이 들어도, 나그네는 잠시 머물다가 떠나야 한다. 자신이 나그네임을 알고 살아야, 준비된 인생을 살다가 떠날 수 있다.
자신이 나그네인지 모르면, 어느 날 준비하지 못한 채, 떠나야 한다. 준비 없는 떠나면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눅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떠남을 전혀 준비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리석은 부자가 되었다. 왜 떠나야 하는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큰 역사를 이루시기 전에, 먼저 떠나게 하셨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도록 떠나게 하셨다. 요셉은 애굽과 유대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으로 떠나야 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광야의 나그네가 되었다. 이처럼 우리도 더 큰 일을 위해, 떠나야 한다.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한 떠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전제되는 떠남이 되어야만 한다.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기도와 말씀과 묵상을 통해, 확인하고 떠나야 한다. 대형 교회 목사님들이 은퇴한 후, 떠나지 않아서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다.
60, 70년대에 교회를 개척하고, 부흥성장 시킨 목사님들로, 그 공은 인정해 주어야 한다. 문제는 그렇게 힘들게 교회를 성장시켜 놓았는데, 새파란 후배에게 모든 권한과 특권을 물려주기가 싫어서, 싸우기에, 공멸해가고 있다. 원로목사가 되어서 떠나지 않으면, 공멸하게 되어 있다.
본문은(히11:27) 모세의 삶 가운데서, 제2기의 삶에 해당하고 있다. 모세가 광야에서 훈련을 받을 때 보여주었던 믿음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애굽을 떠난 모세의 믿음의 간증을 듣고, 우리들도 모두 믿음의 간증을 남길 수 있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시기 바란다.
1.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났다.
애굽을 떠나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자유와 구원을 위해 떠나라는 말이다. 모세는 바로 앞에 나아가, “내 백성으로 가게 하라!”고 요구함으로, 모세와 바로가 대결하게 된다.
바로는 파리 떼의 재앙으로 굴복한다.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 붙들어 둘 수 없게 되자, 단계별로 작전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바로의 전략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온전한 자유를 방해하는, 사탄 마귀의 전형적인 작전을 간파할 수 있다.
(1)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려라(출8:2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너희가 가서 하나님을 섬기되, 이 땅을 벗어나지 말고, 제사를 드리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허락한다. 그러나 나의 통치를 벗어나지 말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믿되, 생활은 바꾸지 말고, 예배만 드리라는 말이다. 겉으로는 인심 쓰는 척한다. 얼마나 교활한 타협인가?
(2) 가기는 가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출8:28).
“바로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사탄은 자신의 통치에서, 너무 멀리 나아가지 말라고 한다. 자신의 노예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멀리 가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때, 이 세상을 완전히 떠나야만 한다. 세상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 그래서 세상이 나를, 완전히 포기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3) 아이들은 두고 가라(출10:10).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 어린것들을 보내면, 여호와를 너희와 함께 하게 함과 일반이니 삼갈지어다, 너희 경영이 악하니라” 가기는 가되, 어린아이들은 두고 가라는 말이다.
중국에서 진행되는 기독교 탄압정책과 일치한다. 중국에서는 성인들에게는 복음을 전할 수 있어도 청소년에게는 전도하지 못하게 되어있다. 청소년이 넘어가면 공산주의는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탄은 너희는 믿어도 되지만, 너희 자녀는 안 된다고 한다.
(4) 물질과 재산은 두고 가라(출10:24).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최종적인 흥정이다. 믿어도 재물까지 헌신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말이다.
어찌 보면, 최상의 제안으로 들린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 받아서 나가는데, 재산이 무슨 필요 있는가?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고 채워주실 텐데, 돈 걱정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이것보다 더 간교한 제안은 없다. 물질(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마6:21).
만일 모세가 애굽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물론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릴 수가 있었지만, 그 결과는 멸망뿐이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오리들이 떼를 지어,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그 중 어떤 오리가, 배도 고프고 날개도 아파서 꾀가 생겼다.
그래서 다른 동료들 몰래 슬그머니, 어떤 농가의 지붕 위에 살짝 내려앉았다. 그 농가의 마당에는 때마침, 자기와 비슷하게 생긴 집오리들이, 집주인인 농부가 주는 모이를 맛있게 받아먹고 있었다. 오리가 가만히 살펴보니까, 집오리들은 이리저리 날아다니면서, 먹이를 찾을 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오리는 집오리들이 너무 부러워서, 지붕에서 뛰어내려서 집오리들 틈 속에 섞여 살았다.
자기도 집오리처럼 행세하면서, 몇 개월 동안 같이 어울려 살았다. 한동안은 너무 좋았다. 그러나 어느 날 오리 마음에, 갈등이 생겼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이제는 내 갈 길로 가야지.” 오리는 날개를 펴고서, 공중으로 날아 보려고 했지만, 날 수 없었다.
몸은 이미 비대해져 있었고, 몇 개월 동안 날지 않아서, 날개에 힘이 없었다. 그래서 뛰어오르다가 다시 땅바닥으로 곤두박질해 버리고 말았다. 이 모습을 본 농부는 먼저 그 오리를 잡아다가, 맛있게 요리를 해 먹어 버리고 말았다.
세상의 낙이 그렇다. 잠시 애굽에서 누리는 죄악의 낙이 그렇다. 그저 잠시 잠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말은 언제나 비참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떠나야 할 죄악의 애굽은 무엇인가? 떠나야 할 것을 떠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포기해야 할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 믿음이다.
2. 모세는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믿음의 사람이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가장 큰 이유는, 폭력과 협박으로 생긴 ‘두려운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한다(히2:15)고 하였다.
성도들 중에 협박으로, 신앙을 포기한 사람이 참 많다. 생명과 재산을 빼앗길까봐 두려워서, 무릎 꿇었다. 아브라함은 두려워서,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거짓말했다. 아론은 두려워서, 사람들에게 굴복하여 금송아지를 만들고, 베드로는 두려워서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다.
연약한 인간이기에 어떤 일에 대해, 무서움과 두려운 감정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그 무서운 감정을 얼마든지 극복해 낼 수 있다. 바로는 신적인 존재였다. 그에게 복종하지 않음은, 죽음을 의미했다. 그런데 모세는 감히 바로와 맞서 싸웠다.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는 본래부터, 타고난 배짱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모세가 장성해서 40세가 되었을 때, 자기 동족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자기 동족이 고역을 하고 있는 현장에 나와 보았다. 때마침 애굽 사람 하나가, 자기 동족 이스라엘 사람을 압제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모세는 참을 수 없어서, 그 애굽 사람을 쳐죽이고, 그의 시신을 모래 속에 감추어 버렸다. 그리고 그 이튿날, 모세가 또 그곳으로 나가 보았다. 이번에는 이스라엘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고 있었다. 모세는 그들을 말리면서 타일렀다. “너희는 형제이거늘, 어찌하여 서로 해하느냐?”
그러자 한 사람이 “누가 너를 우리의 법관으로 세웠느냐?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쳐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고 하면서 모세에게 대들었다. 모세는 자기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인 일이 탄로 나자 두려웠다. 그래서 왕궁을 떠나, 미디안 광야로 도피했다(출2:14-15).
두려움은 언제나 도피를 가져온다. 우리가 어떤 상황이나 난관에 부딪히면, 마음이 괴롭고 무거워진다. 그때 도피하고 싶어진다. 자살은 두려움을 피하려는 도피다. 연약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라. 두려움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란다.
그런데 이런 모세가 40년 후에, 두 번째 애굽을 떠나게 되는데, 그 때는 도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성취하기 위해, 바로와 당당히 맞서게 된다. 모세는 더 이상,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침내 무서움, 두려움을 극복했다.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했는가?
떨기나무 속에서, 이적과 표적으로 함께 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도피를 낳지만, 믿음은 어떤 상황이라도,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믿음은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으로 싸워,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든다. 참 신앙은 도피가 아니라, 직면하고 대결하는 믿음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출14장)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는, 넘실대는 홍해가 있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들이, 특별 병거 육백 대를 타고 쫓아왔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14:11) “모세여,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에 파묻으려 하느냐?”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백성들에게 (출14:13)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바라보았기에, 두려워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종교 개혁자 존 낙스는, 영국 왕 메리 1세가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위협도 두려워하지 않고, 종교개혁을 계속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무덤에는 이런 묘비가 써 있다. “여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한 나머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던 자가, 누워 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담대하기 마련이다.
우리 인간은 참 연약하다. 우리 힘으로는,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면, 우리도 얼마든지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다.
(시27:1)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았던 모세와 다윗의 믿음처럼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라고 담대하게 외쳤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기 바란다.
3. 모세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바라보며 참았다.
모세가 처음 40년 간 애굽에서 살 때에,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했던 자였다. 세상의 부귀, 영화, 모든 권세를 한 몸에 누렸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미디안 광야 40년 동안의 삶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초라한 목동의 삶을 살았다. 고달팠다. 그러나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그 모든 훈련을, 온갖 고통과 역경을 어떻게 잘 참아냈을까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라고 하였다. 모세의 시선은 하나님을 따랐다.
모세는 바로 왕의 권력 너머에 계시는 분을 보았다. 보이지 않는 지지 세력을 믿었다. 모세에게는 믿음의 눈이 있었다. 바로 임금이 무서웠지만, 왕과 애굽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보았으므로, 바로나 그의 군대가 두렵지 않았다.
모세가 강력한 주권자이며 통치자인, 신적 존재인 바로를 보았더라면, 절망하고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보았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하나님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지키신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알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볼 수만 있다면, 믿지 못할 사람이 없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 같이 의지하고, 동행하고 사귀는 사귐을 가졌다. 우리의 믿음도 시각적으로 표현해 보시기 바란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이성봉 목사님은, 늘 오른손을 꼭 쥐고 다니셨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서, 궁금해서 물었다. “목사님! 목사님은 왜 항상 오른손을 꼭 쥐고 다니십니까?”라고 묻자, 목사님의 대답은 이러했다. “제 오른손으로 예수님의 손을 꼭 붙들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으면, 어떤 환난 앞에서도 요동하지 않게 된다.
장로교의 창시자였던 칼빈의 좌우명은 “코람 데오”(하나님 앞에서)였다. 칼빈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지만, 자신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만 의식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고자 했다.
그래서 생명을 위협하는 권력자들, 천주교 교권과 맞서 당당할 수 있었던 용기와 담대함은, 그의 이런 믿음에서 나왔다. 믿음의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란다. 광야의 삶은 끝이 아니다. 지금 광야가운데, 놓여있다고 생각하나요?
광야는 축복의 땅으로 가는 하나의 통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크게, 더 귀하게 쓰시기 위해서, 광야의 삶을 통해서 우리를 훈련시키신다. 모세의 믿음의 간증처럼, 어떤 환난 앞에서도 요동하지 말고, 끝까지 잘 참아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처럼, 우리도 귀하게 사용하시기 바란다.
(1)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났다.
(2) 모세는 믿음으로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했다.
(3) 모세는 믿음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다.
이 모세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서, 이 시대의 모세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