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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은혜 가운데 있으라 (행 13: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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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은혜 가운데 있으라 (행 13:13~43)

초지일관이라고 합니다. 처음 마음에 작정한대로 밀고 나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처음에 마음을 먹은 대로 끝까지 일을 마쳐가는 사람이 과연 얼마 있습니까? 처음 마음먹은 대로 잘 안 되는 이유는 처음 각오야 대단했지만 그런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일들이 얼마든지 우리 앞에 닥쳐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들을 하게 됩니다. 대단한 각오를 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꼭 이루리라 작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가지 못해서 ‘아니올시다’입니다. 그만큼 작정한 것을 이루기란 힘이 듭니다. 하지만 이를 이겨낸 사람들만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땀 흘려 수고하지 않고서야 어찌 거둘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이를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만큼 수고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새벽 기도회에 빠지지 말고 참석해야지 하고 결심을 했지만 새벽에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하루 이틀은 버텨 보았지만 도무지 몸이 말을 듣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오 분만 더 오 분만 더 하다 깜빡 했는데 다시 눈을 떠보면 새벽기도회 시간이 훌쩍 넘어가 버리고 만 것을 알게 됩니다. 내일은 기필코 일어나야지 했지만 또 다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알리는 벨 소리가 울리면 바로 벌떡 일어나야지 조금만 더 하면 이미 끝나고 난 다음입니다. 그렇다면 저녁 시간은 또 어떻습니까? 작정을 하고 기도하려고 했는데 발걸음을 잡아끄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근데 막상 그러한 프로그램에 일단 눈을 돌렸다하면 내일부터 하자 이렇게 되고 맙니다. 또한 끈기를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도 그 기도가 속히 응답되지 않고 오랜 시간이 지나다보면 그만 힘이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러다 보면 아무리 기도해도 안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기를 시작하고 뭐 꼭 교회에 가서 기도해야만 하나, 꼭 이 시간에 기도해야만 하나 하고 한 발짝 물러섭니다. 그리고는 그 한 발짝이 두 발짝이 되고 세 발짝이 되더니 “에이 이젠 나도 모르겠다.” 하고는 퍼져버리고 말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이 귀한 싸움에서 지고 만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처음 마가 요한이 바나바와 바울을 따라 나설 때는 그들을 돕겠다고 하는 그럴 듯한 명분이 있었습니다. 아주 각오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따라 나선 데는 단지 그들을 돕겠다고 하는 이유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바나바를 따라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까지 오기는 했지만 안디옥은 어디까지나 타향일 뿐입니다. 그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을 눈으로 확인하였을 때 마가의 마음도 뜨겁게 불타올랐습니다. 그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바나바와 사울이 떠나는 선교 여행에 함께 가면서 무언가 도움도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물론 안디옥에 혼자 남는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따라 나선 선교 여행이 그렇게 보람될 수가 없었습니다. 거짓 선지자 엘루마가 순간적으로 눈이 멀어버리는 장면을 집적 눈으로 확인도 하고 총독 서기오 바울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을 보면서 정말 따라오기를 잘 했구나 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키프로스에서 배를 타고 소아시아의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도착하면서 이게 아닌데 하는 마음이 들기를 시작합니다. 벌써 고향 땅 예루살렘을 떠나온 지도 한참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꽤나 잘 사는 집에서 자랐습니다. 그 집의 다락방에 120명이 머물 수 있을 정도로 큰 집에서 살았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서울에서 고생 한번 하지 않고 자란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 그가 이젠 전혀 알지 못하는 그런 곳을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찾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는 신이 나기도 했지만 여행이 계속되면서 지쳐가기 시작합니다. 언제 그토록 오래 집을 떠나본 적이 있었어야 말이죠. 아마도 배를 타고 오면서 멀미라도 했을지 모릅니다. 그래 몸도 마음도 다 지쳐 가는데 배야 아무리 멀미를 해도 가만히 누워 있으면 알아서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니까 견딜 수가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걸어 다녀야 합니다. 그냥 버가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다면 그래도 견딜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한참을 더 들어간 비시디아 안디옥이라는 곳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가려고 하는 곳을 보니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높은 산들이 가로막고 있는데 그 산을 타고 가야한다고 합니다. 물론 예루살렘도 높은 산지에 있기는 해도 지금 자기들이 가고자 하는 곳과 비교해보면 그건 얕은 동산에 불과할 정도로 높은 산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데 겁이 덜컥 납니다. 아니 저런 곳을 간다고 생각해 보니 눈앞이 캄캄합니다. 덜컥 겁이 납니다. 그래 순간적으로 난 못해 난 못가 하는 마음이 드는데 한번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까 이건 도무지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 산길을 가는 도중에 슬그머니 도망을 쳐서 예루살렘으로 도망을 가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이처럼 황당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누가 함께 가지고 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굳이 따라가겠다고 나도 도울 수 있다고 한 것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마가 자신 아니었습니까? 물론 은혜를 받고 뜨거운 마음으로 시작한 길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한동안은 신도 나고 나도 뭘 좀 할 수 있네 하기도 했는데 산길을 걸어가면서 발도 부르트고 점점 지쳐만 가는데 집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습니다. 돌아가면 편히 지낼 수 있는 집도 있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 그를 사로잡았고 결국 말도 없이 도망치다시피 예루살렘으로 가버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은혜를 받고 어떤 일을 맡아 수고하게 될 때 처음에 정말 기쁜 마음으로 시작을 합니다. 한편 두려운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내 안에 주신 주님의 은혜가 그 두려움을 덮어버리고도 남았습니다. 그래서 “나도 할 수 있어 잘 해 봐야지” 하고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나면서 지쳐가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게 아닌데 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우리 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지치기도 하고 몸보다는 마음이 더 힘들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그런 일들이 우리 앞에 닥쳐옵니다. 누구는 힘겹게 억지로라도 해보려고 하는데 돕지는 못할망정 딴죽을 거는 사람도 있고 마음과는 달리 일이 제대로 되지도 않는 현실이 너무도 힘이 듭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해야 하나,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욕을 먹어 가면서까지 이렇게 일을 해야 하나 하는 마음에 서글퍼지기도 하고 그래도 그건 아니야 한번 하기로 했으면 해야지 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아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져 내리는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그러면 “나 이렇게 힘들다. 나 좀 도와주라.” 하고 누구에게 하소연이라도 하던가 아니면 주님 앞에 “주님 너무 힘이 듭니다. 나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게 힘을 주세요” 하고 엎드리기라도 하면 되겠건만 그래도 내 자존심에 “나 힘들다”는 말도 못하고 마음만 간절했지 주님 앞에 엎드려지지도 않더란 말입니다. 잘 할 때는 아무 말도 없던 사람들이 조금만 삐끗하면 한 마디씩 툭툭 던지는데 그 말들이 마치 날카로운 칼로 찔러대는 것처럼 내 마음을 파고들더란 말입니다. 아니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옆에서 나를 위해 힘내라고 해주는 말까지도 왜 그렇게 귀에 거슬리게만 들리는지 모든 사람이 다 섭섭하게만 여겨지고 모든 사람이 다 나를 향해서 손가락질하는 것처럼 보이기를 시작하는데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왜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어야 합니까? 결국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아무리 굳센 결심을 가지고 시작했다고 해도 계속해서 내려주시는 주님의 은혜로가 아니면 내 힘만으로는 얼마 가지 못하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007년을 각오하고 시작한 우리 모두가 올 한 해를 지나면서 내 힘 내 지식 내 재주로가 아닌 주님의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끝까지 잘 감당하고 이기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우리는 친숙한 환경으로부터 하나님의 복음 증거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키프로스를 처음 찾았던 이유는 그곳이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하고 다소 출신인 바울의 입장에서도 아주 익숙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도 그들은 주로 유대인의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만큼 저들이 잘 알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으로부터 복음 증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건 밤빌리아의 버가를 거쳐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오는 길에 정말 황당한 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 험한 산골짜기에서 갑자기 마가 요한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직 걱정이 됐겠습니까? 아마 한참을 이리저리로 마가 요한을 찾아다녔을지도 모릅니다. 한 달이 지난 다음에야 마가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는 해도 그들의 마음이 굉장히 무거웠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결코 복음을 위한 그들의 길을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이 목표로 했던 비시디아 안디옥까지의 험한 길을 끝까지 가서 그들은 그곳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 들어갑니다. 마침 안식일이어서 많은 유대인들이 모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들어가 앉았는데 회당장들은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을 읽은 후에 바울과 바나바에게 전갈을 보내어 “형제들이여, 이 사람들에게 권면해 주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시오”라고 합니다. 낯선 사람들이 와서 예배에 참석을 하게 되면 그들로부터 은혜로운 말을 전해 듣는 것은 유대인 회당의 전통입니다. 이것을 잘 알기에 바울과 바나바가 또한 유대인의 회당을 찾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 말할 기회를 얻어서 바울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스라엘의 역사를 쭉 되짚어 설명을 해 나가면서 마침내는 예수를 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 우리가 가까운 이웃을 먼저 찾아야 합니까? 그것은 그들과 친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보다 쉽게 말을 걸 수 있고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니고 있는 문제가 있다면 우리의 교제의 폭이 너무 좁다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되고 난 다음부터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거의 교제를 하지를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경우를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일주일 내내 직장을 빼놓고 나서 본다면 주로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만 만나고 교제를 나눕니다. 그러다보니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함께 하지도 않고 또 함께 하려고도 하지를 않으니 그들을 우리의 믿음 안으로 이끌어 들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는 별로 아는 척도 안 하다가 갑자기 잠깐만 이야기 좀 합시다 하고 그들에게 다가갈 때 그들이 어떤 마음을 갖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왜 이러나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거야 하고 벌써 마음의 문을 탁 닫아놓지를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평소에 우리들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고 알려줄 수 있도록 이웃들과 친밀한 관계를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학부모들이라면 적극적으로 자모회에 나갈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운동모임이라든가 취미 모임 등을 활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들을 우리들의 친교의 시간이나 구역 예배 시간에 초청을 한다든가 또는 식사에 초대를 한다던가 하여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의 어려움이 있을 때 적극적으로 그들을 돕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마음이 열려지게 되고 열려진 마음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덕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큼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얼굴에는 항상 웃음이 떠나지 않는 그런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요 말씀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단지 듣고 지식을 쌓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말씀은 실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실천은 곧 사랑의 실천입니다. 섬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목숨까지도 주려고 왔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처럼 섬기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는데 그 말씀을 듣고 은혜 아래 사는 우리가 또한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내가 누구를 무엇으로 도울 것인가 항상 생각하고 있어야 하고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그런 기회를 또한 놓치지 않고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평소에 좋은 관계를 이루어나가게 될 때 그들은 우리들의 삶과 교제 속에서 풍기어지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 있게 되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말씀과 은혜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항상 주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성도들 되어 섬기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나타나는 결과가 무엇입니까?
말씀을 마치고 바울과 바나바가 회당에서 나갈 때 사람들이 다음 안식일에도 이런 말씀을 더 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모임이 끝난 뒤에 많은 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랐다고 했고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으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귀담아 듣게 되면 나타나는 결과는 이토록 말씀을 또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려진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니 자연스럽게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권할 수도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열린 마음으로 들어야 하고 열린 마음으로 들을 때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게 되는 것이요 그 역사하는 말씀은 더 많은 말씀으로 은혜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말씀에 은혜 받고 마음이 열리니까 말씀 전하는 자를 자연스럽게 따르게 되는 것이요 은혜의 권면도 받게끔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전한 말씀이 듣는 이들의 마음에 찔림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에 찔리는 그런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들까지도 그대로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듣는 자세입니다. 어떤 말씀을 듣든지 그 말씀이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주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 넘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말로 듣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할 자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을 듣는 시간에도 그리고 다시 말씀을 곱씹을 때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실천에 옮겨 섬기고자 할 때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어 하나님의 주시는 힘으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게도 기쁨이 되고 하나님께도 영광이 돌려지게 되는 것이요 하늘의 상급이 우리들에게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자기들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권면합니다. 여기 항상이라는 말은 좋을 때든지 나쁠 때든지, 기쁠 때든지 슬플 때든지, 풍족할 때든지 부족할 때든지 상관없이 심지어는 피곤에 지치고 병들어 고통당할 때까지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억지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화가 변하여 복이 되게 하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는 것은 또한 내가 받은바 은혜대로 나 역시 베푸는 자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혜라는 말은 곧 값없이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나 역시도 대가를 바라지 말고 주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입니다. 베푸는 것이요 나누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주께로부터 받았으니 나 역시도 먼저 이웃들에게 주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 은혜가 더욱 넘쳐나게 될 것이요 그 섬기며 베풀고 나눔을 통해서 우리는 하늘나라의 상급만이 아닌 이 땅에서도 100배로 갚아주시는 주님의 상급을 받아 모든 것이 풍족하고 모든 것에 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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