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은 이것이니라 (약 1:26-27)
본문
위대한 화가 미켈란젤로가 한 파티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남을 흉보는 일에 몰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특정인의 명예롭지 못한 부분들만 들춰내 공격하면서 낄낄댔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왜 자네는 침묵만 지키고 있나?"
"나는 그림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다네"
친구들은 그가 어떤 그림을 구상하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림을 한번 그려보라고 요구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화폭에 흰 물감을 칠한 후 가운데에 까만 점하나를 찍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들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야 물론 까만 점이지."
"그럴 줄 알았네, 나는 하얀 부분을 보고 있다네.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항상 부정적인 것만 보게 되는 법이지."
허물이 많은 사람일수록 남의 약점을 들춰내는 데 앞장섭니다. 우리 집 창문이 더러우면 이웃집 빨래가 모두 지저분하게 보입니다. 내 마음과 눈이 더러우면 세상의 모든 것이 더럽게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말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경건하기를 소원하고 마땅히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말처럼 간단하고 쉽지는 않습니다. 경건은 기도만, 말만, 예배만, 구제만, 직분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체적이면서도 종합적인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와 사회 생활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서는 성자처럼 보였지만 회사에서는 폭군으로 유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상처와 실의에 빠진 사원들이 많았습니다. 오늘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경건한 모습을 사회에 보여 주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전도에 장애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은 인정하고 부족하고 지적 받은 부분은 고치고 회개하여 참으로 경건한 삶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낙심하거나 싸울 필요도 없습니다. 고개 숙이고 사과해야 합니다. 늘 설교를 하지만 은혜 받지 못하는 분들에게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분들이 은혜 받을 수 있도록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여 기도하고 말씀을 준비하고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경건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자신에 대한 경건
본문 26절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경건하다'의 헬라어 '드레스코스'는 '기도문을 중얼거리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배의 외적인 모습 즉 기도, 구제, 금식 등을 언급하는 것으로서 외식적인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암시합니다. 이렇게 스스로 경건하다고 하는 사람이 말에 대하여 자제하지 못할 때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됩니다. 남을 비방하거나 악담하는 것을 제어하는 것을 혀를 재갈 먹인다고 표현하였습니다. 혀를 절제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며 확신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며 이렇게 말과 행위가 다른 경건은 위선자들에게서 오는 헛된 경건입니다. 이는 경건이 아닙니다. 경건한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경건은 아닌 것입니다. 말과 행위가 일치되고 하나가 되는 것이 경건입니다. 여기에 감동과 능력과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허우적대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믿음의 나래를 펴고 더 큰 미래를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끊임없이 더 높은 단계로 자라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지혜를 주시고 우리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주십니다. 막대한 부와 승진의 기회, 참신한 아이디어, 창의력을 주고자 하십니다. 수세기 전에는 통이 아닌 가죽 부대에 포도주를 저장했습니다. 동물 가죽을 충분히 말리면 포도주 용기 모양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새 가죽 부대는 부드럽고 유연성이 있지만 오래될수록 탄력이 사라져서 휘어지지 않고 딱딱하게 굳어서 늘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모두 땅바닥에 쏟아집니다.
예수님은 가죽 부대의 비유를 들어 제자들의 비전을 키워 주셨습니다. "새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마9:17). 좁은 마음으로는 폭넓은 삶을 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틈만 나면 옛 방식과 생각의 틀에 갇힙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으면, 원대한 비전을 품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서 새 일을 행하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를 높이시고 더 많이 주려 하십니다. 우리 생각 속에 받을 만한 그릇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밝은 미래를 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당신의 낡은 생각들,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깨닫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낡은 가죽 부대들을 정리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중심적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고친다는 것은 두렵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자기식대로 믿고 행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발전과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과 다른 것은 비난하고 거부합니다. 자기 안에 갇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도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변화되고 개선되어야 할 부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뭐 좀 있고 행했다고 해서 교만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말이 너무 많습니다. 부정적이고 도전적입니다. 불평과 비난이 많습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너무나도 많은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말과 삶이 일치가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경건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뜯어고칩시다. 우리 모두는 말을 줄이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위로하고, 치료하는 입이 되어 경건한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이웃에 대한 경건
본문 27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본절은 경건한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경건한 삶은 내적인 모습으로부터 다른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외적인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헬라어 '파라토 데오'는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편에 서서'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평가방법으로 사람을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고보는 내적인 경건 생활에서 비롯되는 외적인 경건 생활의 모습에 대하여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서 돌아보고'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는 특별히 두 부류의 대상만을 언급하고 있으나 그 외의 다른 부류인 나그네나 병든 자, 가난하고 갇힌 자 등을 제외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이들은 한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는 사랑의 대상들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자신과 자기 가족들뿐만 아니라 혈연을 넘어서 자신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적극적으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경건이 외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경건의 열매입니다.
수도사 마카리우스가 자신에 대해 전한 이야기입니다.
젊은 시절, 내가 이집트 사막의 독방에서 기거할 때에 사람들이 나를 강권하여 데려가 어떤 마을의 성직자로 삼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성직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으므로 다른 곳으로 도망쳤습니다. 때에 사막에 살지는 않았지만 매우 경건한 어떤 사람이 나를 찾아와 도와주었고, 내가 움막에서 만든 물건들을 내다 팔아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어떤 소녀가 마귀의 미혹을 받아 간음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아이가 임신한 것을 본 사람들이 아기의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에 소녀는 "저 은둔자가 나와 동침했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나를 체포하여 마을로 데려갔습니다. 그들은 내 목에 더러운 그릇들과 물병을 주렁주렁 매단 뒤에 온 마을을 돌아다니게 했습니다. 내가 마을을 돌아다닐 때에 사람들이 때리며 "이 수도사가 철없는 아이를 더럽혔다. 죽여라! 죽여라!"라고 소리쳤습니다. 나를 돕던 그 사람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리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들에게 얼마나 매를 맞았는지 나는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때에 다른 은둔자 한 사람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도대체 저 낯선 수도사를 언제까지 때릴 작정이오?"
그러자 사람들이 그에게 모진 욕을 퍼부으며 "저 수도사를 두둔하는 것인가?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른단 말인가?"라고 답했습니다. 소녀의 부모는 딸을 책임질 사람을 세우면 풀어주겠다고 내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내게 도움을 주던 사람에게 다시 요청했고, 그 사람은 나의 보증인이 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나는 움막으로 돌아와 그간 만들었던 바구니들을 그에게 주며 "이것들을 팔아 제 아내에게 먹을 것을 사다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마카리우스야! 너는 이제 아내를 갖게 되었으니 그녀를 부양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밤낮으로 열심히 일했고, 수고로이 번 돈을 그녀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몇 개월 후, 그 불행한 소녀가 출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산통으로 며칠 고생했지만 아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고생해도 아이가 나오지 않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요."
그녀의 부모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소녀가 대답했습니다.
"제가 그 수도사를 거짓으로 고발했기 때문이에요. 수도사는 이 일과 아무 관계가 없어요. 아기의 진짜 아버지는 옆 마을에 사는 어떤 청년이에요."
나를 도와주던 사람이 이 말을 듣고 급히 달려와 기뻐하며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며칠 동안 고생을 해도 아이가 나오지 않자, 그 애가 진실을 고백했습니다. 당신이 그 일과 전혀 무관하며 거짓으로 당신을 고발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보세요,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곳으로 달려와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당신께 사죄를 하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사람들로 인해 소란해질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이곳 스케티스로 도망쳐 왔습니다. 그때부터 내가 이곳에서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진정한 경건은 이웃을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의 아픔을 모르는 척 눈감는 것도 아닙니다. 강도 만난 자를 버리고 간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행동이 아닌 위험과 죽음을 감수하고 조건과 감정과 혈통을 뛰어넘어 희생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너도 가서 그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 받는 이웃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나누는 진정한 경건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세상에 대한 경건
본문 27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야고보는 '세속'이라는 단어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통한 죄악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사도 요한이 잘 쓰는 표현 방법으로 이웃 사랑은 물론 자신 스스로가 죄악에 빠지지 아니하고 성화를 위해 계속적인 노력을 경주할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건한 자의 삶에 있어서 이웃 사랑과 자기의 거룩한 생활과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자신의 경건을 지키지 못하는 경건은 이웃을 경건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웃을 구원하고 살릴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죄악된 세상에 휩쓸리는 힘없는 성도의 삶이 아닌 죄악된 세상의 파도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의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교육관 훈련이 필요합니다. 군에서도 특수부대는 훈련의 내용과 강도가 다릅니다. 훈련을 제대로 받아야 어려운 상황에서도 임무를 다 할 수 있고 국가와 민족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기도와 말씀의 훈련을 잘 받아 세상을 이기고 구원하는 특별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사명과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사야처럼 나를 보내소서라고 자원하여 충성해야 합니다.
어떤 형제가 한 성자에게 물었습니다.
"겸손함이 무엇입니까?"
"겸손함이란 실로 대단한 것이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오. 겸손의 길은, 육체노동을 쉬지 않는 것이며,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것이며, 자신을 모든 사람의 종으로 여기는 것이오."
형제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성자가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보지 않고 언제나 자신의 죄를 본다는 의미이며,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의미요."
안토니가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함에 대해 묵상하다가 너무 혼란스러운 나머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어떤 이는 젊어서 죽고 또 어떤 이는 늙을 때까지 살다가 병들어 죽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어떤 이는 부유하고 또 어떤 이는 가난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어떤 이는 악하면서도 부유하게 살고 또 어떤 이는 선하면서도 가난하게 사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안토니야! 네 자신에 대해 염려하라.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이런 것들은 알아도 네게 전혀 유익이 되지 않으니 네 영혼에 대해 염려하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기도하고 충성합시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맡기면서 경건하게 삽시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성탄절이 가까이 왔습니다.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이 들떠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과 이웃과 세상에 대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참으로 경건한 삶으로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김정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