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교회 일꾼 (골 1:21-29)
본문
옛날 미국 서부 개척시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마차였습니다. 이 마차가, 그 당시에는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교통수단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차는 크기는 작았지만, 그 안에서도 자리의 구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1등석, 2등석, 3등석으로 자리가 구분되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금처럼 특별하게 좌석을 배치해, 일반석과 특별석을 구분해 놓은 것은 아닙니다. 똑같은 자리였습니다. 좁은 마차 안에 무슨 자리의 구분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면 도대체 무엇으로 보고서, 어떤 기준으로 1등석, 2등석, 3등석으로 자리를 구분했을까?
그것은 자리의 위치가 아닌, 요금의 기준으로 구분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도로가 잘 닦여져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포장되지 않은 길을 달리게 되면, 덜컹거리면서 마차가 자주 고장이 나게 되는데, 마차가 고장이 나는 그 순간에, 어떤 반응을 하느냐에 따라서, 자리의 구분이 이루어 졌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마차가 고장이 났을 때, 1등석 표를 산 사람은, 마차가 고장이 나도, 그냥 마차에 앉아서 기다리면 됩니다.
2등석 표를 산 사람은 어떻습니까? 마차가 고장이 나면 일단 내립니다.
그리고는, 마차가 고쳐질 때까지 밖에서 휴식을 취하며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나 3등석 표를 산 사람은 어떻습니까? 마차에 내려서, 마부와 함께 그 마차를 기름때를 묻혀가며, 고쳐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부들은 마차가 출발하기 전에, 누구를 먼저 보겠습니까?
3등석 요금을 내는 사람이 누구인가? 이것을 유심히 살펴본 후에, 마차를 출발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3등석 승차권을 가진 사람들이, 일꾼의 역할을 제대로 해 줄 때에, 그 역마차가 목적지까지 잘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성도들 가운데서도 이렇게,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만히 앉아서 인정받고 대접만 받으려고 하는 1등석 성도가 있는가 하면, 또한 2등석 성도처럼, 구경꾼도 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분들이, 아마 이 2등석에 있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류의 성도들이 있는데, 어떤 성도들입니까? 소수이기는 하지만 팔을 걷어 부치고, 하나님의 일에 자신을 전적으로 드리는, 일꾼으로서의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가운데 어디에 속한 성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바라볼 때, 목회자들은 때때로 영적인 답답함을 느낄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정말 우리 성도들 가운데 진실한 크리스챤들이 얼마나 될까? 하나님의 교회에서, 모두가 열심히, 나름대로 열심히 사역을 하고 있지만, 정말 자기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자기가 맡은 사역에 사심 없이 헌신적인 모습으로 마칠 수 있는, 그런 진실한 신앙인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많은 목회자들이, 이런 고민을 가져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을 교회의 일꾼이라, 그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된 일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성직자”의 개념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을, 교회의 일꾼이라 말 할 때에, 성직자를 의미하는 단어를 쓰지 아니하고, “종”이라고 하는 단어, “디아코노스”라고 하는 헬라어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자신을, 종 “디아코노스”라고 굳이 표현을 하면서, 이 서신을 쓰고 있는 것일까? 이미 사도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그가, 굳이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하면서까지, 이 서신을 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당시에 영적인 위기감에 봉착해 있었던 골로새 교회에 필요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이러한 참된 일꾼이었고, 그런 필요성을 절감했던 바울은, 성령의 영감 가운데서, 골로새에 이러한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당시 골로새 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골로새 교회는 사람도 많고, 교회로서의 형태도 잘 갖추어져 있었지만, 그 가운데 구원의 기쁨을 소유하고,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수고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도 종의 자세로, 이제까지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는 가운데 사역하고 있었노라고, 너희도 이와 같은 자세로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고 봉사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골로새 교인들을 향해 바울이 말하고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의 어떤 사람입니까?
그것은 첫째로,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교회의 일꾼으로 말하기에 앞서, 복음의 일꾼이라는 것을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교회의 일꾼에 앞서, 복음의 일꾼을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여러분 이 순서는,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왜 바울이 이처럼 순서를 강조하고 있습니까? 교회의 일꾼은, 복음에 대한 일꾼이 되지 아니하고는 결코 될 수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는 채로, 단지 교회에 다닌 연수가 길다고 하는 이유만으로, 교회의 일을 맡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교회에 좀 다니다 보면 교회 생활에 익숙해져서, 교회의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이 여겨지지요? 그래서 그런 분들에게, 교회의 직분을 맡기게 됩니다.
단순히 교회의 생활에 익숙해졌다는 이유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체험도 없는 분들이, 교회에서 직분을 맡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천 교회는 아니겠습니다만, 오늘날 현대 교회 안에 이런 분들이 사실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복음에 대한 확신이 없이 교회의 일꾼이 된다고 하는 것은, 사실 대단히 위험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대단히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이런 성도들이 참 많이 있다는 것이지요. 대체로 교회에 문제가 생길 때 보면, 그런 분들로 인해 교회에 많은 문제들이 파생되어지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교회의 직책을, 무슨 하나의 출세된 자리로 생각을 합니다.
서리 집사에서 안수집사로, 또 장로로 권사로 올라 가야지만, 교회에서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장로나, 권사가 되어지면 하는 소리가 있지요? “다 이루었다.” 자신의 신앙의 최종적 목표를 이루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뒷짐 지고 “에헴” 한다는 겁니다.
참 이해가 안 되고, 또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실제 우리 한국 교회 안에서는 이런 일들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 분들을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왜입니까? 성경에도 보면, 주님의 제자들 가운데 이런 모습을 나타낸 제자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제자들 가운데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주님 앞에 나와 청하지 않습니까?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세상적인 직분, 사람들 눈에 좋게 보이고, 또 높게 보이는 타이틀에 집착하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는 무엇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까?
주님의 제자라 할지라도, 신앙생활 가운데 주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은혜를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되면, 결국 이렇게 자리다툼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수십년 신앙생활을 해도, 주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지내온 사람들, 하나님 은혜에 대한 체험이 없이, 자기중심적으로만 신앙생활을 해 오던 사람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이런 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교회에서의 신앙의 연륜을 내 세워, 당연히 자신이 교회에서 높은 직책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뜻대로 잘 안되지요? 그럴 때 그들이 흔히 쓰는 말이 있습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 낸다.” 여러분, 세상에 이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텃세를 부리겠다는 말 아닙니까?
텃세를 왜 부립니까? 다른 이유 없지요. 자기가 주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일부러 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을 가지고 말하는 분들은 없을 줄로 압니다. 하지만 무의식 중에라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요?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돌이 잘 굴러 갈 때는 이끼가 낄 틈이 없어요. 그런데 굴러가라고 만들어 놓은 돌이 안 구르고 가만히 땅 속에 묻혀 있으니까, 이끼가 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에 이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교회를 향한 원망과 불평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 속에 머물러 있지를 않으니까 불평하게 되고, 원망하게 되고, 이런 신앙생활을 계속해서 하게 되니까, 결국에는 사탄의 계궤에 넘어가, 자신도 모르게 교회의 주인 행사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교회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누구입니까? 다 하나님의 종에 불과합니다. 종이 무슨 직책이 있습니까? 종에게 주어진 것이 있다면, 주인을 더 잘 섬겨야 하는 책임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종에게 무슨 텃세가 있겠습니까? 종에게는 오직 주인의 뜻을 따르는, 순종과 충성만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자기보다 늦게 교회에 등록한 굴러온 돌이, 오래 박혀 있던 자신을 빼 내 주면,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신앙이 복지부동 했음을 깨달으며 회개하는 가운데, 더 열심을 내어 섬기는 모습으로 더 잘 굴러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교회를 향해 불평하며, 교회의 명을 받고 현재 열심히 일하고 있는 다른 성도들을 향해,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 라고 말하며, 되려 화를 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천 교회에서는 이후에라도,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 이런 생각이나, 말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까? 흐르는 강물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여 있는 연못이 아닙니다. 온갖 생물들이 드나들고 함께 공유하며 살아가는, 강물과 같은 교회가 날마다 부흥하는 교회이지, 연못의 생물들과 같이 텃세를 부리고, 자기 영역을 고수하고, 새롭게 등록한 다른 사람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교회는, 절대 부흥할 수가 없습니다. 부흥이 뭡니까? 그런 교회는 침체 일로를 걷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수적인 전통을 고수하는 교회치고 부흥하는 교회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들에 왜 이러한 문제들이 자주 발생하는 것입니까?
교회가 진정 관심을 가져야 할 것에 관심이 없다 보니, 이런 유의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만 아니지요? 모든 종교들이 다 그렇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진리의 도에 관심을 가지기 아니하고,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모든 종교를 불문하고, 저마다 다 엉뚱한 짓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중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뭐에 관심이 있다?” 젯밥에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중이라도, 해야 할 본업인 염불에 관심이 없으면, 그 외적인 일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뜻하는 말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교회가 가진 가장 값진 재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진리의 하나님의 말씀, 영생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도, 이 복음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인 줄로 믿습니다.
초대교회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 때는 이렇게 훌륭한 건물로 없었습니다. 또 요즘 소위 부흥한다고 하는, 교회에서 실시하는 특별한 프로그램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능력은 어떻습니까? 그 당시 세상을 뒤엎었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복음이 가진 능력을, 초대교회 성도들은 알았고, 또한 초대교회 안에는,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러한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교회의 일꾼이기 전에, 복음의 일꾼이십니까?
복음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고, 복음만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믿고 계십니까? 믿고 계신다면, 크게 아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탄에게 결박된 인생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인생이 되게 하는 것은, 오직 복음만이 가진 능력인 것을 여러분은 확신하고 계십니까? 이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며, 오늘도 교회의 일을 감당하고 계십니까? 이 질문 앞에, 오늘 여러분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교회의 기념일을 자축하는 한 행사장에서, 행사를 진행하는 집사님이 그 교회의 당회장 목사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을 때가 언제이고, 가장 슬펐을 때가 언제였습니까?” 그 때 이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가장 기뻤을 때는, 사람이 변할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을 때, 하나님의 복음이 들어가서 그 사람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을 때, 아마 가장 기뻤던 것 같다. 그리고 가장 슬펐을 때는, 마땅히 변해야 될 사람이 있는데, 변하지 않는 그 사람을 바라보면서도, 그 사람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에, 그 때가 가장 슬펐던 것 같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교회 안에서,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평신도로서 하나님의 일을 섬기고, 작지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 나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의 이러한 사역을 통해서, 정말 예수를 믿지 못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어지고, 변하지 않았던 우리 주변의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또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했던 믿음이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섬김과 봉사를 통해서 달라질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가 이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사역의 유일한 보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는 복음의 일꾼으로서, 모든 교회의 일들을 감당해 나가시는, 충성스런 주의 종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로, 바울이 말하는 진정한 교회의 일꾼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의 사역의 목적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자연히 교회의 일들을 거들게 되지 않습니까? 성가대도 하게 되고, 주일학교 교사도 하게 되고, 또 안내나 주차관리 같은 여러 가지 교회의 일들을 돕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의 일을 할 때마다, 우리는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그 목적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가 이처럼 무기력하고, 세속화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교회 일을 함에 있어서, 그 목적을 망각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볼 때가 많이 있습니다.
크리스챤 저널리스트 언론가였던, “말콤 머그릿치”라고 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왜 교회에 가는가? 아마도 교회에 가기 위해 가는가 보다. 사람들은 왜 예배를 드리는가? 아마도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배를 드리는가 보다. 사람들은 왜 기도하는가? 아마 기도하기 위해 기도하는가 보다. 사람들은 왜 성경공부를 하는가? 아마 성경을 공부하기 위해 공부하는가 보다. 사람들은 왜 봉사하는가? 아마 봉사하기 위해 그냥 봉사하는가 보다.”
분명한 목적이 없이, 맹목적으로 교회에서 일하는 현대 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표현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보면 성도들도 교역자들 못지않게, 나름대로 바쁘게 활동하는 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정해준 시간에 성경 공부를 배운다든지, 아니면 다른 교회에서 가지는 세미나에 참석을 한다든지, 특별히 배움에 있어 대단한 열정을 가진 분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에 대한 탐구, 열정이 넘친다는 것, 대단히 좋은 현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좋은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왠지 목회자의 마음에는 무거운 회의가 들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저 분들이 배우는 것은 좋은데, 그 배움을 통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냐?” 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에는, 왠지 마음이 무겁고, 안타깝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배움을 통해, 자신들이 일하는 사역의 영역이 늘어가고, 그 사역의 본질을 회복하며, 그들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구체적인 변화가 나타나야 되는데, 그런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더 침체되어진 사역과, 더 침체되어진 신앙생활의 모습들을, 목회자들이 발견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예전에 비해 많이 배우고는 있지만, 그들이 교회에서 행하는 일은 극히 미미하다는 것이지요. 성경의 지식으로 머리는 커져 가는데, 정작 일해야 하는 손과 발은 점점 줄어들어, 가분수의 머리를 가진, 괴물과 같은 신앙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머리는 좀 줄이더라도, 주님의 뜻과 명령을 행하는 손과 발은, 점점 더 늘여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의 일꾼으로 세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이유가, 바로 오늘 본문 25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교회 일꾼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늘 우리에게 사역을 주셨고, 우리를 교회의 일꾼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이루려면, 그 말씀이 가르치고 있는 핵심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26절에 이 핵심을 바울은 “비밀”이라는 단어로 표현을 했고, 27절에 그 비밀의 정체를 이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충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의 말씀은 그 비밀의 핵심을 담고 있으며, 그 비밀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며,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 본문 말씀 28절에 보세요. 여기에 보면, 우리가 주목해야 될 세 가지 중요한 동사가 나타나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전파한다” “권한다” “가르친다”우리 믿는 자들이 전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권고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의지 하도록 우리는 권고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가르칩니까? 그리스도를 가르칩니다. 우리의 소망이시며, 우리의 생명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것이, 우리의 사역의 목표요,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렇게 예수님을 전파하고, 예수님을 따르도록 권고하고, 예수님을 가르치는 최종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오늘 28절 말씀에, “그들을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라.”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함이라고,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여러 사역이 있지만,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 그것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인가? 우리가 맡은 교회의 일을 하는 가운데,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러한 질문을 수시로 던져 보아야 할 줄로 압니다.
분명한 목적도 없이, 그저 자기 열심만 있는 봉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한, 분명한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주를 위해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하며, 형제와 자매와 이웃을 섬기는 충성된 복음의 일꾼들이, 충성된 교회의 일꾼들이, 다 되어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람이 변화되고, 사람이 온전해 지는 그러한 곳에, 교회의 부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곳에, 변화된 사회가 있을 수 있고, 또 그러한 곳에 변화된 나라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교회의 가장 본질적인 이 일에 대해서, 얼마나 투자하고 있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으며, 또 얼마나 기도하고 있습니까?
사람을 구원하고, 사람을 세우는 일,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우리를 쓰시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성천 교회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소망은 무엇이겠습니까? 새생명 축제를 시작하고, 1차, 2차 예비 작정을 하고, 또 다음 주일이면 본 작정을 하게 될 텐데, 과연 이 시점에서 우리 성천 교회 성도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그 해답은, 오직 기도와 전도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얼마만큼 기도하고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은 얼마만큼 전도하고 있습니까? 기도하고 전도하는 만큼, 생명의 열매를 거두게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고 전도하는 만큼, 우리 성천 교회는 부흥하며 성장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하고 전도하는 만큼, 여러분의 이웃과, 이 금천구의 모든 지경이 변화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이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할 일은 딱 두 가집니다. 하나는 기도요, 하나는 전도입니다. 아멘!!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가지고 부흥을 꿈꿀 수 있겠습니까?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여러분,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기도와 전도가 더불어서 뜨겁게 진행되는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왜 기도합니까?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전도합니까? 전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막 1 : 38절에서,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지요?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여러분, 주님은 이 전도의 사명을 위해 밤마다 새벽마다 부르짖으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이 전도의 사명을 위해 십자가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감당하신 줄로 믿습니다.
이런 기도가 있는 교회가, 이런 전도가 있는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 또 세상에 영적 영향력을 미치는, 능력 있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바로 이러한 일에 수고하고, 헌신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 추구하는 영적인 일들에 빠지지 말고, 적극적으로 동참 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사역들에, 종의 자세로 봉사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에 완전한 자로 세워 가시는, 충성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한 봉사가 아니라, 또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기 위한 봉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하는 순수한 신앙에서의 섬김이 있는 봉사, 이러한 복음의 일꾼으로서 봉사를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교회의 일꾼은, 이러한 일을 남이 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그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팔을 걷어붙이고, 마차를 운전하는 마부를 도와서, 손에 먼지와 기름때를 묻혀가며, 마차를 온전한 상태로 만들어서, 결국 그 목적지까지 다다르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가, 이 3등석 티켓을 가지고, 앞으로도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며, 복음의 능력을 의지하는 가운데, 또 사역의 목적을 바르게 깨닫는 가운데,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그래서 여러분의 신앙이, 이 독산동 뿐만 아니라, 금천구 일대에까지, 나아가 우리나라 교회 전체에 널리 알려지는, 좋은 신앙의 소문이 나는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들,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