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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따르는 순종 (삼상 15:22-24, 눅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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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따르는 순종 (삼상 15:22-24, 눅 5:1-11)


베드로의 믿음

이른 아침 갈릴리 호숫가에서의 일입니다. 두 배의 어부들이 호숫가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밤새도록 고기 잡이를 했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무거운 손과 마음으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호숫가로 나오자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 타셔서 사람들을 가르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느닷없이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직업이 어부였는데, 그는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우리는 밤새도록 모든 지혜를 짜내어 고기를 잡으려고 노력한 베드로의 수고하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밤이 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쳐보라고 하셨습니다. 평생 고기잡이를 해온 베드로에게 말입니다.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쓴 셈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어부이고 예수님은 목수 출신인데 왜 어부가 목수의 말을 듣고 고기를 잡으러 다시 호수로 나가게 됩니까? 그 이유는 거절하지 못해서 입니다.

베드로가 “주여, 믿습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하면서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배를 타고 다시 호수의 깊은 곳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사실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보십시오.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했습니다. 베드로는 피곤한 몸이었는데, 하필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를 타고 사람들을 가르치셨기에 억지로 예수님의 설교를 들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다시 한번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권위에 눌려서 마지 못해서 고기를 잡으러 다시 바다로 배를 저어 나갔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을에서 수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는데, 그 중에 베드로의 장모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에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은인입니다.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따른 행동이었지만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물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서 그물이 찢어지기 시작합니다. 급히 옆에 있는 친구의 배를 불러서 함께 그물을 끌어 올렸는데, 물고기가 두 배가 물에 잠길 정도로 두 배를 가득 채우게 되었습니다.

말씀의 성취

여러분, 우리가 본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따른 것은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감정적 측면이 아니라, 의지적인 면이 중요한 것을 알게 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판단과는 반대로 ‘의지적 믿음’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또 알아야 할 것은 베드로가 성공에 대한 믿음으로 그물을 던졌기 때문에 고기가 많이 잡힌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베드로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고기가 많이 잡히도록 하셨기 때문에 고기를 많이 잡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말씀의 성취가 있습니다.

말씀을 따른다는 것은 항상 즐거운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의 ‘생각’과 반대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에 반대될 수도 있고, 자신의 ‘판단’과 반대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순종할 수 있는 겸손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순종과는 거리가 먼 불순종의 자식으로서 교만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실패의 새벽에 찾아 오셔서 순종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대단한 신앙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지만, 바로 말씀에 순종하는 이 행위가 베드로에게 더 큰 신앙의 세계를 열어 주었습니다. 믿음이란 그것 자체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믿음은 순종을 통해서 자라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순종함으로 여러분의 믿음이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의 마음의 변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놓치면 안 되는 중요한 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고기를 많이 잡고 나서 ‘아멘 할렐루야!’ 하고 기뻐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물고기를 많이 잡은 성공에만 도취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깜짝 놀라서 무릎을 꿇고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라고 황망하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만선의 기쁨을 베드로에게 선물로 주셨는데 왜 갑자기 베드로가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떠나시기를 원합니까?

베드로는 만선의 기쁨에 도취되기 보다는 도리어 자신의 마음 속의 죄악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말씀을 충분히 믿지 못했던 불신앙과 교만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의 존재에 깊이 뿌리 박힌 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어리석고 부족한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실패의 밤에 주님은 찾아 오십니다. 사람들은 위기 가운데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인생의 위기 가운데서 내가 메시야를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삶의 문제 때문에, 삶의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수가성의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대낮에 아무도 물 길러 오지 않는 시간에 사람의 시선을 피해서 물 길러 우물로 왔습니다. 원인이야 알 수 없지만 정말 피곤한 인생임이 틀림 없습니다. 고생스런 인생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여인의 결정적인 고통을 예수님께서 드러내 놓고 말씀하실 때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상대방의 결정적인 약점, 상처 등을 건드리면 안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의 가장 고통스런 점을 지적하십니다. 이 여인의 삶의 급소를 찌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너의 남편을 데려오라 말씀하실 때, 이 여인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로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네가 남편이 다섯 있었으나 지금 남자도 너의 남편이 아니니라.’ 원인이야 어쨌든 정말 피곤한 인생임이 틀림 없습니다. 고생스런 인생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삶에서 이 고통은 가장 결정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의 전체였습니다.

이 여인이 나중에 동네 사람들에게 전도하면서 한 말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요4:39).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분명히 이 여인의 결혼 생활이었습니다. 사람은 가정적으로 불행해도 얼마든지 다른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모든 것을 말한 것이나 같습니다. 그녀의 가장 고통스런 부분을 건드려 주셨습니다.

그 여인은 메시아를 만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뜻밖에 만난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고, 온 동네에 증거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기에 그의 삶이 변화된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은 우리의 선택과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고통의 현장에, 우리의 실패의 밤에, 절망의 새벽에 찾아오셔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처음에는 ‘선생님’으로 불렀으나 이제는 ‘주님’으로 부르게 됩니다. 베드로의 마음이 변하게 됩니다. 베드로의 실패와 예수님의 도움으로 인한 성공은 베드로를 영적으로 더욱 깊은 차원으로 인도합니다.

베드로의 위기는 경제적 위기였습니다. 베드로는 천박한 물질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물질적 차원을 뛰어넘는 영적 차원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물질적 위기를 통해서 영적인 세계를 발견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베드로의 물질적 실패의 밤은 영적인 부활의 아침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경제 위기를 말합니다. 그런데 경제지표들은 단 한 해도 내려 간 적이 없고 항상 성장해 갑니다. 신앙적 눈으로 보면 이것보다 더 큰 위기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더 큰 위기란 우리의 정신적 영적 타락입니다. 우리의 경제적 위기는 우리의 정신적 영적인 위기를 발견하게 하고 극복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경제적 물질적 불안은 영적인 회개의 기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에 사는 한 교포의 경험담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여행사를 경영을 해서 한국 사람들이 프랑스를 관광할 때 안내하기도 하고, 프랑스 사람들의 한국 관광을 안내하기도 한답니다. 이 분의 말씀에 의하면 한국 사람들은 지위의 고하와 빈부를 막론하고 제일의 관심사와 화제는 경제적인 문제랍니다. 한국 사람들의 질문은 주로 ‘여기 땅값은 얼마예요? 이 정도의 집을 사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한가요? 사람들의 월급은 얼마인가요? 프랑스에서는 무엇을 하면 돈을 잘 벌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랍니다. 돈 외의 영역에 대해서는 관심이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랍니다. 여기에 반해서 프랑스 사람들은 돈에 관한 화제를 거의 꺼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현대 사회의 시민으로서 경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지만 일상 생활의 대화 화제가 이렇게 경제 문제에 집중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건 결과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물신의 노예가 되어 있는지를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 부르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우리 인생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남편을 몇 명이나 두어 왔습니까? 어릴 때는 특정한 학교, 직업, 학교를 졸업하고는 특정한 직장, 지위, 재산, 아파트 평수, 자녀, 건강 등 이런 것들에게 목적을 두지는 않았습니까? 남편을 6명이나 두는 여인과 우리 인생이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그 어떤 남편도 이 여인의 인생에 책임을 지지 않듯이 우리의 삶의 이끌었던 세속적인 목적들은 우리를 허무로 몰아 넣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나오면서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처럼 나옵니다. 좌절과 실패와 실먕 가운데서 우리 인생의 목적, 소명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모릅니다. 과연 우리가 목숨 바칠 소명은 무엇입니까?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주님께서 먼저 부르시고 제자들은 그 부르심에 순종하며 따라 갔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부르셨고, 사도들은 따라 갔습니다. 이것이 지극히 단순한 원리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면 무조건 순종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누구라도 자기 의지로 자발적으로 주님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또한 주님의 부르심을 아무도 거절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 부자나 가난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나 죄인을 가리지 않으시고 누구나 다 당신의 사도로 부르시며 성화시키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부르심에는 아무도 예외가 될 수 없고, 아무도 핑계를 대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부족을 핑계 삼아 예수님의 부르심을 거절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주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는 것은 커다란 죄악입니다.

모세는 6번이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했습니다. 모세는 천지를 지으시고,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자신의 무능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처럼 말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론 같이 말 잘하는 사람을 붙여주실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처럼 입술이 더러우면 뜨거운 불덩어리로 입술을 정화해주실 것입니다. 바울 사도처럼 예수님을 박해하는 완악한 사람이면 말에서 떨어뜨려 정신을 차리게 하실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무식한 어부라면 사람 낚는 훌륭한 어부로 바꿔놓으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나는 죄인이고, 무식하고,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꽁무니를 빼서는 안될 뿐 아니라 뺄 수 있는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나 같이 유식하고, 점잖고, 바쁜 사람이 어떻게 감히 교회에서 굳은일로 봉사한단 말인가?’ 하는 말은 감히 하나님 앞에 내놓을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버리고 따라감

그런데 베드로는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까?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이 말씀은 베드로가 나중에 예수님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배를 육지에 대자마자 곧바로 현장에서 예수님을 무조건 따라가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멋은 버리는 멋입니다. 베드로는 그가 얽매였던 물신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 갑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물고기를 잡는 어부직을 버리고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영적 어부의 직을 향해 인생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헌신의 결과를 계산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가지 못합니다. 예수님 앞에 나온 부자 청년은 처음부터 부르심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약속을 따라 길을 떠났으며, 베드로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는 말씀 한 마디 듣고,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냥 따라나섰습니다.

우리가 우리 신앙 생활의 결과를 다 알아서 사는 것 아닙니다. 아무리 믿어도,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5분 후에 닥칠 일을 미리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베드로는 먼 훗날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나서야 예수님의 부르심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르심의 내용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부르시는 그 분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여 따라갔습니다.

공동체적 헌신

그런데 한 사람의 헌신은 다른 사람의 헌신을 자극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자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이 함께 따라나섰습니다. 한 사람이 결단하니까 함께 결단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한 사람의 헌신이 공동체적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개인에게서 만이 아니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연구에 의하면 한 도시에 어떤 교회가 아름답고 건전하게 성장하면, 주변의 교회가 모두 약해지고 한 모범적인 교회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의 모든 교회가 아름다워지고 성장해서 그 도시가 더욱 많이 복음화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즉 배와 그물과 부모, 형제, 친척을 다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이웃에게 그 말씀을 전하며 사는지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에 여러분의 뜻을 맞추려는 노력을 기울이십이오.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에 새로운 차원이 열릴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의지할 때, 영적인 눈이 열리고, 믿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한 결단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느 단계에 있습니까? 세상의 어려움 속에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단계에 있습니까? 억지로 마지 못해서 따라가는 단계에 있습니까? 아직도 예수님을 통한 세상적 성공에 만족해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자신의 의지적 결단 속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도 여러분의 마음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향해서 열심히 한 충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이런 단계를 넘어서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따라하며,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순종하십시오.

먼저, 문자적으로 순종하십시오.

둘째, 원리적으로 순종하십시오.

변화된 시대에서 문자적으로 적용 못 시킬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을 해석하여 그 원리를 적용하십시오.

때에 맞는 부름에 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때를 따라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날의 일용할 양식을 주시듯이, 일용한 복이 있습니다. 그날의 순종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날의 순종에 따르는 그날의 복이 있습니다. 한 날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날의 일용할 복은 일용한 부르심을 따라 옵니다.

날마다의 순종을 통해서 날마다 만선의 기쁨과 죄의 용서와 소명을 발견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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