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두 목사 설교 - 젊은 날의 결단 (단 1:8-16)
본문
다니엘 1:8-16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사람의 미래는 그 사람의 젊은 날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흔히들 '젊은 사람들의 실수는이해해 주어야 해' 라고 말하지만 그 말이 정말 옳은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말해야 옳지 않을까요? 연세가 든 분들이 저지르는 실수는 이해해드려야 한다고 말하는 편이 옳지 않을까요? 연세가 드시면 생각이나 행동이 이전처럼 민첩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실수는 존경과 사랑으로 이해해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젊은이들이 생각이 깊지 못한 것을 어떤 이유로든지 이해하고 넘어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젊다는 이유로 그들의 모든 실수를 이해하고 넘어가자는 풍조에 대해서는 제동을 걸어야 합니다.
특히 생각이 깊지 못한 젊은이들의 잘못을 봐주는 풍조는 재고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젊은 날은 마땅히 생각해야 할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그 어떤 시기보다 생각을 많이 해야 할 때입니다. 젊은 날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마치 씨를 뿌리기 전에 무엇을 거둘 것인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을날 추수하기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미리 생각하고 우리는 봄에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농부가 반드시 생각을 해야 할 시기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기 전입니다. 그때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그 후에는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땅에 씨를 뿌리고 나면 무엇을 장차 거둘 것인지는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다니엘은 젊은이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생각하는 젊은이였습니다.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가 아니라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피상적인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심사숙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뜻을 정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생각을 굳혔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을 인생의 중대 문제에 대해서 요동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이 말하는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라는 구절의 의미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다니엘은 젊은이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포로였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이런 결단을 했다는 것이 더욱 돋보입니다. 고향산천에서부터 멀어지고 많은 사람의 눈길을 벗어나면 젊은이의 행동이 자유분방해지기 싶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낯설고 물선 타국에서 젊은 날 이와같은 숭고한 결단을 합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사람처럼 처신하라'고 사람들은 보통 충고합니다. 그러나 여기 젊은 청년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되어 살면서도 바벨론 사람처럼 처신하지 않기로 결단합니다.
아니 바벨론 왕궁에 살면서도 왕이 먹는 진미를 먹지 않기로 작정합니다. 왕이 마시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기로 결단합니다. 태어난 조국과 섬기던 하나님마저 잊고 살도록 바벨론은 다니엘의 이름마저 강제로 바꾸었지만 다니엘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세상은 다니엘의 이름은 바꿀 수 있었으나 그의 신앙인격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그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비록 포로였으나 그의 마음은 자유로웠고 충성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처럼 바벨론에서도 그의 양심은 자유로웠습니다. 그는 그의 신앙에 따라서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고 결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이런 올곧은 수많은 젊은이들을 주시도록 소원합시다. 그 걸음을 말씀에 따라서 걷기로 결단하는 젊은이들을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시도록 간구합시다.
다니엘의 마음 속에 활동하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충성된 영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사로잡는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되기를 기도합시다. 세상의 제도나 관습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수많은 젊은이들을 세워주시도록 하늘의 주님께 간구합시다. "새벽 이슬같은" 청년들의 헌신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께 자신을 드리기로 결심하는 이들이 우리 가운데 많이 나타나도록 밤낮 간구합시다. 득실을 계산하지 아니하고 옳은 일이면 기꺼히 따르고 그 갚을 치룰 줄 아는 주의 청년들의 헌신이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다니엘 그는 청년이었습니다. 또한 포로였습니다. 아직도 배우는 시기였습니다만 그의 숭고한 결단 때문에 그의 후년의 삶은 밝게 빛났습니다. 젊은 시절에 하나님의 은혜로 위대한 결단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후에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입은 자"라고 불리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통치 시절에 확고한 결심을 하지 않았다면 후일 고레스왕 시대까지 장기 사역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저녁 때의 모습을 아침에 미리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맞이할 황혼이 어떠할 것인지 그 사람의 아침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히 삶의 아침 시기에 처한 젊은이 여러분, 만약 하나님이 함께 인생을 시작하시면, 여러분이 하나님과 함께 인생길을 출발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앞날을 도우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내일은 복되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복된 노년을 맞이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 사람 다니엘에 관해서 많은 말씀을 드리기 보다 이와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결단하는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말씀드릴려고 합니다. 첫째 대지는 세상에는 우리가 물리쳐야 하는 유혹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둘째로 유혹을 이기는 올바른 방법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린 후에 마지막으로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몇 가지 사항들을 말씀드릴려고 합니다.
첫째로 세상에는 우리가 물리쳐야 하는 유혹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신앙인이라고 하면, 아니 신앙의 젊은이라면 결코 아무런 시련이 없이 살아갈 것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는 동시에 그 신앙을 흔들려고 하는 유혹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비가 내리지 않고 홍수가 나지 않고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 집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아니 집을 세울 때부터 비가 내릴 것을 예상하고, 홍수도 날 것을 예상하고, 큰태풍이 불어올 것을 예상해서 집을 세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시련의 비바람도 있고 세차게 부는 태풍도 만나지만 하나님이 지으시고 붙드시는 반석 위의 집은 넘어지지 않습니다.
이제 다니엘의 시험을 살펴봅시다. 그가 받은 시험은 특별한 시험이였습니다. 그는 매일 왕의 식탁으로부터 내려오는 일정한 음식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왕의 음식을 매일 먹을 수 있는 것은 결코 누구나 누리는 특권이 아닙니다. 아니 많은 사람들에게는 다만 꿈에 불과합니다. 매일 왕의 진미를 먹고 그 포도주를 마시는 것, 그보다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다니엘은 매일 일정량의 포도주를 마셔야 했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세상에서 제일 큰 제국입니다. 바벨론 왕이 마시는 포도주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포도주임에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왕이 먹는 음식도 제국의 최상급 음식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나라 조그마한 한반도에서 이조시대의 왕들이 어떤 것을 먹었습니까? 각지역에서 나는 특산물 가운데서 제일 일등품만 왕의 수라상에 올라가는 진상품이었던 것을 여러분은 알고 계실것입니다.
왕이 먹는 진미를 먹고 왕이 마시는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은 다니엘이 왕자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거부하기로 결심하다니요? 사실 그는 지상 최고의 음식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직 왕의 진미와 그 포도주가 자신을 더럽힌다는 사실말고는 그것을 거부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식욕이 왕성한 청년이었습니다. 그것을 거부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 음식들은 유대인으서 다니엘이 먹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진미 가운데는 다니엘이 먹으면 더럽힘을 당하는 음식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돼지고기나 토끼고기나 문어나 낙지나 뱀장어같은 것들은 유대인으로 그가 먹을 수 없었던 음식들입니다.
단순히 음식 종류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도 유대인으로서는 세심히 관심을 기울여야 했던 것입니다. 피를 완전히 빼고 요리를 한 고기라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러한 음식 규정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지켜져 내려 오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느부갓네살 같은 임금은 음식을 그냥 먹지 않았습니다. 먹기 전에 먼저 자기의 신에게 드렸습니다. 자기가 섬기는 신에게 봉헌하지 않고는 먹지 않았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메로닥이라는 신을 숭배했습니다. 그래서 메로닥에게 부어드리고 나서 마셨습니다. 음식도 일부를 구별해서 그에게 봉헌했습니다. 그것은 전부를 우상 앞에 먼저 바치고 나서 그것을 먹는 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마치 우리가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지만 '그 나머지 물질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고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첫 열매를 드리지만 소출 전부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라고 인정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일단 우상앞에 바쳐진 그 음식을 먹을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음식을 사실 먹고 싶은 유혹도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고 어떤 사람은 말했을 것입니다. 오늘 신약시대는 사실 돼지고기를 먹든, 산낙지를 먹든, 뱀장어 구이를 먹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구약 시대는 달랐습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느냐에 따라서 당신이 누구이며 어떤 신을 섬기는 지가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다니엘은 별나? 다른 유대인은 왕의 진미를 먹는데 개의치 않는데 다니엘은 참으로 유별나군!'이라고 말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여호야김 왕에게도 매일 일정량의 음식이 왕의 식탁에서부터 주어졌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것을 거부했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면 여호야김 왕은 이런 특별대우 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먹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왜 이 젊은 친구는 왕이 주는 음식을 거부하고 법석을 떨지, 왜 이렇게 튀지? 그렇게 사소한 것에 집착하고 그런 것을 가지고 엄격하게 굴지'라고 입을 대었을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그런 유혹들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 유혹은 출세의 지름길 같이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왕의 진미를 먹고 왕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바벨론에서 출세하는 지름길로 보였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아, 왕이 보낸 음식을 거절하고 그것 먹는 것 가지고 꺼림직하게 여긴다면 어떻게 출세하겠는가? 그만한 일에 양심을 내세우다가는 출세와 승진에 손해보네'라는 말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세상은 요즘도 과히 다르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양심 다 지키고 시의원, 국회의원 노릇하기 어려운 것은 오늘도 마찬가지 일지 모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다니엘이 어떠한 청년입니까? 양심이 한없이 고운 청년입니다. 포도주 한 잔, 고기 한 점 가지고 신앙양심이 상하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왕이 내린 음식인데 말입니다. 아마 연세드신 어른들이 그런 젊은 청년을 보면 무엇이라고 충고할까요? '자네, 그래가지고는 힘들겠네, 자네는 신앙 때문에 크게 출세하기는 힘들걸세' 하지만 그런 충고는 크게 적중하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그는 후에 당대 최고의 제국에서 세 총리들 가운데 최고의 위치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신앙 때문에' 모든 출세 길이 막힐 것 같은 청년이라고 세상은 보았으나 그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오히려 다니엘은 신앙의 결단을 통해서 당대의 뛰어난 행정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혹은 그것뿐이 아닙니다. '이 사람아, 국법일세, 이 나라의 황제가 매일 이 음식을 먹고 마시라고 명령한 것일세'라고 위혐겸 유혹을 했을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법률이 무엇을 말하든지, 풍습이 무엇을 말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땅에 있는 임금보다 더 높은 임금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오직 하나의 법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의 풍습을 따릅니다. 신앙인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그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원하는 이들입니다.
보통 때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가장 국법을 잘 준수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님의 율법과 관련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정말 고집불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불에 태워질 수 있지만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죽임을 당하는 편을 택했지 하나님의 진리를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니엘이 그에게 요구되는 것을 한다면 그것은 성별된 삶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는 음식을 날마다 먹고 지낸다면 그는 호의호식하며 왕같은 생활을 누렸을 것입니다만 그는 갈대아 사람 가운데 하나로 전락했을 것입니다. 좋은 음식과 최고급 포도주에 신앙정조를 팔아넘긴 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고귀한 약속이 주어진 이스라엘인 되기를 포기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동일한 유혹은 오늘날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라고 허용합니다. 다만 세상 조류에 따라서 휩쓸리어 가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도록 합니다. 시간마다 예배자리에 나가도록 허용합니다. 때가 되면 학습세례도 받고 성찬에도 참여하는 것을 시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거기까지이어야 하지 결코 사업에 가지고 들어와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직장에서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처신하라고 세상은 압력을 가합니다. 교회 다니는 것은 허용하지만 절대로 별나게 믿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혹은 지금도 도처에 지뢰밭처럼 깔려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너도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속삭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들하니까 너도 그렇게 말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그것을 주장하니까 너도 그 주장을 수용하라고 사탄은 간교하게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 시대의 교회를 파괴하려고 드는 원수의 전략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런 유혹 앞에서 과감히 자기의 신앙을 지키기로 결단합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고 결심합니다.
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면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떤 유혹들이 있다고 여러분은 생각합니까? 이 시간 모든 개개인이 당면한 유혹들을 낱낱이 다 살펴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혹시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분 가운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신 젊은이는 없습니까? '직장에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해고당할지 몰라, 지금 시대가 어떤 때야! 다른 사람들이 하는대로 나도 해야해' 다니엘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마시지 않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어떤 엄청난 재산을 가진 가문의 재산관리인으로 대를 이어서 관리하는 직책을 맡은 한 사람이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대를 이어 가면서 그런 일을 맡을 만한 신임을 얻게 되었는지 말입니다.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가 소년 시절에 사장이 찾아온 사람에게 자기가 없다고 하라는 말을 했을 때 '사장님,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사실이 아니니까요' 물론 사장은 그 때 불같이 화를 내었습니다만 그 이후부터는 이 소년을 신임했고 그것이 대를 이어서 재정관리를 하게 된 계기였다고 말입니다.
물론 저는 정직하게 처신하면 모두 다 당장 그런 복을 받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런 동기로 정직한 척하는 것이 옳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적당하게 속이고 얼버무리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어려움과 난관에 빠져 드는 것은 진리입니다. 긴 안목으로 보면 정직은 최선의 처신임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다니엘처럼 올곧게 처신하십시오. 요즈음은 세상이 달라졌다고요? 그러나 요즘도 다니엘의 하나님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진실하게 살기로 작정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시대는 과거 어떤 시대보다 쾌락에 대한 유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즐길 수 있는 것이 산지에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듭니다. 목구멍에 넘어가면 우리의 의식을 몽롱하게 만드는 최고급 포도주는 아직도 동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다니엘 시대에 붙었던 동일한 상표는 아니지만 아직도 새로운 상표의 최고급 포도주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게다가 들여마시기만 하면 몽롱한 환각의 세계로 초대하는 수많은 마약조차 이 시대 젊은이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레져와 스포츠가 우리의 관심과 시간을 물질을 손짓하고 있습니다. 그 자체가 아무런 해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체로는 좋은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마 우리의 모든 관심과 시간과 물질을 온통 다 쏟게 되면 그것은 우리의 새로운 신이 될 수 있습니다. 등산도, 낚시도, 스키도, 골프도, 행글라이더도 윈드 스핑이나 스킨 스쿠버할 것 없이 우리의 관심을 우리 하나님 섬기고 예배하는 일에서 멀어지게 하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새로운 학문과 신기술도 우리를 옛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추측과 가정에 근거한 여러 가지 과학이론과 철학과 심리학이 우리를 성경의 진리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이론이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를 가리고 매몰시키려 듭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도 다니엘처럼 결심하는 청년들이 많이 나타나야 합니다. 세상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야 합니다.
또 이 시대의 다른 문제는 신앙 생활 전반이 해이해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한다고 그리스도인들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옛날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했지만 오늘 우리가 꼭 그렇게 해야 되느냐'고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우리 '하나님은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는 속성은 변치 않았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죄를 범하는 것을 허용하시고 그것을 바라보며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해오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할 이유가 아직도 존재합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은 아직도 건재합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들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는 말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사랑하는 주의 백성 여러분, 우리 시대야말로 그 어떤 시대보다 부정한 것에서 떠날 필요가 큰 시대입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그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로 뜻을 정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