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지 않고도 배부른 이유 (요 4:26-38)
본문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
지난 주간 평창 지방 부흥회를 인도하고 왔는데 아주 기뻤던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셨습니다. 그 교회에 가장 유력한 두 권사님이 싸우셔서 말도 하지 않고 지내셨는데, 첫째 날 저녁 집회를 마치고 집에 가서 극적으로 화해하셨다고 너무나 좋아하셨습니다. 설교자로서 이보다 더 기쁜 말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먹지 않고도 배부른 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때 먹지 않아도 배부르셨습니까? 돈 1억원이 생기면, 먹은 것이 없어도 배부르지 않겠습니까? 자녀가 기대 이상으로 좋은 대학에 합격했을 때, 먹은 것이 없어도 배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수가 성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 사람들에게로 달려가는 것을 보시고는 그렇게 기쁘셨던 모양입니다,
제자들이 마을에서 먹을 것을 구해 와서 예수님께 드시기를 권했는데, 시장하실 것이 분명하신 예수님께서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일로 너무 기쁘셔서 아무 것도 드시지 않으셨지만 배가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을 그토록 기쁘시게 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사랑하고 구원하는 일입니다.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천국에 가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을 받은 것,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기쁨의 조건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기쁨의 조건 사이를 한번 메꾸어보시면 좋겠는데 예수님이 어째서 사마리아 여인을 보고는 먹지도 않고 배가 부르실 정도였을까? 그것은 예수님은 사람을 보시는 눈이 우리들이 보는 것하고는 달랐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보실 때 그 영혼을 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는 사마리아 여인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33절에 보니 제자들은ꡐ혹 누군가가 다른 먹을 양식을 갖다 드린 모양이다ꡑ라고 생각하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생각을 아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는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예수님께 그토록 기뻐하시고 만족스러워 하신 그 일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셨기에 먹지 않고도 배부르셨습니다.
사람을 보는 예수님의 눈은 일반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27절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것 자체를 이상히 여겼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풍습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건넨 것이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거의 원수처럼 지내던 사람들입니다. 9절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하실 때, 놀라서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했습니다. 둘째는, 랍비가 낯선 여인에게 말을 건넨 것이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여자들을 멸시했습니다. 랍비들은 여자들의 인사를 받아서도 안되며 거리에서 대화를 해서도 안되고 율법을 가르쳐서도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랍비라고 생각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는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여러 형태로 나누어 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볼 때 어떻게 보시나요? 어떤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일단 그 사람의 외모를 봅니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사람인지 아닌지. 거기서 벌써 내 반응이 달라집니다. 지나고 보면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닌데도 우리는 사람을 일단 외모로 좋다 나쁘다로 판단을 합니다. 그 다음에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얼마나 배운 사람인지, 소유가 얼마나 되는지, 집은 어디에 어떤 규모의 집을 가지고 있는지... 이런 조건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합니다. 그러다가 고향은 어디인지, 마지막에 나이를 따집니다. 그래서 내가 형인지 동생인지 이런 것에 관심이 본능적으로 그렇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보실 때 전혀 다르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눈에는 그 여인이 사마리아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았고. 여자로 보이지도 않았고, 과거가 복잡한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그녀의 영혼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창조될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말입니다. 영혼을 보시는 예수님의 눈에는 사마리아 여인도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영혼으로 보면 누구나 다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그래서 많은 남편을 둔 사마리아 여인, 어부인 시몬, 부정직한 세리장 삭개오, 겁많은 유대인 관원 니고데모, 모두가 예수님의 눈에는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라는 별명을 가졌을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헐뜯었는데, 예수님 당시 죄인은 사람들이 상종하기 싫어하고 차별하고 멸시하던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것은 죄인을 특별히 사랑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의 영을 보시기에 예수님에게는 남녀나 신분이나 지위나 재산이나 나이나 유대인이냐 사마리아인이냐 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영혼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영으로 보면 사람은 다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다 더럽고 추하다고 멸시하는 여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영으로 예배를 드리면 그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시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시기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람들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대합니까? 대부분은 먼저 외모를 보지 않습니까? 그리고 궁금해 하는 것이 나이입니다. 그 다음에 ‘고향은 어디인가?, 어느 학교 출신인가? 어떤 일을 하는가? 신분이 무엇인가? 집은 있는가? 있으면 어떤 집인가? 몇 평인가? 차는 있는가?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가?'
그리고 나서 더 가까이 사귈 것인지 인사나 하고 말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사람에 대해 차별하는 이런 태도는 반드시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큰 일 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이 이웃을 싫어하거나 외면하는 것입니다.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마 25:44-45)
예수님은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셨습니다. 교만은 사람을 소유나 능력이나 집안이나 외모로 차별하여 보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어떤 사람은 작아보이고 어떤 사람은 커보이는 사람이 있고 어떤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고 어떤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면 예수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사람을 보는 눈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옥에 갇힌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고, 그 사람들도 똑같이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그 영혼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왕을 세우려고 이새의 집에 가서 그 아들들을 둘러볼 때 사무엘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의 외모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새의 맏아들이 가장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즉각 사무엘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우리의 영적 실상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입니다,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도 그 영혼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큰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답니다. 그 목사님이 강단에서 설교를 시작하면서ꡐ저는 세 가지 대지로 설교하고자 합니다ꡓ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대부분의 회중들은 하품을 했습니다. 전에도 늘 듣던 말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했습니다.ꡐ첫 번째 요지는 이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에는 약 20억의 사람들이 굶주려서 죽어가고 있습니다.ꡓ교인들의 반응은 시큰둥 했습니다. 이전에도 그런 설교는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설교자가 이어서ꡒ두 번째 대지는 이것입니다.ꡓ하고 말하자 모두들 똑바로 앉았습니다. ‘설교가 시작된 지 겨우 10초 내지 15초가 지났을 뿐인데 벌써 두 번째 대지로 들어가다니?’ 의아했습니다. 설교자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했습니다. “두 번째 대지는 여러분 중 대부분은 이 사실에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빌어먹을’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자 회중들 사이에는 놀람과 분노로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이렇게 심한 말을 하다니?’ 설교자는 또 다시 잠깐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요지는 이렇습니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의 진정한 비극은 20억의 사람들이 굶어서 죽어가고 있다는 말보다도, 설교자가 ‘벌어먹을’ 이라는 말을 했다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는 것입니다.ꡓ그리고는 그 설교자는 천천히 강단에서 내려와 자기 자리에 앉았습니다. 전체 설교는 1분이 채 걸리지 않았지만, 교인들에게는 이제까지 들어 본 것 중에 가장 강렬한 설교였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크리스천이 단순히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당에 들어와 의자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진정한 사랑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임을 교인들에게 일깨워 준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싫어하실 것이라는 착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아니 확신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좋아하지 않고 싫어하는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충격적이지만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혼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죄인이거나 불성실하거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지 않으신다면 똑같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도 사랑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여러분이 싫어하고 미워해서 여러분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습니까? 사람들에 대한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늘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에 대하여 차별적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적대적이고 도움이 안될 사람들에 대하여 무덤덤합니다. 여전히 “영혼을 사랑하라! 영혼을 구원하라!”는 말씀이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한번 다시 생각해 봅시다. 내가 구원받을 때, 예수님께 먹지 않고도 배부르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외모로 판단치 않으시고 영혼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사람들을 보는 눈이 새로워집니다.
제 아내가 두 주간 미국을 다녀왔습니다. 둘째 딸까지 데리고 다녀왔습니다. 큰 딸 지영이가 몸도 아프고 기숙사에서 나오게 되어 거처할 곳도 마련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와 하영이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혼자 지내는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경험해 보았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제 아내가 메일을 보냈는데, 가자마자 돌아올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여보, 지영이가 어떤 사람에게 메일을 보냈다는데, 자기가 학교 갔다가 왔을 때, 엄마가 집에 있는 것을 보면 울 것 같다고 했대요.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울컥했어요. 벌써부터 떠날 날이 걱정이예요. 울지 않고 떠날 수 있을지. 여기가 너무나 쓸쓸한 곳이라서 혼자 두고 가기가 그러네요.”
제 아내와 하영이가 돌아온 다음 날 제 딸 지영이 싸이에서 엄마와 동생과 헤어질 때 마음을 써놓은 것을 읽었습니다.
공항에서 엄마와 동생와 헤어질 때,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하면서도 울지 않고 참았답니다. 그렇게 하리라 다짐하고 다짐했었답니다. 그런데 다 떠나고 차에 돌아왔는데 기다리는 사람이 없을 때, 그리고 돌아오는 차 중에서 옆자리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느껴질 때, 그 때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었답니다. 집에 와서 문을 열었는데 다 캄캄하고, 주방에서 음식하는 엄마도 없고, 방에서 컴퓨터 하는 하영이도 없고, 불러도 대답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도 불러보고 또 부르다가 막 울었답니다. 이 글을 읽고 저도 울었습니다. 두 주간동안 혼자 지내다 보니까 혼자 지내는 딸의 심정이 너무나 깊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보시고 먹지도 않고 배부르셨던 예수님의 심정은 바로 이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입니다. 딸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기도했습니다. “사람을 주님의 마음으로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처럼 사람을 사랑했던 인물은 역사상 없습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사랑하는 자녀를 되찾고자 하는 부모의 심정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았을 때, 그때까지만 해도 솔직히 영혼에 대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목회 조차 큰 교회를 담임하여 성공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솔직히 그것때문에 하나님도 이용하고 교인을 이용하여 나의 자존심을 만족시키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1984년 예수님께서 제 영혼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한 낮에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오신 것처럼, 다리가 부러져 장애인이 될 처지의 절망 속에 있던 저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날 저는 ‘나는 평생 뭔가에 삶을 바쳤는가?’ 생각했습니다.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그리고 큰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는 것이 왜 부끄러운 일인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알았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하나만 꼽으라면, 내가 말처럼 정말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쏟고 있는 지, 가면 뒤에 이기주의의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는지, 나는 평생 무엇에 사로잡혀 왔는가? 진실을 대하고 나니 식은 땀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창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저는 그날 제 자신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다 드렸습니다. 그래도 기뻤습니다.
영혼의 실상을 알게 된 것이 모든 것이 달라 보이게 했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것이 제 사명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의 양식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35절에 보면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추수할 때가 되었도다” 하시면서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38절)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아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가 올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일을 위하여 제자들을 세우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람을 보는 눈이 바뀌어야 사람들에게 다가가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전도하여 영혼을 구원하면, 주님은 드시지 않고도 배부를 만큼 기뻐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지만 전도하지 못한다면 결코 만족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느끼는 정도에서 끝이 아닙니다. 이해하는 정도에서 끝이 아닙니다. 눈물이 나는 정도에서 끝이 아닙니다. 진정한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먹지 않고도 배부르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먼저 그러했습니다. 그녀는 물을 길러 우물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물동이를 버려 두고 마을로 뛰어갔습니다. 물을 마시지 않고도 속이 시원했던 것입니다. 생수의 강이 넘쳤습니다. 그 만큼 기쁨이 컸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혼자 간직하기에는 벅찼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발견한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기쁨이 있습니다. 이렇게 기쁘니까 혼자 간직하기에는 너무 벅찼던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말할 수 없는 사랑의 눈으로 보십니다. 오늘 성찬은 정말 그 자체가 말할 수 없는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성찬이 그대로 담아주셨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사랑을 그 속에 담아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자식을 위해서는 목숨도 내놓을 수 있으실 것입니다. “차라리 나를 데려가시고 이 아들을 살려주십시오..” 부모는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찬식은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찾으시기 원하는 자녀로 여기신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이 사랑을 믿는다면 우리도 늦기 전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특히 영혼을 사랑하여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