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지도자인가? (출 17:8-16)
본문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한 가지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질문입니까? “지금 나의 신앙은, 하나님의 뜻에 근거하고 있는가?” “지금 나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우리는 쉼 없이,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스스로에게 던져 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질문이 없다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목적 없는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이고, 의미 없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무엇에 의미를 두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분명한 것은 내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삶을, 우리는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이예요. 내가 지금 교회 다니고 있다.
여러분, 그것이 신앙생활 아닙니다. 그것은 한낱 종교생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도, 이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질 못한 분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단순히 주일날 예배에 한번 참석한 것으로, 자신의 신앙적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 하시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무관한 신앙생활입니다.
사 1 : 12절에,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하나님과 별개의 신앙생활입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이 내 삶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인 줄 믿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주님도 기도하셨지요? “내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러분,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신앙생활은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수동적으로, 소극적으로 하는 신앙생활 이겠습니까? 이는 분명 아닌 줄로 압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이 있다면, 일반적인 성도로서의 삶의 모습이 아닌, 좀 구별된, 좀 특별한 제자로서의 삶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반 성도로서가 아닌, 제자로서의 삶을 원하시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때에, 이 사회가 변화되어 지고, 또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구원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실 때,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그 순간, 나의 구원은 확정된 것입니다. 아멘!!!!
만약 구원이 목적이었다면, 우리는 굳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구원이라는 목적이 이루어졌는데, 뭐하러 열심을 내어 신앙생활을 합니까? 시험지의 답을 다 알고 있는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겠습니까? 안 합니다. 그냥 놀다가 시험 당일 날, 시험 치러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학생이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시험 성적 때문입니까? 아니지요? 물론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공부의 원래 목적은 단순한 시험 성적향상보다는, 그 공부를 통한 지혜와 지식의 습득, 그리고 학문을 통한 인격 수양이, 진정한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우리 자녀들을 보세요. 시험 성적은 좋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1, 2등을 다툽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회에서는 어떻습니까? 마찬가지로 1, 2등 합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착각하지 마세요.
사회생활은 학교 성적순이 아닙니다. 학교에서 우등생이, 사회에서도 우등생 입니까? 오히려 사회에서는 열등생으로 사는, 자녀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사회에서는 바보 같은 자녀들이 많다는 것이예요.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까? 그들에게 답만 가르쳐 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쪽집게 과외” 가 성행하는 것 아닙니까? 일단 답만 맞추자는 겁니다. 그래야 시험 성적이 잘 나와, 유명 대학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회생활에서는, 답을 누가 찾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답을 스스로 찾아가며 살아가야 하는데, 어디에서도, 어느 누구에게서도, 그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회생활에 과외가 있습니까? 다 스스로가 터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사회 생활이예요. 그런데 이런 사회생활에, 우리 자녀들이 적응을 하지를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날 마마보이가 넘쳐나고, 우리나라 이혼률이 세계 1위가 된 것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머리 좋은 건, 세계가 인정하는 바이지요. 그런데 과거와는 달리, 한국의 두뇌들이 세계에서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왜입니까? 창의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응용력이 떨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세계 하이클래스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밀려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공부의 목적은, 시험 성적의 향상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미래 지도자로서, 더 나아가 세계의 미래 지도자로서, 자신이 세워지기 위해, 꿈을 연마하며 학생들은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의, 학문 연마의 지정한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지 않겠습니까? 구원이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출발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이 사회에서 내가 영적인 지도자로 쓰임을 받는 삶, 다시 말해, 제자 로서의 삶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적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마 5장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서 나타나야 하겠습니까? 교회 안에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의 진정한 가치는, 세상 속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만 인정받는 신앙인이라고 한다면, 그는 답만 알고 시험을 치르는 학생과 같습니다. 마 5 : 15절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all the world"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빛을 비췰 수 있도록 말 아래 있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서서 빛을 비추는 사람, 교회에서 배운 말씀을 사회에 적용시키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사람, 이런 사람이 진정한 성도요,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이 시대의 영적 지도자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겠습니까?
아니요, 어떤 이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그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세요. 모세를 따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까? 모두가 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수도 없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며, 우상 숭배를 행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분노케 했습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며 주님을 따랐던 허다한 무리들, 그들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까지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라 외치며,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삶 가운데 얼마든지 이러한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그렇지 않지요. 하나님의 뜻을 그르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그 뜻을 온전히 이루어 가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제자와, 그렇지 못한 허다한 무리들과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신앙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제자로서 신앙생활입니까? 아니면, 일반적인 성도로서, 허다한 무리로서 신앙생활입니까?
단순한 구원이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세상 가운데 나타내기 위한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이러한 목적으로 부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면, 과연 현재 여러분은 그 부르심의 목적을, 얼마만큼 이루어 드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은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땅에, 여러분이 속한 그 사회에, 영적 지도자로서의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러한 여러 가지 질문에, 여러분 스스로가 답을 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영적 영향력을 끼치는, 신앙의 지도자들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고, 그 영향력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 제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와같은 영적 지도자의 삶,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먼저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말씀은, 너무나도 유명한 말씀이지요. 또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아말렉에 대적하여, 모세가 아론과 훌의 도움을 받아 산꼭대기에서 기도하고, 여호수아는 현장에서 아말렉을 쳐서 파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누가 영적 지도자요, 주님의 참된 제자인가?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 이 시대에 있어서,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지도자가 누구인지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영적 지도자요, 제자입니까?
첫째로는, 삶의 현장에서 신앙으로 싸우는 자가, 바로 영적 지도자요, 제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현실 도피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염세적인 종교도 아닙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채, 마음에 평안과, 안식을 주는, “氣”나 “뉴에이지”와 같은, 그러한 종교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여러분, 삶의 현장의 종교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래서 교회가 절과 같이 산에 있지 않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심 가운데, 항상 있는 것 아닙니까?우리의 사는 이 삶의 현장에서, 내가 속한 그 영역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나가기를 노력 하는 자,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날마다 투쟁하는 자가, 영적 지도자요, 주님의 제자라고 말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 16 : 16절에, 베드로가 유명한 신앙고백을 하지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런데, 이 베드로의 고백이 있은 후에,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러분 무슨 뜻입니까? 교회의 존재 목적을, 주님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다름아닌, 음부의 권세를 깨뜨리고, 무너뜨리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이 “음부의 권세”를 영어 성경을 보게 되면, “Gate of Hell”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Gate of Hell” 무슨 뜻입니까?
교회와 성도들은, 음부의 권세에, 이 “Gate of Hell” 지옥의 문으로 빠져들어 가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을, 생명의 구원으로 인도해야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이 땅의 음부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음부의 귄세에 사로잡힌 수많은 불쌍한 영혼들을 “Gate of Heaven”으로 인도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명을 가지고, 음부의 권세에 맞서, 우리가 속한 삶의 현장에서 세상의 불신앙과 온갖 죄악들과, 우상숭배로 물든 이 세상을 대적하며,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맞서 싸우며, 결국에는 승리를 쟁취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자로서의 성도요, 또 진정 이 땅을 바르게 이끌어 갈, 영적 지도자들이요, 신앙의 지도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도의 모습일진데,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자로서의 삶의 모습일진데,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런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영적 지도자로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아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이 땅에 변화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이 땅에 변화가 더디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이 땅에 아직도 죄악이 관영하고, 불의가 판을 치며, 우상 숭배가 더해 간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는,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주님이 원하시는 이러한 제자로서의 삶을, 영적 지도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 성도들은 이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 맞습니다. 맞고요. 이런 관심도 없다면, 어찌 그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관심도 없다면, 어찌 그 사람을 성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에 대해, 그저 관심을 가지라고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관심이 뭡니까? 마음으로 본다는 것 아닙니까? 마음으로 바라만 보는 것이, 관심입니다. 어려운 누구에게 관심을 가진다고 말을 하지요? 이는 구체적인 도움이 아닌, 최소의 도움을 베푸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구제의 차원에서는 이 정도의 관심만 가져도 충분한 위로가 될 수 있고,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특별히 구원에 관한 일,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로 세워 가는 일에 있어서는, 관심만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에 우리가 관심만 가지니까, 일이 안 되는 것이예요.
주님은 이렇게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는 관심을 넘어, 사명감을 가지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세상 가운데 자신의 신앙을 나타내며, 세상과 맞서 싸워 승리를 쟁취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렇게 세상과 맞서 싸우려고 하질 않습니다.
그 싸움의 현장에서 자꾸만 도망치려고 합니다. 성도의 사명을, 그리스도의 군사로서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도망가지는 않지요.
그러나 부딪혀 보고, 무리다 싶으면, 이내 뒤로 물러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히 12 : 4절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이것이 오늘 현대 교회와, 성도들의 문제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물러난 그 자리를 누가 차지하겠습니까? 사탄의 세력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세상 가운데 확장해 나가야 하는데,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신앙의 영역마저 빼앗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고 목사님,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아직 우리의 능력이 부족해서”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여호수아의 군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말이 군대지, 사실 군대다운 면모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군대라 할 땐, 적어도 칼이나 창과 같은, 병기를 군사들이 소지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여호수아와, 몇몇 장수들을 제외한 일반 병사들에게는, 이러한 병기들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럼 무엇으로 그들이 전쟁을 했습니까? 그들이 가진 농기구였습니다.
칼 대신 보습을 들고, 창 대신 낫을 들고, 전쟁에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열악한 자신들의 모습이었지만, 그들은 강력한 아말렉 군대와의 전쟁에서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무기를 가지고, 그 보잘 것 없는 무기를 가지고도, 최선을 다해 맞서 싸웠다는 것입니다.
누가 지도자입니까? 여호수아입니까? 그 당시의 장군들입니까?
물론 그들이 지도자이지요.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 전쟁에 참여했던 모든 병사들이, 다 지도자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찌 보면, 여호수아나 장군들보다 더 위대한, 그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라 말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어찌 그 전쟁이, 여호수아 한 사람의 힘으로만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어찌 몇 몇 장수들의 힘으로만,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믿음을 가지고, 기드온을 따라 전쟁에 참여했던 3백명의 용사와 같은, 무명의 백성들이 있었기에, 그 이름 모를 무명의 농부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말렉을 대적한 무명의 용사들에 있었기에, 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땅을, 이방 영토였던 르비딤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를 변화시키고, 이 나라와 이 민족을, 더 나아가 세계를 변화시키며,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는 사람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몇 몇 위대한 신앙인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개 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회자들도 아닙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여러분과 같은 일반 평신도들,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그곳이 직장이든, 그곳이 학교이든, 여러분이 속한 모든 삶의 영역에서,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고, 사탄의 세력과 맞서 싸우며, 그래서 사탄의 문을 부수고, 그 땅을 점령해 나가는 모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여, 이 시간 말씀을 듣는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 성천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이와 같이 현장에서 싸우는,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세상과 대항하여 싸우는,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로, 어떤 사람이 영적지도자요, 주님이 기뻐하시는 제자입니까?
세상에 맞서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작정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과 맞서 싸우기 위해, 늘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는 사람들이, 바로 주님의 제자요, 영적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싸움을 하는데 있어 기도가 없다면, 그 싸움은 보나 마나인 것입니다. 왜입니까?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데, 기도가 없다는 것은, 무기를 가지지 않고 맨몸으로 전쟁에 나가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군대가, 칼과 창과 같은 병기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아멜렉 군대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용맹스러움도 있었겠지만, 이러한 기도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가, 여호수아 군대의 강력한 병기가 되어져서, 그 힘으로 아말렉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가 전쟁의 현장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이를 위해 기도했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모세였습니다.
오늘 본문 11절 말씀을 보세요.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기도가 중단되면, 아무리 용맹스럽게 싸워도 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재물이 넉넉하고, 내가 가진 지식과 지혜가 출중하고, 내가 가진 사회적 경험이 뛰어난데, 굳이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가 있느냐? 차라리 그 시간에, 내가 가진 능력으로 더 많은 승리를 거두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여러분 그렇습니까?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결과는 뻔합니다. 결국에는 어떻습니까? 제가 예언할까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이제는 자신이 기도의 자리에 나아갈 때, 제발 하나님 나를 박대하지 말아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면서 기도하러 나온다는 것입니다.
삼상 17 : 47절에 다윗이 이렇게 고백했지요.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할렐루야!!
전쟁은 내 능력이, 얼마나 되느냐에 달려 있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달려 있는 줄 믿습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에, 이것을 믿을 때에, 우리는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지를 못하니, 교회를 오래 다녀도, 성도들이 기도하러 나오질 않는 것이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싸움도 중요하지만, 기도는 더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영적 전투의 장입니다. 날마다 우리는 사탄의 세력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믿음도 중요하고, 세상과 맞서 물러서지 않는 용기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은 객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상처를 입고 쓰러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사탄의 세력은, 우리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죄악이 우리를 짓눌러 버렸기에, 우리는 쓰러질 수밖에,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빠진 우리의 삶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것이 목사님 너무 피곤합니다.” 예, 맞습니다. 기도하는 것 피곤한 일입니다. 성경에도 기도하는 것이, 즐겁다고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주님도 땀이 피 방울이 될 정도로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괴롭습니까?
제자들은 주님과 같이 기도하지 못하고 잠을 잤습니다. 얼마나 피곤합니까? 날마다 기도한다는 것, 더군다나 시간을 정하여 기도한다는 것,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기도하는 일이 쉽다고 결코 말하고 있질 않습니다. 그런데 왜 기도하라고 합니까? 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기도해야, 우리가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해야, 우리가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오늘 본문 12절을 봅니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피곤해도, 계속해서 손을 들고 기도할 때에, 여호수아의 군대가 아말렉을 이기는 역사가 일어난 줄 믿습니다.
누가 지도자입니까? 누가 신앙의 지도자요, 누가 주님의 제자입니까?
이와 같이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 지도자요, 주님의 참된 제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우리가 살펴보았지만, 모세만 기도하는 지도자였겠습니까? 아니지요. 모세와 같은 영적인 지도자들이 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모세의 팔을 받쳐준, 아론과 훌 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모세의 팔을 붙잡아 준, 일꾼에 불과하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모세가 기도하는 그 자리에, 아론과 훌, 이 두 사람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모세는 피곤에 못 이겨, 그 팔을 다시 들지 못한 채 쓰러졌을 것이며, 기도가 중단되었을 때, 현장에서 싸우던 여호수아 군대도, 아말렉에 의해 힘없이 패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팔을 붙잡아 준 아론과 훌이 있었기에, 모세는 끝까지 기도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현장에서 전쟁을 하던 여호수아의 군대도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중요성을 모세 못지않게 잘 알고 있었던 아론과 훌, 그들도 모세 못지않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아론과 훌과 같은, 기도의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같이 기도하라는 것 아닙니다. 물론 이와 같이 기도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적어도 아론과 훌과 같이 협력하여 기도할 수는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도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여러분의 삶에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 이 세상과의 영적 전쟁에서도, 교회가 승리할 수 있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들이 손을 들어 주어야 될 기도의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성천교회 성도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가 현장에서 싸울 때, 여러분의 가정을 평안하게 하고, 여러분의 기업을 세상에서 실패하지 않고, 날마다 이기게 만들고, 성공하게 만들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오늘 우리 교회에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담임 목사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게 계신 여러분들이, 모세의 손을 받쳐 준 아론과 훌이 되어, 목사님의 기도의 손이 내려오지 아니하도록 붙잡아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울산 교회 중보기도팀, 왕성교회 중보기도팀)
그래야 여러분도 살고, 목사님도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세워 주신 성천교회가 사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이, 담임 목사님들을 비롯한 교회의 모든 목회자들의 강력한 기도의 후원자, 기도의 협력자들이, 다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직분을 자랑하며, 직분을 내세우며, 뒷짐지고 관리만 하는 사람이 지도자가 아닙니다. 그건 세상의 그릇된 지도자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결코 직분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직분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뒷짐 지고 관리만 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몸소 행합니다. 모든 일에 모범을 보입니다. 또한 모든 일에 적극적입니다. 또 항상 모든 일에 앞장섭니다. 자신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또한 이와 같이 되기를 소원하며, 그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는 성도들,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 늘 기도하는 성도들이, 바로 교회의 진정한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 16절 말씀,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오늘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두 가지의 지도자적인 신앙을 소유하여,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여호와 닛시의 단이 쌓아지고, 우리 성천 교회에도 여호와 닛시의 제단이 쌓아져서, 날마다 승리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귀한 역사가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