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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보다 적은 믿음 (마 17: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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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보다 적은 믿음 (마 17:14-21)


우리 몸속에는 각종 호르몬이 분비되고 있습니다. 현재 밝혀진 호르몬의 종류만도 80 가지가 넘습니다. 이런 호르몬은 뇌, 소화기, 성기 등에서 만들어집니다. 호르몬은 신체 기관에 적절한 자극을 주어 강약을 조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심장 박동수를 조절하고, 키를 자라게 하고, 혈당과 체온을 조절하는 것이 모두 호르몬의 작용입니다. 그러니까 호르몬은 일종의 조절 스위치와 같습니다. 신체의 모든 기관을 조절해서 기능을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면서 건강을 유지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호르몬은 그 농도가 아주 미약합니다. 우리 몸속의 호르몬은 주로 ppb 라는 단위를 사용합니다. ppb는 우리가 잘 아는 ppm 보다도 천분의 일에 해당하는 아주 적은 양입니다. 1g에 10 억분의 1에 해당합니다. 몸에 영향을 주는 호르몬의 농도는 50미터 실내수영장을 가득 채운 물에 잉크 몇 방울 떨어뜨린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그런 아주 미약한 정도의 성호르몬은 남성과 여성을 결정해 줍니다. 성호르몬은 뇌의 맨 밑에 있는 뇌하수체에서 분비됩니다. 뇌하수체는 크기가 1g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온 성호르몬 때문에 남녀의 다른 골격이 형성됩니다. 목소리가 변하고, 털과 근육이 만들어집니다. 정자와 난자를 생산합니다. 배란 임신 출산을 하게끔 몸을 만들어갑니다. 유선을 자극해 젖이 나오게도 합니다. 그밖에도 기능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 환경 호르몬이 문제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환경 호르몬은 우리 몸에 있는 천연 호르몬보다 그 양이 많습니다. 환경 호르몬을 나타내는 수치는 ppm이란 단위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환경 호르몬은 천연 호르몬보다 천배 이상 강하게 우리 몸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ppm도 백만분의 일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극히 적은 양입니다. 그래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오염 물질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쇠고기에는 광우병, 물고기에는 수은중독과 항생제, 농산물에는 독성 농약, 공기 속에는 암을 유발하는 각종 유해물질들··· 모두 너무나 작은 세계들입니다. 이런 물질은 지극히 적은 양지만 치명적인 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20 절에 보면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여기서 믿음이 적다는 것은 제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12 명 가운데 9 명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예수님이 산에서 변화 체험을 하고 내려 왔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 왔으니, 산 아래에는 9 명의 제자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때 간질로 고생하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제자들을 찾았습니다. 간질은 뇌신경 이상으로 쓰러져 일시적으로 몸이 굳는 증세입니다. 이런 장애의 원인은 여러 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 아이를 고칠 때 귀신을 쫓아 내셨습니다. 이 아이의 간질의 원인은 귀신이었습니다. 간질이 모두 귀신들린 것은 아닙니다. 이 아이의 경우는 귀신들림이었습니다.

귀신들림의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15 절에 아이의 아버지의 호소 속에 나타납니다. 저가 간질로 자주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간질 증세가 나타날 때 불이나 물 곁에 있으면 위험합니다. 그래서 평소에 불과 물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자주 불과 물에 넘어졌다는 것은 귀신의 해코지입니다. 귀신이 간질을 일으켜 불과 물에 몸을 상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귀신이 아이를 끌고 불과 물 곁에 데리고 가서 쓰러뜨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귀신의 해코지는 악랄합니다.

사람 몸속에 들어가 이런 장난을 치는 귀신은 호되고 야단을 맞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은 이 귀신을 쫓을 때 꾸짖어서 쫓으셨습니다. 아이가 멀쩡해졌습니다. 아마 불과 물에 여러 차례 넘어졌었기 때문에 온 몸에 흉터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쳐주실 때 이 흉터까지 깨끗해졌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아이가 낫고 나서 시작되었습니다. 9 명의 제자들은 나름대로 아이를 낫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견습생 노릇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간간이 기도로 병을 고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조용히 찾았습니다. 이 귀신은 센 놈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어찌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꼼짝하지 못했습니다. 그 물리친 비결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여쭈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예수님은 단 한마디로 답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그러면서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조금만 있어도 못할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좁쌀 만 합니다. 아주 작은 겨자씨를 비유로 믿음의 크기와 양을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센 귀신을 쫓아내려면 믿음도 커야 될 줄 아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믿음은 지금 겨자씨보다도 훨씬 못 미쳤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 말은 제자들의 믿음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기독교에서 믿음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응답받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걸핏하면 ‘믿습니다.’ 하고 대답을 잘합니다. ‘믿습니까?’ 하면 ‘아멘’ 하고 답합니다. 거의 조건 반사로 반응합니다. 무엇을 믿는가가 중요합니다.

제자들이 아이를 고치기 위해서 기도할 때 무엇을 믿었을까요? 기도하면 귀신이 쫓겨 나갈 것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되었습니까? 잘못되었습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할 때 믿음의 대상은 언제나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자체를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믿음의 주인공은 언제나 하나님 뿐 입니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 믿음 생활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때 철저히 하나님을 믿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칫하면 우리는 엉뚱한 것을 의지하고 믿게 됩니다.

우리가 빠지기 쉬운 혼란은 공력을 의지하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공력을 믿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 할 때는 믿음의 기도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공력을 믿는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했으니까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기도를 정성들여 했으니까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기도를 오래했으니까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공력을 믿는 것입니다.

도교는 이런 공력을 아주 많이 요구합니다. 이른 새벽부터 치성을 드려야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도 삼천 번 절을 하라고 합니다. 불경을 소리 내서 반복해 읽으라고 합니다. 이런 도를 닦는 과정을 거쳐야 깨달음을 얻습니다. 모두 공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서도 이런 공력을 이야기합니다. 40 일을 정해놓고 작정 기도하는 것, 어디 제단을 쌓는다는 이야기, 일천 번제를 위해 헌금을 매일 만원씩 3 년 가까이 드리라고 합니다. 주기도문을 백번씩 외우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모두 공력을 믿는 잘못된 프로그램들입니다.

오래 믿고, 많이 기도하다보면 그 노력이 아까운 생각이 들 겁니다. 그래서 그 공을 알아달라고 만든 이야기들입니다. 누가 산기도 많이 하고 신령해졌다고 하면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그 분은 너무 신령해져서 하나님보다 더 높아져 있습니다. 자기를 통해서 기도해야 효능을 본다고 합니다. 그런 신령자에게 기도 받고 예언 받고 하지 마십시오. 거의 비신학적인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믿음을 이야기하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떠올립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우리에게 아주 좋은 모본입니다.

로마서 4 장에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이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기에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하늘의 별처럼 후손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99 세가 되도록 언약의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아브라함을 심히 번성케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나이가 들어 90 세였습니다. 이미 부부가 다 늙어서 자식을 바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종이 자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을 때 사라는 천막 밖에서 듣고 웃고 말았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믿음이 진가를 나타냈습니다. 아브라함은 생식 기능이 퇴화된 자기 자신과 아내의 몸을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있는 그대로 믿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이런 믿음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의 능력을 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실 분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아브라함도 한 때 믿음이 흔들린 때가 있었습니다. 그가 85 세가 되었을 때까지도 사라가 임신을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늙어가는 자신을 보며 조급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임의로 해석했습니다. 꼭 아내 사라를 통하지 않고도 후손이 생길 수 있지 않느냐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의 몸종 하갈을 첩으로 맞았습니다. 그래서 얻은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약속한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약속의 아들을 주시겠다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만 믿게 되었습니다. 자기 능력이나 처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경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뭘 못하시겠습니까? 과연 아브라함은 백세가 되었을 때 사라를 통해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믿음이란 어린 싹과 같이 시작하여 점점 성숙해져 가는 것입니다. 처음 믿고 나서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서 점점 단련됩니다. 아브라함은 오랜 세월동안 약속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기다리는 동안 믿음이 약해질 수 있었습니다. 믿음에 의심이 생길 수도 있었습니다. 믿음에 의심이 깃들면 이내 믿음은 파괴됩니다. 그러나 견디면 믿음은 더욱 견고해집니다. 이 견고해진 믿음을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이 확신하는 믿음은 믿음의 클라이맥스입니다. 믿음이 성숙해진 단계입니다.

로마서에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롬 4;20-22>

마지막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합격한 것입니다. 믿음이 약해지는 단계, 믿음에 의심이 깃드는 단계를 이겨냈다는 것입니다. 이 시련을 견뎌내니까 견고한 믿음이 되었습니다. 이런 견고한 믿음을 반석 같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옳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제 아브라함을 믿을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상대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믿을만하도록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믿음이 성숙하게 자라서 하나님이 나를 믿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 정도 되어야 믿음의 합격점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 하십니다. 처음 믿었다고 바로 합격을 내 주지 않으십니다. 믿음이 단련되지 않으면 작은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간의 시련을 겪게 하십니다.

정금이 어떻게 나옵니까? 금에는 온갖 불순물이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풀무불에 달궈 녹인 후 불순물을 걷어냅니다. 그러면 99.9% 순도의 정금이 됩니다.

강철도 풀무에서 단련된 후 두들기고 물에 식히고를 반복해서 나옵니다. 담금질을 견뎌야 강철이 됩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의 성숙 과정을 거쳐서 정금 같은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나의 믿음을 보시고 ‘이제 됐다’ 하셔야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만 믿으십시오. 중간에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도 흔들리지 맙시다. 마귀는 우리의 믿음을 빼앗아 가려고 온갖 시험과 유혹을 합니다. 하나님만 바라고 보고 있는데 시선을 다른 데로 빼앗으려고 합니다. 능력 없고 무능한 자기 자신을 보게 만듭니다. 나이 들고 늙어 자식을 기대할 수 없는 죽는 것은 몸을 보게 합니다. 이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오직 주만 바라봐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자기도 그렇게 물위를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 자기도 걷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허락을 받고 베드로도 물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풍랑이 일자 겁이 났습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걷다가 시선을 물결이 이는 곳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그만 물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구해주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고 하셨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어도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크기와 양을 보지 않으십니다.

그 믿음이 진정 하나님만을 믿는 것인지를 보십니다. 자기 재주와 능력을 섞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기다리는가 보십니다. 어린 아이들처럼 깨끗하고 순수한 믿음인지 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케이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세포 속에 핵이 있습니다. 이 핵속에 DNA가 있습니다. 이 DNA는 나선형 구조로 가느다란 철사 두 줄이 꼬여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DNA 분자와 같은 굵기의 가느다란 철사를 직경 2mm인 구체의 핀머리로부터 뽑아낸다면, 그 길이는 지구를 30번 이상 칭칭 감을 수 있는 길이가 됩니다. 너무나 작은 세계이지만 하나님의 설계는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겨자씨 만한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모래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겨자씨 안에도 놀라운 유전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작은 씨이지만 땅에 심으면 큰 나무가 됩니다. 이것이 작은 믿음의 능력입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의 믿음은 겨자씨만한 믿음보다도 적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믿음은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응답을 받았다고, 한 번 기적을 맛보았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겸손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믿으시면 됩니다. 그러면 기적은 우리의 믿음 생활에서 일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 하시고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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