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의 믿음의 간증 (히 11:24-26)
본문
1,911년 남극 정복의 비전을 가진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노르웨이의 탐험가 아문센이요, 한 사람은 영국 해군장교 출신인 스코트 경이다. 두 탐험대는 똑같이, 남극 정복의 비전을 가지고 출발하였다. 아문센은 출발하기 전에, 극지에 사는 에스키모 인들의 생활을, 철저히 분석하고 익혔다.
모든 장비와 물품을 눈썰매에 싣고, 이를 에스키모개들이 끌도록 했다. 개와 사람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게 했고, 물건과 복장, 장비 등은 최대한 가볍게 하며, 세심하게 준비하였다. 그는 하루에 6시간 이동한 후, 반드시 휴식을 취했고, 중간 캠프에 물품을 저장했다.
개썰매로 남극점을 향해 출발했고, 출발한 지 55일 만에, 1,911년 12월 14일 인류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남극탐험에 있어서, 그의 경쟁자로 나선 영국의 스코트 경은 달랐다. 그는 남극 탐험을 위해, 모터 엔진과 망아지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모터 엔진은, 5일 만에 강추위에 고장 났다. 망아지는 동상에 걸려 죽고 말았다. 사람들이 대신 짐을 지고 가야만 했다. 한 사람이 200파운드의 짐을 짊어져야했고, 중간 중간에 묻어두었던 물품은 잘 표시를 하지 않아, 반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음식물과 물자 부족으로, 고난을 당하였다.
모두 다 동상에 걸려, 신발을 신는데도, 1-2시간씩 걸렸다고 한다. 겨우 극점에 도착했지만, 이미 35일 전에 아문센이 이미 기를 꽂고 갔다. 그리고 스코트에게 건투를 빈다는, 쪽지가 남겨져 있었다. 결국 스코트 일행은, 모두 다 죽고 말았다. 왜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났는가? 지도자의 문제다.
지도자를 잘 만난 사람들은, 결국 극지를 정복하고, 성공적으로 돌아 왔다. 반면에 지도자를 잘 못 만난 사람은, 결국 다 죽임 당했다. 이처럼 지도자가 중요하다. 좋은 지도자를 만남은, 큰 축복이다. 훌륭한 지도자는 명령하지 않고, 앞에서 백성을 이끌어간다.
지도자는 따르는 자의 미래를 주장한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최대지도자로, 애굽에서 350년 동안 노예생활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했다. 또한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위대한, 영웅적인 지도자다.
모세는 신비한 사람이다. 출생과정도 신비롭고, 소명도 신비하다. 바로 앞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한 일도, 참 신비로운 드라마다. 120세로 죽을 때, 그의 눈은 흐리지 않았다. 비스가스 산에서 죽었는데, 그의 시체는 하나님께서 신비하게 감추어서, 찾을 길이 없었다.
성경은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신33:1), ‘여호와의 종’(신34:5), ‘하나님이 대면하여 아시던 자’(신34:10), 즉 하나님이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모세가 위대한 삶을 살았던 비밀은 믿음이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으로 살자.
모세는 120세를 살았다. 모세의 삶은 40년씩 3기로 구분이 된다. 애굽에서 살았던 40년, 광야에서 보낸 40년, 그리고 출애굽의 지도자로서의 40년이다. 본문은 모세가 장성했을 때, 그의 나이 40세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모세의 제1기 믿음의 간증은, 3개의 동사로 설명할 수 있다.
1. 모세는 거절했다(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믿음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마땅히 거절해야 할 것을 거절해야 한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함은, 애굽의 왕자이다.
오늘날 청와대의 권력 정도가 아니다. 전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옥좌를, 모세는 거절했다. 그래서 세상의 부귀, 영화, 권세를 다 포기해 버렸다. 역사가 요세푸스 따르면, 바로의 공주는 무남독녀였다. 더군다나 그녀에게는 아이가 없어서, 바로의 공주는 시녀들을 데리고, 나일 강으로 목욕하러 갔다.
그 당시 애굽 사람들은, 나일 강을 신으로 섬기고 있었다. 특별히 생산의 신이었다. 그래서 아이 없는 사람들은, 나일 강에서 목욕을 하면, 아이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때, 바로의 공주는 갈대 상자에 들어 있는 모세를 발견했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아마 “이 아이는 나일 강 신이, 내게 준 아이니, 아들로 삼아서, 훌륭한 인물로 키워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모세를 아들로 받아들여, 애굽 궁으로 데리고 들어가, 애굽의 왕자로서 최고의 교육을 받게 했다. 모세는 모든 면에 있어서, 탁월한 사람이었다.
(행7: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라고 하였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애굽과 에티오피아 사이에 전쟁이 났을 때, 모세는 바로를 대신해서, 애굽의 총사령관으로 출전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아무튼 모세는 얼마든지 부귀와 영화와 권세를 다 누릴 수 있었다.
바로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지만,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했다. 그 순간 부귀, 영화, 권세를 모두 다 포기해 버렸다. 그 이유는 믿음 때문이었다. 모세에게 있었던 이 믿음은, 부모님에게 물려받았다. 모세는 그의 어린 시절을, 부모의 품에서 자랐다.
바로의 공주가 나일 강에서, 모세를 발견했을 때, 그때 멀찌감치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바로의 공주에게 다가가, 자기 어머니 요게벳을 모세를 위한 유모로 소개해 주었다. 그 결과 모세는 어려서부터, 그의 어머니 품에서 신앙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들은 부지런히 어린 모세에게, 힘써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심어 주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허락하셨던 약속들을 어린 모세의 마음속에, 깊이 심어 주었다.
모세는 어린 시절,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어머니에게 받았던 신앙적인 교육으로 인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마음속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모세는 어릴 때, 불과 얼마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에 그의 어머니를 통해서, 신앙 교육을 받았다.
그 뒤에 모세는 오랫동안 궁에서, 세상 사람이 부러워하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모세의 일평생의 삶을 지배하며 주관했던 교육은, 애굽의 궁에서 받았던 세상적인 교육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서 받았던, 신앙 교육이었다.
따라서 어릴 때 가정에서 받는 교육을, 절대 소홀히 생각할 수 없다. 주일학교에서 실시하는 신앙교육을, 결코 소홀히 하면 안 된다. 주일학교 교육이, 어린아이의 일평생의 삶을 주관하기에, 구세군 창설자인 윌리암 부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마귀가 손을 쓰기에 앞서, 우리의 자녀들에게 먼저 하나님을 가르쳐야 한다. 마귀가 우리 자녀들에게 죄악을 심어 주기에 앞서, 우리가 먼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을 심어 주어야 한다.” 어린 시절의 신앙 교육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나이 40이 되자, 자신의 인생관이 정립되며,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다. 애굽의 보좌에 앉으면, 온 세상을 다스릴 수 있지만, 영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음을 모세는 알았다. 죄악 된 그 나라에, 희망이 없음을 알았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이 권력이, 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됨을 거절했다. 부귀와 명예를 거절함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길러 준 어머니의 사랑을 거절하는 데에는, 더 큰 아픔이 있었을 것이다. 바로 왕의 공주는, 그를 낳아 준 어머니보다도, 더 큰 애정을 쏟은, 모세를 길러 준 어머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공주의 곁을 떠나야 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귀하다. 모세가 자기를 길러준 어머니를 사랑함이 죄는 아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사랑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방해된다면, 이는 명백히 거절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마땅히 거절한 것들을, 거절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거절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No라고 해야 할 때 ‘No’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어떤 신학자는 정의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은 “아니오”라고 말할 때, “아니오”라고 말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가서, 보디발의 집에 총리가 되었다. 제법 성공하게 되었다. 이제 출세의 길에 접어들었는데, 보디발의 아내가 청년 요셉을 유혹했다. 그 당시 장군들의 아내는 미인이었다. 요셉은 젊은 청년의 피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거절하면 자기가 높이 쌓아 올린 성공이, 무너질 줄 알았다.
그러나 요셉은 망설이지 않았다. 보디발의 아내가 그의 옷을 잡고 늘어질 때, 그는 “안 돼요, 어찌 이 큰 죄악을 내가 하나님 앞에서 행할 수 있나요!” 그러나 많은 교인이, 세상 문화 앞에서 “아니요”라고 말해야 때에, 말하지 못하고 타협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금 신상 앞에서, 절하라고 강요받았을 때에 “아니요”라고 대답하며, 왕이여! 우리를 풀무 불에 던질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 내실 것이다.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우리는 금 신상 앞에 절하지 않겠다(단3:17-18).고 외쳤다.
이처럼 성공과 부귀가 보장된 놀라운 제안이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굳게 서서, “No!”라고 외치는 그런 사람들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으신다. 그러므로 거절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2. 모세는 더 좋아했다(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모세는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한 가지는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림”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음”이다. 전자는 낙을 누리는 길이다. 후자는 고난의 길이다. 그런데 모세는 두 가지 중에서, 믿음으로 고난의 길을 택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가는, 영원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죄악의 낙을 누리는 길은, 잠시 누리는 길로, 그 끝은 파멸이다. 독버섯은 눈으로 보기에 아름답다. 그러나 그 속에는, 사람을 죽이는 독이 있다. 마약도 담배도 그렇다. 처음에는 좋지만, 끝이 안 좋다. 죄악이 그렇다. 육체적인 즐거움이 있다. 쾌락이 있다.
그러나 죄악의 낙이라는 말 앞에, “잠시”라는 말이 언제나 붙는다.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린 후에는, 오랜 기간 동안, 고통과 파멸이 대가로 따라 온다. 그래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았다. 인간의 부귀영화 권세는, 잠시 누리는 죄악의 낙에 불과하다.
만일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으면서,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물론 잠시 동안 부귀영화를 누리며, 애굽 왕 바로가 되었을는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애굽 사람들로부터, 신으로 숭배를 받고, 죽고 난 후에는, 피라미드에 묻혔을 것이다.
그의 육신은 미라가 되어 보관 되지만, 그의 영혼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던져져, 지금도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믿음으로, 바른 선택을 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택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약속하신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었다.
복에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공하는 복, 또 하나는 위대해지는 복이다. 사람들은 성공이 남보다 잘 되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 성공에 따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예수님 뒤에는,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복을 받으려고 따라다녔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정 위대해지는 복을 주셨다. 성공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경쟁해서, 승리함을 말하지만, 위대함은 예수님과 비교해서, 예수님을 닮아 감을 말한다. 성공이 다른 사람과 싸워 이겼다고 말한다면, 위대함은 자기와 싸워서 이김이다.
성공은 세상을 얻는 일이라면, 위대해지는 일은 예수님을 얻는 일이다. 어려움이 다가오면 주님이 위대해 지기를 원하신다고 깨닫기 바란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열심히 믿어야 된다. 그래야 네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성공할 수 있단다.” 물론 이런 가르침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더 정확한 가르침은 무엇인가? “살다보면 선택을 해야 될 때가 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바른 선택을 하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일보다도, 언제나 의로운 고난의 길을 택하라. 그것이 영원히 榮?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자녀들을 가르쳐야 한다.
‘모세’의 뜻이 “물에서 건져내다”라는 뜻이다. 모세가 아기 때 나일 강에 ‘던짐’을 받았는데, 바로의 공주에 의해서 ‘건짐’을 받았다. 그런대 ‘던짐’과 ‘건짐’을 받은 모세가, 나중에는 ‘던짐’을 받은 자기 백성을 ‘건지는’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누군가를 ‘건지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던짐’과 ‘건짐’을 받는 경험을 하여야 한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건져내려면, 부모인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 자녀들을 믿음으로 키워야 한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모세처럼, 주님의 나라를 위해 귀히 쓰임 받는, 위대하고도 훌륭한 일꾼들이 다 되기 바란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던” 모세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기 바란다. 그리고 이 믿음이, 우리 자녀들에게도 있기를 바란다.
3. 모세는 바라보았다(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버리고 고통을 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상주시는 분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얻는 상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에게서 얻을 상을 바라보았다.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도 더 큰 재물로 여길 수 있었다.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잠시 누릴 상이 아니라, 영원히 기억될 상급을 바라보았다. 모세의 시선은 하나님을 따랐다. 아마 모세가 바로 왕을 보았더라면, 절망했고, 원망하고 짜증내는 무지한 이스라엘 백성들만 보았더라면, 그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모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모세의 선택을 비웃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상급으로 축복해 주셨다. 세상의 쾌락도 잠깐이고, 고난도 잠깐이지만, 상급은 영원하다. 불멸의 상급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히12:2) 예수님께서도 고난의 십자가를 선택하심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셨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왜 실패했나? 상급을 바라보지 못했기에, 망하게 되었다. 같은 땅이지만, 상급이 없음과 있음에는, 수확이 몇 배 차이가 났다.
바울도 (롬8:18)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보상을 바라보았다. 예수님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천국에서 상급이 있다고 하셨다. 따라서 믿음은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이다. 우리에게는 천국이 상급으로 준비되어 있다.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한 수고가 헛되지 않는다.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음을,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이라 했다. 모세는 역사적으로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 그보다 훨씬 뒤에 예수님이 오셨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살았는데, 성경은 그 삶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았다고 말한다.
무슨 말씀인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몹시도 핍박했다. 어느 날 바울은, 대제사장의 공문을 손에 쥐고, 다멕섹에 있는 성도들을 붙들어,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기 위해, 다멕섹에 거의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다.
홀연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그를 둘러 비추면서, 예수님께서 바울의 히브리식 이름을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함은, 그리스도 예수를 핍박함이다.
이처럼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음이, 곧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이라는 뜻이다. 모세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 애굽의 박물관에 가면, 피라미드 속에서 발굴된 보화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피라미드 하나에 들어 있는 금의 무게만 수 천 톤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그런데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훨씬 더 크고 값진 재물로 여겼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보화와 비교할 수 없다. 훨씬 더 값지다.
우리가 받을 상이 길어질 수 있다. 그러나 낙심할 필요가 없다. 상 받기까지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오히려 유리하다. 왜냐하면 결제되지 않은 대금은, 언제나 이자가 동반되기 때문이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 가운데 실망과 좌절에 빠진 분이 계신가요?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란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실망과 낙담에 빠지지 않는다. 여호와를 앙망하면,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이 올라가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고, 달려가도 고단치 않는다.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바로의 군대만 보고 있지 않았다. 홍해의 넘실거리는 파도만 보지 않았다.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베드로가 주님을 볼 때는, 파도를 이겼다. 그러나 풍랑을 볼 때는 물속에 빠져들었다.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
우리가 얼마나 천국의 상급을 갈망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신앙생활의 양태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하늘나라는 성도들에게 위대한 보상이다. 우리는 이러한 보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늘의 상을 얻기 위해, 우리는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고 했다.
이 상급신앙으로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