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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받는 성도는 (살전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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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받는 성도는 (살전 1:2~5)


1. 칭찬

한때 유명 TV 프로그램에 “칭찬합시다”라는 것이 있어서 전국적으로 칭찬 릴레이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이 참 좋았던 이유는 우리 사회에는 칭찬받을만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그런 사람들 때문에 우리 사회가 그래도 살만한 사회라는 것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듣고 보는 사람들에게도 자신을 살펴 선하게 살려는 노력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프로그램이 다시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마음들이 생겨나면 삭막한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요?

만약 그런 프로그램이 다시 생긴다면, 여러분을 칭찬하기 위하여 TV 카메라가 여러분을 찾는 일이 있을까요? 설사 TV 카메라가 여러분을 찾으러 오지는 않더라도, 여러분들이 칭찬을 받아야 할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우리 주님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주님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성도들로부터 칭찬받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이 주님과 다른 성도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던 사람들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통하여 여러분이 주님으로부터 칭찬받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살펴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칭찬받은 데살로니가 성도들

바울이 두 번에 걸쳐서 편지를 보낸 바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가 제2차 전도여행 때 마게도냐 지역에서 빌립보 교회에 이어 두 번째로 개척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에서의 전도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불과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요. 그 이유는 유대인들의 핍박이 너무나 심했기 때문입니다. 방해가 너무나 심해지자 바울 일행은 더 이상 데살로니가에 머물 수가 없어서 급히 베뢰아로 피신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거기까지 쫓아와서 괴롭혔고, 그래서 바울 일행은 할 수 없이 또 다시 아덴으로 피했습니다. 그렇게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로부터 점점 멀리 갔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은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갖 태어난 어린 교회인 데살로니가 교회가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데살로니가라는 도시 자체와 그 시민들은 복음에 대해 아주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로서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불신자들인 그들의 친척들과 이웃 사람들로부터 경멸과 조롱을 받고 신앙을 포기하지 않을까? 헬라 귀부인들이 예수님을 믿어 신자가 되었는데, 그 남편들이 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들이 아내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을까?’ 등등 염려되는 것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초신자들이고, 따라서 복음에 대한 지식과 신앙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사도가 영적인 어버이로서 염려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내어 교회의 사정을 알아오게 했습니다.

그 후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살핀 디모데를 통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디모데가 가져온 소식은 너무나 기쁜 내용이었습니다. 도대체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어떠했기에 바울 사도가 그처럼 기뻐했을까요? 바울은 바로 오늘 본문 3절에서 그가 기뻐하고 감사하는 구체적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3. 칭찬받는 성도가 되려면 …

1) 믿음의 역사가 있어야

바울이 기뻐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첫 번째 모습은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었으며,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자신들의 구주이심을 믿었습니다. 그가 죽었으나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시고 부활하셨다는 것, 그리고 승천하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가 다시 오시리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진 믿음은 “역사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란 ‘일하다’에서 유래한 말인데요. ‘일을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재료와 수단으로 건축이나 문화적인 활동 등 온갖 종류의 일을 하는 것을 뜻하는 말인데, 특히 이 말에는 ‘적극적인 열심’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즉 “역사”라는 말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가진 믿음이 그들의 삶의 전 영역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게 나타났다는 것과 그들이 그것을 아주 적극적으로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힘썼다는 말입니다. 즉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은 단순한 신념이 아니었습니다. 머리에만, 가슴에만, 입에만, 때로는 교회 안이나 예배 때만 나타나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실제 생활에서 뭔가 일을 일으키고 어떤 역사를 일으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의 믿음은 이제 갓 시작된 것이었지만, 그들의 삶을 이전과는 다르게 만들었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을 되게 했고, 일반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내었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고(2:2),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2:14~17)”고 말했습니다. 기도와 성경공부는 잘 하는데, 예배 참석은 잘 하는데, 주위에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있는데도 그들을 모른 체 한다면 그런 사람의 믿음은 역사하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이와 같은 말씀을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중국 교회의 지도자요 선교전략가인 토마스 왕(Thomas Wang)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에 그의 어머니의 구원을 위해서 열심히 전도한 결과, 어머니가 예수님을 믿기로 승낙은 했지만 사실 마음으로는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가 북경에 있는 어느 선교사 가정에서 가정부로 일하게 되었는데요. 그 선교사 부부가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을 보면서 ‘나도 저 분들이 믿는 예수님이라면 한 번 믿어봐야 되겠다’고 다짐하고, 비로소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선교사 부부의 역사하는 믿음이 또 다른 역사를 일으켜 그의 어머니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역사하는” 믿음입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머리나, 가슴이나, 입에만 있는 믿음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나는 믿음입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교회 안이나 예배 때만 나타나는 믿음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뭔가 일을 일으키고 어떤 역사를 일으키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믿음 때문에 여러분의 인격과 생활이 믿기 전과 달라지고, 믿음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 되고, 믿음 때문에 일반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두 번째로 바울이 기뻐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모습은 그들의 사랑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성부의 사랑,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사 못 박혀 죽으신 성자의 사랑, 늘 우리 곁에 거하시면서 은혜를 주시는 성령의 사랑, 그리고 이러한 사랑 그대로를 이 땅에 실천하며 살라고 하신 사랑의 명령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칭찬을 받는 이유는 그들은 이러한 사랑을 받고 그것을 아는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이 사랑으로 인한 “수고”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수고”란 ‘구타, 매질’ 등 고난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그리고 육체적인 피로를 일으킬 만큼 ‘고된 일, 수고’를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즉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사랑의 실천을 하되 수고와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사랑에는 희생과 수고가 따릅니다. 이것을 그대로 보여주신 분이 우리 예수님입니다. 로마서 5: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십자가를 지시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사랑에는 300 데나리온이라는 거액의 향유를 주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과 눈물로 주님을 닦는 수고가 뒤따랐습니다. 주님을 향한 루디아의 사랑은 자신의 집을 교회로 사용하도록 내어드리고, 자신의 사업을 통하여 바울 사도의 복음 사역을 물질로 섬기는 수고가 뒤따랐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것을 알았고,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그 누구에게도 받지 못할 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행동이 없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실천되지 아니한 사랑, 아무리 그것이 가슴에 뜨거운 것으로 자리 잡고 있을지라도 진정한 사랑은 아닙니다. 그들은 병자와 굶주린 자와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를 돌보기 위해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구제를 했으며,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데 희생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처럼 여러분의 사랑에도 그와 같은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사실 사랑이 있으면 수고는 더 이상 수고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자녀를 위하여 수고하는 엄마의 수고가 수고입니까?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들의 모습은 수고라는 말도 부족합니다. 죽도록 수고하고도 즐거운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수고하는 사랑”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나, 교회와 성도를 향한 사랑을 수고하면서 힘과 노력과 돈을 들여서 실천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소망의 인내가 있어야

바울이 기뻐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세 번째 모습은 그들의 소망과 소망으로 인한 남다른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소망”이란 ‘내가 바란다’하는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확실히 보장된 미래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즉 반드시 그렇게 될 줄로 믿고 인내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의 “인내”라는 말은 ‘용감한 군인이 극한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버텨나가는 기상(氣像)’을 의미합니다. 우상에 젖은 이방 도시에서 외국인이 전해준 기독교 복음을 믿고 따른다는 것, 그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 잃어야 한다는 것, 때로는 가족과 재산과 심지어 목숨까지도 버려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주님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에 막다른 골목처럼 보이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낙심치 않고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압박과 설움을 당해도 굴복하거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소망으로 인내했다”는 말은 현실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이 다 보시고 아신다는 것, 그 주님께서 어떤 형태로든 갚으실 것이라는 것, 장차 그 주님 앞에 서거나, 혹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사 승리하게 하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2차 대전 때에 한 유대인이 독일의 지하 감방에다가 다음과 같은 말을 써 놓았습니다. “햇볕이 보이지 않아도 나는 태양을 믿는다. 비록 느끼지 못하더라도 나는 사랑을 믿는다. 비록 잠잠하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매 순간 동족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또 자신이 언제 죽을 지 알 수 없는 가운데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쥐들은 캄캄한 항아리 속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요? 쥐를 캄캄한 항아리 속에 넣었더니 3분을 못 견디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항아리로 한 가닥의 빛이 들어가게 했더니 그 쥐들이 36 시간을 살아 있더랍니다. 캄캄한 항아리 속에서 3분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쥐들은 체력이 다해 죽은 것이 아니라, 절망하여 죽었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결론이었습니다. 삶을 꿋꿋이 살게 하는 힘, 그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 힘을 소망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의 빛은 위로부터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래가 보장되면 참을 수 있습니다. 집을 수리하기 위한 며칠 동안의 불편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와 같이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이 세상의 삶은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소망이 있었기에 그 모진 시련, 환란, 시험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들처럼 주님에 대한 소망을 확실히 하셔서 모든 어려움과 시련과 시험을 이기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일이 잘 안 풀리고 꼬여도 참으십시오. 아무리 사람들이 여러분을 괴롭혀도 참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진 문제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제 자리 걸음만 하고 있을지라도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는 주님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4. 신망애와 언행의 일치

독일의 ‘발츠’라는 목사님이 미국의 어느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미국 교회 목사님이 어느 교인을 소개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우리 교회 평신도 챔피언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습니다.
“이 분은 일주일 내내 매일 저녁을 교회에서 지내는 분입니다”라고 소개하면서, 그분이 교회 일에 얼마나 열심인지를 소개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 들은 발츠 목사가 다시 미국 목사에게 질문했습니다.
“그 분은 가족이 없습니까? 그리고 직장도 없습니까? 또한 다른 사회생활은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 교회 목사는 “다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발츠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분은 평신도 챔피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정에서, 사회에서, 직장에서 해야 할 임무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이 성도를 위한 목사의 칭찬은 도리어 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균형잡히고 조화로운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죠.오늘 본문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칭찬받은 이유는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덕목인 “믿음, 사랑, 소망”을 하나도 빠짐없이 골고루 갖추고 있었고, 그것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믿음, 사랑, 소망”은 말이나 구호가 아니라, 실제 생활이었습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 앞이나 교회에서가 아니라, 예배 시간이나 성도들과 함께 있을 때가 아니라, 세상에서 직장에서 불신자들과 함께 있을 때 드러나야 합니다. 사랑은 수고와 희생을 마다하지 않아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과 일들, 그리고 사람들로 인하여 아무리 괴로워도 인내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데살로니가 성도들처럼, 여러분들에게도 이 “믿음, 사랑, 소망”이 늘 있고, 그것이 여러분의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되고, 수고하고 희생하는 사랑이 되며, 인내하게 만드는 소망이 되어, 주님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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